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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3호] 21세기에서 맞이한다, <꾿빠이, 이상>_신도현

21세기에서 맞이한다, <꾿빠이, 이상>

 

일반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_ 신도현

 

 

 

나는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수많은 가 있는 거요?

-가무극 <꾿빠이, 이상> -

 

혼란의 기대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극, 서울예술단 <꾿빠이, 이상>(9.21-9.30/CKL스테이지)은 김연수 작가의 소설 <꾿빠이, 이상>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 가무극이다.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에서 이상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진실과 거짓 간의 불분명한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면, 가무극 <꾿빠이, 이상>진실과 거짓 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통하여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연수 작가는 인터뷰에서 둘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은 언어로 표현한다. 나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글을 썼고, 오세혁 작가는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글을 썼다.” 비록 두 작품의 제재는 다르지만, 공통된 메시지는 존재하는 듯하다. 불분명한 경계.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정체성. 이 메시지는 가무극 <꾿빠이, 이상>을 관통한다.

<꾿빠이, 이상>의 메시지가 신선하고 기분 좋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받쳐주는 연출에 근거한다. 오루피나 연출은 인터뷰에서 김승희 시인의 언어를 빌린다.

“(이상은) ‘하이브리드 예술가이자 언제나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지적 노마드였다.

그는 소설을 시처럼, 수필을 시처럼, 시를 의료 진단서처럼 썼고, 시에 그림을, 기하학적 도형을, 숫자판을, 인쇄기호 등을 도입해 타이포그래피 등을 실험했다.”

오 연출은 이상의 하이브리드 예술가적 측면 혹은 이상의 콜라주성에 주목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꾿빠이, 이상>의 주제와 표현방식을 잇는다. 다양한 시선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시인 이상, 가무극이라는 총체적 장르, 그리고 극과 관객을 이어주는 이머시브 씨어터. 이 표현 형식들이 A도 아니고 B도 아닌 <꾿빠이, 이상>, 그리고 그 의미를 창조한다.

서울예술단의 브랜드 가무극은 음악()과 춤()와 극()을 혼합한 총체극이다. 서울예술단의 표현을 빌리자면 또한 가무극은 서구의 극문법 뮤지컬과 한국의 전통적인 극 표현 및 제재와 정서를 결합한 브랜드이다. <꾿빠이, 이상>에서 이상을 하나의 얼굴로 정의할 수 없듯,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역시 하나의 장르적 정의로 설명하기 어렵다. 뮤지컬의 문법을 기대하고 온 이에게는 현대 무용의 장을, 무용공연의 문법을 기대하고 온 이에게는 뮤지컬의 극적 서사를 제시한다. 혼합적 장르 특성 탓에 혼란스러워 하는 후기도 종종 인터넷에 게재된다. 이는 서울예술단이 수 년 간 단체의 극 정체성에 대해 질문 받는 이유이자 단체 스스로도 고심하는 지점이다. 허나 이 혼합성은 <꾿빠이, 이상>과 만나 되레 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그야말로 서울예술단이 할 수 있는 극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이다.

콜라주 같은 장르 가무극이 이머시브 형식를 만난다. 이머시브 (immersive), 말 그대로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극 형식이다. 극장과 로비의 경계가 없는 그 혼돈의 장소에서 극은 바로 시작된다. 관객들은 가면을 쓰고 극의 일부가 된다. 가면을 쓴 채 이상에 대해 그는 누구였을지 웅성이며 소리 내어 이야기한다. 이상의 단일한 얼굴을 쓴다. 그리고 무대 내부로 들어가 이상의 집합적 정체성 혹은 얼굴의 일부가 된다. 관객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이상의 일부이기에 그들은 집합적 정체성을 만들며, 동시에 그 속에 존재하게 된다. 삼면 무대 자유석에 앉아 그들은 어느 방향, 어느 시선을 정하지 않은 채 자유로이 이상의 얼굴 찾는 여정을 목격하고 증명한다. 하나가 아닌 모두 다른 맛의 양갱을 받아먹고 소화하며 이상의 얼굴 찾기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오감도난장장면에서 모두 가면을 벗으며 이상의 정해진 얼굴은 없다, 모든 얼굴이 이상이다라는 극중 이상의 깨달음을 함께 맛본다. 극이 끝나서도, 극장과 로비에서 나누는 극의 후기와 즉각적 반응들은 극 후의 또 다른 극을 이어간다. 각자 다른 감상이 모여 하나의 <꾿빠이, 이상>이 되기에 극은 끝났어도 살아간다.

이상의 얼굴 찾기. 이 극에서 이상은 진정 누구였을까하는 고민은 이제 어느 정도 지난 고민이 되어버렸다. 이상이 19세기에서 20세기를 좇았듯, <꾿빠이, 이상>20세기의 이상에서 21세기의 메시지를 좇는다. 20세기서 21세기까지 달려온 포스트모더니즘. 단일한 구조가 있다는 환상을 깨부수는 후기구조주의. 이상의 유일한 얼굴은 누구도 찾을 수 없다. 혹은 모든 얼굴이 그의 얼굴이다. 모든 얼굴이 콜라주 되어 그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치 여러 시선의 얼굴을 평면으로 그려내는 이상의 시는 알 길 없고 복잡하고 모호하며 그로테스크하다. 그리고 <꾿빠이, 이상> 역시 복잡하고 모호하며 어느 한 관객이 말하듯 과도해보일지 모른다. 여러 장르의 표현법을 섞어놓아, 이것저것 작품을 걸어놓은 전시회처럼 보일지 모른다.

허나 <꾿빠이, 이상>은 단지 이상에게 외치는 복잡하고 모호한 꾿빠이로 끝나지 않는다. 극에 참여한 얼굴들이, 관객들이 있는 한 극은 이어진다. 그들의 이야기로 극은 이어진다. 극중 오감도 난장에서 표현한 이상의 펄떡이는 심장처럼 잦아들다 또 뛰고, 또 뛸 것이다. 웅성거리는 관객의 감상 속에서 <꾿빠이, 이상>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이상이라는 거대한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그렇기에, 그야말로 고은 시인의 말대로, 혹은 <꾿빠이, 이상>의 대사대로 이상은 시인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