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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0호] 한국의 미신담론, 상이한 세계관의 경합의 결과

 

한국의 미신담론, 상이한 세계관의 경합과 결과

 

김동규_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근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무당의 고단한 삶이나 무속의례의 다채로운 장면들이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을 교정하는 효과를 지니며, 동시에 근대성 및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변화된 시각의 결과라는 점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한국무속 전반에 대한 시각의 변화로 간주되거나, 한국의 종교문화에서 무속이 가지는 위상의 총체적인 변화로 이해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무당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하며, 설사 무당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하더라도 공식적으로 그 관계를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무속은 바람직하지 못한 미신 혹은 사기행위일 뿐이라는 사회적 편견 혹은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속이 근대적 학문의 연구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미신이라는 개념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무속에 대한 기존의 편견들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주로 사용되어 왔다. 이들은 미신이라는 어휘가 생성된 역사적 배경, 특히 그 개념이 형성된 일제 식민지 상황과 그리스도교와 서구적 합리성을 포함하는 배타적인 서구 중심주의 등의 문제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무속의 미신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무속의 본질에 대한 왜곡을 통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을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러나 무속이 미신으로 범주화되고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비단 근대 이후의 일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12세기 고려 중엽부터 조선시대를 통해 유학자들에게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비판되었다.

무속 연구자들은 유학자들의 무속 비판의 논리를 음사론으로 개념화하며, 근대 이후의 미신론과 차별화하고 있다. ‘음사미신은 서로 다른 지성사적 패러다임에서 사용된 개념들이며, 각각의 개념들이 내포하는 의미와 그런 범주화를 가능케 한 세계관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들이 미신론음사론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한 설명방식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필자는 무속과 관련한 조선시대의 음사론과 근대의 미신론을 포괄적으로 무속의 미신담론이라는 용어로 분류한다. ‘음사개념이 미신개념과 역사적 의미론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두 개념 모두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관 혹은 감수성(sensibility)을 부각시키고 안정화시키는 데 타자(他者)로 기능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메타포(metaphor)로써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한국사에서 무속이 타자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검토되었던 조선시대의 음사론, 음사론의 경계형성과 세계관들의 경합이라는 차원에서 검토하고 소개한다.

 

 

음사론의 경계: 문명화의 열망과 위계적 의례론

음사는 주로 유학자들에 의해 유교 이외의 종교적 실천을 지칭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된 개념으로써, 대표적인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에서는 음사제사지낼 곳이 아니지만 그 곳에 제사하는 것을 음사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음사라는 개념은 제사의 대상에 국한되는 의미로 보이지만, 이 개념이 주로 사용되는 맥락을 좀 더 살펴보면 제사를 지내는 주체의 자격 그리고 제사의 방식과도 관련되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로써 아첨이나 번독(煩瀆)’이 있다. ‘아첨은 제사하지 말아야 할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번독은 일정한 법식을 벗어나 제멋대로 지내는 제사를 지칭하기 위한 개념이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음사론의 경계를 정하는 핵심적인 개념들로써, 의례를 행하는 데 그 주체, 대상, 형식에서 허용될 수 있는 경계가 있으며 그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을 때 바로 음사론으로 범주화되었다. 한국문화에서 음사론에 대한 유학적 범주화는 조선왕조의 유교화 과정, 즉 유교와 비유교적 실천 사이에 발생한 헤게모니 투쟁 과정과 연관되어 설명된다.

조선시대를 통해 유학자들의 음사비판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의례에 대한 문서들 및 여러 개인들의 문집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세종 8년 국무당(國巫堂)의 폐지를 주장했던 사간원의 상소문에서 당시 음사론의 내용 및 경계가 잘 드러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사회는 유교적 예악에 바탕을 둔 법전을 마련할 정도로 문명화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그 문명화에 역행하는 음사의 실천이 일반 서민뿐만 아니라 양반들 사이에서도 만연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이고 경제적인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음사실천의 구실이 되는 국무당을 폐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상소문을 통한 사간원 관리의 요청은 조선 왕조를 유교적 문명사회로 만들려는 당시 유학자들의 이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당시 의례는 유교 문명을 위한 모델일 뿐 아니라 유교 문명의 모델로써 파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시대를 걸쳐 의례체계를 확립하고 법제화하며, 그 체계에 따라 일반대중의 종교적 실천까지도 통제하려고 했던 유학자들의 노력은, 자신들에게는 조선의 문명화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유교적 만신전(pantheon)과 제사 양식의 확립

문명화의 상징으로써 기능한 의례체계의 기본적인 형성 기준은 사전(祀典) 정비를 통해서 유교적 만신전(pantheon)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의례주체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실천 가능한 의례의 대상과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상소문에 등장하는 천자는 천지에 제사내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지내고, 대부는 오사(五祀)에 제사내고, 사서인(士庶人)은 조고(祖考)에게 제사지낸다는 관념은 유교적 제사의 주체와 대상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만신전에 포함되는 신들에 변화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예기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백성에게 공렬(功烈)’이 있던 사람과 백성에게 재용(財用)’을 제공해준 자연 대상이 만신전에 포함되었다. 유교적 만신전의 구성 기준이 인간 삶에 끼친 영향의 정도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이런 관념은 조선 초기에 국가 사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에 의해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적합한 제사의 대상 기준이 공렬혹은 재용과 같은 인간의 삶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정해졌다면, 각각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사의 주체는 제사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었다.

