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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132호] <서유강론> 우수 논문 소개 - 자본주의적 매트릭스의 종교성에 대한 민간 신앙적인 돌파구 모색 개요

서강논문상 ‘서유강론’



자본주의적 매트릭스의 종교성에 대한 민간 신앙적인 돌파구 모색 개요




 이정훈 _ 종교학과 박사과정



     무속 신앙은 흔히 어리숙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쉽게 돈을 뜯어내는 기제로 인식되어 왔다. 근래 들어 어떤 방송국의 유명한 PD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극도의 편집증을 발휘하여 그러한 집단의 인식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몇날 며칠을 발품을 팔아다가 변장도 하면서 사주팔자를 알아보고 신기를 시험했으며 생생하게 그 현장을 담았다. IMF 환란 당시에는 있는 돈을 다 끌어모아 빚을 갚아도 모자랄 판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굿판이 성행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일반의 인식대로 무속 집단이나 민간 신앙이 돈만 밝히고 사기를 친다는 것은 확실한 것인가? 본 논문은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본문 내용은 소비문화가 하나의 매트릭스를 형성하고 있고 유아기적 최초의 출생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만, 고착되는 욕망을 넘어 빙빙 도는 상실의 형태로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 상태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든 것의 배후에 진정한 실재를 은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트릭스를 넘어서면 진정한 현실이 있는 거도 아니다. 이러한 형태는 종교적 상징이 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내세의 파라다이스를 기대하며 현세를 살아가는 것이 거의 모든 종교의 기본적 패턴이 아닌가? 허면 자본주의는 어떤가?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결정하는 상품, 돈, 자본을 생산하고 유통시킨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물질로 환원되고, 대신 물질의 자본적 관계가 주체로 환원된다. 이로써 본문에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상품 관계와 인간관계의 전도가 일어나는 와중에 자본주의와 종교 관계 또한 전도가 일어난다. 자본주의는 종교성을 일부 획득하지만, 종교는 자신의 성격을 일부 상실하게 되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악순환을 거듭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갈 길은 더욱더 요원하다. 그것의 가장 가까운 예가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라고 볼 수 있다. 그 추악한 냄새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이기에도 모자라다.

     최소한 민간 신앙은 사회적 자본의 계층 간 분배 역할이라도 한다. 하지만 교회는 목사와 결탁한 몇몇 장로들만 신난다. 하염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매주 헌금을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서민들이다. 이미 자본주의와 분리할 수가 없게 된 기독교는 자신의 주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맘몬의 지성소를 만들어놓고 천상의 권력이 아닌 지상의 권력에 합장하며 들러붙고 있다. 종북의 기치를 가장 높이 들어 올린 단체가 바로 개신교이며, 그들은 광화문에서 부채춤을 추는 것 이외에 아무런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 비록 논문에서는 “abducted agency”라는 개념을 예로 들어 소비문화가 상품을 구매하도록 끊임없이 꼬드기면서 원초적 트라우마에 반복적으로 생채기를 내지만, 소원 성취의 미명 아래 끊임없는 악순환에 들어가 마침내 에너지를 매트릭스에 저당 잡히고 마는 구조 정도만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내세를 빙자하여 현세에 대한 희롱을 메커니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유사하고, 민간 신앙에서 발견될 수 있는 다른 가치가 그 흐름을 끊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현재의 위기에 조상님에게 축원하는 그 행위로 무엇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민간 신앙은 내세와 현세를 혼동시키는 기만의 술수는 부리지 않는다. 조상님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조상님과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자크 알랭 밀레와 지젝은 이 부분에서 활용될 수 있는 욕망과 충동의 구분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욕망이 일단의 결여에 대한 몸부림이라면, 충동은 메울 수 없는 구멍 그 자체이며 그 간극 주위를 끝없이 맴도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기독교 모두 뻥 뚫린 구멍(도달할 수 없는 소원성취, 내세의 파라다이스)을 악순환시키는 충동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민간 신앙은 조상님의 결여를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그것을 메우려 하니 욕망의 영역에서 움직이다. 물론 욕망과 충동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지면상 그런 여유는 없다. 흔히 최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라는 말이 있는데, 차악(민간 신앙)을 선택할 수 없다고 최악(기독교, 소비문화는 물건이라도 준다)을 선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 아직까지는 마이너스(복채)인데, 여기서 더 좋은 것을 보태 최소한 제로베이스로 만들 여지는 있는가?

