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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28호]민주주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상상

 

민주주의, 이것은 이제 저 먼 곳에 자리한 이론적 차원의 논의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할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기본 가치로 내세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이 소외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저 꿈에 불과한 일인가?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워 사회적 소수를 분리시키는 또 하나의 억압적 정치 형태인 것은 아닐까. 모두가 자율성을 가진 인간으로 나와 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로티의 사유를 바탕으로 철학자 이유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인터뷰 및 편집_ 김하늘(penhan@sogang.ac.kr)

 

나의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연대성은 편견을 제거하거나 혹은 이전까지는 감추어졌던 깊은 곳을 캐냄으로써 인식될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되어야 할 하나의 목표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탐구가 아니라 상상력, 낯선 사람들을 고통 받는 동료들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연대성은 반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낯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의 특정한 세부 내용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창조된다. 그렇듯 증대된 감수성은, 가령 그들은 <우리와> 같이 느끼지 않는다라든가 고통이란 언제나 있게 마련인데,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여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국외자로 치부하는 그런 일을 어렵게 해준다. 다른 인간들을 그들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로 보게하는 이 과정은, 낯선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지에 대한 재서술에 관한 문제이다.”

 

Q. 우리들은 민주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는 사회인지 모르고 살 때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이지만, 달리 말하면 결국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다수가 된 사람들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니까요. 로티의 철학을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요건은 무엇일까요?

 

A. 로티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신자유주의 같은 의미로 많이 해석되고 상당히 우편향된 한정된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 자유주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공간을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가 제도나 관습의 틀에 갇혀 잘 보이지 않았던 어떤 제약들, 로티의 표현에 의하면 잔인성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 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고 고쳐나가는 것부터가 시작이라 볼 수 있지요.

로티는 프래그머티스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민주주의를 위한 현실적인 비교대상을 될 수 있는 사회를 그 예로 끌어 옵니다. 북대서양 연안의 사민주의 국가(스칸디나비아 3)들을 우리가 현실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이야기 할 때 떠올려 볼 수 있는 하나의 모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에게 민주주의의 요건이라 하면, 경제적인 여건도 어느 정도 중요합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같은 빈국에서 무가베 같은 끔찍한 독재자가 나왔잖아요. 대중이 교육받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쉽게 조작당할 때 민주주의는 어렵게 되지요. 기본적으로 그 사회에서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앞서 언급한 잔인성의 문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는 문제까지 관심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덧붙여 말하면, 로티는 듀이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꿈을 계승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듀이가 생각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 사회가 가진 모든 갈등과 대립이 극복될 수 있는 사회였죠.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개인의 개성과 민주주의를 연결합니다. 이 이야긴 뒤에 나누도록 하지요. 결국 로티에게 민주주의란 한 편에서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한 발전이 필요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민주주의가 어떤 제도적인 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겁니다. 그 목표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정되지 않은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누가 고통을 받는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관한 끊임없는 관심과 실천, 로티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 우리의 영역에 들어온 것.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자유의 영역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우리라는 개념입니다.

 

나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르는 인물을 스케치할 것이다...나는 아이러니스트란 말로서,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의 우연성을 직시하는 사람, 그와 같은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이 시간과 기회를 넘어선 무엇을 가리킨다는 관념을 포기해 버릴 만큼 충분히 역사주의자이고 명목론자인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괴로움이 장차 감소될 것이며,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굴욕 당하는 일이 멈추게 되리라는 자신들의 희망을, 그렇듯 근거지을 수 없는 소망 속에 포함시키는 사람이다.”

 

Q. 로티는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이상적인 인간이 아이러니스트라고 보았던 건가요? 헤럴드 블룸의 시인의 불안이라는 개념을 써서, 이것이 아이러니스트의 숙명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A. 아이러니스트라는 말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이는 앞서 말했던 듀이 식으로 말하면 개성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죠. 니체가 플라톤을 비판하는 부분도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죠. 삶의 의미를 자신의 삶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은 숙명적으로 헤럴드 블룸이 말한 시인의 불안에 시달립니다. ‘강한 시인이라는 시인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쓴 시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선대 시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불안에 떨죠. 그래서 시인의 불안이라는 말은 데카르트적인 확실성에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인 회의를 통해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세우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이야기하려 했다면, 니체 이후의 철학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식의 확실성이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진리란 무엇인가, 다르게 말해 내 삶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이 물음이 나온 배경은 모든 것을 정당화 해주리라 믿었던 모든 거대 담론들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보편적 진리, 형이상학적 진리, 종교적 교리 등을 아무리 이야기해 보아도 그게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단 거겠죠. 블룸의 시인은 니체가 말하는 자율성을 추구하는 인간, 듀이가 말한 개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 로티는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아이러니스트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네요. 자신만의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시인처럼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어휘로 서술해 보는 인간이 바로 아이러니스트이지요.

