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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9호] 촛불들의 무리 속에서 대의재현과 직접발현, 헌법구성을 사유함

촛불들의 무리 속에서 대의재현과 직접발현, 헌법구성을 사유함

 

 

 

전규찬 _ 언론연대 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진실들의 재현을 가로막는 언론(검열)게이트


 

 추상이 구체와 조우하고, 관념이 실제와 면접하며, 이론이 실천으로 연결될 때, 오직 그 변증법적 전회의 과정에서 진실은 명징해진다. 사변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인 힘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개념은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의 관문인 터, 개념화의 활동은 따라서 응당 현실이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지고 바로 그 곳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공부를 늘 현장 주변에서 해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대의’나 ‘표상’, ‘ 재현’으로 번역되는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문제는, 바로 지금 활성화된 민심대의∙진실재현의 직접행동현장에서, 촛불운동장의 어디에선가 사유되고 정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교통능력을 갖는다. 대중의 감각에 다가선다. 거리에 나선, 지금까지 성문 밖 개돼지들로 취급받아 온 시중잡인들의 생활, 의중과 통한다. 겹겹이 처진 게이트들을 뚫고 들어서려는, 행진에 나선 그런 ‘시민 아닌 시민들’과 말이다. 지금 이 떼거리들은 말 그대로 우왕좌왕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겹겹이 쳐진 게이트들을 뚫어내고 권력의 문안으로 성큼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거짓 기관을 공모자로 내치면서, 행동으로 심정을 대의하고 몸으로욕망을 재현하고 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와 같은 개인적 무력(無力)의 상황을 시위행진이라는 집단적 물리력으로 거뜬히 돌파해낸다. 대중들로부터 격리∙소외된, 교문 안 창백한 몰골의 아카데미즘을 대신해서다.

 도처에 설치된 공고한 선전의 바리게이트들을 넘어선다. 사실, <법 앞에서>라는 작품은 박근혜/국가-최순실/비선-이재용/자본의 공모관계와 뒤얽히고 그것을 안팎에서 보위코자 축조된 소위‘언론’이라는 제4의 게이트 실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어느 날 한 시골뜨기 사내가 그 게이트로, 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문지기가 딱 가로막는다. “지금은 안 돼요!”문 밖 사내가 오랜 대기 시간이 지나 임종을 맞이 했을 때, 문지기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 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만을 위한 문이었는데, 당신이 죽으니 안 됐지만 나도 이젠 게이트를 닫고 떠나야겠소..’
 이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소설에서 문은 법문(法門)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우리는 현실주의적으로 전유해, 은밀한 부정과 비리의 거래로 유착된, 공주-미실-재벌 3인조 사이의 ‘서로 주고받기’ 섭정체제를 보위하는 언론게이트로 치환할 수 있다. 대한민국을 부정과 비리, 통제와 검열의 겨울공화국으로 꽁꽁 얼게 한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설치된 추악한 제4의 관문이 존재했다. 외부의 빛이 안을 비추지 못하도록 하고, 내부의 어둠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하라! 그런 권위의 재현과 권세의 대의로써, 조작과 선전으로써, 진실을 봉쇄하고 민의를 폐쇄하는 거대 벽이 우리를 환멸에 빠트리고 있었다.
 권력에 부역하는 반언론 미디어, 스스로 권력이 된 선전미 +디어의 정확한 몰골이다. 인∙민 대중의 자율적 진실대면 노력을 진압하고, 인∙민 대중을 위한 진살탐사 책무를 사보타주1)하는 언론(검열)게이트. 우리가 민주공화국체제 붕괴의 이 사회∙정치적 재난상황에서 명료한 언어로써 분명히 드러낼 또 하나의 실재계다. 진실 탐구와 진상 규명 그리고 진심 표출을 오히려 억압∙차단해온 언론게이트, 검열게이트. 그 탄압적 ‘게이트들의 게이트’가 진실들의 재현을 가로막고 진정의 민심 대의를 하면서 기만적 언문(言門)으로 행세해왔다. 그 실체의 철거가 시급하며, 민주정치와 결부된 대의정치, 재현매체의 논의는 그 활동의 와중에 이루질 것이다.


