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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7호] '즉각적 대안'의 위험성, 여정으로서의 대안찾기

'즉각적 대안'의 위험성, 여정으로서의 대안찾기

 

 

강남순 _ 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대안찾기’의 선행조건


인간은‘지금’보다 나은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무엇이 지금보다 나은 세계인가는 개인들이 지닌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물론 각기 다르다.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보다 나은 세계’의 표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개인의 삶에서든 사회적 삶에서든 기존의 세계는 늘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완전한 세계’는 언제나‘아직-아닌-세계’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지금보다 나은, ‘아직-아닌-세계’를 꿈꾼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는 그의『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에서,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인간의 꿈을‘낮꿈(daydreams)’이라고 명명한다. ‘낮꿈’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은 무수한 변화와 변
혁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는‘낮꿈’을 꾸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막연히 꿈만 꾼다고 해서 그것이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막연한 꿈꾸기는 몽상에 머물면서 구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낮꿈’이란 그 꿈을 통해서 지금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혁적 실천이 동반되는 꿈이다. 많은 이들이 찾고자 하는‘대안들’은 바로 이러한 변혁적인‘낮꿈’의 결과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지금보다 나은 미래 세계를 위하여 지금의 문제구조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가.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지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 비판적 성찰은 기존의 현실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고, 무엇이 변화되어야 할 문제들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사안들에 대하여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모든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비판적 문제제기가 결여된‘대안’이란 대부분 권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득확장을 위한 현상유지적인 장치일 경우가 많다. 차별과 배제를 은밀하게 가리는 현실구조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층적인 비판적 분석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정의, 평등, 권리의 원을 확장하기 위한, 변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모든 이들의 정의, 평등, 권리의 확장’이라는 관점을 가진 비판적 성찰과 문제제기를 통해서, 다양한 근거에서 사회의 주변부로 살아온 사람들이 정의와 평등의 적용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특정한 정황에 대하여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할 때, 그러한 비
판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묻는 것은,‘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타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그 내용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냉소적으로 작동되는 이유는, ‘대안 찾기’ 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려는 진지성이나 적극적 개입의 의지가 결여된 채 던져지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오히려 스스로를 향해 진지하게 묻는 것일 때, 질문의 중요한 의미가 살아난다.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우선 현실의 복합적인 구조에서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분석해 내는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비판적 문제제기는 새로운 대안찾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대안’은 없다


개인적인 삶이든 사회정치적 삶에서든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 누구도 모든 정황에 맞는 보편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삶에서조차 자신이 아닌 타자가 제시하는 대안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소위 유명인사들이 쓴 자기계발서나 힐링서들이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 항목에 들어가곤 한다. 물론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책들의 저자들이‘나’를 대신해서 나의 삶을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저자들이 나의 이 삶에서의 갈망, 희망, 이루고 싶어 하는 것들 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또는 모든 정황에서 작동하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대안’이나 해답은 없다. 이러한 보편적 대안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적 사유의 결정적 한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지점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들어 맞는 보편적 대안이나 절대적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러한 대안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이다. 그 보편적 대안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거대 서사 (grand narratives)’이다. 보편적 대안으로서의 거대서사는 많은 경우 이미 이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강화시키고,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에 기여해왔다. 아이,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경제적 빈곤층들이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오게 된 이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인간의 자유와평등에 대한 비전이 이러한 거대 이론들이나 보편 대안 담론들에 의하여 진정한 의미의 자유나 평등을 실현하는데에 스스로 근원적인 오류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유럽이 만든 이 세계를 위한 보편 대안으로서의 거대 담론들은 결국 유럽, 남성, 중상층, 기독교인들을 세계의 중심에 서게 했다. 더 나아가서 비서구 세계를 자신들이 만든 기준으로 ‘개발’시키고, 기독교로‘개종’시켜야 할‘미개인들’로 간주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 모더니즘은 서구 식민주의와 분리할 수도, 분리해서도 안 된다. 모더니즘은 거대이론들로 구성된 소위‘보편 대안’들에 의하여,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이상을 스스로 배반하는 모순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거대서사로서의‘보편 대안’들이 약자 들에 대한 식민화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와 같은 보편 대안에 목마른 사람들은 자신 밖의 외부세력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용한다. 현대세계에서 발생하는 나에 대한 타자의 식민화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쉽게 인식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스스로 사유하는‘고독의 시간과 공간’가지기를 회피한다면, 외부세력이 (그것이 사람이든, 대중 매체이든, 사회나 국가든) 나를 대신하여 내 삶의 방향과 대안을 결정하게 하는‘식민화’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스스로 사유하고, 읽고,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고 씨름하는 과정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황과 연계된 대안의 실마리를 조금씩 찾아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출처: 아이클릭아트)

 


