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130호] 민중미술 잔혹사, 1세대에게 묻다

 

민중미술 잔혹사, 1세대에게 묻다

 

인터뷰 및 편집 박경룡, 채다희

 

 

올해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참여 작가였던 홍성담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 때문에 사전 검열과 수정 압박을 받았다. 광주의 역사와 세월호 사건을 잇는 세월오월그림은 수정 요구의 논란 끝에 전시 기회를 상실했지만, 씨엔엔, 월스트리트저널, 르몽드 등 해외 언론의 취재와 미국, 캐나다 교포들의 세월호 특별법 시위 현장에서 등장하면서 전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시민미술학교, 민중미술운동을 하며 현실과의 간극을 좁혀온 민중미술 1세대 작가 홍성담에게 미술계와 일상에 만연해지는 표현의 자유의 실종에 대해 물었다.

 

 

작가 홍성담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79'광주 자유 미술인회' 조직에 참여했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선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1983년에 '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미술대중화운동에 힘써왔다. 1988년에 독일 행체 화랑 초대전을 출발로 수차례의 해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평양축전에 '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 이 공동 제작한 민족해방운동사사진을 북한에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구속 이후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판화전이 있었으며, 1990년 국제 엠네스티본부에서는 예술가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 그는 젊은 의식전, 삶의 미술전, 우리시대 30대의 기수전, 오월미술전, 민중미술 15년 전, 동학 100주년 기념전 등 각종 단체전과 선전전에 수 십여 차례 참가하였다. (출처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지난 2주간(9.18~10.3) 대만에 위치한 청궁대학교에서 동아시아 민중문화: 희망의 연대라는 전시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시 과정과 배경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

홍성담(이하 홍). 10여 년 전부터 대만,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식민지 잔재 청산(안티 야스쿠니)을 위해 일을 해왔다. 현재 대만의 정치적인 갈등구조(독립파, 통일파)와 더불어 한국의 분단구조, 지역갈등구조 등이 일본 식민지부터 시작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대만 역시 식민지의 잔재가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해결되지 않으니 분단 문제의 기본적 원인도, 책임자도 없다. 어마어마한 학살의 역사에서 학살자가 누구인지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가려지지 않은 채, 전두환(전 대통령)과 노태우(전 대통령)가 감옥에 갔지만 학살의 이유가 아니라 부정 축재의 이유로 감옥에 갔다. 책임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대만이나 우리 사회나 무책임 중독증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들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게 되는 것이 국민적 정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정을 준수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가 되어 버리고 있다. 이러한 무책임 중독증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 나는 식민지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단지 대한민국의 일이 아닌 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무책임 중독증을 되돌아보게 하고,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논의의 출발점을 만들고자 전시에 내 그림이 초청되었다.

참고로, 대만에서는 이런 그림을 보기가 힘들다. 대만은 1950년 전에 백색테러나 2.28사건으로 인해 지식인, 예술가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그들이 감히 정부에 대해 반항하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장개석의 군대가 대만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노신과 판화운동을 함께 했던 화가 들이 문예운동을 하거나 전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백색테러 등으로 인해 처벌되면서 암흑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대만의 문화가 세계화로 흘러가기 시작해 잘못된 모더니즘을 받아들이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갈등 구조를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회피하는데, 이는 갈등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자유로움은 자신을 직면하지 못하고 아나키스트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홍성담, <야스쿠니 夜想曲>, 2008

 

서강. 세월오월의 광주 비엔날레 전시 논란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울관 개관을 하면서 임옥상 작가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제외되었다. 이렇게 미술계에서 사전검열이나 정치적 표현을 제한하고자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전시회 기획자나 미술관 책임자가 미리 최고 권력의 심기 경호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심기경호가 기획자의 능력, 미술관장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최고 정치권력이 그림을 얼마나 알며, 그림까지 신경을 쓰겠는가? 그런데 주변에서 미리 알고 심기 경호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잘 하는 것을 능력으로 취급 하는 사회 풍조가 만연해있다.

(덧붙여, 축소되고 있는 예술가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 영역은 예술가가 담고 있는 사회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시민은 예술가 절반 정도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그러한 자유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의 역할은 그 사회가 관행적, 관습적, 제도적으로 금기시하는 영역을 끊임없이 깨부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금기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금기는 불평등한 것이다. 최고 권력, 최고 자본부터 시작해서 일용 노동자까지 금기사항이 똑같다면 평등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평등한 것이다. 예술가는 시민 사회의 평등 구조를 위해 최고 자본가와 최고 권력이 금기시하는 것들을 자유로운 예술의 확장을 통해 까발리는 것이 주어진 권리이며 의무이다. 이를 등한시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 예술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술 관장, 기획자들은 이를 다 알면서 그러고 있다.

