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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2호] 원우문화활동기고 (상수)

 

어떤 위안

 

상수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20179, ‘대단한단편영화제에 다녀왔다. 영화 <연애담>의 감독 이현주의 단편 네 작품을 특별전으로 상영한다는 소식에 얼른 예매를 서둘렀다. 두 여자의 사랑을 담담한 색채로 그려낸 퀴어영화 <연애담>, 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의 대상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개봉 후에도 팬덤(‘팀 연애담’)을 형성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현주 감독 개인이 품었던 지난 짝사랑의 기록이라는 네 편의 영화, <과외>, <우리 결혼해요>, <Distance>, <바캉스>. 영화 안에 그의 삶이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연애담>을 비롯한 네 편의 단편 모두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서사가 실감나게 등장한다. 결혼을 종용하는 엄마 덕에 하는 수 없이 게이 지인과의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레즈비언, 유학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벽장 안의 레즈비언,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홧김에 애인에게 키스해버리는 레즈비언한 사람의 감독이 어떤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보는 것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는데, 한 사람의 또렷한 성장을 체감하는 동시에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서사나 변치 않는 그만의 화법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랬다.

이 글의 제목이 어떤 위안인 까닭은 여기서 내가 영화의 만듦새나 미학에 대한 시시콜콜한 분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전공한 적이 없고 그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러온, 그 날 그 극장에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연애담>을 보고 이현주 감독에게 이성애자들이 로맨스 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편지를 보냈다던 어느 동성애자 관객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날의 극장도 그랬다.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된 <과외><우리 결혼해요> 같은 작품은 화질이나 촬영기법, 등장인물들의 외형이나 미감, 서사의 진행방식 모두 지금과 같지 않아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졌다. 디지털 촬영의 세련됨에 익숙한 나는 민망해져 얼른 다음 작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객석에서 하나 둘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의 반대와 세상의 눈이 무서워 억지로 결혼을 하는 동성애자와 그 연인의 이야기는, 어쩌면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 익숙한 것이 아니었나. 수많은 비평들과 영화이론들이 명징한 언어들로 날을 세워 영화의 의미와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파헤치더라도, 결국 한 축에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부리는 날것의 감정들이 있다는 게 새삼 다가왔다. 그것을 위안, 위로, 공감 따위의 말로 겨우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와 정체성이 맺는 관계에 대해 건조한 언어들로 굳이 풀어내지 않아도, 우리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다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안다.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여 말해보자면 나일 법한’ ‘나와 비슷한모습을 발견할 때 즐거워한다. 불규칙하게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그림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디어에서 재현된 인물들을 구심점 삼아 저마다의 정체성을 구성해낸다.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동력은 아마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은바로 그것이 아닐까? 신부대기실에서 연인의 손을 맞잡는 하은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바람난 엄마의 애인더러 이 아저씨가 엄마 친구야? 영미는 내 친구야!”라고 외치며 키스하는 윤주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그린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은 따가운 비평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소수자를 재현할 때의 정치함은 물론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얼마나 많은 동성 간의 로맨스들이 결국에는 이성애 규범적인 로맨스 공식에 복무하고야 마는가. 그렇지만 많은 이론가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인 허다한 허물들을 명징한 언어로 폭로하기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사랑이라는 그 이름을 가장 살갗에 닿는 언어로 파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 영화 <연애담>이 가지는 미덕도 그것이었다. 분명 보편성이 특별함을 지워내는 순간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 순간에 극장 안 모두를 묶어내는 감정이 분명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이 모두를 휘감는 날것의 감정들을 이론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하게 배치될 수 있을까? 이를 포착해낼 수 있는 더 많은 영화 언어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한 힘겨운 커밍아웃,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결말, 눈물 흘리고 상처받는 퀴어들의 서사에서 벗어나 퀴어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퀴어임이 부각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사에 섞여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억압받는 이야기 또한 그 사회상을 고발한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현주 감독은 누군가에게는 잘 알고도 익숙한 이야기면서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재미있게, 그렇지만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을 절묘하게 탈 줄 아는 이야기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극장에 앉아서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결의 웃음과 울음을 운다는 사실이 가끔은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같은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는 누군가를 확인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그렇게 막연하게 나를 위로한다. 영화관에 온 이유도, 그래서 집중을 하는 정도도, 울고 웃는 순간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던 그 날의 극장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