대안의 세 가지 요소
정치, 사회, 종교, 또는 우리의 윤리적 책임 등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많은 경우‘거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거시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각자는 자신이 관여하고 개입되어 있는 구체적인 정황들에서 그 대안들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가야 한다. 대안 찾기란 매우 치열한 분석, 고민, 그리고 씨름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이론은 연장 상자’와 같으며, ‘이론은 실천(theory is practice)’이라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통찰은 새로운 변화된 세계를 갈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이 늘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모토가 된다. 이는 이론과 실천을 이분
법적으로 보는 전통적인 이론이해를 근원적으로 뒤집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을 분석하는‘연장’으로서의 이론들을 통해서 현실세계에 대한 다층적 문제제기와 비판적 저항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한 비판적 저항은 복합적 이론들을 통해서 가능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는 집단에서 종종 보게 되는‘반(反)이론주의’는 오히려 그 변혁운동을 폭넓게 확산시키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은 저절로 가능하지 않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분석적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해서 저절로 다층적 성차별이나 가부장제적 가치구조를 아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 거부감을 느끼고 오히려 반대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 중에는 여성들이 많다. 그러한 여성들은 가부장제적 가치를 내면화함과 동시에 그 구조에게 살아남기 위한‘생존의 테크닉’을 체현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는, 식민지하에서 억압의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
두가 그 억압적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착취구조의 문제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급한 대안요구 이전에 비판적 문제제기들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게 되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비판적 저항이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문제를 문제로 보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대안 찾기의 첫 발걸음이 시작된다. 비판적 저항과 문제제기 이후에 발견되는 대안은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닌다.
첫째, 대안은 언제나‘정황 특정적 (context specific)’이다. 여타의 대안들은 구체적인 자신의 정황 속에서 구상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특정한 정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크고 작은 대안들과 장기적 또는 중단기적 대안들을 끈기있게 모색하고 찾아 나가야 한다. 대안이 특정한 구체적 정황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삶만이 아니라, 개별인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유명 인사가‘인생의 해답’이라고 제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모색하는 길과 맞는 것이 아니다. 자신 스스로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찾고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사유란‘내가 나와 대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비판적 사유는 고독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자신과 진정한 대화를 하면서 그 속에서 비로소 현재를 넘어서는‘대안’의 갈래들을 조금씩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개입하고 있는 집단의 특정한 정황 속에서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가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발걸음을 한걸음씩 떼는 것이다. 둘째, 대안은‘잠정적’이다. 그 어느 위대한 대안도 평생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오늘 찾은 대안이라고 해도 그 대안이 내일도 작동되는 유효한 것이 아닐 경우들이 많다. 왜냐하면 모든 대안은 특정한 정황 속에서 모색되는 것이며, 정황이란 고정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 대안의 잠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화된 오늘의대안은 새로운 가능성의 등장을 오히려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수 있다. 또한, 한 기구나 운동집단에서 오늘 작동되는 하나의 대안을 영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될 때, 다른
가능성과 대안들을 억누르는 또 다른 권력 장치로 변질될 수 있다.
셋째, 대안은‘부분적’이다. 인간의 인식론적 또는 경험적 한계성 때문에 우리의 모든 대안은 언제나 부분적일 뿐이다.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는 인식론적 겸허성은 한때 자신이 찾았던 대안에 자신을 매어 놓는‘대안의 감옥’으로부터 갇히지 않게 만든다. 어떠한 대안이라도 그것은 ‘완벽한 대안’이 아니라 언제나‘부분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자기 절대화의 위험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나의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나의 성공이나 행복의 기준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준 규격 속에 넣는다.그리고 그 규격화된 기준에 자신이 들어맞지 않을 때 열등감 속에 시달리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그런데 이러한 규격화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의 문제점은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볼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낮꿈’을 꾸면서 다양한 양태의 사회변혁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유사한 문제와 딜레마를 마주하곤 한다. 바로 그 운동의‘성공’또는‘실패’를 외부에서 규정한 기준에 맞추는 경우이다. 개인들이 서로 각기 다른 것처럼, 다양한 운동단체들은 각기 다른 정황 속에서 자신들의 성공이나 실패의 기준을 스스로 논의하고 규정해야 한다. 한 집단의 커다란 목적이 다른 단체와 유사하다고 해도, 각 단체는 그 단체만이 지닌 고유한 정황이 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운동 단체들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 그리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스스로 고민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사회에만 회자되고 있는 특이한 신조어들이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를 의미한다는 3포 세대로부터 시작하여, 5포 세대, 7포 세대,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N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신조어들은 한국 사회의 소위 청년층이 지닌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신조어가‘청년층’일반을 대변한다고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우선‘청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 생각, 열정, 기대들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동일한 생물학적 나이 또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매뉴얼에 따라서 작동되는 기계가 아니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간다. ‘N포 세대’와 같은 신조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신조어는‘냉소주의’를 확산시키며, 책임적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현실 세계의 구체적 데이터들이 암흑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도, 인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틈새 공간들에서 대안들을 찾으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한국사회에 무차별적으로 만들어지는 신조어들의 등장에 대하여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신조어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은 냉소주의의 확산을 도울 뿐, 유일한 존재로서의 개별인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다층적인 대안 모색의 시도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외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행복과 성공의 기준을 만들어 가야 한다. 또한‘현재의 나’만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나 (becoming-I) 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가능성에 대해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성급하게 즉각적 대안을 찾으려 하지 말고, 끈기 있고 치열한 비판적 성찰을 통한 문제분석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자기의 삶에서 필요한 대안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