 

 홍성담, <세월오월>, 2014, 논란이 된 박근혜 대통령 풍자 부분은 닭으로 수정되어 있다.

 

서강. 민중미술처럼 메시지가 두드러지는 것을 두고 미학적으로 옛날 것이고, 낮은 수준의 미술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민중미술의 양식과 형식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것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이다. 지금으로부터 2~30년 밖에 안 된 것이다. 그것이 옛날 것인가? (더 오래된) 1960~70년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좋다고 하고, 서구에서 유행한 라캉,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후기 모더니스트나 맑시스트는 좋아하고 추구한다. 나는 민중화가 중 해외 전시를 많이 하는 편인데, 해외에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은 서구의 현대 미술을 그대로 베끼는 수준에 지나지 않다. 한국 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서구에서 유행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그대로 가져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엄이나 문명비판의 문제는 빼놓고 형식, 패션, 모양만 가져온다. 세계 어느 나라 미술평론가든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는 문화평론가라면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이 한국 최초의 주체적인 미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한다.

현대 미술을 하고자 하더라도 진정한 우리의 현대 미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얘기하면 글로벌 시대에 우리 것을 만들자는 것은 내셔널리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세계에 우리 것을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그림이 세계적이어서가 아니지 않은가? 서구적 입장의 미학적 틀로 분석이 된 그런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학적 틀로 분석한 예술이 나와야 한다. 서양의 미학적 틀로 분석하고 정리한 것을 답습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틀로 미술사를 분석하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의 올곧은 현대 미술을 인류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홍성담, <도시 농부 가족>, 2011

 

서강. 세월오월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1980년대 한국 민중 미술의 가장 중요한 양식이라고 한다면 걸개그림과 판화운동이다. 판화와 걸개그림은 내가 최초 세대이고, 이끌어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술관이라고 하는 화이트큐브에 유리관 속의 쇼 케이스에 걸릴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했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5월 정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작을 거절한 이유가 두 가지 더 있었다. 1980년대부터 같이 활동한 시각매체연구소 회원들이 공동 작업을 위해 그들의 하는 일을 접어놓고 1~2달의 합숙 훈련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돼 거절했고, 또 한 가지 그 당시에 걸개그림을 그릴 만한 동력이 없었다. 그림 의뢰를 받은 것은 올해 1월이었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없어서 광주의 5월 정신(‘5월 정신은 올해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의 주제다-편집자 주)이라는 시각적 틀에서 그 이슈를 내다볼 만한 이슈가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다른 작가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책임 큐레이터가 직접 해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 415일에 전시회 관련해서 일본에 갔다가 귀국 했다. 그러다 16일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다 구조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으나 밤이 되니 구조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안산에 있는 내 화실에 작년부터 단원고등학교 학생 두 명이 알바를 했었다.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이었는데 단원고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서 아르바이트를 시키면서 그림도 가르쳤다. 여학생은 형편이 어려운데 미술 학원에 다닐 돈이 없어서 1주일에 한 번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림도 가르쳤다. 남학생은 약간 지적 장애가 있는 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이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해서 두 명이 여기 왔었다. 그런데 올 봄 여학생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바비와 용돈을 줘서 보냈다. 그 여학생이 그 배에 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417,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나는 원전 폭발이든, 쓰나미 현장 같은 곳에는 간다. 인간이 만든 지옥에 찾아가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팽목항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여학생의 엄마를 만났다. 웬일이냐고 묻자 우리 애가 저 배 안에 있다더라. 정말 아차 싶었다. 팽목항과 진도 실내 체육관을 5일 정도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 과정을 지켜봤다. 광주가 34년 전, 군부에 의해 국가폭력을 당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한 세대 전 아닌가? 세월호도 권력과 자본, 무능한 관료제의 삼자 카르텔로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고 있는 이 가운데 300여 명을 학살한 국가폭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안산으로 올라오면서 걸개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그 후 6월 말에 광주에 내려가 임시 작업장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강. 1980년대부터 활동했던 시각매체연구소의 소속된 작가와 시민과 함께 참여해 세월오월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한 공동작업을 택한 이유는?

