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55호] 바로 오늘, 당신의 겨울 음악

정 나 영 (뮤지컬 작곡가)

 

  (사진 출처 : https://likejp.com/3379)

  우리는 일상 곳곳에서 음악을 쉽게 만난다. 그러다 다시 듣고 싶거나 소위 괜찮은 노래는 수집하고,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그 중에서 BGM처럼 깔리며 스쳐 지나가는 음악도 있겠으나, 뮤지컬 넘버처럼 극적으로 부각되어 인생의 테마음악이 되고, 여전히 곁에 있는 음악도 있다. 

 

  그렇게 하나둘, 차곡차곡 쌓인 플레이리스트는 나의 서사와 기록을 담고, 역사가 된다. 그래서 어느 계절에 만났던 음악을 같은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듣는다거나,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그 음악’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계절, 날씨, 시간대에 따른, 혹은 스트레칭, 산책, 소풍, 청소, 이동, 작업, 독서 등등의 생활패턴과 내 감성에 꼭 들어맞는 플레이리스트들이 있다. 마침 계절은 바뀌었고, 그래서 올해도 어김없이 꺼내든 나의 보물이자 유물 같은 겨울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한다. 

 

  어느 겨울날, 아침부터 고요한 새벽까지 함께할 수 있는 방구석 플레이리스트. 당신에겐 조금 낯선, 혹은 반가운 순간이 되길 바라며.

 

#아침 #침대 밖은 위험하니까 #음악으로 세계여행 
•Keren Ann - Les Mercenaires 
•Asgeir - In the Silence (Dyrð i dauðaþogn)

: 겨울을 싫어하는 내가 겨울의 매력을 알게 된 순간이 있다.  창문을 오래 열어두어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방안에서, 오직 몸만은 뜨듯한 장판과 극세사 이불로 보호된 채로 침대에 누워있을 때, 그리고 이른 겨울 아침, 제주도 여행에서 아우스게 일(Asgeir)의 음악을 만났을 때이다. 아이슬란드 가수인 아우스게일의 ‘In the Silence’는 ‘Dyrð i dauðaþogn’라는 제목의 아이슬란드어 버전으로 먼저 발매가 되었다. 발매 직후 아이슬란드 국민 열 명 중 한 명이 소장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져 영어로 번안된 앨범을 내게 됐다. 하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추운 나라의 뮤지션들은 기가 막히게 찬 공기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잘 만든다. 어쿠스틱 사운드 바탕에 공간감 있는 우아한 보컬이 아이슬란드 풍경을 담은 가사와 어우러져 차분하고 투명한 겨울 아침이랑 잘 어울린다. 

#정오 #맛점 #오늘의 추천요리 
•염신혜, 선우정아 - Blossom 
•이소라 - Rendez-Vous


: 겨울 볕이 방안에 차오르는 점심시간, 그저 한 끼 때우기 위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잘 차려진 밥상을 나에게 대접 
하는 것도 중요한 일. 그리고 그럴 땐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의 재즈 음악을 찾아 듣는다.

이소라의 랑데부(Redez-Vous)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보사노바로, 그녀의 4집 앨범인 ‘꽃’에 수록된 곡이다. 이소라의 목소리는 어떤 곡이냐에 따라 온도를 달리하는데, 이 곡에 들리는 따듯하고 담백한 그녀의 목소리와 보사노바가 겨울 오후에 오밀조밀 잘 녹아든다. 

#오후 #햇살이 창문을 넘을 때 #차 한잔 
•Hekuto Pascal - Fish in the pool / 花屋敷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OST)   
•Jazztronik - Room 204


