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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3호]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2015년 4월 봄철 정기 학술대회, 호스피스 철학에서 웰다잉의 문제 :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호스피스 철학에서 웰다잉의 문제 :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이은영_철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웰다잉’의 문제가 우리사회에 있어서 상당히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촉구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는 ‘웰다잉’에 집중해 있는가? 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오래 살지만 아프면서 오래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2012년 기준 60세 남성은 22년, 여성은 27년을 더 살 것이라는 통계가 발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0여 년을 아프다가 사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선진국이 약 6년인데 반해, 한국의 경우 거의 두 배에 육박한다. 이 사실은 진료비 통계에서도 알 수 있다. 2013년 고령층 진료비는 전체 진료비(50조 7426억 원)의 35%를 차지하며, 사망원인은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 폐렴 등의 순이다.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말기 판정에도 불구하고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받는 환자는 갈수록 늘어 간다. 가족이 병 수발로 겪는 정신적, 경제적 고통은 마침내 비참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둘째, 아픈 상황에서 빈곤의 심각성이다. 2013년 고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중위 소득의 50%미만 인구)은 48%로 전체의 3.3배이며 이는 곧 OECD 국가 중 60세 이상의 자살률이 최고라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 평가에서 40개 국가 중 32위라고 밝혀지고 있다(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10). 이러한 배경 하에, 최근 들어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국내 연구자들의 다양한 ‘웰다잉’ 연구의 다변화가 시도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물론 본 연구에서 추구하는 호스피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연구의 본격적 수행을 예비하는 최근의 몇 가지 의미 있는 움직임들은 눈여겨 둘만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호스피스’ 내지는 ‘호스피스 활동’이 아니라 왜 ‘호스피스 철학’인가? 또한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은 죽음에 대하여 어떤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또한 그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접근 방법은 다른 분야의 방법과 어떠한 차이를 견지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본 글을 출발한다. 


호스피스 철학


호스피스(Hospice)의 어원은 ‘손님을 집에서 정중하게 모셔 후대 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의학사전에서는 ‘죽어가는 사람과 가족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영적 간호의 형태로 고식적이고 지적인 서비스 제공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공공시설’로 명시하고 있으며 숙소나 집의 의미보다 임종환자 내지 그 가족을 포함하는 사람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집과 사람이라는 양자를 함께 ‘집에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때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의미는 그가 하루속히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하는데 심신의 피로로 인해 하룻밤 쉬어야 하거나 혹은 신병으로 떠나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숙소에 그냥 남아 있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더욱이 이들을 돌봐주고 간호해 주는 정중한 마음까지를 다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전인적 돌봄’이라고 할 수 있다. 호스피스의 현대적 정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환자가 남은 여생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으로 도우며, 사별 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이다.(...)따라서 호스피스는 임종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희망 속에서 가능한 한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전념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총체적 접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병 뿐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갖고 있으므로 호스피스는 이러한 육체적인 치료와 영적 치료를 같이 해주는 전인치료를 목적으로 하며, 죽어가는 환자 뿐 아니라 그 가족 전체를 돌보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스피스는 주로 종교적인 활동으로 인식되며, 하나의 운동 내지는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호스피스 운동’(Hospice Movement)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호스피스 정의를 토대로 백승균 교수는 다음과 같이 ‘호스피스 철학’을 규정짓는다, 그에 의하면, “호스피스는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해 ‘간호’(시간)하는 일과 그들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숙박’(공간)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는 순례자와 병약자를 위한 숙박과 간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우리는 이 ‘숙박’(공간)의 개념과 ‘간호’(시간)의 개념을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철학의 기본범주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를 ‘호스피스 철학’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백승균에 의하면, “호스피스 돌봄 보다는 ‘호스피스 철학’이라고 명명하고, 인간존재와 생명현상, 그리고 그러한 생명의 존엄성이 무엇인가를 호스피스 철학의 이념으로 제시한다. 호스피스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가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며 또한 그러한 인간 삶의 중심축이 바로 인간의 실존임을 주장함으로써 호스피스 활동이나 돌봄 보다는 호스피스 철학”임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백승균의 논의를 적극 지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적 바탕 위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부가하고자 한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한 ‘간호(시간)’와 그들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숙박(공간)’이라는 기본범주를 토대로 간호하는 호스피스와 간호를 받는 환자 사이의 ‘관계(태도)’라는 요소를 추가하여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재해석하려는 것이며, 이를 ‘호스피스 철학’(Hospice Philosophy)으로 규정짓고자 한다.


