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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3호]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전자감시제도의 부정성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전자감시제도의 부정성





윤영철_한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과학기술의 양면성 - 디지털 감시사회의 등장

현대사회는 첨단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으로 만끽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특히 디지털 혁명이나 정보통신기술 혁명으로 인해 상호 관련된 정보를 한 곳으로 집적할 수 있는 디지털 컨버전시(digital convergency)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더욱이 디지털 컨버전시에 네트워킹을 결합하면서 우리사회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정보통신환경을 형성하고 일상생활의 편익을 구현하는 유비쿼터스 사회(ubiquitous society)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사회를 과학기술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양면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편의성과 신속성, 효율성과 경제성, 자동화와 안전성 등의 긍정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에 과학기술이 초래하는 예컨대 물질만능주의, 위험성의 일상화, 인간존엄성의 형해화, 비인격화로 인한 획일화 경향, 감시의 일상화, 사생활 및 개인정보의 노출 등의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디지털 전자정보통신기술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의미의 유비쿼터스 사회는 다른 한편으로는 전방위적 감시가 일상화되는 디지털 감시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사회에서의 IT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사회구성원을 서로 네트워크화하여 상호 활발하게 소통하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전방위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파놉티콘, 즉 디지털 파놉티콘의 도래를 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국가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동등하게 최소한으로 유보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법규범을 제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 즉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 즉 자유를 보장해주는 수단이므로, 국가는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갖게 되어 인간에 대한 국가의 지배는 오로지 인간에 대한 봉사라는 점에서만 그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과 관련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야 하는 보호기능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모든 상태를 형성해야 하는 형성기능을 가진다. 이에 따라 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삶을 강요하는 모든 법적 상태를 배제하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법적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 임무를 가진다.


그리고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 스스로 목적을 정립하는 존재, 즉 자기입법의 기획을 통해 자신의 인간 존재를 형성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은 바로 자기입법의 기획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자의 존재가능조건이 된다. 따라서 국가와 법을 통해 모든 인간 질서를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게 자유질서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을 동물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이성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법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목적 그 자체, 즉 스스로 목적을 정립하는 존재의 존엄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정신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은 물론 사회의 관점에서도 각 개인이 최대한의 자유와 평등한 자유의 질서를 통해 개인의 개별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상호적 자유도 최대한으로 보장하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목적 그 자체인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평등하게 보장해야 하는 수단, 즉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처벌에서 감시로의 전환

형벌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전에는 처벌을 할 때 신체형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체형은 본질적으로 범죄인의 신체에 물리적 폭력을 가하여 절대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심리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과정으로써 본보기적 징벌의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 그러나 신체형의 잔혹성이나 비효율성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으로 인해 신체형은 점차로 인도적인 자유형으로 전환되었다. 신체형과 달리 자유형은 합리적인 계산에 입각한 효과적인 징벌의 원칙, 즉 최소분량의 원칙, 관념성 충족의 원칙, 측면적 효과의 원칙, 완벽한 확실성의 원칙, 보편적인 진실의 원칙, 최상의 특성화 원칙에 따라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형벌이다. 신체형이 범죄에 대한 응보적 처벌에 중점을 두었다면, 자유형은 범죄인을 일정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감시하는 효율적인 통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신체형이 자유형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바로 처벌이 효율적인 감시에 의한 통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범죄인에 대한 효율적인 감시를 최적화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 다름 아닌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벤담(Jeremy Bentham)이 주장한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파놉티콘에 의해 범죄인을 관리하는 방식은 공리주의적 비용효과이론에 입각한 감시방식이다. 파놉티콘이라는 효율적인 감시 장치에 의해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사회를 규율사회라고 한다. 규율사회에서는 파놉티콘적 통제의 대상이 규율사회의 전형적인 영역인 감옥, 공장, 정신병자 수용소, 병원, 학교 등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감시가 요구되는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규율사회에서는 효율적인 감시에 의해 권력과 통제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체형이 자유형으로 전환되면서 형벌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완화되었지만, 반면에 형벌을 통한 효율적인 감시와 통제는 점차로 강화되었다. 즉 형벌이 물리적 폭력에서 심리적 강제로 전환된 것이다.


