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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52호] 잔인한 섬에서 고통의 연대로 - 전염증 시대에 ‘부활’을 성찰한다._주낙현

(사진=주낙현 신부.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

 

“사월은 잔인한 달.”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봄날에 관한 말일까? 20세기의 빼어난 시인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화사한 봄날이 왜 시인에게는 그토록 잔인했을까? 시인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생각했다. 군인 9백만 명, 민간인 1천 9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다. 시인은 그 망각 위에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기 어려웠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다. 그 탓에 봄을 한탄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봄을 안기고 있다. 상황을 보면 바이러스만 탓할 일만은 아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세계 변방에서 생긴 불운이라 여겼다. 짐짓 문화우월주의적인 냉소와 핀잔을 보내기도 했다. 예상보다 더 빠른 확산에 불안했지만, 쉽게 넘길 만한 일이라 여겼다. 바이러스는 사람의 안이한 예견을 코웃음 치듯 비껴가며 활개를 쳤다. 힘세고 콧대 높은 어느 나라 우두머리는 전염증을 특정 지역의 이름에 붙여 부르며 외국인 혐오를 부추겼다. 전문가의 의학적인 조언을 무시했다. 투명하고 정직하게 사태를 대처했던 나라의 경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았다. 당장 그 나라에 창궐한 전염증으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는데도, 경솔한 허언을 남발했다. 바이러스가 사태의 시작이었지만, 고통의 확산은 사람 책임이기에 잔인하다.

 

한국 사회가 한순간에 겪은 바이러스 확산도 어이없다. 빠른 대처와 적절한 관리로 선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이비 종교의 집단 감염과 확산은 상황을 뒤바꾸었다. 투명하지 않은 조직, 정직하지 않은 대처, 합리적 이성을 배척하려는 광신이 문제였다. 이 행태는 이웃과 나라 전체에 엄청난 물리적 피해만이 아니라, 공포와 불신의 심리적 손상도 크게 남겼다. 자신은 ‘사이비'가 아니라고 항변하던 어느 교회도 지성과는 동떨어진 맹신으로 행동하다 새로운 지역 감염지가 됐다. 바이러스와 종교의 상관관계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 등식처럼 새겨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무리 선의로 출발한 종교, 혹은 집단이라 하더라도, 정직하게 대화하고 배우며 성찰하지 않으면, 오히려 악행의 도구로 변하기에 잔인하다.

 

종교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 여러 종교가 정부와 방역 당국에 적극 협력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종교의 핵심 생활인 예배 모임 중단으로 이어졌다. 사람의 건강과 사회의 안전에 함께하고 있다. 불교는 석가탄신일 축하를 미루었고, 그리스도교는 가장 중요한 축제인 부활절에도 모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감내한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희생과 결단이다. 종교의 본질은 자기 생명의 보호에 있지 않고, 세상과 타인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가르침은 여러 종교에 공통으로 흐른다.

 

한편, 종교 모임 활동 중단과 자제에 관해서 볼멘소리하는 이들도 있다. 교회는 실제로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모임과 친교를 제재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교회는 분명히 ‘모이는 교회’로 시작한다. 그 이후의 과정과 목적은 다르다. 교회는 모여서, 자신의 소리가 아닌 초월자의 명령을 듣고 배우며, 그에 따라 자기 생각을 바로잡고 공동체에 조율하는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런 다음 ‘흩어지는 교회’가 된다. 지금은 ‘모여서 배우고 조율하는 교회’에서 나와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로 파송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책임을 다하고 실천할 일이지, 관습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일이 아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보자면, 부활이 새로운 생명이듯이 종교도 옛 관습과 허황한 행동을 버리고, 세상에 부활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명을 다시 생각할 때다. 부활의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 새롭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계속 선포하고, 그 신앙의 전통 안에서 자신을 쇄신하는 습관을 훈련하는 공동체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부활은 세상에 무엇을 말하는가?