: 차 한잔하며 멍 때리기 딱 좋은 시간. 이럴 땐 가사 없는 음악을 선호한다. 따스한 방안, 깊게 들어온 볕, 찻잔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그리고 이 공간을 완성하는 음악인 ‘Fish in the pool / 花屋敷’. Hekuto Pascal의 Fish in the pool / 花屋敷’은 일본영화 <러브레터>, <4월 이야기> 등을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에 나오는 곡으로, 가사 버전으로도 들을 수 있다. 감독 특유의 아련한 감성이 담긴 영상에 음악이 고스란히 녹아들 수 있었던 이유는, 감독인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만든 3인조 유닛 밴드 ‘헥토 파스칼’이 음악을 담당했기 때문인데, 현재는 6인조로 재편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함박눈이_나린다. 
•Various Artists - Dream Scenery II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OST) 
•이문세 - 옛사랑 
#해질녘 #단지 오늘의 해가 넘어가는 것뿐인데 
#낯선 감정 
•테시마 아오이&칸노 요코 - Because 
•김윤아 - 길 (드라마 ‘시그널’ OST)
: 일찍 지는 해가 아쉬워서일까? 겨울 하루 중 이 시간대에 유난히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감정으로 마음이 일렁인다. 그리고, 그래서 김윤아의 길을 찾게 된다.  드라마 ‘시그널’에서 김혜수의 메인 테마곡으로 사랑받았던 김윤아의 ‘길’은 전반적으로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도브로>라는 어쿠스틱 기타의 보틀넥 주법을 활용해 마치 황야, 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질감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 위에 김윤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보컬이 매력을 더하며, 낯설지만 익숙하기도 한 감정들이 흘러갈 수 있게 도와준다. 

#저녁 #춥지만 따뜻하니까 #겨울답다 
•Honne - Warm on a cold night 
•Toki Asako - Black Savanna 
  
•에피톤 프로젝트 - 플레어 (Vacal. Azin) 
: 긴 겨울밤의 시작, 조명이 방을 밝히는 저녁에는 분 위기, 상황에 따라 듣고 싶은 음악도 달라진다. 저녁 식사와 함께 가 
볍게 한잔할 수도, 랜선 파티를 하며 도란도란 수다를 떨 수도, 집중해서 과제를 하거나, 작업을 할 수도, 캔들이나 워머의 은한 불빛 아래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도. 이렇듯 각자의 겨울밤은 다르겠지만, ‘Honne’의 ‘Warm  on a cold night’로 시작하는 밤은 꽤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밤 #온기가 필요해 
•양희은 -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말 
•이소라 -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자이언티 - 눈 (feat.이문세) 
  
: 겨울엔 ‘춥다’ 하나로 온기를 갈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생존에 직결되는 온기부터, 소소하게 즐기는 따스함까지. 당연히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줄 음악도 필요하다.  자이언티가 작사, 작곡한 ‘눈’은 자이언티와 이문세가 함께 부른 곡이다. 어렸을 때 눈이 오길 바랐던 기억에서 시작된 노래라고 하는데, 둘의 음색의 조합이 묘하게 뭉클하다.  
눈이라고 썼지만, 희망이라고 읽어도 된다는 자이언티의 마음이 느껴지는 눈을 들으면 노래가 흘러가는 동안만 일지라도 포근한 온기가 채워지는 것 같다.

#새벽 #어둠은 문밖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자우림 - 샤이닝 
•Asgeir - Heimfrin
: 이따금 쉬이 잠 못 드는 밤이 찾아오면 그대로 새벽까지 내 달린다. 그런 새벽을 채워주는 건 자우림의 ‘샤이닝’이다.  
 ‘꼭 필요한 부분만 채워 놓은 연주의 소박한 분위기, 슬픈 진실을 이야기하는 존재에 대한 노래.’ 자우림 6집 타이틀곡을 고민할 당시, 김윤아가 ‘샤이닝’에 대해 언급한 듯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그녀의 말처럼 꼭 필요한 부분만 채웠기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공감과 위로를 준다. 가사 그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깊게 공감하며 위로를 받고, 어느새 괜찮아져 잠이 들기도, 혹은 조금 울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연말에도 #신나게 #놀기도 하며 살아가세 
•넬 - 사는게 니나노 (넬 ver.) 
•Otto know - Dying for you


: 몇 년 전, 페이코에서 국악 ‘태평가’를 여러 아티스트가 자신의 스타일대로 작업해 보여주는 광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중, 12월에 발표된 넬의 ‘사는게 니나노’는 밝은 정서인 태평가가 넬을 만나 모던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특유의 멜랑꼴리하지만, 공간감이 풍부한 사운드로 12월 겨울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 시국이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유행한, 유독 허탈하고 허망했던 2020년도 한 달 남짓 남았다. 그렇다고 2019.5년으로 만들지도 못하니 다소 억울하고 어정쩡한 한 해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일상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절실하게 느낀 한 해이기도 했다.  부디 안전하고 평온한 연말이길. 코로나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길. 그런 바람을 담아 오늘도 내 방구석에서만큼은 니나노 니나노 늴리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