제사의 주체 문제와 관련한 음사’, 그리고 이에 대한 유학자들의 혐오는 유교적 예() 개념에 근거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예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이해되었으며, 의례는 겉치레의 형식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천리 즉 법칙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의례를 위계적 사회질서의 또 다른 표현이자 신유학의 핵심적인 세계관이 구현된 것으로 이해했다. 의례에 따른 사회 계층의 차별화와 위계적 질서의 유지는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의제였던 것이다. 유교적 의례 개념의 테두리에서 천자만이 제사지낼 수 있는 하늘에 무당이 제사를 지내거나 하늘의 뜻을 전한다는 믿음과 실천은 사회질서 뿐 아니라 신유학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음사와 관련된 자들에 대한 처벌

그러나 제사 주체와 관련한 위계적인 의례체계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민들뿐만 아니라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양반가의 사람들, 심지어는 왕실에서까지 그러한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의례들은 실천되었다. 특히, 무당은 간사한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신분의 질서를 넘어서 제사지내게 하는 존재로서 이해되었다. 세종 25년 의정부에서 건의한 음사를 금지하는 법령에서 무속과 관련된 법령을 건의했는데 무녀들 중에서 고금에 없는 신이나 혹은 최근에 죽은 장수나 정승의 신이 내렸다고 하면서, ‘요망한 말로 사람을 미혹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다. 또한 무당의 집에 머물거나 무당과 함께 야제를 지내고 산천과 성황에 직접 의례를 지내는 양인(良人)들의 경우에는 그 집의 가장을 벌하되, 가장이나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그러한 음사에 직접 참석한 부녀자 자신을 치죄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관리들로 하여금 이런 일들에 대해 불시에 감찰을 하게 함으로써 음사를 근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분명 음사를 금지하기 위한 조선조 유학자들의 노력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기록들의 이면은 민간층에서 무속 의례가 성행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비록 조선 후기로 가면서 국가의례에서 무속적인 양식으로 봉행되던 의례들이 유교식으로 대체되고, 무당들에 대한 법령이 강화됨에 따라 무속이 공식적인 의례의 영역으로부터 주변화 되고 오직 개인의 기복(祈福)이나 치병(治病) 등의 문제 영역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역사적 상황에서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음사론은 조선사회 내에서 상이한 세계관들이 공존하고 경합했던 과정을 보여주며, 그러한 경합의 결과 발생한 무속의 타자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해석틀을 제공한다.

 

상이한 세계관의 경합: 최적화 우주론과 보호의 우주론

앞서 검토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세계관은 위계적 질서가 인간사회를 넘어 신격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신령조차도 국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관념과 관련하여 신유학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독특한 우주론적 특징을 언급해보자. 먼저, 유학자들에게 관계적 사고는 인간 사회 뿐만 아니라 우주 운행의 근본적인 원리였다. 서구의 개별자로서의 인간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신유학에서는 세상 만물이 항상 유동적이며, 인간의 자기 정체성조차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 내에서경험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서의 역할을 통해 결정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되며 인간 사회 내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론적 관계에까지 확대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확대는 인간이 우주론적 원리에 의해서 우주 만물과 관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 세계의 구조는 자연과 다른 우주현상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유교적 세계관의 두 번째 특징에 연결된다. , 귀신들 역시 위계적 질서로 구성된 세계의 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관념이다.