 

‘민심’대의의 언론매체, 혹은 권력 재현의 선전기관


 사실, 대의정치의 실패를 논하는 것은 최근의 포스트주의 정치(철)학에서 하나의 상식이다. 그와 이어져, 재현 미디어의 불구성, 미디어 재현의 불가능성을 논구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통한다. 말로써 옳고 그름을 논하는 과정과 실천을 누군가 대신하거나 타자의 의견을 누가 대변하는 것에 대한 의식적 회의이자 반성의 표식이라 할 수도 있겠다. 미디어가 어떤 누군가를, 뭔가를 과연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제법 ‘래디컬’한, 철학적인 고민처럼 현학의 미디어연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비판적인 문화연구자까지 유혹한다.
 아서라.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커넥션이 야기한, 그로써 확인되는 민주공화국 체제붕괴라는 재난현실은 이런 한가한 질문의 끈을 똥칠된 현실의 밑바닥으로 확 끌어당긴다. 대중교통론을 공부하고 언론∙미디어 운동을 하는 우리를 헌정질서파괴라는 밑바닥 현실로 훅 끌어내려서는, 실제상황에 맞게 자문자답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비선-자본권력 공모의 게이트는 한국사회 내 지금까지 재현매체를 어떻게 통솔해 왔으며 매체재현을 어떠한 방식으로 통제해 왔나?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커넥션과 결부된 언론(검열)게이트는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지 않았)고, 누구의 뜻을 어떻게 대의해 오(지 않)고 있었던가?
 언론이라는 사회, 정치, 문화의 핵심 개념에서부터 다시 차분히 시작해보자. 언론이 무엇인가?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필요 없다. 그것은 말로 표명한 바를 가지고 그렇게 의견을 드러낸 타자와 더불어 옳고 그름의 윤리를 따지는 공개적 실천 행위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오직 의사를 밝힘으로써만 시민성을 담보 받을 수 있는 인∙민이라는 존재, 의견을 표출함으로써만 정치적 주체로 인정될 수 있는 시민의 천부적인 인권, 주권, 기본권에 해당한다. 헌법이 언론자유를 중시여기는 연유며, 대한민국헌법이 언론표현의 자유를 분명히 못 박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중대한 사회(연합)∙정치(활동)∙문화(구성)적 언론활동을 제대로 매개하는 것들에 우리는 언론매체, 언론기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하지 않고, 반대로 언론 실천을 방해하고 탄압한다면, 우리는 언론 대신에 그 반대말인‘선전’을 붙여 선전매체, 선전기관이라정확히규정할것이다. 혹은,‘ 검열’이라는용어를 사용해, 검열매체, 검열기관이라고 명명해도 좋다. 물론, 이 성격이 전혀 다른 매체기관은 재현방식을 완전히 달리한다. 전혀 반대의 대의체계를 지향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민주 정치의 매체가 아닌, 반민주 통치의 기관이 된다. 이게 핵심이다. 지금 중요한 건, 미디어는 여론을 대의하고 진실을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사변의 문제가 아니다. 똥 싸지르는 정권-비선-재벌 게이트와 커넥션 된 각종 매체들은 무엇의 의사를 대의하고 어느 쪽의 세계를 재현해 결국은 이 나라를 똥통에 빠트렸는지를 확실히 분별해내는 일이 남는다.

 제대로 된 여론기관은 오직 복수적 구성체로서의, 다양한 의견 및 차이나는 이견들의 복합체로서의, 사실들을 꿰매는 허구/서사의 별자리로서의, 진실만을 쫓았을 것이다. 바디우가 말한, ‘진실과정’에 늘 진지하게 임했을 터다. 목소리 작은 인∙민의 여론을 아래로부터 부양하며, 다양한 음성들을 채집해 그걸로 합리적 진실의‘민심’을 구성해낸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미디어는 이런 인∙민 위주의 진실대의∙진실재현의 언론매체와 거리 멀었다. 철저히 국가-비선-자본 커넥션을 대의하는 선전기관으로 부역했다. 공모의 게이트가 제공하는‘창조경제∙문화융성’의 환상계를 기사나 프로그램으로 재현하기 바빴으며, 나머지 세계는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비실재적인 것으로 틀어막았다. 철저한 진상은폐, 진실억압의 (검열)게이트로 부역했다.


