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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6호] 세계화 시대와 소외된 노동

세계화 시대와 소외된 노동



임경석1) _ 한양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 



들어가는 말

인간은 생존과 관련된 결핍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을 변화시키는 일체의 행동인 노동(Arbeit)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노동이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행동을 의미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노동은 거미나 꿀벌의 뛰어난 건축행위가 지니는 맹목적인 생존본능의 차원을 넘어 맑스의 지적처럼 그 자체안에 노동과정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 자아실현의 과정이자 공 동체적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그 무엇이어야 할까?

고대의 노동은 적어도 여러 부족의 공동체 의식이나 집단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례활동으로서 신화적이며 생존 에 절박한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군사, 예술, 법률, 도덕 등의 여러 분야들과 혼융되어 개인과 집단의 연대를 제공 하는 총체적 활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노동은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생산, 유통, 분배, 소비 및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순환의 토대이자 무한욕구를 충족시키는 재화 와 용역의 공급을 통해 창출되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능하는 모든 것만을 포함한다. 더구나 언제부턴가 현대인에게 노동하면 유급 노동만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노동의 의미를 지나치게 협소화시켰고 인간적인 욕구의 증대와 여가와 놀이의 즐거움을 배제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타적 노동관을 극복하려는 포괄적 노동은 임금이나 봉급의 형태로 지불되는 유급노동이건, 가사 노동이나 그 밖의 돌봄 노동의 경우처럼 무급노동이건 간에 정신적∙육체적인 노동력의 제공 일체를 포함할 수 있는 보다 확장된 행위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현대인에게 노동은 생필품을 제공하는 생계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케 하는 다양한 생활과 유희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나아가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연대의식의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은 새로운 대인관계나 문화교류의 접촉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 자신으로 하여금 수행하는 업무에 대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긍심과 다층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노동 개념의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이 어떤 노동의 수행과정을 통해 바람직한‘자아실현’을 성취하고‘자기소외’의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비교적 간소한 물음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현재 인류는 첨예하게 대조되는 낙관론과 비관론의 두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가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긍정적인‘낙수효과’를 통해 제품 원가를 저렴하게 하고 소비자의 수요증대를 촉진하는 선순환의 구조속에서 세계화된 시장이 블루오션을 만들어 냄으로써 모두를 위한 보다 많은 일자리의 창출과 안락한 삶을 제공할 것이란 장빛의 청사진을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노동하는 절반 이상의 지구인이 이제까지 체험해 온 삶의 현주소는 불안정, 저임 금, 빈곤, 실업, 절망감, 일방적 성과사회가 야기한‘피로사 회 ’이. 금와 흙저 의 갈등 은 물론 해당 사가 도달한 수준에 따라서 노동 수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하는 다수는 노동력을 꾸준히 제공함에도 불구하고‘제로섬 게임’으로 인해 식량, 주거, 교육, 의료, 문화 등 기본적 필수재화와 용역들의 혜택조차 배제되며 그 접근권의 간극도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가당면한 과제는 어떠한 합당한 노동정책을 제안하고 실현 가능한 치유책을 제시하느냐의 여부이며, 이에 따라서 향후 인간의 조건인 노동의 의미는 축복 혹은 저주로 다가올 것이다.


맑스의‘소외된 노동’

칼 맑스(Karl Marx, 1818-1883)에 따르면, 노동이란“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Stoffwechsel)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과정”으로 지적 활동과 제작된 도구를 가지고 인간적인 욕구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총체적 행위이자 자기 실현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적인 욕구가 바람직한 노동의 의미에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맑스의 사후에 출간된 청년기 대표작인『경철수고(1844)』에서 노동의 4가지 소외국면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코뮌공동체의 윤곽을 만나 볼 수 있다.

첫째로‘노동 생산물에 대한 소외’의 측면을 살펴보자. 노동은 확실히 부자에게는 경이적인 궁전을 만들어 내지만, 노동자에게는 가난한 오두막집을 만들어낸다. 노동은 사치와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궁핍과 추한 모습을 생산한다.

노동은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인 노동판으로 내몰고, 또 다른 노동자는 기계로 대체한다. 노동자는 부자를 위해서 지성을 낳으나, 노동자 자신에게는 저능과 백치를 낳는다.