 

인간의 연대성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우리의 도덕적 의무감의 우연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에 대한 니체의 관점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상상의 초점이란 것이 (칸트가 생각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붙박이로 갖추어진 특징이 아니라 발명품이라고 해도 나빠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슬로건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은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을 일깨우는 수단으로서 우리라는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화된 사람들, 즉 우리가 여전히 본능적으로 우리라기 보다는 그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의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 슬로건을 제대로 독해하는 올바른 방법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폭넓은 연대성의 의미를 <창조>하도록 우리 스스로에게 권유하는 것이다. 그릇된 독해의 방법은 그런 연대성은 우리가 인식하기에 앞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인식>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이 연대성이 <진짜냐?>’고 하는 요점을 잃은 회의적 물음에 빠져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종말은 잔인하게 되지 않으려는 시도의 종말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는 니체의 암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Q. 그런데 모두가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는 각각의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면, 구성원 간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A. 그 부분은 로티에게 중요한 이론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로티가 아이러니스트 개념을 이야기 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은 무관심의 괴물이라는 말입니다. 나보코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통 그렇다고 봅니다.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주인공을 보면 자신이 빠져있는 것을 쫓다보니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고통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의 문제만이 유일한 관심사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해 타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무관심의 괴물이 되어서겠죠. 이 사람들은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상관없는 인물들입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이죠. 그래서 로티는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이 자유주의자, 달리 말해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적인 사회를 만들면 그 안에서 수많은 아이러니스트가 사는게 가능해지기에, 민주주의가 다른 이론이나 철학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그런 아이러니스트의 욕망이 최대한 실현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드는 어떤 제도를 가진 사회의 모습을 말하는 거겠죠. 그러나 이런 아이러니스트들이 가지는 사적인 욕망은 아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제약이 될 텐데, 그래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인권에 관한 인식이 성장해 온 과정을 보면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었던 것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것이 상식이 되었어요. 여성참정권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얘기 같지만 여성이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된 건 100여년 정도 밖에 안됩니다. 무엇이 사회적으로 제약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로티가 말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오늘날 당연히 제약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과연 진짜 그러한가?’라는 물음을 던져보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기준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민주적인 실천 과정에서 합의되고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실천에서 강조되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틀 안에서만 고통, 잔인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여성의 참정권 같이 지금의 상식적인 일들은 일어날 수 없었겠죠. 로티도 같은 맥락입니다. 민주주의적인 실천은 어떤 제도적인 형식을 완성시키는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어디까지 관용과 포용의 영역을 넓힐 것인가 하는 문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문제와 관련될 것입니다.

 

Q.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화를 통한 합의라고 본다면, 그 합의를 이끌어내는 대화의 장으로 하버마스의 공론장을 말씀하셨습니다. 공론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A. 공론장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학자들이 지금도 하고 있지요. 그 중 하버마스가 대화의 가능성을 가장 크게 두고 있는 사람이라 대표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성은 공동체의 목표와 관련된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공공성의 문제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면 공공성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도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공론장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거죠. 공론장 논의는 우리가 어떻게 공공성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 제도와 관습들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버마스 뿐 아니라 듀이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도 공공성이 논의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데 필수 전제조건이라 보았지요. 나아가 로티로 넘어와서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 핵심은 공공성의 내용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듀이의 경우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별하는 개념적인 틀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무엇이 공공성인지를 명확히 구획하지는 않지요. 이는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나 독재, 또는 소수가 지배하는 시스템과 다른 점은 무엇이 공적인 문제인가를 논하는 것 자체를 시스템 안에서 갖추어 놓은 제도라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논하는 것이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누군가가 선정해버려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영역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죠.