     민간 신앙의 재수굿에는 잘 살고 있던 신도들이 신령의 은덕을 망각하고 있다가 굿이 계기가 되어 다시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응분의 정성으로 보답하는 의례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연된 시간’이라는 요소가 있다. 이것은 신령의 은덕을 입고 사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덕적 채무감을 부여하는 것인데, 지속적인 단골 관계로 해소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볼 수 있는 이자 문제다. 자본주의의 씨앗을 잉태하는 중세 때 고리대금업자는 시간을 훔치는 자로 표현되고 있으며, 시간은 오직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기에 고리대금업자는 하느님의 재산을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자본주의와 이자의 큰 단위인 부채로 유지되고 있으니, 시스템 자체가 고리대금업이라면 이 체계는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훔치는 매트릭스가 아닌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재산에 해당되는 것이 뭐가 있는가? 인간의 생명, 더 좋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노동력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반면 인간의 생명을 빚진 조상님에 대해 끊임없이 지연된 시간을 빌미로 도덕적 채무감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생명에 대해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생명이 아니라 조상님에게 받은 것이다. 기독교 입장에선 신성 모독의 혐의를 타자에게 씌우지 말고 본인 스스로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과연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 태도인지 말이다. 시스템 자체가 부채가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자본주의에 목매달고 있는 기독교인지, 아니면 그 자본을 털어서라도 채무감을 벗고 자유롭게 받은 생명에 감사하는 민간 신앙인지 말이다.




서울 재수굿 공수내림 (출처: 한국민속신앙사전)

재수굿은 서민들이 가족의 안녕과 재복 등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빌기 위해서 지내던 한국의 기본적인 무속제의이다. (편집자주)


     사실 바로 그 낭비라는 개념으로 옭아맨 혐의 자체가 절약이라는 도그마를 완수하기 위한 것 아닌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대로라면, 칼뱅의 주장처럼 사치와 낭비를 절제하고 절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애초에 그 혐의가 유언비어이고 그것이 낭비가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채무자 본인이 채무감을 떨쳐내고 빚을 다 갚은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기회가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에서 쉽게 부여되는가? 또한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어림없다고 본다. 조상님이라는 어떤 것을 빌어서라도 채무자의 감정을 달래줄 그 무엇이 우리나라에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다. 차라리 그것이 없는 걸 탓해야지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채무자와 그 가족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몸을 던져 힘들게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만신 탓을 하는가? 그런 걸 게으름이라 부르는 것이요 태만이라고 콕 집어 부르는 것이다. 그럼 애초에 기독교는 얼마나 불우 이웃을 위해서 적선을 했는가? 일간지 통계에 보니 예산의 4%도 안 된다고 한다. 예수와 사도들이 시킨 일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자기반성 없이 형제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가? 하긴 처음부터 자기반성이라는 게 있었으면 기독교일 리가 없다. 그런 것이다.

     한편 그와 같은 사태를 민간 신앙과 기독교의 대립이라는 막연한 긴장감으로 상정할 수 없기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원시의 생존 경제에 대한 소고를 살짝 요약해서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primitive라는 측면에서 생존 경제와 민간 신앙의 친연성(affinity)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쉬움이 좀 남는다. 생존 경제에서는 돈이나 자본 그리고 생산기술이 없이도 자본주의 사회가 뽐내는 것만큼의 욕망 정도는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부시먼들은 하루나 이틀을 일하고 또 그만큼 쉬는 데에도 노동생산성 측면에서 높은 효율을 발휘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높은 생산성은 소위 미개인이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철저히 이용하지 않을 때 달성되는 것이다. 저장 대신 궁핍을, 시장 대신 교환 거부 의지를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줄 수 없는 독립과 자유를 살펴볼 수 있고 한 사회가 다른 사회에 종속되는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다른 한편 본문에서 사례로 든, 부채를 갚아야 하는 돈을 민간 신앙의 재수굿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신령(조상님 등)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에게 속아서 거저로 돈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대감신의 공수처럼 “먹고 쓰고도 남게 부러울 만큼 도와준다.”는 신령의 ‘넘치는 무엇’(자본주의의 잉여와 같은 의미)에 대한 약속을 지향하는 것이다. 즉 미래에 풍요롭게 될 자기 자신에 대한 상징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성공한 기업가들이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 역시 앞서 언급했던 도덕적 채무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들이 헛된 곳에 돈을 쓰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 신앙적인 도덕적 채무감에 대한 봉사가 당장의 소비문화가 가져다주는 잉여의 향락과도 상쇄될 수가 있다는 측면에서 사회 전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아 합리적으로 소비문화에 동참하는 주체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서는 실제로는 부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이 그나마 가진 돈을 신령이 약속해주는 잉여를 믿고 비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주체이고 이 주체는 어쩌면 히스테릭하다. 히스테리컬하다고 비합리주의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있는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의 히스테리란 사회적 지시에 대한 의문 및 거절이다. 이것 없이 사회가 긍정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가? 특히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도착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교환을 거부하고 시장을 무력화시키는 생존 경제의 의지와도 맞닿아있는 셈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명제를 다시금 편견 없이 바라볼 눈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