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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137호] 연구 / 세미나 - 중독과 행복

 

중독과 행복

 

김봉규 _ 미래행복인재연구원 대표

 

 

 

키스는 기호이다. 사랑은 황홀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하지만 사랑 뒤엔 욕망이 은폐되어 있다. 그 끝은 죽음이다. 결국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도 죽음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가, 아니면 완성하는가? 기호는 언제나 잔인하다. (그림: 구스타프 클림트의‘키스’)

 

 

 

클림트의 <키스>엔 남녀의 황홀한 사랑이 보인다. 꽃으로 만발한 정원, 별들이 빛나는 밤에 둘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색을 잊어버리고, 여인의 표정도 삭제하고 둘의 모습을 바깥 선으로만 따라가 보면 예상치 못한 모습이 보인다. 성적으로 흥분한 남성의 성징이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핵심개념인‘남근’, 인간 욕망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잡을 수 없는 ‘파랑새’, 도착할 수 없는‘무지개’! 그림을 그냥 보지 않고 이리저리 뜯어 본 결과는 사랑 아닌 욕망이다. 하지만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려진 여인의 몸에서 유일하게 삐져나온 부분이 있다. 발의 형상이 화살표 같다. 오른쪽 아래로 드리워져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절벽! 죽음의 상징! 보아야 할 것! <키스>가 전하는 종국적 메시지는 죽음이다. 처음엔 사랑인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저 욕망에 중독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끝은 죽음이다. 아무것도 없는 지구를 상상해 보자! 대지 위에 있는 것이
라고는 작은 바늘 하나뿐이다. 어디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또 어디선가, 수십만 피트 상공에서 누군가가 실 하나를 떨어뜨린다. 실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살랑살랑 떨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무심하게 떨어진 단 하나의 실이, 지구위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바늘귀에 꽂힐 확률! 바로 당신이 태어날 확률, 기적이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다. 두 번 사는 인간은 없고 두 번 죽는 인간도 없다. 절대적 일회성, 대체 불가능성의 존재이다. 인간은 어쩌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다. 피노키오는 완전한 인형에서 완전한 인간이 된다. 그럼 인형일까, 인간일까? 정답은“둘 다 아니다”이다. 인형도 많고, 인간도 많다. 피노키오라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피노키오는 피노키오이다. 그래서 사실 당신은 인간도 아니고, 학생도, 군인도 아니며, 어떻게 부르든 집합명사는 아니다. 한번 사는 기적의 존재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쇼펜하우어처럼‘불행이 잠깐 멈추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식언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불행이 잠깐 멈추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행복이 잠시 멈추는 것이 불행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소중한 많은 존재들이 다양한 중독에 빠져, 귀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다. 10대만 해도 100만 명 이상 게임중독에 빠져 있다. 중독에는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 도박중독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뿐만 아니라 약물중독, 섹스중독, 포르노 중독 등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정상처럼 보이는 생활에도 중독은 있다. 쇼핑중독, 드라마중독 일중독 등 자아를 잃어버리고 노예상태와 같은 상실의 삶을 보내도록 만드는 요소는 많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인간은 누구나 자존심에 중독되어 있다.
학술적 정의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론적 이해이다. 무엇엔가 중독된다는 것은 그것 안에 내가 용해되어버림을 뜻한다. 단순히‘몰입’으로 치부할 수 없다. 노예의 삶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가 술을 마시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이 나를 마시듯, 모든 중독은 어느 지점을 경계로 행위주체가 바뀐다. 처음엔 내가 쇼핑을 해도 결국 쇼핑이 날 쇼핑하고, 드라마를 내가 본다고 생각하지만 후엔 드라마가 날 보게 된다. 안 보면 일주일을 산 것 같지 않다.

 

중독 밑의 중독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정상처럼 보이는 중독이 있다. 전혀 중독 같지 않은 중독이 사실은 더 무섭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을 아는 것처럼 매일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가 질문하면 머뭇거린다. 그리고 사실 별로 행복하지 않다. 신기한 것은 대부분 그것을 정상으로 알고 살아간다.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을 행복지수라 한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가난한 나라일수록 높은 경향이 있다. 돈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방글라데시인들은 행복지수가 높은 것이 아니라 불행지수가 낮다. 욕망 지수가 낮기 때문인데, 눈에 보이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기는 젖만 주면 행복하다. 행복지수는 인간은 단순히 욕망하며, 욕망이 충족되는 것에 비례해서 행복하다는 느낌, 즉 행복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위해 산다.을 위해 산다. 행복감의 대상은 다양하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세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생존과 관련한 몸의 욕망이고, 하나는 쾌락과 향유, 즐김과 관련한 자극의 욕망이며 마지막은 명예, 성공 등과 같은 비교의 욕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돈이 한 번에 해결해준다. 그래서 자본주의, 자본이 주인인 사회이다. 그런데 행복감을 위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인생행로는 늘 계단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안착하면 행복의 첫 번째 계단이다. 취직하면 두 번째, 승진하면 세 번째, 차를 사고, 연애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낳고, 집을 사고, 집 넓히고… 그렇게 계속 가면 저 높은 곳 어딘 가에 행복의 거대한 태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계단식의 길을 올라 실제 행복을 만난 사람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길이 없기 때문이다. 허상이다. 실제 길은 이렇다. 명문대에 진학하게 되면 행복감이 충만해진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나면, 그 많던 행복감이 다 사라진다. 졸업하고 좋은 곳에 취직하면 행복감은 다시 충천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식어버린다. 동일한 행복감을 지니려면 승진해야 하고, 또 식고, 연애, 결혼, 출산, 집짓고 넓히기 etc. 그러다 이제는 흰머리가 늘어난다. 그렇게 살다 그 어느 날도 행복하기 위해 뭔가를 하다‘돌아가신다.’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삶은 다양해 보이지만 사실 죽을 때까지 리포트만 쓰다 죽는 것과 같다.