하버마스의 공론장, 듀이의 공공성, 또 로티가 우연성을 토대로 연대를 강조할 때도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대화 그 자체가 하나의 민주적 실천 과제라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공공성인가하는 논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이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거죠. 이들의 말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그 어떤 이론가도 그것을 선험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사실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하고, 수많은 부작용들을 감수해야 할 테지만, 결국 민주주의는 그 부작용들을 줄여가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것들을 달성해 낼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될 겁니다. 또 구성원들은 마땅히 그것을 감수할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이고요. 내가 불편하더라도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곧 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현행의 제도와 실행에 대해 어떤 재서술을 제시한다는 것이 그것의 적들에 반대하여 옹호론을 편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집의 버팀대를 세운다거나 집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세우는 일이 아닌, 마치 집의 가구들을 바꾸는 내부 수리와 더 흡사한 일이다.”

 

Q.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기준을 정해 놓는 것에 반대한다면, 이미 만들어진 제도 역시 거부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직 불완전한 민주주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제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A.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상상력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의제 민주주의, 즉 의회를 통한 간접 민주주의라는 것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공통적인 의견이 있는 듯 합니다. 합법적인 투표에 의해 선출된 합법적인 대표들이 과연 대표성을 갖는 것인가 의문을 갖는 거죠.

그럼 어떤 대안이 나와야 하는데, 그 부분이 상상력에 달려 있다고 보는 거죠. 우리는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고, 보통선거가 실시되고, 의회제도가 작동하면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동적인 판단을 해버립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달성됐다고 하죠. 그런데 그럴까요? 민주주의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소외되지 않고, 개성을 실현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일 텐데 한국 사회처럼 획일성이 강한 사회라면 거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대안을 세우려면 우리가 가진 틀 안에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죠. 그래서 상상력을 강조하는 겁니다. 한국에 잘 알려진 학자들 중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 일종의 생활협동조합이 전면적으로 확산되는 사회가 실현될 때, , 우리가 생각하는 국민국가 경제 시스템이 크게 작동하지 않게 될 때,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을 하나의 대안적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결국 우리가 현재의 틀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하고,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실험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겠지요. 물론 시도하는 데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들 수 있기 때문에 로베르토 웅거는 앞서 말한 상상력의 강조와 함께 상상을 통한 공간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사유실험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Q. 사유실험이란 말 그대로 생각 속에서 상상을 통해 나온 대안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인가요? 상상이라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면요.

 

A. 사유실험이라는 것이 관념적인 차원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웅거는 구체적인 대안을 몇 가지 이야기합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날과는 다른 기업 형태가 작동하는 사회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가 붕괴될 때 나온 여러 대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노동자 지주제라던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공장 같은 거죠. 가족 기업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가족기업이 재벌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웅거가 말한 가족기업은 일본 지역 마다 전통을 잇는 조그만 가족기업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강조한 부분은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냉혹한 합리성이 작동하지 않는 기업형태가 가능할 것이라는 거죠. 우리도 우리 사회에서 이런 예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나 주장한 것이 기본 소득제입니다. 앞서 로티가 말한 민주주의 요건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기본소득제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회 구성원들이 생존의 불안에 휩싸이면 전체주의로 가게 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이미 드러났잖아요. 모든 사람들을 생계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자, 그럼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수많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나온 제도적 실험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보는 거겠죠.

 

Q. 결국 민주주의는 실천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원생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면 어떤 것부터 시도해 볼 수 있을까요?

 

A.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 세대가 겪지 못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섣불리 조언을 하기가 어렵네요. 그 또한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일수도 있기 때문이죠(웃음). 굳이 조언을 해보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네요. 로티 식으로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공부 말입니다. 사회적인 불안이 커질수록 자신의 삶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으로 채울 가능성이 커지고, 사회적으로 보면 이런 개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티는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고, 아이러니스트가 자동적으로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저는 그것이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동인형으로 살아가지 않고, 불안한 사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 각자가 뭔가 자신의 욕망, 즉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 인간인가를 확인하고, 그런 것들을 실현해보기 위한 시도를 힘들더라도 끈질기게 가져가면서 내 삶의 가치와 연결해 보려는 태도가 중요한데, 이는 각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죠. 블룸이 시인의 불안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자율적인 개인들로 존재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공부, 책을 읽는거죠. 그런 의미에서 대학원생들은 그런 삶을 살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안에 속하지 않고, 또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사람들까지도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공부하는 협동조합 같은 건 어떤가요? 작지만 큰 실천이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