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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1호] 전능했던 주체와 무기력한 주체, 그리고 파상(破像)의 힘_임명현

전능했던 주체와 무기력한 주체, 그리고 파상(破像)의 힘

 

 

임명현 _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석사, MBC 기자

 

아주 예전부터 나에게 허락된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여러 번 살 수 있다면, 아주 주류처럼도 살아보고, 또 아주 비주류처럼도 살아보고, 권세와 쾌락 이기심을 추구하면서 살아보고, 신앙와 윤리 이타심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보고... 아니 최소한 두 번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한 번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다른 한 번은 남이 살아보라는 대로 살 수 있지 않은가. 허황된 생각이었다. 내가 살 수 있는 삶은 단 한 번뿐이다. 그나마 이 삶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평균 수명이라는 통계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100년을 갈 수도 있지만 당장 내일 끝날 수도 있는 것이, 예측 불가능한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 불만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내 삶은 연속성을 가지고 흘러왔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제도권 교육과정을 마쳤다. 21세기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에 입사했다. 사회부, 정치부, 스포츠취재부 등을 거치며 10여년을 보냈다. 흐름에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순간순간 물꼬를 트고 물길을 잡는 선택은 내가 내렸다. 때때로 목표를 세웠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진력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면 왜 그랬는지 성찰하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기획했다. 그렇게 앞으로의 삶도 살아갈 작정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풍부한 취재경험을 가진 좋은 기자가 되고 싶었다. 권력에 불편부당하고 낮은 자들에겐 친절한 뉴스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 삶에서 의미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의미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삶에 대해 내가 가진 태도였다. 그렇게 살아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살아있는 삶이고 싶었다.

 

2012년이 변곡점이었다. 그 해 이후 내가 저널리스트로서 그려가던 서사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파업이 있었다. 170일 간 벌어진 파업이었다. 그 파업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기자로서 나의 서사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종료되었다. 그 종료가 일시적인 것인지 영구적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2017년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것만 분명할 뿐이다. 나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좋은 기자, 좋은 뉴라는 비슷한 꿈을 함께 꾸고 그렸던 선후배 동료 상당수가 유사한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MBC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뉴스를 만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은 자들이 만들어 방송하는 MBC의 뉴스가 좋은 뉴스인 것도 아니었다. 전혀 권력을 향해 불편부당하지 않았고 낮은 자들을 향해 친절하지도 않았다. 되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권력을 향해 친절했으며 낮은 자들을 외면하고 멸시했다. 세월호 참사 보도가 그 대표적 증거다.

 

이러한 MBC의 상황을 문제적으로 느낀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했다. 성찰했다. 헤게모니를 쥔 경영진이 바뀌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말했다. 썼다. 일상적으로 그들과 교섭했고, 사내 게시판에 문제제기를 하는 글을 썼다. 성명서를 썼다. 피켓팅을 했다. 구호를 외쳤다.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말과 글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오히려 반격을 불렀다. 말하고 쓰는 이들이 보복당했다. 징계를 받고 뉴스의 외부로 배제됐다. 말하고 쓰지 않았던 자들은 이 광경을 보며 분노했지만 동시에 위축됐다. 말과 글이 힘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행동에 나설 수도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패배한 파업의 후폭풍이었기 때문이었다. 말과 글뿐 아니라, 실천의 힘까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더 이상 성찰할 수 없었다. 문제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의 언어로 인식하는 작업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성찰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한들 그 깨달음이 가진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획도 할 수 없었다. 말과 글은 물론 실천의 힘까지 상실한 상태에서 어떤 기획을 한들 그 기획이 우리의 문제 상황을 변화시킬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찰도 기획도 할 수 없는 상태, 이것은 파산을 의미했다. 좋은 기자, 좋은 뉴스를 향해 흘러가던 나와 우리의 꿈이 파산했음을 의미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더 좋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려가던 나와 우리의 서사가 파산했음을 의미했다.

 

나와 우리는 지난 몇 년 사이 너무도 극과 극의 주체를 경험해야 했다. 적어도 파업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MBC 내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느꼈다. 사주가 없는 공영방송, 그러면서도 정부가 직접 지분을 갖지 않은 공영방송이라는 지배구조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독특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다. 그것이 MBC였다. 어느 기업이든 사장은 나름의 지배적 아우라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사장을 월급사장이라고 불렀다. 사장이 가진 존재감을 체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 이후 모든 것이 해체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주체가 됐음을 절감해야 했다.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주체였다. 좋은 기자가 될 수 없었고 좋은 뉴스를 할 수 없었던 차원을 넘어,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조차 분석할 수 없었다. 성찰할 수 없었다. 해봤자 소용이 없기에. 또 문제적 상황을 변혁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기획할 수 없었다. 해봤자 소용이 없기에. 그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전지전능한 주체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한 주체 모두를 동시에 경험했다.