둘째로 노동자는 노동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결코 자기만족을 느끼지 못하고‘생산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 는 작업과정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로 인해“시련으로서의 활동, 무기력(Ohnmacht)으로서의 힘, 거세로서의 생식, 노동자의 고유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가 노동자 자신에게 반대되고, 독립적이고, (...) 본질의 소외”마저 느끼게 된다.그러므로 노동자는 그가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편안함을 느끼지만, 그가 일을 할때에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자유노동(freie Arbeit)이 아니라 강제노동(Zwangsarbeit)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은 외부적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노동을 통한 전인적인 인본성의 실현과 대비되는 노동행위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노동활동에서 자아실현을 희망하는 자율적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셋째로‘유적본질(Gattungswesen)로부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연대적 삶의 실현 가능성을 무한경쟁을 통한 이기적 삶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육체를 소외시켜, 그것을 인간 밖에 있는 자연처럼, 인간의 정신적 본질 즉, 인간의 인간적 본질인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하지만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아 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나와 너의 상호관계성을 토대로 동료 인간과 협력적으로 살아가는 유적 존재일 때 비로소 비유기적인 자연과의 교류 속에서 동물의 집단생활과 달리 창조적 활동과 의식적 생명활동을 영위하는 인류로 존재할 수 있다.

끝으로 인간이 자신의 노동생산물, 자신의 생산 활동, 자신의 유적본질로부터 소외되는 직접적 귀결은‘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이다.“인간이 자기 자신과 맞서게 된다면, 타인도 그와 대립하게 된다. 자신의 노동, 그 노동의 생산물,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타당한 것은 곧 타인의 노동과 노동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의 관점은 청년 맑스의 초기 자유 방임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낭만적인 비판적 관점으로만 평가되어선 안된다.그의 소외된 노동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문명사는 이른바 인간의 노동을 통한 인간의 생산물에 다름 아니다. 맑스는 인간 노동의 여러 단계를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처음 노동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속해있고 자연적 필요에 속한 상태이므로 아직 소외가 발생 할 수 없었던 원시공동체의 단계로부터 주인과 노예의 노동으로 분리된 고대사회를 거쳐 영주나 귀족과 분리되는 농노와 부역에 의존한 중세사회에서 본원적 축적을 통한 자본과 노동의 분리 단계인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이행과 관련된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모순을 주목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시장에서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이란 상품이 지니는 잉여노동의 가치 때문에 그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공정한 교환과정이 아닌 생산과정에서의 모순적 착취가 발생함을 맑스는『자본』의 곳곳에서 밝힌다.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망에서 개혁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 두 계급간에 점증하는 적대감인 계급의식을 통해 혁명의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소외된 노동의 네 국면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탈소외된 노동공동체를 실현하려는 해방된 세계건설의 완성과제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맑스는 소외된 노동의 제반 과정을 종식시키고 인간적인 해방을 실현하려면,“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인 그런 결사체(Assoziation)를 실현하기 위한 품위있는 노동세계로의 이행이 필요함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있어서 노동은 그러므로 필연성의 왕국에 속하는 수단적 삶의 요소가 아니라 자기실현, 주체의 대상화, 실질적 자유와 같은 목적의 왕국을 건설하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소외가 종식된 사회에서 노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분명한 한 가지 점은 노예노동, 부역, 임금 노동처럼 강제노동에 대비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무노동 (Nicht-Arbeit)이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코뮌공동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맑스는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무노동의 나타함과 결핍사회를 경고하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창조적 자유노동을 실현하는 코뮌주의 사회의 특징으로1) 노동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할 것과2) 과학적 성격을 띠는 노동을 통해 개인에게 자유 시간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의 충분한 자아발전과 자본주의를 능가할 수 있는 노동생산력이 유지되는 자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꼽았다.


