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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2호] AI, 예술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정준모)

AI, 예술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정준모_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비평

 

 

인공지능예술의 현재

최근 뉴욕의 사진전문갤러리 메트로픽처스에서 미국작가 트레버 파글렌(Trevor Paglen, 1974~ )의 전시회가 열렸다. 컴퓨터와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스스로 학습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내는, 아니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보이지 않는 변화를 추적하는 전시다. 전시된 작품들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공부하는(Deep Leaning)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추적하고 연구한 결과물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컴퓨터 과학자들이 수 년 동안 스탠포드대학의 레지던시에서 협업을 통해 얻은 성과물이다. 이 성과물들은 컴퓨터가 학습과정에서 급증하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스스로 생성해내면서 예상할 수 없거나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을 채록(?),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되는데 우선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자주 사용되는 부분 프로그램들을 모은 이미지와 컴퓨터가 판독 가능한 풍경, 그리고 컴퓨터가 스스로 만든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이미지들은 독일의 예술가 히토 스테이얼(Hito Steyerl, 1966~ )의 이미지 백여 개를 가져다가 다양한 얼굴 인식 알고리즘을 적용시킨 이미지와 함께 나이, 성별, 감정 상태 및 기타 특징을 읽고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함께 전시했다. 또 한편에는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동시에 정신과 의사이기도한 프란츠 파농(Franz Fanon, 1925~1961)이나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의 사진을 읽기위해 안면인식프로그램을 사용했다. 파농의 얼굴에서 파생된 또 다른 다양한 파농의 얼굴 표정은 컴퓨터에 탑재된 생체 인식 소프트웨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물들은 그 소프트웨어에 의해 결정된 고유의 특성을 보여준다. 같은 이미지에서 각각 대립되는 환각적인 형상들을 만들기 위해 파글렌은 이미지들을 전조와 관념, 괴물, 꿈 등으로 분류하고 다시 이를 인식해 조합하도록 인공지능을 훈련시켰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인공지능은 점점 더 자기 혼자 스스로 으스스하고 섬뜩하지만 아름다운 새로운 이미지들을 첫 번째 인공지능과 함께 협업을 통해 생산해냈다. 이 전시에 출품된 비디오 설치작업은 일반적인 컴퓨터 속의 인공지능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 십 만개의 교육용 이미지들을 훈련을 통해 어떻게 사물과 얼굴, 표정과 행동을 익히는지 보여준다.

 

과학과 예술의 만남

늘 새로운 것에 목마른 예술가들에게 과학과 신기술은 충실한 동반자인 동시에 조력자였다.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가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 것도 실은 그가 새로운 과학적 기법과 원리를 그림에 도입해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원근법 특히 선원근법과 명암원근법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해부학을 통해 인체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던 그는 피부만 그린 것이 아니라 뼈대를 세우고 근육을 더해 인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의 상대성이론은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예를 들면 마그리트(René Magritte,1898~1967)<유리의 집>(1939)은 빛의 속도로 달리는 물체는 시간이 느리게 가고 길이가 짧아진다는 특수상대성의 원리에 의한 길이수축의 원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초현실주의자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작품 <기억의 지속>(1931)에는 움직임이 없는 쥐죽은 듯 고요한 해변에 시계가 나무에 늘어진 채 걸려 있다. 상대성이론의 정지된 시간의 개념이 보인다.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시공간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입체파회화(Cubism)도 마찬가지이다. 백남준(1932~2006)의 작품도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1969년 일본 공학자 슈야 야베(Shuya Abe, 1932~ )의 도움을 받아 비디오 합성기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야베와 함께 만든 비디오 신시사이저는 여러 비디오 영상 제작에 사용되었다. 비디오카메라나 다른 소스로 부터 최대 7개의 영상을 받아들여 실시간으로 편집이 가능했던 다재다능한 도구였다. 스캐닝, 색채변화, 녹화의 주요기능은 신시사이저의 건반처럼 빠르게 깜빡이는 화소단위 정보의 집합 영상을 전자적 메카니즘으로 직접 연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업적은 이런 기술적인 발명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인 시간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도록 비디오라는 매체, 형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다.

이후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과학을 이용해서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이제 곧 인공지능이 많은 전문직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판사나 증권투자자들의 자리는 물론 의사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많은 예술가들이 인공지능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고 있다.

