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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1호] 메리토크라시, 그 지독한 혼돈을 넘어서

 

메리토크라시, 그 지독한 혼돈을 넘어서

 

장은주_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영산대학교 교수

 

 

일베라는 한국 교육의 적자(嫡子)

지난 9월 초,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가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고 있던 광화문 광장에는 최소한의 시민적 양식을 갖춘 이라면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들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그 농성을 조롱하며 폭식투쟁이란 걸 벌였던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최근 <시사인(367)>은 이런 폭거를 자행한 일베의 회원들, 곧 이른바 일베충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분석 기사를 내 놓은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그저 무식한 루저지질이가 아니라 나름의 논리 체계와 정의 관념을 갖추고 있는 아주 예의바른 청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여성, 진보개혁 진영, 호남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무임승차 혐오라는 모종의 정의감이 표현된 결과다. “여성은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고 남자를 등쳐먹고, 진보는 제 능력으로 성공하는 대신 국가에 떼를 쓰고, 호남은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뒤통수를 친다.” 한 마디로 이들은 기여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을 요구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척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들 일베충은 우리 사회 극히 일부의, 예외적으로 비뚤어진 청년들이 아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오찬호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에는 그런 일베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지닌 우리 사회의 숱한 보통의 이십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도 가령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이 정당한 기여 없이 대가를 바란다며 비판하는데, 마찬가지로 강한 무임승차 혐오 정서를 보이고 있다. 조야하고 역겨운 방식으로 표현되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 공격만 빼면, 저자에 의해 괴물이라고 지칭된 우리 사회의 이 보통의 이십대들과 일베충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그 이십대들이 그렇게 된 것은 성적이나 능력에 따른 배제와 차별을 당연시 하는 학력위계주의에 깊숙이 포박되어 있어서다. 이것은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능력주의업적주의등과 같은 통상적인 역어는 능력자 지배체제라는 말의 본뜻을 드러내지 못할 우려가 있어서 그냥 외래어를 쓴다)라는 모종의 정의 관념의 한 표현이다. 이 메리토크라시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생활 이데올로기로서, 무엇보다도 특히 숱한 병리를 양산하고 있는 우리 교육의 패러다임을 그 근본에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베충은 이 메리토크라시적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병든 한국 교육의 적자(嫡子)일 뿐이다. 도대체 이 메리토크라시의 정체는 무엇인가?

 

메리토크라시적 교육 패러다임과 한국의 교육 병리

메리토크라시는 부와 권력과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재화를 어떤 사람의 타고난 혈통이나 신분이나 계급 같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력에 따라 사람들에게 할당하자는 이념으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 일반을 사실적이면서도 규범적으로지배하고 있는 분배 정의의 한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사회전체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또 그런 식의 분배가 정의롭다고 정당화되는 사회체제에 대한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얻고자 다투는 사회적 재화를 기회의 균등이라는 전제 위에서 공정한 절차에 따른 경쟁을 통해 능력과 노력 여부로 사람들에게 분배한다면, 이것은 정말 합리적이고 정의로우므로 누구든 승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핵심 이념이다.

그런데 이 이념은 사실 서구에서보다는 유교적 동아시아 사회에서 먼저 발전되었고 또 여기에서는 그만큼 오랜 전통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들은 서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과거(科擧) 제도와 그에 기초한 관료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과거제도는 적어도 그 이념상으로는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공직을 분배한다는 원칙에 기초한 매우 메리토크라시적인 인재 선발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교적 조선 왕조의 정당화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던 이 메리토크라시 이념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퇴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분제의 철폐라는 조건 위에서 더욱 더 강력하게 사회적 주체들의 실천적 상상력을 사로잡으면서 우리의 근대 사회 형성에 구성적으로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념은 무엇보다도 주체들의 자기계발의 의지같은 것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우리 근대성의 문화적 중심축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사회에서보다 강렬한 우리 사회의 교육열은 이런 배경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메리토크라시적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교육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능력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될 수가 있다. 때문에 그런 능력에 대한 평가를 객관화하고 또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이때 다름 아닌 교육이 오랜 시간 동안 평가되고 축적되는 성적과 학력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와 같은 필요에 잘 부응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교육의 오랜 과정은 기본적으로 능력자를 추려내는 경연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때 사회는 성적과 학력(및 학벌)을 능력의 증거로 여기고 그것들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자연화한다. 다시 말해 불평등을 사회 구조와 과정의 귀결로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서구에서보다 더 오래 전부터 메리토크라시적 이념에 따른 분배 체계를 발전시켜 왔던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을 이해하는 근본 패러다임 자체가 더 철저하게 이런 식의 이해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여기서 교육의 중심은 언제나 성적이나 학력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교육을 받는 궁극적인 목표는 가능한 한 높은 학력을 얻는 것이며 학교의 궁극적인 사명은 그런 목표 설정을 도와 그 높은 학력을 위한 적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것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사람들의 인생의 질과 전망은 성적과 학력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으로 이해되고 또 그런 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패러다임에서 물질주의와 결부된 학력()주의나 성적지상주의의 지배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학력과 성적이 돈과 권력의 보증수표로 이해되는 탓이다. 좋은 성적을 받는 학생은 사회적 생산체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또 그에 따라 사회적 분배 체계에서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허드렛일이나 단순 육체노동 같은 것에 종사하며 낮은 임금과 직업적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대학서열화, 자사고 및 특목고의 입시학원화, 입시지옥, 사교육 광풍 등과 같은 교육 병리들이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교육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올바른 자기실현을 위한 자아탐구나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 함양 같은 진짜 중요한 교육적 요소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너무 자연스럽다. 학교는 명문대 진학이라는 목표를 감당할 수 있는 학생들만을 챙기고 나머지는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다. 이른바 교실 붕괴는 이 교육 패러다임의 단적인, 그러나 가장 추악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 메리토크라시가 능력에 따라 생겨나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배제를 정의롭다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의사나 변호사가 청소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청소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이 필요하고 또 그 능력을 연마하고 기능을 쌓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며 또 그 바탕 위에서 사회 전체를 위해 더 많이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체제에 정당한 명분을 갖고 반기를 들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며,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이 체제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것뿐이라고 여기게 된다.

