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

[139호] 서강논문상 - 英祖의 對民詢問活動과 그 정치적 의미

英祖의 對民詢問活動과 그 정치적 의미

 

 

주채영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석사 졸업

 

 

‘詢問’이란 일반적으로 임금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질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왕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순문은 빠질 수 없는 정치 행위였다. 그렇지만 영조 대에 이르면 순문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 순문의 대상이 관료에서 백성으로 확대되었다. 영조는 능행길에서 백성들에게 농사의 형편을 묻거나 궐문 밖에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생활상을 알아보았다.

조선 초부터 국왕은 民意를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문고를 설치한다거나, 擧動할 때 上言이나 擊錚등의 방법을 이용했다. 왕의 궁 밖 출입이 드물었던 조선 후기에 영조는 유난히 궐 밖 출입도 잦았고, 백성들과도 많이 접촉했다. 영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백성들을 불러 ‘순문’했다. 궐 밖으로 출입이 많았기 때문에 이미 선대왕들에 비해 대민접촉의 기회가 많았음에도, 영조는‘순문’의 대상을 관료에서 궐 밖의 백성으로 확대했다. 백성을 대상으로 한 순문은 영조 재위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관료가 아닌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순문을 행한 것은 영조가 처음이었다. 충분한 대민 접촉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문의 대상을 民으로 확장한 영조의 의도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이 연구에서는 상언과 격쟁 등에도 적극 응하던 영조가 특별히 백성들에게 순문을 실시한 정치적 의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본 연구에서는 愛民∙爲民의 레토릭 뒤에 숨은 ‘정치 전략가’영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Ⅰ. 英祖의 對民詢問추이
영조는 즉위 초부터 종묘나 능으로 자주 행차했기 때문에 민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에 幸行에 나선 대가 앞에 서얼 260명이 난입하여 서얼 허통을 주장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영조는 궐을 나설 때면 으레 상언이나 격쟁을 장려했으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재위 원년(1725)에 懿陵에 다녀오다가 양주의 노인을 불러 직접고을의 폐단을 물어보았다. 이것이 민을 대상으로 하는 첫 순문이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중 총 129회에 걸쳐 순문을 실시했으며, 순문의 내용 및 대상, 순문의 장소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영조의 대민순문 초기는 능행길에 만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農形을 파악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대민순문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는 국정 운영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良役變通논의에 등장한 대민순문이었다. 영조는 재위 26년(1750), 100여 년간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양역변통 논의에 대해 전격적으로 대민순문을 실시했다. 이때는 양역변통에 대한 논의가 정점으로 치달을 때였다. 양반 엘리트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논의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영조는 홍화문 밖에 士庶人을 불러 모아 놓고, 양역변통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이를 통해 영조는 균역법 실시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영조가 균역법 시행과 관련하여 실시한 순문이 최소 4회였다. 균역법에 대한 논의가 완료되자, 영조는 이듬해 바로 새로운 정책 과제인 濬川문제를 제기하는 등 주제를 바꿔가면서 순문을 계속 실시했다.
영조 28년(1752)에는 순문의 대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 貢人과 市人이 순문의 대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신분(士庶人) 혹은 지역민(방민, 경기도민, 향민 등)으로 구분하던 순문 대상에 貢∙市人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영조는 공∙시인을 선화문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弊􂙰을 물었다. 이후 공∙시인을 대상으로 폐막을 묻는 순문은 총 26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영조는 재위 29년(1753)에 貢市堂上을 신설하였다. 이는 당시에 공∙시인과 관련한 현안들이 국정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준천 시행이나 공시당상의 신설 등은 당시 사회가 도시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따라서 영조는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농정뿐 아니라 공시폐막도 대민순문의 주요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영조의 대민순문은 영조의 재위말년으로 가면서 다시 큰 변화를 맞는다. 바로 湯劑進御여부에 대한 순문이었다. 영조 50년(1774)에 처음 유생과 방민을 모아 놓고 탕제를 계속 마셔야 할지에 대해 순문했다. 그리고 51년(1775)에는 총 8회에 걸쳐 탕제 진어 여부를 순문했다. 같은 해에 실시한 순문의 주제 중 탕제 진어 여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또 다른 특징적 모습은 영조의 순문에 폐막이 없다고 답하거나 천세를 외치거나 聖德頌을 부르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영조가 말년에 실시한 대민순문은 전반기와 같은 민정 파악이나 정책적 활용보다는 민을 대상으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받고자 했던 자리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영조가 행했던 대민순문의 특징을 시기에 따라 2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재위 전반기에는 민정을 살피거나 정책적인 의도를 갖고 대민순문을 실시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후반기에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Ⅱ. 英祖의 對民詢問활용 의도