 

선전 ‘시스템들의 시스템’ 속의 멸망한 (공영)방송


 도둑질 위해 우선 손보는 게 집지키는 개다. 도둑들은 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먹잇감을 던져주며, 말 듣지 않을 놈은 재갈을 물리거나 폭력을 행사해 죽여 버릴 것이다. 현 시국의 언론(검열)게이트를 설명하는 데 딱 어울리는 우화적 비유다. 도둑들에 맞서 공화국을 보호하고 헌법을 사수하며 그럼으로써 인∙민 주권을 안전케 할 신문, 방송이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도둑질하는 3인조에 굴복하고 회유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무력 진압되어 선전기관으로 전락했는데, 짓지 않은 똥개들은 결국 공화국과 헌법 그리고 인∙민 모두를 멸망의 위험에 빠트린다. 지금과 같은 불행한 사태, 파경의 현실을 초래한다.
 촛불은 그 대항의 진출이다. 비겁한 똥개들을 잡아라! 지금까지 대의되지 않던 성문 밖 인∙민 대중들이 직접 나서 선전기관들에 분노를 폭발한다. 진실 앞에 부복하는 대신에국가-비선-자본의 권력네트워크에 부역한 선전기관들에게 ‘당신들도 공범!’이라 선포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권력 커넥션 앞에서 찍 소리 못하는 비겁한 (공영)방송이다. 권력을 향해 꼬랑지 치고 권력을 핥으며 약자를 향해서나 왈왈대는 (공영)방송의 카메라고 기자며 이들의 기사다. 이들 주구들에게 공화국 헌법정신 배반, 민심대의와 진실재현이라는 언론인 윤리 및 언론기관 책무 위반의 죄를 단호하게 추궁한다.
 물론 언론인을 자임코자 하는 기자, 저널리즘을 실천하려는 피디들은 이미 목이 잘렸거나 자리에서 쫓겨난 상태다. 월급에 만족하는 직원, 자기 검열하는 리포터, 비겁한 ‘기레기’들만 남았다. 이들이 내부 통제기구, 외부 검열기관들과 뒤섞여 현재와 같은 진실∙민의 검열의‘기관 없는 신체’를구성한다. 『 앙띠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한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서가 아니다: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2) 딱 그런 선전 ‘기계들의 기계들’을 이룬다.
 ‘기관 없는 신체’의 설명을 위해 들뢰즈∙가타리가 책 서두에 넣은 린드너의 그림을 현 국가-비선-재벌-선전(검열) 게이트 시국에 적용하면, 공모자 또는 부역자로 명명되는 기자∙피디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기계적∙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문제다. 그 시스템을 통제∙운용∙컨트롤하는 (사람의 신체에 국한되지 않는) 몸체가 핵심이다. 누군가 싸지른 똥을 쩝쩝 먹어치우고 냄새 안 나도록 쓱쓱 청소하며 태평스레 왈왈 짓는 똥개 시스템, 바로‘그것’이 중요하다. 사람인지 기관인지 구분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선전 똥 싸기의‘시스템들의 시스템’. 그 무더기 속에 (공영)방송 또한 범벅이 되어 하나의 엔진으로 돌아갈 것이다. 민심을 대의하지 않는, 오직 권력을 재현하는 선전‘매체들의 매체’중 하나로서 말이다.

 

 

 

 사실, 우리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 이와 연루된 언론검열/선전 게이트 자체를 네트워크화한 시스템, 연속된 몸체들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연결되고 연접되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 혹은 수직∙수평적으로 교차하고 네트워크화한 시스템들의 복잡 시스템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리의 기계가 내부 인자들을 자동적으로 돌리고, 거꾸로 핵심의 인종들이 자신이 맡은 기관을 돌릴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종자들과 돌아가는 구조가 맞물려 국가-비선-자본이라는 3중의, 공주-미실-재벌-언론이라는 4각의 게이트를 시스템적으로 완성한다. 민심대의를 불구화하고, 진실재현을 불가능성으로 빠트리는 악한‘시스템들의 시스템’이다. 이 거대 신체의 진실재현 기피, 민의대의 배신의 현실의 바로 지금 우리가 따질 본질적 사정이 아닌가?

 