. 걸개그림은 공동 작업을 해야만 한다. 걸개그림이 가로 10.5m, 세로 2.5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걸개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도 하고 시민들과 토론을 하는 등 이벤트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벤트는 하얀 캠퍼스를 두고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주제, 내용을 두고 토론을 했다. 그래서 그 때 나온 의견을 바탕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비엔날레에서 지원 받은 돈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부산의 젊은 작가들을 불러 함께 작업했다. 서울의 성미산 공동체에 있는 룰루랄라예술협동조합, 파견미술팀, 낸시 랭이 속한 팝아티스트협동조합 등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 걸개그림의 의미가 산다고 생각했다.

 

서강.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인지?

. 한국의 다양한 젊은 작가들과 함께 그렸다는 의미를 말한다. 장르, 지역을 불문한 작가들이 참여했다. 일본에서 국가폭력에 대해 노래하는 언더 가수 까지 초청을 했다. 그에게 공연료를 줄 수는 없었지만. (웃음). 그가 공연도 하고 그림도 같이 그렸다. 그렇게 함께 했다는 의미가 컸다. (공동 작업이 활발한) 1980년대와 달리 지금 다시 공동 작업을 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참여한 작가들도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서강. 이야기를 들으니 미술 작업이라기보다 마을 잔치같은 느낌이 든다.

. 그렇다. 이 그림에는 광주 민주화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얼굴도 많이 있다. 명노근 교수, 김남주 시인, 윤영규 초대 전교조 위원장, 광주의 어머니들 등 기타 10여 명의 여러 실제 인물들을 그렸다. 그 분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진을 요청하니 그 분들의 가족들이 많이 와주셨다. 그림 그려줘서 고맙다고 먹을 것도 많이 가져다주시고 기념촬영도 하는 등, 그래서 정말 잔치 같았다. 공동 작업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작업 기간 동안 술도 항상 쌓여 있었다. 사실 작업을 하는 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는데, 화가들이 술을 잘 마시는 줄 알고 방문하시는 분들이 늘 가져다 주셨다. 정말 신나게 작업을 했다.

 

서강. 역설적으로 비엔날레에서는 전시가 무산되었지만 오히려 관심을 더 받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처음에 그냥 그림을 걸었다면 몇 번 회자되다가 말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검열 하느라고 그런 것이다. 이 정도 정치 풍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나 그릴 것을 그랬다. (웃음) ‘세월오월작업을 시작하러 광주에 내려가기 전에 광주 비엔날레에서 내 걸개그림이 아무 말 없이 걸리면 실패한 것이고 문제가 되다 걸리면 더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제가 너무 커져서 아예 걸지를 못했지만 나는 시원하다. ‘내가 민중미술 1세대로서, 걸개그림 양식을 발전시켜온 사람으로서 미술관이라고 하는 지하 묘지로 집어넣는 골동품 그림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살아 숨 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니고 촉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앞으로 민중미술가로서 내 삶을 더 유지하게 만들 것이다.

 

서강. 비엔날레가 정상화되기 위해서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

. 비엔날레라는 것은 단순한 미술 엑스포나 올림픽이 아니다. 비엔날레는 당대의 모든 현실적 담론들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해서 모아서 한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 시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비엔날레는 시각적 용광로나 다름없다. 각 나라의 작가들은 자국/사회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을 본다. 그래서 뜨거운 용광로이다. 그래서 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난장판이 되어야 한다.

비엔날레라고 영어로 쓰면 정제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자신의 지역 문제를 그림 언어로 표현하여 가져다 놓고 우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담론을 만들어내자고 만든 것이 비엔날레이다. 비엔날레는 그림을 파는 곳도 아니다.

예술에서 1,2등이 어디에 있는가? 미술 세계에서 화가 한 사람, 한 사람은 거버먼트(government)이다. 그런 자존심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비엔날레에 출품된 그림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하는 행위들 중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표현이니까. 그래서 비엔날레는 뜨거운 것이고 거기에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터전을 불태워라였다. 내가 정말 터전을 불태우기는 했지만. (웃음) 세계의 모든 문제를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이런 것들이 가득해야 비엔날레이다. 이렇지 않으면 비엔날레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서강.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얘기해달라.

.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은 눈에 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들 모두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뜻이다. 정말 해야 할 일은 자기도 남도 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고, 그 일을 하나 둘씩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더욱 더 즐거워지고 행복해 지는 일을 해야 한다. 공부하는 과정이 추악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준비했으면 한다. 추악해지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