영조는 경종 시해 혐의를 안고,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그를 둘러싼 정통성 시비와 충역논란이 필연적이었다. 더욱이 재위 초반기에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대기근과 무신란 등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영조는 어떻게든 민심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영조는 합문폐쇄와 전위소동과 같은 극단적 방법까지 동원하며, 신료들을 억누르고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잡고자 노력했다. 이반된 민심을 안정시키고, 자신이 구상한 정국을 운영하려면 신료들을 누를 수 있는 국왕만의 가치가 필요했다. 영조가 택한 방법은 성리학적 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군주이자 백성을 사랑하는‘愛民∙爲民의 군주 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민과 위민은 조선 건국 이래로 강조되어 온 가치였다. 영조는 이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확보해야 민심도 잡고, 신료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영조가 택한 방법은 직접적인 대민접촉을 통해서 민의 실체를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민에 대한 인식 전환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영조가 대민순문을 시작한 것도 위민과 애민의 군주 상을 자신만의 가치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순문은 거동이 아닐 때에도 궐 밖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는 민의 형편을 들을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대민순문은 위민과 애민을 추구하는 임금과 조정 관료들이 순문현장에서 민이 요구한 것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영조는 위민∙애민의 군주 상을 내세워 정책 결정의 주도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孝宗때부터 지적되어 온 양역폐단을 해결할 때에도 대민순문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중앙 군문을 강화함에 따라 군역에 대한 부담도 같이 증가했다. 그러나 군역을 짊어질 양정의 수는 줄었기 때문에 그 부담이 주변에 전가 되면서, 양정 한 사람이 져야 할 군역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 부담을 줄이는 방법은 양반층에게도 수포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반 관료층은 갖가지 이유를 내세워 이에 대한 저항을 했고, 결국 양역변통 논의는 100여 년간 성과 없이 계속되었다.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이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영조는 전격적으로 대민순문을 시도했다. 그는 백성들을 모아 놓고 양역변통의 방법에 대해 질의했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답했다. 영조는 이 자리에서 조정 관료들에게 그동안 실체 없이 다퉈왔던‘민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양반 관료층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백성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할 명분이 없어졌다. 영조는 위민∙애민의 명분 싸움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민의 존재를 소환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영조 재위 전반기에 행한 대민순문의 특징은 경전 속에만 존재하던 민을 실제 정치 현장으로 불러냄으로써, 위민과 애민의 가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이 가치를 이용해 정책 결정과정에 활용했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영조 재위 후반기는 국왕권 강화를 과시할 수 있는 전시성 정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영조는 의례나 의장을 정비하여 국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고, 궁 밖 행차나 거둥 등을 국왕의 위세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대민순문 활동에서도 유사한 모습이 나타났다. 즉위 후, 38년 동안 행한 대민순문이 총 46회였는데, 壬午禍變이후 親政에 복귀하여 진행한 대민순문이 83회로 거의 2배에 가까웠다. 주제나 대상에서는 농형과 공시폐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전반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의 순문에 임하는 민의 태도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공∙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순문에서‘폐단이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여전히 공∙시인들이 관료 혹은 종친들의 폐행으로 고통 받는 현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반응은 영조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무렵 영조는 걸핏하면 대신들을 책망하고 나무라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사전에 순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답변을 조율했을 가
능성도 있어 보였다.
재위 후반기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위민이나 애민활동과는 전혀 관계없는‘탕제 진어 여부’가 순문의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영조는 재위 50년(1774)과 51년(1775)에 유생과 방민들을 불러 모아 놓고 탕제 진어 여부를 여러 차례 순문했다. 탕제 진어 여부에 대해 묻는 자리에서 천세를 부르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탕제는 임금인 영조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재위 기간 내내 君父의 모습을 추구했던 영조였다. 부모의 건강을 위해 탕제를 들기 간청하는 자식의 모습으로, 순문 자리에 모인 민들은 영조에게 탕제 마시기를 권했다. 영조는 이 자리를 통해 군부의 모습을 민에게 확인 받았다. 이 무렵 대민순문은 이전과 같이 민정을 살피고 정책의 도움을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영조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political performances)였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총감독 겸 주인공이자 성군이었으며, 민들은 그의 선정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엑스트라이자 교화의 대상인 臣子였다. 이러한 모습들은 실상 독재자로 변한 영조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고, 신료와 민의 입장에서는 그의 신경을 건드려 일어날 풍파를 막기 위해 비위를 맞추는 행위였다.
영조는 많은 약점을 안고 즉위했다. 그가 자신의 취약점들을 극복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선대왕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해야 했다. 영조가 택한 전략은 완벽한 유교적 성인군주로, 신하들을 압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위민군주의 모습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분만으로는 부족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강조되어 온 유교적 성인군주나 위민군주는 擇君을 들먹이는 신료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국왕권을 위협하는 신권에 대항하기 위해 영조는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영조는‘위민 군주 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논의해 왔던 민을 실체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 현실의 정치 무대로 이끌어 냈다. 신료들은 그동안 추상적으로 말해왔던 민의가 그들의 눈앞에서 ‘실제로 표출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영조는 위민의 가치라는 측면에서만큼은 신료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