 

부활은 창조 세계의 회복을 요청한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는 근대 산업화 이후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가 악순환하며 낳은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자연은 정복과 계발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생명체는 멸종을 맞아 생태계 파괴로 이어졌으며, 심지어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은 파괴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고, 창조 보전의 길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부활은 신앙인과 교회의 역사적 책임을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종교와 정치 권력의 야합이 만들었다. 소수의 특권을 유지하겠다는 정치 전략은 선한 사람과 사회를 질시하고 모함하며, 거짓 선동과 무책임한 악행으로 이어진다. 부활의 신앙은 이 불의한 역사와 현실을 분명하고 정직하게 감지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이처럼 억악하는 권력과 희생의 논리에 저항하는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부활은 인간이 겪는 상실과 절망에 위로와 희망을 선포한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로 고통받고 희생당한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이 너무도 많다. 이 무참한 사건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우리가 모두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뉴욕의 성공회 세인트 존 더 디바인 주교좌성당은 환자를 위한 임시 병원으로 성당 자체를 제공하고 있다. 진실한 종교는 사람이 만들고 갈라놓은 다양한 문화, 사회, 종교의 벽을 넘어 행동한다.

 

부활은 교회야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새로운 사회라고 선포한다. 교회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문화에 휘둘리지 않고 공동체의 일치와 절제의 문화를 훈련하고 실현하는 곳이다. 여러 종교가 ‘사이비’로 변하고 그 행동이 지탄받는 연유를 살피면, 개인의 소망 성취에 사로잡힌 탓이 크다. 그 성공을 빌어주는 여부에 따라 자신의 취향으로 종교와 신앙을 장식품으로 삼아 소비하는 일이 적지 않다. 새로운 삶의 질서, 특히 공동체의 감각을 깊이 성찰하고 훈련할 때, 진실한 종교들은 사회 밑바닥에서 서로 손을 잡는다.

 

부활은 고통과 죽음의 세상 속에서 함께 힘을 모아 통과하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의 말대로 “교회는 그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The Church is the only society that exists for the benefit of those who are not its members)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과 사명을 망각하는 교회는 그 존재 이유를 잃고 그 존재 자체마저 위태롭게 한다. 건물 안에서 자축하며 만족하는 예배는 세상의 위협에 속수무책이다. 세상의 조직보다 개별화하고 자기식대로 안주하려는 교회는 생존하기 어렵다. 개인의 신심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신앙생활은 현실의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지 못한다. 세상과 사회에 무관심한 교회는 무책임한 집단으로 불신의 대상이 된다.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기는커녕, 거짓 선동을 퍼뜨리는 교회는 결국 무참하게 버림받는다.

 

우리는 ‘잔인한’ 망각의 세월을 넘어 좀 더 새로운 통찰을 만나야 한다. 17세기 영국 사회를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았던 존 던(John Donne) 신부의 설교 한 대목이다.

 

“그 누구도 섬처럼 그 자체로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으며 / 모든 사람은 그 대륙의 한 조각이요, 전체의 일부이나니 / 한 줌의 흙이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 유럽 대륙은 그만큼 작아지고, 모래톱도 마찬가지라네 /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소유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하나니 / 나는 모든 인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네. /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사람을 보내지 말라 / 바로 그대를 위해 종이 울리나니.”

 

20세기 소설가 헤밍웨이는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로 그를 다시 불러냈다.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이었다. 프랑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스페인 민중은 물론, 헤밍웨이 자신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던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군사 쿠데타 세력과 싸웠다. 소설가는 모든 사람이 불의에 저항하는 일체 헌신한 사건을 두고 존 던의 말을 떠올렸다.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삶에서 즐겨야 사랑이, 누려야 할 정의와 평화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진실을 고통스럽게 일깨우고 있다. 함께 돕고 연대하여 세상의 생명을 지켜내는 일이 거룩한 일이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일이다.

 

T. S. 엘리엇은 전쟁이 앗아간 생명의 슬픔을 기억했고, 존 던은 평생의 병고 속에서 세상의 고통을 보았으며, 헤밍웨이는 그 깨달음 속에서 자신을 역사에 던졌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통을 통해 깊이 들여다보았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과 그 생명은 뿔뿔이 흩어진 개체가 아니며, 쉽게 망각할 수 없다. 그 한 생명 자체로 온 창조 세계 그 자체이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이다. 역사와 현실의 교회는 흩어진 생명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사(sacrament)로 존재한다. 이 성찰과 실천만이 우리를 세월의 잔인함에서 구하여 새로운 삶과 미래로 이끈다.

 

(사진=대한성공회 주교좌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