대의되지 못한 인∙민 신체들의 진실을 밝히는 촛불행진


 몇 만 명에서 시작해 수십만, 수백만으로 점화 중인 촛불이다. 그것은 민심을 대의하지 않고 진실을 재현하지 않은 언론(검열)게이트들의 게이트에 의해 철저히 버려지고 완벽히 기만당한 성문 밖 인∙민 대중들의 자기의사 발표에 다름아니다.‘ 이건아니다!’는 이성적 판단 하에,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정서적 결기를 쫓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윤리적 선택을 바탕으로, 청소년에서 노인까지, 노동자와 실업자를 아우르는, 말 그대로의 온갖 잡인들이 현시다. 시위현장의 직접 출석이다. 자기대의의 집단적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이다. 자신재현의 떼거리 창조행위다. 대의제가 진압되고 재현정치가 타락할 때, 그 실패와 패배를 더 이상 용인하면 역사의 패배자가 될 공화정의 주권자 다중이 국가-비선-자본-선전 권력을 거슬러 직접 자신을 대의한다. 진심을 재현한다. 바로 그런 대안의 대의정치 공간, 대항의 재현운동 시간이 광장과 거리에서 촛불로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행진하고 발언하는‘신체들의 신체’로써 현출한 대중들이다. 그런 우리가 대의기관이 포기하고 재현기구가 억압한 언론을 직접행동 방식으로 몸소 실천한다. 스스로 언론기관이 되며, 자신이 언론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거짓된 시스템들의 시스템을 전복하라! 무명의 아마추어 대중들이 진실을 발언하고 진심으로 글쓰기를 하며 진상을 밝히라 항의하는 까닭이다. 독특한 상상력과 기발한 창의력으로 자기만의 언론, 집단적인 행위예술을 실천하는 이유다. 시위는 말 그대로 자율적, 주체적 언론의 현장이다. 초딩들조차 ‘이모, 이제 제발 하야해요!’라 적은 화이트보드를 들고 청와대 앞거리에서 또래를 대의하고 또래의 진심을 재현하지 않던가?
 감동적인 대중공연, 정동의 공연대중들이다. 몸과 의식에 덧붙여 자신의 감각을 유동케 함으로써 주변의 몸과 의식과 감각까지도 함께 동요케 하라! 일파만파의 촛불. 국가-비선-자본 <그것들>의 커넥션에 대항하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그것들>의 게이트에 저항하는, 거짓 대의기관과 선전 재현기구들의 바리게이트를 넘어서는, 촛불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사건이다. 인간 자존심의 견고한 위치를 수직적으로 밝힐 뿐 아니라, 스스로 녹아내림으로써 주변을 또렷이 수평적으로 밝히는 촛불시위의 정치미학. <그것들>의 공모관계에 의해 개돼지로 전락한 인∙민이 다시 자신을 공화국의 주권자, 민주의 별자리로 빛낸다. 진심 대의, 진리재현의 실천이 그렇게 부정과 비리, 공모와 음모의 어둠을 밝힌다.
 발현. 치안스테이트 메트로폴리스 건축물 사이의 광장에서, 일방통행로로 퇴락한 대로와 소비 아케이드로 장식된 골목에서 자기재현의 인간극장들이 상영된다. 다양한 민의 대의의 소극장들이 개장한다. 스스로 무대 위 주연이자 조력의 연기자가 된 대중들이 상황극을 펼친다. ‘우리’가 관객과 연출자의 몫을 동시에 떠맡는 역할극의 시간이다.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 이음과 화성의 심포니 공연 공간.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내려는 창작열의, 타인과 자유로이 느낌을 교환하려는 공감의지가 불탄다. 자신의 의사와 욕망을 더 이상 <그것들> 하수의 재현기관에 위임하거나 <그것들>의대의기구에 의탁하지 않고 직접 표기∙표출∙표현하겠다는 다중의 전시의도가 촛불이라는 대안의 재현체계, 대항적 민의기계를 통해 도심 속에 상황으로써 전개된다.
 위로부터의 재현권력과 아래의 재현역능이 충돌하고, 선전기관의 대의권력에 언론매체의 대의주권이 격돌한다. 언론의 헌법적 실행이다. 거대한 빛의 네트워크가 인∙민의 대의기관으로 행세하면서 청와대를 향한다. 엄청난 물리력의 파동이 대중의 재현기구로 작동하면서 각하 쪽으로 행진한다. 몸서리치는 빛의 연쇄, 섬뜩하기도 한 촛불들의 정권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제헌적인 실천이자 스펙터클한 공화정의 구성이다. 컨스티튜션(constitution). 감각의 따뜻함과 물리의 차가움이 뒤섞인 이상한 화점들. 새파란 분노와 새빨간 열기가 들끓는 기괴한 점화. 그것이 역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저 도도한 흐름 한 가운데서, 바닥을 딛고, 차가운 하늘의 성좌도 올려다보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사유할 것은 무엇인가? 진실재현, 민의현시, 헌법구성이라는 공화국의 보르메오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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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고의적인 사유재산 파괴나 태업 등을 통한 노동자의 쟁의행위. (출처 : 두산백과) (편집자주).

주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1997). 최명관(역), <앙띠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서울: 민음사,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