 

메리토크라시냐 클렙토크라시냐?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말 제대로 된 메리토크라시적 사회이기는 한 것일까? 조금만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는 사실 곳곳에 학연이나 혈연 및 지연 등을 이용한 끈끈한 네트워크와 폐쇄적 카르텔 그리고 온갖 종류의 반칙을 통해 쌓아 올린 특권적 성채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무슨 낙하산 인사같은 것이나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의 불법적인 경영권 세습만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메리토크라시 이념은 빛 좋은 개살구, 그러니까 사실은 그런 특권 체제의 불의를 덮으려는 매우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일 뿐이지 않을까?

메리토크라시적 교육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경쟁 체제에서 승리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이기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승자독식을 정당화하고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만들어 낼 우려가 있다. 여기에는 패한 사람들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승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이긴 것은 우리가 잘나서이고 너희가 패한 것은 너희가 무능해서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너희의 그 불행한 처지에 만족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그게 억울하면 너희도 출세하라.’

그러나 이건 거대한 기만이다. 이른바 -을 관계’, 가령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한 관행이라든가, 아니면 SSM골목 상권진출이나 지겨운 학벌 따지기 관행 등을 생각해 보라. 또 아니면 서울 강남 출신의 학생들이 좋은 학업 성적을 얻는 것은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모들의 경제적 여력이 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는 경쟁이 그 출발선에서부터 공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온갖 종류의 반칙특권이 넘쳐난다.

우리 사회는 결코 제대로 된 메리토크라시 사회라 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메리토크라시의 이상은 결국 기득권 질서의 부당함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맥락에서 이용되고 있다. 메리토크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사실은 부당한 지배와 권력관계에 기초해 만들어진, 그래서 아마도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도적盜賊 지배체제)’라 규정해야 마땅할, 우리 사회의 과두특권독점체제의 본성을 은폐하면서 그 체제가 능력에 따른 정의로운 체제라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반칙과 특권의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 식 메리토크라시가 그 자체로 정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자. 과연 정말 성적은 곧 능력인가? 기본적으로 한날한시에 치러지는 수능 같은 국가주관 시험, 그것도 객관식으로 치러지는 시험으로 평가한 성적이 한 개인이 사회생활에서 발휘할 수 있는 참된 능력의 지표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흔히들 그 대안으로 여기는 내신성적이 그런 지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능력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언어 능력이나 수리 능력 같은 것만이 아니라 가령 쉽게 평가될 수 없는 감성과 정서적 상태, 타인이나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과의 교감 및 친화 능력 등도 인간에게는, 설사 좁은 경제적 생산을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이런 것들을 성적, 그것도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획일적이고 계량화된 평가 방식을 따르는 성적 속에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능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내용을 가지지 않은 도구적인 개념일 뿐이다. 능력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좋다또는 올바르다고 여기는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그 좋음이나 올바름이 의심스러운 생산주의또는 경제지상주의라 할 만한 그런 관점에서 획일적 기준을 세워 놓고 그에 비추어 능력을 평가하지만, 그런 평가를 그 자체로 옳다거나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새로운 교육패러다임을 위하여

정말이지 우리 사회는 교육문제 때문에 너무도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메리토크라시라는 가상 위에 조직된 우리 사회의 과두특권독점체제다. 이제 우리는 그와 같은 과두특권독점체제의 불의를 은폐하고 강화시키기만 하는 메리토크라시적 교육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넘어 설 수 있는 새로운 교육패러다임을 하루빨리 모색해야만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른 교육은 메리토크라시적 서열화나 불평등의 자연화를 넘어서 모든 청소년들의 존엄의 평등을 보호하고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학생 개개인의 인격적 불가침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다양한 방향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교육 패러다임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과정을 단순히 능력자를 추려내는 경연의 장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토대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패러다임에서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단지 특정한 능력이 모자란다고 무시당하거나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능력의 개념을 학업성적이나 학력 등에만 고정하는 좁은 메리토크라시적-생산주의적 지평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열적으로 평가되는 지능이나 성적과 같은 좁은 의미의 능력이 아닌, 모든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나름의 재능과 잠재력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능력을 모든 측면에서 존중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누구든 어떤 측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세울 수 있는 뛰어난 소질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잠재력 평가의 초점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다. 가령 어떤 소아마비 장애우의 잠재력을 평가하면서 그와 비장애우 사이에 달리기 경주를 시켜 놓고 그 장애우를 재단하거나 그 장애우가 지적인 측면에서는 더 뛰어나다고 추켜세우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 장애우가 자신의 신체적 한계 안에서도 나름의 인간적 성취를 보이려는 노력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초점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성원들의 잠재력에 대한 사회적 가치평가는 원칙적으로 사회의 모든 성원을 포용하면서도 개개인들의 다양한 처지와 차이들이 모두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게끔 개인화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은 이렇게 모든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참된 가치를 인정하고 계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