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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9호] 기고 -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보고

 

 

박효진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지난 9월 보건복지부는 불법 임신중절수술을 한 의료인에 대해 12개월의 강력한 자격정지 행정처분을 하는 입법예고안을 냈다. 이에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검은 옷’을 입고‘낙태죄 반대’를 외쳤다. 이‘검은 시위’는 10월 3일 폴란드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뺏긴 것에 애도를 표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폴란드 뿐 아니라 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등 카톨릭 국가들에서 낙태죄를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다. 낙태죄는 단순히 산모의 임신중단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출산율 장려 정책, 종교계의 권력, 의료 및 의약품계의 이해관계 등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낙태를 둘러싼 이러한 다양한 갈등 요소들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낙태가 법적으로 전면 금지된 차우세스쿠 독재정권 시절의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루마니아 정부는 부국강병이라는 기치 아래 출산율 장려를 목적으로 극단적 낙태금지법을 시행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모든 낙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임신중절술을 시행한 의사와 산모 모두 적발되었을 시 10년이상의 징역형을 살아야 했으며, 심지어 콘돔, 피임약 등의 피임기구들도 국가에서 몰수하여 철저히 금지했다. 1966년 시행된 이 법은 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무려 23년간 지속되었다.

 

 


아이를 기를 형편이 안 되는 상황에서 태어난 많은 아기들이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고아원 등 시설에 맡겨졌고, 이는 심각한 영양결핍과 유아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 또한 불법 낙태시술로 인해 매년 500여명의 여성이 출혈과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1983년의 모성 사망비는 66년에 비해 7배 높아졌다. 이는 주변 국가인 불가리아나 체코보다 약 9배 정도 높은 비율이었다. 89년 낙태금지법이 철폐된 이듬해 모성사망비는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평범한 공대 여학생인 오틸리아다. 그녀의 기숙사 룸메이트 가비타는 뱃속에 4개월 하고도 3주가 지난 아이가 있고,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의사로부터 불법 낙태 시술을 받기로 되어 있다. 오틸리아는 가비타에게 낙태수술비를 빌려주고, 시술 장소인 호텔에 같이 간다. 의사는 자신이 징역을 살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을 단 돈 몇 푼에 해 줄 수 없다며 둘이 차례로 자신과 섹스를 하지 않을 거면 수술은 없던 일로 하겠다고 협박한다. 호텔비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미 여기저기서 돈을 꾸었을 뿐 아니라 하루하루 지체될수록 수술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둘은 어쩔 수 없이 의사의 협박에 응하고 만다.
가비타가 아닌 오틸리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는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만든다. 임신한 가비타가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부모님도, 임신시킨 남자도 아닌 친구 오틸리아였다. 국가의 인구조절정책, 낙태금지법, 임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남성 사이에서 오로지 불법이 되는 것은 여성의 몸이고, 이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여성들이다. 오틸리아 역시 언젠가 자기가 원치 않는 아이를 갖게 된다면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은 가비타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몸의 통제권을 뺏긴 여성들은 성폭행이나 고소, 협박 등으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하다. 가비타가 오틸리아와 나눈 고통과 두려움, 죄책감은 오롯이 배가 되어 돌아와 이들의 어깨를 짓누를 뿐이다.

오틸리아는 방금 수술을 마친 친구를 호텔에 혼자 두고 어쩔 수 없이 잠시 남자친구 어머니 생일파티 자리에 참석하게 된다. 어른들 사이에 낀 오틸리아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그저 불편하게 자리를 지킨다. 중년 남성들은 처음에 오틸리아에게 몇 가지 의례적이고 짐짓 무례한 호구 조사를 한 뒤엔 계속해서 의회 이야기, 정책 이야기, 경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그러자 한 여성이“정치적인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핀잔을 두며 부활절 달걀을 예쁘게 색칠하는 방법 같은 일견 사적인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무 의미 없이 삽입된 장면이라기엔 너무나 긴 일상적 대화가 식탁 위에서 오고 간다.

오틸리아가 방금 한 경험은 저녁 식사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이야기일까? 누군가의 낙태 경험은 정치적인 이야기일까, 사적인 이야기일까? 출산율과 태아의 생명권은 너무나 중요하고 공적인 문제이지만 섹스와 피임, 임신, 출산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일이며 사적인 일이고, 게다가 낙태는 영원히 숨겨야 할 비밀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논하는 데 있어서 정작 여성의 경험, 여성의 목소리는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의 몸은 국가와 종교, 의료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의 전쟁터다. 가비타와 오틸리아의 경험은 가장 사적인 경험이면서 정치적 이슈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기치인“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폴란드 여당 법과정의당은 낙태 전면금지법안을 폐기했다.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기존에 12개월로 설정했던 입법예고안의 형량을 1개월로 낮추었다. 여성들의 절실한 목소리가 조금씩 세상을 움직인다.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여성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하기 이전에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라는 것. 여성의 몸의 주체는 여성이며, 그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본권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