경제적 세계화의 추세

지난 세기말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되었고 신자유주의는 현혹적인 구호로 다가올 삶의 목표에 대한 막연한 청사진만을 제공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불평등한 축적에서 발생한 빈부격차, 불경기, 공황 그리고 대량실업이나 사회불안정의 문제를 저지하기 위한 자본주의 그 자체의 탐욕을 해결할 묘책이 부재한 상황이다. 오히려 1997~98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월가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진 일인 점령시위는 1대 99로 상징되는 암울한 지구촌의 소외된 노동의 현실만을 상기시킬 뿐이다. 특히 경제적 세계화는 금융자본의 무한경쟁 속에서 기업의 인수와 합병, 통합, 구조조정, 효율성, 이윤의 확대만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전체 작업장에서도 평생직장의 의미보다는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과‘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무시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이중고용시스템(two-tier system of employment)의 한 가운데에서 세분화된 비정 규직(임시직, 계약직, 파트타임)의 양산만을 조장하는 승자 독식의 문화가 판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초국적 기업의 경계 파괴와 확산되는 이주 문제는 21세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측되며, 이 점은 향후보다 독립적인 상세한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현재 초국적 기업들은 엄청난 양의 재화와 용역을 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생산하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컬 차원에서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수십 억의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 국가의 차원에서 안정적 일자리가 창출되도록 노력하면서 점증하는 이주자의 물결과 외국인 혐오증을 막는 것이 향후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세계화가 주목해야할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에 산업화된 국가들이 지속가능한 공동번영의 과제를 주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확장된 입장의 견지가 요구된다. 첫 째로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통해 이룩한 생산성의 결실을 노동하는 인류 모두의 복지를 위해 함께 공유하고 (재)분배해야 한다. 둘째로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이나 국민국가의 충성심을 요구하는 협소한 애국심을 넘어서서 하나뿐인 지구를 보존하려는 세계 시민으로서 인류의 공동운명을 함께할 연대감의 확산에 정책적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가간의경제력의 차이나 투자능력, 저축수준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무역이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면서 개방 압력을 통한 국가 간의 예속, 금융자본의 만연, 생태 계의 파괴 등 승자독식의 폐해로 인한 반세계화의 투쟁을 불러오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적 세계화를 배경으로 본 한국사회의 소외된 노동의 국면들

우리 사회의 노동과 관련된 직업 추세는 지난 60년 동안 일차 산업이나 이차 산업이 급격히 쇠퇴하고 삼차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급변했다. 블루칼라가 차지하는 직업 비율보다 도소매, 부동산,보험, 금융, ICT분야 등 각종 서비스분야의 화이트칼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무역규모도 1조억 달러를 돌파한 산업국가로 변모했다. 이러한 고도성장의 결과 1953년 불과 69달러였던 1인당 국민 소득도 3만 달러에 다가섰고, 비투자나 초고속 무선인터넷, 모바일 보급률에서도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런 수치만으로 볼 때 60년 간 연평균 7.6%의 고도 성장률을 이뤄왔고 앞으로도 최소 성장을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기반으로 한 산업, 가정, 주거, 교육, 생명, 보건, 안보, 사회문제, 환경과 생태계 등과 관련된 평범한 한국인의 삶의 전망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가족노동은 맞벌이 부부가 증가했음에도 가계부채의 비율은 이미 170%에 다다르며 그 액수도 1,200조 원을 넘어섰고 물가상승률과 부동산, 전∙월세의 고공행진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공교육의 실종과 과도한 사교육비의 부담 및 대학학자금 대출로 인한 사회 초년생들의 빚 부담이나 신용위기는 다른 원인과 함께 늦은 결혼과 저출산의 문제로 연계되고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층의 복지안전망 부재, 인구의 빠른 고령화와 높은 자살률, 묻지마 범죄를 비롯한 생계형 범죄율의 증가, 후퇴하는 행복지수, 세계 최하위권의 성평등 지수 등 절박하고 어두운 시대의 국면들로 넘쳐나고 있다. 정치권의 동반 성장과 복지사회의 이념적 강조에도 불구하고 대기업과 중소 기업, 상업부문별, 고용구조 및 소득의 양극화 문제는 이미 고착되어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 자동화와 매우 복잡한 분업체계, 그리고 증대된 업무 간에 수행되는 촘촘한 상호의존성의 추세 강화와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 불안정, 전 방위적“실업”과 정규직 일자리의 감소 및“프레카리아트 (precariat)”의 증대와 같은 맑스적 의미의 소외된 노동의 특징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회 변동의 추세는 다양한 유형의 노동자와 예비노동자들에게 취업과 실업 및 해직과 관련된 심대한 압박감을 체험케하고 있으며 향후 인간적인 노동과 연대적인 작업장의 실현에 대해 암울한 전망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도 이제 비록 기준에 대한 명확한 합의는 없지만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 노동정책의 달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그 출발점은 모두의 노동, 욕구, 향유의 조화로운 협력을 보장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동시간의 단축과 더불어 기본소득(basic income)과 같은 생존권 보장정책의 도입 및 바람직한 양성평등을 촉진하고 연대적이고 지속가 능한 지구촌의 공존능력에 기여하기 위한 연대정책적인 대안들의 토론을 통해 찾아야 할 것이다. 





1) zxmoz3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