호스피스 철학의 정초로서 사랑과 공감


필자는 슈타인의 박사논문『감정이입의 문제』에서 제시되었던 감정이입(Einfühlung)의 한 측면인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을 통하여 호스피스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모색해 내고자 한다. 우선 감정이입의 한 형태로서 제시된 ‘하나로 느낌’이다. 슈타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곡예사와 ‘하나(eins)’가 아니라, 단지 곡예사 ‘곁에(bei)’ 있을 뿐이다. 나는 곡예사의 행동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즉 곡예사의 행동을 나는 외적으로는 실행하지 않지만 내적으로 함께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곡예사를 ‘고유한 자아’, 지켜보고 있는 나를 ‘낯선 자아’라 할 때, 낯선 자아가 고유한 자아의 움직임을 함께 실행하지 않아도 낯선 자아는 고유한 자아와 내적으로 함께 하면서 내적으로 하나가 되고 ‘하나로 느끼게’ 된다.” 이러한 ‘하나로 느낌’(Einsfühlen)에서는 ‘우리’가 하나로 느낌의 주체이기 때문에 ‘나’의 기쁨과 ‘너’의 기쁨, 그리고 ‘그’의 기쁨은 ‘우리’안에서 유지되며 따라서 ‘우리’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호스피스는 임종하는 환자의 곁에 있으며, 임종자의 고통스러운 행동을 외적으로 직접 실행하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감정이입하면서 함께함으로써 ‘하나로 느끼게’ 될 수 있다. 임종자의 고통을 하나로 느끼려 하는 호스피스의 태도는 심리적, 정서적으로 환자가 자신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가지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더불어 느낌’이다. 슈타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컨대 A가 시험에 통과했고, A는 이 일에(시험에 통과한 결과에) 대해서 기뻐한다, A의 친구인 나도 기뻐하는데 기뻐하는 대상이 A의 기쁨 그 자체가 아니라 A가 시험에 통과한 그 결과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이 기쁨은 A가 시험에 통과한 사건에 대해서 A와 내가 함께 기뻐함이 된다. 이것이 곧 ‘더불어 느낌’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A가 기뻐하고 있는 그 사건(A가 시험에 통과한 사실)에 나를 옮겨놓는 것이며, 이때 나는 A의 기쁨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서 A와 더불어 기뻐하고(느끼고) 있는 것이다.(PE, 13-14)” 마찬가지로 호스피스는 임종자의 고통에로 자신을 옮겨 놓으며, 임종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 대하여 ‘더불어 느낌’(Mitfühlen)으로써 임종자의 호소에 응답하며 임종자로 하여금 친밀감과 가까움이라는 정서를 느끼게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감정이입의 한 형태로 제시된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의 근저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철학적 가치는 슈타인의 주저『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 전반에 걸쳐 감정이 존재에 접근하는 유효한 방법임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예컨대, 인간을 실례로 살펴보자면, 전쟁 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서 감정을 기술한다. 군대는 거리를 따라서 열을 지어 행진한다. 그들은 경험이 없는, 차별이 없는 무리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엄마와 약혼자는 개개의 군인을 본다. 여기에서 논점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병사들의 통일된 본성(동일성)보다는 이성적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개인의 차별성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통일된 본성은 궁극적으로 신의 전능한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병사들의 통일된 본성(동일성)보다는 개개인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며, 이는 곧 임종을 앞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환자들이라는 동일성 보다는 개개인의 차별성을 통하여 그 고통과 괴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가는 말


2014년 설문조사(건강보험정책연구원)에서 86%가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현재(2015년 3월) 암 사망자의 13%만이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실정이다. 말기환자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고가의 검사와 처치로 고통을 받으며 품위 있는 생의 마무리를 위한 돌봄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호스피스 국민본부는 ‘웰빙의 마무리는 웰다잉’이며 ‘호스피스 제도화로 말기환자 돌봄의 질을 높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국회는 호스피스 제도 도입과 함께 말기환자 완화의료 등을 위한 법안을 제정하고 정부는 웰다잉에 관한 범부처 5개년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그 성과를 점검하는 체계를 갖출 것을 약속하였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는 웰다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시행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오는 7월 1일부터 호스피스에 건강보험을 적용함으로써 말기 판단시점부터 환자의 호스피스 선택을 보장하고 최상의 의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만일 오늘날 개인이 치유를 필요로 하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문제뿐 아니라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몸과 감각적 측면 그리고 영혼과 정신적 측면의 상관관계 속에서 문제를 직시해야 함을 강조하는 측면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인간의 죽음은 육체만의 문제라고 지정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영혼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판단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웰다잉의 핵심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관점의 웰다잉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런 한에서 필자가 제시하는 슈타인의 호스피스 철학에서 웰다잉 문제는 우리 사회의 좀 더 성숙한 죽음 문화 형성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