 

전능한 주체였던 시절 나와 우리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근질근질한체질을 갖고 있었다. 마음 속에 그린 아이템과 기획안이 방송물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선순환을 자주 목격했다. 뭔가를 해야만 했고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러나 무기력한 주체가 된 우리는 이제 뭔가를 하는 것이 불안한체질로 변화됐다. 해도 안 되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나아가 이것을 했다간 우리 모두가 끝장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불안하다. 그토록 전능하게 느꼈던 우리의 뉴스, 우리의 직업, 우리의 선배, 우리의 노조가 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를 논의하는 게 두렵다. 탄핵된 구 권력과 새롭게 등장한 신 권력, 그리고 사회 곳곳에 변화의 물결이 이는 것 같은 지금의 장면을 보면서도 뭔가 새로운 기획에 나서는 것이 두렵다.

 

전능했던 주체였기에 타자의 탓을 할 수 없다. 우리가 패배한 것은 우리의 탓이다. 또 전능했던 주체였기에 우리의 구원을 타자에게 부탁할 수도 없다. 우리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라는 주체는 전능한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체다. 그렇기에 나와 우리에겐 외부가 없다. 이건 네 탓이라고 귀책사유를 돌릴만한 외부가 없다. 또 제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눈물로 기원할 만한 대상으로서의 외부도 없다. 외부를 탓하고 외부에 구원을 위탁하는 우리 스스로를 여전히 수치스럽게 느끼는데, 외부를 탓하고 외부에 구원을 위탁하지 않고서는 이 무력한 주체를 탈피할 수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지독한 모순이 있을까?

 

엄기호(2016)의 관찰을 빌리면 외부가 없는 주체에게 가능한 것은 숨는 것뿐이다. 그의 표현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알처럼 웅크려 들거나 누에고치로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숨어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우리는 숨어 있었다. 각자에게 허용된 공간에 최대한 숨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최대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애써 스스로의 감정을 탈각화했다. 때로는 그냥 회사일 뿐인 MBC에 그동안 너무 내 인생을 쏟아부었다며 이젠 회사는 회사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자 다짐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이질적 주체는 차단하고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소수와의 밀도를 끌어올렸다. 그런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살아가기 위해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극과 극의 모순된 주체를 오간 우리가 지난 몇 년의 시대를 버텨낸 방법이었다.

 

다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9년 전 내심 전능한 주체로 보수정권의 시대를 직면했던 나와 우리는 이제 고갈되고 메마른 무기력한 주체로 새로운 정권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 시대를 열기 위해 한국사회는 초유의 국정 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이라는 누구도 예상 못한 길을 헤쳐나와야 했다. 어떤 힘이 시대를 밀고 온 것인가.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인가? 그 상상을 구체화하는 기획력인가? 아닌 것 같다. 김홍중(2016)의 개념을 빌면 나는 이 시대를 밀고 온 힘은 파상력(破像力)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파상이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이다. 바로 나의 체험이었다. 좋은 기자, 좋은 뉴스에 대해 갖고 있던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가 산산조각난 체험을 했다. 또한 이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체험이었다. 세월호 참사,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가깝게는 구의역 김군과 최순실게이트에 이르기까지, 국가공동체와 민주주의, 안전, 한 인간의 존엄 등이 파상된 체험을 우리는 일상화해왔고 그 파상된 조각, 깨진 꿈을 끌어안은 채 버텨왔다.

 

파상력이란 그러한 버팀이 만들어내는 힘이다. 김홍중의 말대로 이런 파상의 시대에서 우리는 각자의 기획을 실천하는 행위자라기보다는 깨져나가는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겪는 자에 가깝다. 이때 행위가 갖는 힘이 있듯이, 겪는 것이 갖는 힘 또한 있다. 그 힘은 깨진 꿈과 아직 오지 않은 꿈 사이에 펼쳐진 이 지독한 가위눌림과 환멸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의 근거를 그 파편들 속에서 찾아내려는 자세다(김홍중, 2016). 나는 이러한 파상의 시대의 저항이라는 것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정치적이고 혁명적 행동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제시된 정체성과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박명진, 1991)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왔던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숨어있었지만, 무기력했지만, 그것은 말과 글이 힘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제하는 정체성과 통제를 체화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 끝에 찾아낸 실천 전략이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버팀이 가진 힘을 긍정하기로 했다. 기획과 행위만큼이나, 버팀과 겪는 것이 가진 힘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 시대 저마다 파상의 조각을 끌어안고 버텨온 내 자신과 동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스스로가 전능한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가 겪은 모순된 주체, 전능함과 무기력함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새로운 우리의 주체를 찾아야 하고 그 과정은 상상의 결과인 필연이 아닌 파상의 결과인 우연 속에서 어느 순간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팀겪음의 힘이 황폐화된 내 삶의 무대, 공영방송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고 예기치 않은 희망이 생성되는 장면을 곧 목격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참고한 글>

김홍중. 2016. 사회학적 파상력. 2016. 문학동네.

박명진. 1991. 즐거움(Pleasure), 저항, 이데올로기.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社會科學政策硏究> Vol.13 No.2, 67-95p.

엄기호. 2016.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