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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136호] <서강논문상> 우수 논문 소개- 누구세요?가 제시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

별없는 밤의 무도회 

-<누구세요?>가 제시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 




장서란 _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부유하는 정체성

물질적 풍요로움과 가치판단의 기준이 부재하는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부조리극은 불합리속에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시한다. 루카치의 말처럼 현대는 길잡이별을 잃은 사람들의 시대지만, 두 다리를 가진 우리는 여전히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부조리극 또한 이러한 시대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현화의 <누구세요?>는 언어의 해체, 등장인물간의 의사 소통 불가능, 극의 시작부에서 나타나는 불가해한 상황이 결 말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부조리극의 틀을 지닌다. <누구세요?>는 비 내리는 날 같은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부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서로를 이방인으로 인지하고 서로를 추방하려 한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을 입증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이웃인 남자A와 여자A의 등장은 상황을 더욱 불가해하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는 극의 절정에서 가학적∙피학적인 성행위 이후에 잠시 서로를 부부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갑작스런 여자A의 등장과 함께 남자가 여자A를 아내로 인식하고 여자A또한 남자를 남편으로 인식함으로써 등장인물 중 누구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극의 중심 갈등은 남자와 여자의 갈등인데,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방편으로 전화기와 꽃병이라는 오브제와 극적 공간인 집을 택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하여 오브제와 극적 공간을 독점하려 하며, 이는 곧 서로를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관객이 판단하기로 남자와 여자는 부부 사이로 보이며, 그들은 집 안에서 그들만의 행동양식과 오브제에 얽힌 기억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부부로 인식 하지 못하는 상황은 관객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며,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인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이들의 논쟁은 1경 (극 안에서의 장)에서부터 쭉 이어지다가 남자A의 등장으로 전환을 맞는다.

남자A는 맥락상 여자의 내연남으로 보이는데, 막상 여자와 마주하고 나서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며, 이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자A는 남자와 여자를 폭력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정체성의 상실을 건 드림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동질감을 자극한다. 이후 4경 말미에서 등장하는 여자A로 인하여 남자A의 정체성은 보다 확실해진다. 남자A는 남자처럼 자신의 직업을 밝히는 데에 그치 지 않는다. 남자A는 여자A의 남편이며, 그것은 여자A의 진술로 설득력을 얻는다. 여자A 또한 남자A의 존재로 인하여 남자 A의 아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남자A와 여자A가 서로를 통해 확립하는 정체성은 집과 물건을 통하여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남자와 여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즉 남자A와 여자A의 존재는 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제 5경

<누구세요?>에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5경이다. 5경은 1경에서부터 시작되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으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날씨를 암시하는 빗소리와 함께 사뭇 진정된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1경에 서부터 비효율적일 정도로 늘어지던 논쟁의 이유가 암시된다.


여자 ....... (반짝 물기를 띠는 눈)

남자 ....... (그녀를 보는 시선이 안쓰럽다. 천천히 일어

나 다가가며) 옆에 앉으면 실례가 될까요? 여자 실례가 된다면 안 앉으시겠어요?

남자 ......아뇨.
여자 그럼 대답할 필요가 없잖아요?
남자 가까이 하고 싶어서.
여자 고의적인 실례는 악의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데 요?
남자 이해를 바라고 싶은 악의죠.
여자 이해란 강요하는 게 아녜요.
남자 전 강요당하고 싶은데요?
여자 미안하지만 난 이해를 강요해야 될 만한 일이라면

애초부터 하지도 않아요.
남자 내 이름을 한번쯤 물어보는 덴 이해를 강요할 필요

도 없을 텐데?
여자 ......? (비로소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 (그녀의 시선을 반기며) 그런 화제라도 없는 것보

다는 낫잖아요?
여자 물으면 대답해주겠어요? 남자 대답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여자 ......아뇨.
남자 .......
여자 어차피 가짜일 테니까.