비인간적 통제장치로서의 전자감시제도

앞에서 언급되었던 첨단과학기술의 발달은 형법영역에서도 범죄예방이나 재범방지에 첨단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국가는 범죄나 범죄인으로부터 국민의 법익과 사회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첨단과학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범죄나 범죄인에 대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감시에 의한 범죄통제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첨단과학기술은 형벌 자체보다는 오히려 범죄 또는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기 위한 보안처분과 쉽게 결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관한 예로는 특정범죄인의 신상정보공개, 성범죄인에 대한 화학적 거세, 특정범죄인에 대한 전자감시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컴퓨터기술, 정보통신기술, 전자기술 등의 첨단과학기술이 감시제도에 접목된 것이 바로 전자감시제도이다. 전자감시제도는 전자감시장치를 이용하여 사회의 자유공간을 자유가 억압된 통제공간으로 만드는 범죄영역에서의 디지털 파놉티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특정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현재는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임)을 제정하여 2008년부터 전자감시제도를 특정범죄인에 대한 보안처분으로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점차로 그 대상범죄를 확대해가고 있음은 물론 더 나아가 전자감시기간의 상한을 30년으로 상향 조정하였다. 우리나라의 전자감시제도는 위성을 통한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에 기반하는 위치추적전자장비를 이용한다. 위치추적전자장비는 발목에 전자위치추적장치 - 일명 전자발찌 - 를 착용한 감시대상자의 위치를 24시간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하고, 위치추적센터에서는 통제요원이 실시간으로 데이터화된 위치정보를 통하여 감시대상자의 이동을 감시하며, 필요한 경우 수사기관 등에 현재 위치정보를 포함한 시점별 위치정보를 즉각적으로 제공한다.


전자감시제도와 관련하여 교정시설 과밀수용의 완화, 구금비용의 절감, 과중한 교정업무의 완화, 구금 없이 구금의 목적 달성 등이라는 긍정적인 효과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보안처분이 아닌 형벌로서의 전자감시일 경우에 나타나는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한 형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보안처분으로서의 전자감시제도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인간의 자유보장보다는 철저히 사회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사회방위이론과 통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어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나라의 전자감시제도는 예컨대 평등원칙의 위배문제, 인권침해의 문제, 이중처벌의 문제, 비례성원칙의 위배문제, 형사사법에 의한 사회통제망의 확대문제 등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형기종료자에 대한 전자감시제도는 사회적 낙인효과로 인해 오히려 범죄인이 다시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는 재사회화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첨단전자기술을 이용한 범죄인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규제로 인해 심각한 인격권이나 사생활의 침해문제를 야기한다.


전자감시제도는 우리사회가 사회의 안전을 사회의 최고 가치로 간주하는 고도의 규율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규율사회에서는 사회 안전의 필요성을 빌미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나 침해가 합리화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구성원이 스스로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안전감옥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자처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하는 인간이 단순히 사회 안전을 위한 수단, 즉 비인격적 객체로 전락하게 되어 인간존엄성의 상실이 나타나게 된다.


나가는 말

벤담이 주장한 파놉티콘은 격리와 고립 그리고 이를 통한 교화에 기초하는 효율적인 감시통제장치라고 할 수 있다. 교화는 기본적으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인격적 통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의미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은 어느 정도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의 전자감시제도는 오로지 효율적인 통제를 위한 감시만 있을 뿐이며, 그 어디에서도 교화의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전자감시제도의 교화적 의미는 그의 사회적 낙인효과와 그로 인한 재사회화의 방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더욱 무의미해진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유의지와 자율성을 가진 주체적 존재이고 그 자체로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므로, 인간은 범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 평등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전자감시제도에서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는 오직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한 비인격적 객체로서의 인간상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자유와 자율성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할 사회를 안전감옥, 즉 파놉티콘으로 전락시키는 전자감시제도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더 이상 자유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철저한 감시로 인해 자유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규율사회는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인 행동의 자유가 제거된 비인간적 통제사회에 불과하다. 그뿐만 아니라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전자감시제도는 경제적 효율성의 극대화에 기인하므로 도덕적 주체인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효율성의 도구인 경제적 객체로서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전자감시제도 하에서 특정범죄인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상태에서 전자감시대상자는 자기 자신이 바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의지와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가진 인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인간임을 성찰할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전방위적 감시와 통제의 불안 속에서 대중 사이에서 철저하게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로서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여 표류하는 정신이 없는 비인격체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사회계약설에 근거한 사회공동체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구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사회 안전을 목적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를 볼모로 하는 전자감시제도는 근본적으로 단순한 사회의 안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보장을 지향해야 하는 국가의 본질적인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 제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시민으로서의 저항정신을 다시 되살려 디지털 파놉티콘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여 안전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자유를 볼모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국가의 전략적 권력구상에 대한 시민의 자유공간을 지키기 위한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저항만이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