 

귀신의 지위

귀신들이 인간세계와 우주를 포괄하는 위계적 질서 내에 위치한다는 관념은 귀신을 근대적 의미의 자연의 영역 너머에 있는 초자연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사실, 신유학적 우주관에서는 자연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영역으로서 초자연의 영역 자체를 상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고의 근저에는 유교적 우주론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음양론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와 인간의 모든 현상들은 음양의 소장변전(消長變轉)으로 설명된다. 더불어 귀신의 존재도 이 관점에서 설명된다. , 귀신과 같은 존재들 역시 음양소장의 작용에 의한 것이기에 자연 현상과 구분되는 특정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자연의 현상들과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귀신이 자연세계 내의 위계질서와 동일한 층위에서 파악됨에 따라 귀신의 지위는 귀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원리, 즉 도덕성의 원리에 수렴되었다. 따라서 어떤 유학자들은 자신들이 도덕적 수양의 차원에서 어떤 신령 혹은 귀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다고 간주했으며, 무당에 내리는 어떤 신령들은 도덕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무당들이 모셨던 신령들과 도덕적으로 수양이 깊었던 유학자들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암시하는 많은 사례들이 목민심서등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나주 지역의 성황제에서 성황신보다 먼저 술을 대접받게 되었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는 나주목사 홍윤성의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수양이 높은 유학자들은 초자연적 존재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뿐 아니라 신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주장할 수 있다는 조선 유학자들의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덕성에 대한 강조와 수덕(修德)’의 정도에 따라 신적 존재들까지 자연세계의 일부이며 위계질서 내로 수렴시키는 위계적인 세계관은 최적화된 우주(optimal universe)’에 대한 유학자들의 낙관주의적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국가 사전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국조오례의에는 주로 정기적인 월력의례 성격, 즉 사시의 변화와 농경주기에 맞추어 신과 조상에 올리는 제사에 대한 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자연적 재해나 전쟁 등의 재난이 있었을 때 시행되었던 여제와 기우제 등의 기양의례가 있었지만, 제사의 대분류체계인 대((소사(小祀) 내로 범주화되지는 못했다. 이것은 유학자들에게 의례가 가지는 중요성이 일시적인 위기상황의 해결이라는 차원에서보다는, 우주가 규칙적으로 운행되는 것이라 믿어지는 관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하며, 우주적 질서는 도덕 혹은 공덕에 따른 위계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교화 과정이 심화되면서 공적인 문화 영역에서 무속적 의례 양식이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무속의 세계관

한편, ‘최적화된 우주에 대한 관념을 지닌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무속의 세계관은 우주의 운행이 예측가능하지 않으며, 파악될 수 있는 원리보다는 귀신이라는 다소 변덕스러운 존재에 좌우되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러한 시각은 생사화복이 모두 귀신의 소치이며 무당에 의해 좌우 된다, 조선왕조실록내에서 발견되는 여러 표현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자연세계의 현상이 귀신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는 무속의 세계관은, 사람들이 아직 귀신의 이치에 어둡기때문에 존재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인간보다 혹은 어떤 종류의 신들보다 더 강력한 신에게 의존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무속의 세계관은 문명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유학의 최적화 우주론과 비교될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특징적인 세계관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무속의 세계관을 종교학자 마틴(D. B. Martin)의 개념을 빌어 보호의 우주론(patronal universe)’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보호자와 고객사이의 관계 양식에 근거한 보호의 우주론, 인간이 경험하는 생활 세계의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위협에 대해 자신보다 더 강력한 어떤 존재의 보호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세계관은 도덕성에 의해 존재론적인 위계가 정해지는 유교적 우주관과는 달리 힘을 중심으로 한 위계를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음양의 논리에 의해 만물이 생성이 되면서 위계가 정해진다고 보는 관념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며 변화에 민감하다. 유교적 세계관이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닫아놓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가진 사회적 상위 계층에 의해 향유된 최적화 우주론이 가지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면 언제라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 있다는 무속적 세계관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명화의 과정에서 타자로 기능한 미신

근대적 문명과 양립할 수 있는 종교개념에 따르면, 과학적 합리성 혹은 기계론적인 인과론에 의해 지배되는 물리적 세계와 또 다른 영역으로 설정된 초자연적 세계는 서로 간섭될 수 없으며, 만약 종교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 혹은 정신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호의 우주론(patronal universe)’에 기반을 둔 무속의 실천자들은 여전히 신령이 자연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대상이기도 하며 의지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적 계몽 지식인들에게 시각에는 숙명론이나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초래하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이러한 삶의 자세는 문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퇴보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원시종교혹은 잔존과 같은 진화론적 사고의 비유들이 무속을 미신론의 영역으로 수렴시키는 데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음사론이나 근대의 미신론으로 표상되는 한국의 미신담론은 그 자체로 정의된다기보다는 당대의 지배담론을 형성시키는 데 효과적인 타자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명화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해진다.

 

1960년대, 무당 살풀이 사진. 집 안에 병자가있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굿을 하고 살풀이하는 일이 많았다.

(출처:충북인뉴스, 2007, 912. ‘무속신앙과 미신타파운동’)

 미신을 타파하자, 무당집은 대성황, 심리적 약점을 노리는 군상들(출처: 경향신문, 1955118).

과학적 근대화가 최대 목표였던 시기에 무속과 전통들은 모두 미신(迷信)으로 타파할 대상이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