여자의 마지막 말,“어차피 가짜일 테니까”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극 전체를 흐르는 불합 리와 논리에 대한 불신에서 생겼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조차 논리와 대화로 입증할 수 없었고, 오히려 대화와 논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 대한 좌절을 경험했다. 즉 여자의 말은 두 사람의 갈등은 이성에 기반을 둔 언어로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뒤집는다면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풀리는 지점은 행위(몸)와 감정의 선에서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5경의 말미에서 나타나는 남자와 여자의 사디즘적∙마조히즘적 성행위는 이전 논의에서 극의 잔혹성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시도, 자기 응집력을 회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 등 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어디까지나 남자에게만 초점을 맞춘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설명하는 아내의 악어 핸드백은 부유함을 나타내는 오브제일 뿐만 아니라 남 자에게 있어서 아내와 동일시되는 공포의 대상이다. 악어 핸드 백이 삼키는 물건은 손거울, 크림, 화장지, 피임약, 묵직한 곗돈이다.이때 피임약과 곗돈을 통해서 남자는 아내에게 성적∙경제적 위축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남자는 깨진술잔으로 다친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희열을 느끼며, 그 피를 자신의 몸에 묻힐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묻히며 여자를 욕망한다고 말한다. 피는 온전히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상징되며, 이성과 논리를 통하여서는 찾을 수 없었던 정체성을 남자는 자기 자신이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피-를 통해 발견한다. 여자에게 피를 묻힘으로써 남자에게 아내는 공포의 대상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디즘 적∙마조히즘적 성행위로 인하여 극은 절정을 향한다.

마조히즘적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타인의 욕망의 자율성 또한 부정되어 사라져야만 한다. 마조히스트는 동일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성취한다. 즉 마조히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는 권력과 권력의 부재가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조히즘은 욕망의 파괴와 그로 인한 권력의 획득, 이항대립의 차이 거부, 차이의 부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5경에서의 사디즘적∙마조히즘적 성행위로 인하여 6경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부부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말다툼 끝에 여자가 밖으로 나간 사이 여자A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남자는 여자A를 아내로 인식하고 여자A 또한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인식한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간 후 밖에서는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차임벨을 울리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극은 막을 내린다.

결국 어떠한 관계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며,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상황만이 남는다. 누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나타나지 않으며, 일대다의 관계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극의 순서와는 달리 근거도 인과관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나타난다. <누구세요?>에서는 극에서 가장 넓은 범위의 기능을 갖는 언어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언어에 대한 믿음이 축소됨을 보여준다. 언어는 모든 다른 기호 체계를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우의 언어는 관객의 상상에 인지 가능한 것을 전달하는데, 대사를 통한 맥락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보중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인물에 대한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언어 기호-대사에 대한 믿음은 줄어들고, 준언어적 기호와 몸짓 기호, 배경과 오브제 등과 같은 다른 기호들에 대한 믿음이 중요시된다고 할 수있다. 6경에서 잠시나마 논리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이유 또한 대화가 아니라 5경에서 나타나는 두 사람의 성행위, 몸짓 기호에 의한 것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논의를 뒷받침한다.



별 없는 밤의 무도회

앞에서 <누구세요?>는 불합리하기에 부조리극을 전형을 보인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극에 나타나는 불합리와 언어에 대한 불신, 정체성의 혼란은 무대밖의 관객에게 있어서 오히려 현실로 다가온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 할 때,이름과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꾸만 주변의물체-오브제에 기대어 나를 증명하려고 하나 오브제는 유일하지 않으므로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하며, 마찬가 지로 타인 또한 나를, 타인을, 또 다른 타인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유일한 관계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나 자신을 규명하지 못하기에 타인과의 의미있는 관계 또한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은 타인이어도 좋고, 또 다른 타인이어도 좋은, 그러므로 아무래도 좋은 관계가 지루한 왈츠처럼 계속해서 반복됨을 이미 현실에서 관객들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의 표류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걸어갈 것이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아도 집 밖에서는 빗줄기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해가 뜬다. 남자와 여자A가 애써 획득한 정체성을 다시 무너뜨려도 문밖에 서는 여자가 차임벨을 울리며, 정체성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이성과 언어 반대편에 있는 감성과 행위의 극한까지 달려가는 투쟁이 치열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누구세요?>는 별 없는 밤의 무도회이다. 끊임없이 짝을 바꾸어 가면서 나와 타인의 바닥을 더듬는 이야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