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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1호]<서강대학교 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 학술대회>, 민주정치연구회

<서강대학교 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 학술대회>, 민주정치연구회

세계금융질서의 정당성 위기와 경로의존적 변화

 

정재환 _ 민주정치연구회,

Ph. D in Politics and International Studies, University of Cambridge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 중심지인 미국에서 발생된 위기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동아시아 금융위기와는 사뭇 다른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아직까지 뚜렷한 국제금융질서의 변화 양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2007년 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질서가 경로형성적(path-shaping)보다는 경로의존적(path-dependent)의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구성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국제금융질서의 변화를 가로막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무엇보다 국제금융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부재가 국제금융질서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기존의 시장친화적 금융규제(market-friendly financial regulations)의 정당성을 상당부분 훼손시키는 하였으나 여전히 금융시장의 규제방식은 금융위기 이전에 존재했던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더 나아가 국제금융질서를 관리․감독하는 국제제도 또는 기구의 연속성이 관념적 경로의존성(ideational path-dependency)을 강화함으로써 금융시장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국제금융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려는 노력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지배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내재적인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이 국제금융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했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해서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은 동아시아 자본주의를 Anglo-American 모델로 전환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고,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개혁 역시 국제금융시장의 행위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기초를 만들기 위해 각국의,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제체제를 Anglo-American 모델로 전환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Financial Stability Forum(FSF)을 중심으로 International Standards of Best Practices를 형성하고 각국에 이 기준을 부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Wade(2007)가 이야기한 것처럼 ‘standards-surveillance-compliance’ 체제를 만들려고 한 노력이었다. FSF를 중심으로 금융시장의 규제와 행위에 대한 international standards를 Anglo-American 모델에 기초하려 만들고 IMF 등의 국제금융기구들이 standards의 준수여부를 감독하여 금융시장의 민간행위자들이 standards의 준수여부에 따라 금융적 처벌과 이득을 제공해서 각국이 하나의 국제규범에 따르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2007년 금융위기는 국제금융네트워크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발생된 위기였기 때문에 동아시아 외환위기 보다 더 큰 국제적 영향력을 미쳤다(Oately et al. 2013). 하지만 이 위기의 파급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위기가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질서 개혁의 기초로 삼았던 Anglo-American 모델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2007년 금융위기는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어 왔던 international standards를 형성하려는 노력에 치명적인 정당성 위기를 불러왔다(Mosley 2009). 하지만 이 정당성 위기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과 제도적 실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기존 질서의 경로의존적 성격이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Helleiner 2010; Onis and Guven 2011).

 

이처럼 기존 국제금융질서의 정당성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국제금융질서의 개혁 노력이 경로의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유로 세 가지 정도가 거론될 수 있겠다. 첫째, 물리적 측면에서 1930년대의 금융위기에 비교하여 최초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그간에 발전해온 국제제도가 세계경제의 유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Drezner 2014).

 

둘째, 관념적 측면에서 충분한 정보만 제대로 제공된다면 금융시장의 행위자들이 가장 최적의 경제적 선택을 할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Best 2010). 이는 기본적으로 금융시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금융시장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금융시장 행위자는 risk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 risk는 충분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계산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 행위자들이 risk가 아닌 uncertainty에 노출되어 있다면, 이는 충분한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산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따라서 금융시장 행위자는 항상 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과도한 낙관주의나 혹은 panic에 빠지게 된다(Nelson and Katzenstein 2014). 따라서 우리가 금융시장이 risk와 uncertainty 두 가지 모두가 상존하는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금융시장 행위자들이 합리적 행위를 위한 제도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international standards를 주도했던 transparency advocates의 관념적 기초는 제고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 국제금융시장의 개혁의 주도적인 아이디어는 금융시장의 행위자는 risk에만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Mugge and Perry(2014)에 따르면 이러한 아이디어를 equilibrium finance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조직적 측면에서 uncertainty가 아닌 risk에만 주목하는 equilibrium finance 아이디어가 지속되는 이유로 국제금융질서의 개혁의 주도하는 기구의 경로의존성을 생각할 수 있다. 국제금융질서 이후 G-7을 G-20로 확장하는 등의 중국을 필두로 개발도상국들이 더 많은 발언권을 낼 수 있도록 하는 Global Governance 변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실질적인 내용의 변화와 연관되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Mugge and Perry 2014). 이는 국제금융질서 개혁을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하는 조직의 경우에는 FSF에서 FSB로 확장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계속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organizational path-dependency가 ideational path-dependency를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당성 위기는 제도변화의 시작일 수 있으나, 정당성 위기가 제도변화를 반드시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07년 금융위기 이후 현존하는 국제금융질서의 정당성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국제금융질서의 변화는 경로형성적 성격보다 경로의존적 성격에 크게 지배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uncertainty가 아닌 risk에만 초점을 두는 equilibrium finance라고 부를 수 있는 금융시장에 대한 지배적인 아이디어가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ideational path-dependency는 기존의 국제금융질서의 개혁을 주도했던 제도와 기구가 2007년 위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organizational path-dependency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