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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26호] 새로운 ‘인간적인 것’을 위하여

 

새로운 인간적인 것을 위하여

- 권력이 빚어내는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들

 

 

 

자신 몸을 묶는 방식으로 사이렌으로부터 벗어난 오디세우스, 생존을 위한 자기희생의 신화 속 모델이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이해수

 

 

자기 다스림의 기술

 

자기를 다스림이란 것은 그저 단순히 살아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갖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활동이다. (어떤 생명체가 인간의 형체를 갖고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인간적인 것이란 범주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으로서 표현되든, 예절, 겸손과 같은 도덕적인 덕목으로 표현되든, 공동체에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하게 하는 어떤 인간적인 것이 존재한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이러한 요소를 학습하고 일정한 삶의 방식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구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인간적인 것은 선조들의 혁명과업이나 덕목에서 물려받아 그저 보존하고 지키기만 하면 되는 주어진 유산이 아니다. 동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인간적인 것은 어느 정도 주어진 것으로 공동체 속에서 학습된다. 그러나 일정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적인 것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것을 구성하며 변화시키는 과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도, 이데올로기적 교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인간되게 하는 공동체의 제반 조건들과 특정한 관계를 맺게 하는 일종의 기술(技術)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삶과 그 삶을 다스리는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가진 자기주체화의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생존원칙자기희생

 

필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이 자기계발이라는 형태로 점차 구체화되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위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자기계발이 일종의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로서 어떠한 원칙과 방식 하에 순환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기계발의 기술이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 기술이 각 주체들과 어떠한 모습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우선, 공동체와 자기계발 기술의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생존원칙이 그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살아남기가 사회의 원칙이 되는 경쟁사회에서 자기계발의 기술은 생존을 위한 기술로 구성된다. 시장화 된 공동체는 개개인들의 생애주기를 핵심적인 사회원리로 간주한다. 개인들의 전 생애에서 각 시기별로 삶의 기술들이 구체적으로 구성되고, 사회의 가치들과 제도들은 이 주기에 따라 재편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보다 총체화 되면 마치 사회가 하나의 유기체화 되어 생애주기를 갖고, 개인들은 사회의 인구로서 파악된다. 사회는 그 인구를 관리하고 제반환경을 통제하는 기술을 구성한다. 다음으로, 각 주체들과 자기계발 기술의 관계는 주체들의 자기희생이 필연적으로 전제된다. 돈을 벌기위해 자신을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가치전도현상은 지금의 자기계발기술의 핵심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가치가 시장가치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각 주체들도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목적과 수단의 전치과정, 개인의 물화(소외)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희생을 전제하게 된다. 개인들은 자기계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모든 가치로부터 탈 가치화 시킨다. 동시에 획일화된 경제적 가치로 자신을 재 가치화시키는 거듭된 변신과정 속에서 자신의 불안한 미래에 자신의 현재를 투자하는 식으로 자기희생을 반복하게 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인간적인 것’, ‘인간의 인간됨의 판단 기준은 철저히 한 사회 내에서 어떤 개인이 구현할 수 있는 경제적 힘으로 평가되고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업서열이 대표적인 예시다. 서열결정에 가장 큰 척도가 되는 경제적 힘이란, 단순히 개인이 버는 돈의 크기가 아니다. 해당 직업이 사회 내 자본흐름을 얼마나 쉽고 용이하며 광범위하게 통제, 관리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본래 직업(노동)이란, 서구사회에서 오래전 일종의 소명’, 즉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서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데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직업이 노동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는커녕, 안정적인 생활 확보, 공동체 내에서 발휘할 수 있는 경제적 힘 따위를 내용으로 하여, 한 개인의 인간됨을 판단하는 지표가 되고 있다.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와 군부정권기의 연속성

 

이 문제는 단지 자기계발담론이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요 근래 상황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조금만 뒤돌아보면, 군부정권시기 또한 생존을 위한 자기희생이 핵심 사회 원리였다. 60,70년대는 경제성장을 통한 생존이 핵심적인 사회동력이자 국가의 성장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전제하였던 시기, 현재의 희생을 통해 미래의 행복을 이루려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시기였다. 국가는 공동체와 국가구성원들의 관계를 주체가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 모델로서 구체화함으로써 손쉽게 살아있는 사람을 그 성장 동력으로서 취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기술 모델은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생존을 위한 국가경제성장을 최우선의 목표로 설정했다. 자기 계발을 공동체 발전과 연결함과 동시에, 개인들과의 관계에서는 자기희생, 성실, 근면 등의 요소들로서 국가가 원하는 국민성을 자발적으로 구성하도록 내면화시켰다. 여기서 개인들의 혈연관계는 그들의 희생이 그들 자식세대들의 혜택으로서 돌아올 것이라는 선전을 통해 기술 모델에 훌륭한 방패막이이자 촉진제로서 활용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식교육에 대해 부모들이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광기는 바로 부모세대들의 자기희생에 대한 반작용의 일면으로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군부정권시기 이후에 급속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등에 업고 등장한 세대들의 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그들 자신의 고민에 대한 대답은, ‘경쟁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그런 폭력적인 생존투쟁과는 다른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였다. 하지만 내용만 바뀌었을 뿐 핵심원리는 동일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되려 부모세대들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팽배한 자기계발의 원리를 비판하고 문제시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식세대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문구로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무엇이겠는가? 이는 바로 그들의 삶의 방식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 원리가 자기계발의 원리와 친화력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새로운 관계형성을 위하여

 

삶의 방식이 여전히 희생의 원칙과 생존의 법칙이라는 원시적 원칙을 따르고 있는 사회가 과연 진보한 사회, 문명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을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자신을 이런 폭력적 운명 속으로 가두어 버리게 되는 사회에서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어떤 이상적인 상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의 상황을 한 번 더 심각하게 되짚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조건, 그리고 끊임없이 전승되어 내려오는 희생의 원칙과 생존의 법칙에서 그저 도망치듯 눈을 돌린 채 자기기만적으로 이상화된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의 공동체의 제반 조건들과 관계 맺기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주체화하는 삶의 방식, 기술이기에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고 자유로워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생존의 법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는 폭력적인 공동체삶의 기술주체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해서, 이 관계가 단지 먹고 사는 문제인 생존의 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다. , 이 관계를 생존의 법칙 같은 원초적인 법칙이 아니라 좀 더 고상한 인간적인 가치로 바꾸는 것을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쉬운 접근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생존의 문제가 폭력적 관계에 붙들려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이 죽고 사는 문제조차도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사회에 포획되어 관리·통제되는 위급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폭력적인 관계의 시급한 해소와 더불어 새로운 관계 형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어떠한 방식과 어떠한 모습으로 해체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식을 생존의 차원이라는 단계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의 유무가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