자유
혹자는 행복감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다. 무소유의 삶이라고,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멈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생각 멈추기’를 위해 엄청나게 생각한 다. 마음은 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비워졌다 해도, “아 마음이 비워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온다. 무념무상의 경지는 뇌의 작동이 멈출 때에만 가능하다. 사실 행복감의 대상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아니다. 돈도 나쁜 것이아니다. 그냥 교환가치일 뿐이다. 돈이 불행이 되는 이유는 돈을 소유한 이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진다. 갤럭시 1을 향한 마음이 2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차가운 욕조의 물을 다 비운다고 따뜻해지지 않는다. 온수를 틀어 욕조 안에 부어야 한다. 물론 좋은 것을 넣어야 한다. 저녁에 방이 캄캄하다고 그 어두움을 비워낼 수는 없다. 어두움을 비우겠다고 머리를 두드리지 말고 그냥 스위치를 켜면 된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사라진다. 따라서 중독은 행복이 들어와야 치유된다.


행복
베를린에서 서울까지 경주를 한다고 하자. A에겐 KTX를 타고가라 하고, B에겐 람보지니 스포츠카를 주고, C에겐 제트비행기를 준다. 그런데 나에겐 기어도 없는 짐자전거를 타고 가란다. 공정경쟁이랍시고 너무 한다. 그래도 내가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타고 가면 된다. 시선이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무관심이다. 어떤 것도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사랑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중독은 중독으로만 치유된다. 그 행복한 중독은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을 때, 이해받을 때, 공감 받을 때 발생한다. 그렇게 사랑을 받아야 사랑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만 줄 수 있다. 그래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사실 더 어렵다. 사랑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이다. 그 사랑은 처음 자궁 안에서 경험했다. 임신 전의 여성은 모든 삶이 자신의 행복감 중심이다. 하지만 임신하는 순간 그 전의 행복감을 따랐던 자신은 죽는다. 부정된다. 머리로 하는 모든 생각이 부정되고, 손으로 하는 모든 행위가 부정되며, 두 발로 가던 모든 길이 부정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모두 부정한다. 그래서 출산 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완전한 죽음, 그 때 생명이 나온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체투지와 같다. 십자가의 형상이다. 사랑을 받은 아기만 엄마 품에서 천국에서와 같은 잠을 잔다. 사랑을 받은 아기는 평화이며, 자유하고, 안식하며 행복하다. 우리가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실제 모든 사랑은 제한적이라도 그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그 사랑을 그리워한다. 행복감의 대상들로 아무리 바꾸고 채우려 해도 그 길은 이카루스의 길일뿐이다.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 사랑을 과연 누가 나에게 줄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은 제한적이다. 사실 모성애도 본능이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 희생하지만 동일한 강도로 집착한다. 이론적으로 완전한 사랑의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신이라 부르든 예수라 부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기호는 우리의 기호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믿음을 전제하니, 보편적이긴 어렵다. 결국 선택이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몸은 흥분과 욕망 그리고 소유로만 살 수 있다. 마음은 평안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니 선택하고, 감사하라.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는 감사이다. 하루 24시간 당신 안에 있는 감사의 양을 재보면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상대가 나에게 얼마의 사랑을 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것을 얼마의 감사로 받아들이는 가가 본질이다. 스스로 응아를 닦을 때까지 천 번 이상 정성스레 닦아준 엄마를 생각해보라. 공기가 없으면 인간은 3분이면 죽는다. 자연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두 누군가가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사실 찾지 않아서, 잊고 싶어서 그렇지 세상엔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삶은 어차피 선택이다. 그 선택은 내가 원한 것이고, 난 내가 원한 삶을 산다. 행복감을 선택하면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살다 가는 것이고, 행복을 선택하면, 난 그 사랑을 받아 감사가 되어 행복을 흘려줄 수 있다. 사실 진리는 간단하다. 빛을 향해 서있는 자에게 그림자는 항상 뒤에 있고,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자에게 그림자는 항상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