하긴 하나를 가르치면 스스로 열을 아는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까지 갖춘 인공지능이 못 할 것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화가 헤롤드 코헨(Harold Cohen, 1928~ )은 이미 1973년 소위 아론’(Aaron)이라는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을 내 놓았다. 그 후 아론은 진화를 거듭해 1980년대에는 3D 공간에서 물체나 사람을 배치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스스로 그림을 그릴 정도로 발전했다. 아론의 그림은 1986년 코헨의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기증되어 어엿한 미술관 작품이 되었고 1995년에는 경매를 통해 소장되기도 했다. 벤자민 그로서(Benjamin Grosser)는 쌍방향 대화형 그림 그리는 도구로 작업을 한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해지도록 상호 작용적인 경험, 기계 및 시스템을 구성하여 소프트웨어가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방식을 알려주어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그림에 영향을 주는 대화, 배경음악등 프로그램자체가 소리에 따라 반응하면서 캔버스위에 흔적을 남기도록 하고 있다.

음악에서도 작곡과 연주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야마하는 자동연주피아노 디스크라비에’(Disklavier)를 만들었고, 2012년에는 캐나다의 한 작곡가는 협업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당시 관객들은 사람과 인공지능이 작곡한 음악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예일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하는 도냐 퀵(Donya Quick)쿨리타’(Kulitta)라는 작곡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운드 클라우드로 공개해 사람이 만든 음악과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을 가려보라고 했다.

 

도구냐 예술이냐

인공지능이 인간이 만든 음악과 구분 할 수 없을 정도의 음악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것을 과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사실 작곡하는 인공지능 쿨리타의 경우 저장된 자료에서 규칙들을 분석하고 음계를 조합해 작곡을 하는데 이는 일종의 자기학습 방식으로 이 방식을 이용하면 클래식뿐만 아니라 여러 음악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기계시대 원본개념의 상실이 아니라 예술의 기본구조를 깨는 결과를 초래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컴퓨터 즉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은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느끼고’, ‘이해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한 작업이다. 인공지능이 좋은 음악을 만들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음악을 창조하기보다는 분석해서 조합하는 것이라는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젊은 새로운 음악가들은 쿨리타같은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론같은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도 사람이, 미술가가 애초에 만들고 창작해놓은 작품들로부터 학습이 시작되고 비롯된다는 점에서 현재의 시각으로는 예술이라기보다는 모방또는 복제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요즘 상업적인 영화나 음악의 경우 빅데이터를 분석해 이를 토대로 대중들이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소들을 매우 정교하게 배치해 흥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과 어쩌면 닮아있다. 관객이나 청중들의 감상패턴이나 반응을 섬세하고 촘촘하게 분석해서 영화나 음악을 만드는 것은 이미 알려진 비밀이다. 넷플릭스의 성공작 하우스 오브 카드BBC 원작을 토대로 관객들이 원하는 감독과 배우를 기용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초단위로 분석해 흥행요소를 이어 붙인 것이다. 장면과 상황 즉 이야기를 엮었다. 소비자 성향 분석을 위해 기존 작품의 장면을 초단위로 분석할 정도로 치밀하다.

하지만 장르에 따라 다르지만 원칙적으로 음악의 경우 작곡 방식과 코드의 진행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라면 이 다른 장르상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이어붙이고 잘라 새로운 음악을 만들거나 편곡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창조가 가능하지만 컴퓨터와 프로그램은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선형구조로 생각하지만, 프로그램은 선형구조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화가와 소설가, 음악가를 대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지만 절대적으로 인간의 감성의 영역인 동시에 비선형적인 예술의 영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다. 사실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예술은 미적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라고 정의할 때 인공지능이 창작해낸 예술품들이 과연 종래의 미학적 관점과 태도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간의 경우, 삶의 주변과 자연 등 모든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등 변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그 과정과 과정마다 변화와 대응을 해나간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오직 완성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작동하거나 아니면 완성되었다는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판단을 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학습을 해야 하는 과정이라면 결코 완성작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작업을 하는 중간에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변수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으며, 영감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백남준에게 TVVCR 기술이 붓을 대신하는 도구였던 것처럼 인공지능은 예술의 도구 또는 조력자는 가능하겠지만 예술가를 대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과 외형이나 형식이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도 작품이라면 필히 갖추어야할 창조성과 예술성과 내면의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넉넉하게 봐서 현대미술에서 사용되는 오마주(Hommage), 패러디(Parody), 차용(Appropriation), 키치(Kitsch)등의 하나로 정의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