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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8호] 탈현대사회 대안공동체

 

 

이동수_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 서론

본래 근대국가는 개인들의 자기보존을 도와주고 보호하기 위해 존속하는 인위적이차적인 것으로서, 개인들의 집합체인 시민사회보다 하위의 존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달, 관료제의 확대, 상비군 제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국가 부의 축적 등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지위는 점차 공고화되었다. 그 결과 근대국가는 오히려 구성원인 국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동원하고, 복종을 강요하면서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체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국가로 인한 질곡은 당연히 국가의 해체를 요구하게 만든다. 18세기 말 제기되어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아나키즘은 국가를 해체하고 국가적 삶과는 다른 자발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아나키즘의 원칙은 자연론적 사회관, 자주적 개인, 공동체의 지향, 권위에의 저항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은 단순히 무정부 상태나 구속되지 않는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동체적 개체성’(communal individuality)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나키스트들의 노력은 20세기 초반에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프랑스 68혁명 이후 서구 탈현대사회에서 다시금 아나키즘이 부활되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를 모두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환경, 평화, 여성, 인권, 반핵운동과 같은 생활정치적 이슈를 제기하는 신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국가, 자본, 공산당, 그리고 모든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질서에 반대하면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복원을 추구한다.

신사회운동의 근저에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전제되어 있다. 과거의 계급중심적이고 체계변동적인 구사회운동과 달리 신사회운동은 국가를 비롯한 체계 자체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시민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통해 자율적이며 공동체적인 삶으로의 이행을 주장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대안공동체 운동으로 전개된다. 대안공동체는 국가주의적 삶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과거의 아나키즘과 달리 국가를 전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국가에 도전하여 체계적인 억압과 구속에 저항하면서, 다른 한편 국가 내에서 국가적 삶과는 다른 대안적 삶을 위한 공간을 새로이 형성하고자 한다. 이 글은 이러한 탈현대사회 대안공동체의 이론적 전거, 특징, 의의, 한계 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 근대 아나키즘의 전개

아나키즘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 정신을 잇고 인간의 가치와 자율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자본주의와 소유제도의 문제점을 수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당시 풍미하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과도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를 부정하며, 일반적으로는 권위의 원칙에 대한 부정으로 정의된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라는 조직체가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과 주인으로서의 삶을 방해하면서 강제와 억압을 통해 인간의 소외와 사회의 혼란을 부추겨왔다고 평가하고, 인간들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와 권위적 위계질서의 철폐를 정치적 목적으로 삼는다.

먼저 최초로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명명한 프루동(P. Proudhon)은 오히려 국가가 혼란을 가져온다고 보고, 혼란과 무질서를 벗어나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진정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코뱅의 통치와 같은 권위적 지배가 아니라 모든 국가와 정부의 지배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프루동은 프랑스 혁명이 국가의 폐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사회혁명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자코뱅의 통치는 군주정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이며, 그 결과 또 다른 지배를 가져왔을 뿐이다. 또한 민주정도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강제이며, 권력에 의한 지배라는 속성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단순히 정치적법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는 경제적산업적 관계의 변화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프루동이 추구하는 아나키적 이상사회는 분화된 기능으로 구별되면서, 협상과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성에 의해 통합되어 있으면서, 힘에 있어서 평등하고 종류에 있어서 다양한 수많은 생산적 기업들로 구성되는 사회이다.

그런데 프루동이 보기에, 현존 경제관계에서 제일 문제되는 것은 소유이다. 진정한 사회적, 경제적 변혁을 가져오는 사회혁명은 소유제를 철폐하고 상호주의를 통해 노동, 교환, 신용, 교육에 있어서의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다. 평등한 사회에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평등한 생산자들의 교환관계 속에서 상호관련된 사회조직이 형성될 것이고, 이것은 국가의 권위적 지배가 아니라 구성원간의 평등한 계약이 법률을 대신해 상호주의적 사회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소유가 폐지되고 평등한 교환관계가 회복되면 인간에게 국가란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된다.

한편 크로포트킨(P. Kropotkin)에 있어서 아나키즘은 단순히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행위하는 삶 속에서 개인의 자아발전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아나키즘은 개인성의 완전한 발전이 자발적 결사의 가장 높은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자연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이러한 자연적인 경향이 전도되었을 때이며, 인류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대성’(solidarity)이다. 이런 점에서, 크로포트킨은 천박한 신다윈주의자들에 반대한다. 진화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들간의 연대성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연대의 법칙은 단순히 미망에 사로잡혀 꿈꾸고 있는 비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가 역사 속에 기입되어 있으며 과학에 의해 증명되었다고 본다.

프루동을 따라 크로포트킨은 경제교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프루동과 달리, 생산수단의 소유와 분배가 사라지면 경제적 교환관계가 아예 성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따라서 그는 사적 소유는 인정하되 다만 개인적인 사용을 위한 사적 소유의 형태로만 남아있어야 하며, 화폐를 없애고 상품은 필요에 의해서만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임금제도가 폐지되고 최대한의 자신의 능력에 따라 공공복리를 위해 공헌하는 모든 자들이 가능한 자신의 최대 필요에 따라 사회의 공공적인 재고로부터 향유할 수 있을 때에만 평등한 사회조직이 생길 것이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역사는 아나키즘의 노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사회혁명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1인터내셔널에서 프루동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패퇴한 이래 공산주의의 그늘에 가려졌다. 혹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기뻐서 혁명에 동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에게는 자유란 없어도 되는 사치품이었으며,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결국 체포되거나 처형되고 말았다.

 

. 국가의 반격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의 사회혁명에 대한 전망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필자는 아나키스트들의 실패가 그들의 낙관주의적 오류에 기인하고 있으며, 푸코(M. Foucault)와 하버마스(J. Habermas)의 분석이 아나키스트들의 잘못된 판단을 수정할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즉 근대국가체제는 단순히 물리력과 경제력의 독점을 통해 인간을 억압하고 사회를 통제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정신적 차원에서 국가의 필요성, 애국심, 국민국가를 강조하면서 국가체제에 잘 길들여진 근대인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사회혁명이 아나키스트들의 전망처럼 탈국가적 성격을 띠기보다는 국가주의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먼저 푸코가 보기에, 권력은 단순히 국가가 행사하는 물리력, 강제력, 행정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물리적 힘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에 침투하여 사회 자체를 생산하고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기제가 사회 전반에 걸쳐 편재한다손 치더라도 국가는 실제 권력관계의 모든 분야를 다 점유할 수 없으며, 더욱이 국가는 다른 것에 기초해서만 즉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에 기초해서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육체, (), 가족, 지식, 기술 등을 투자하는 전체 권력네트웍과 관련하여 초구조적이다. 따라서 권력은 단순히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현상에 관련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네트웍으로 구성된 권력은 단순히 억압하고 강제하는 힘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배제하고, 억압하며, 검열하고, 호도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지만, 푸코에게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권력의 본질이 아니다. 권력은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며, 사회의 담론과 가치 그리고 사회생활 전반을 유도하고 생산하는 힘이다. 이러한 권력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 왔다. 봉건시대에는 사회적, 종교적, 윤리적 지배의 형태로 행사되었으며, 19세기에는 착취하는 경제적 권력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주로 훈육적 권력을 사용하여 교활한 방식으로 종속과 복종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한편 하버마스에 의하면, 단순하고 분화되지 않은 전통사회에서부터 복잡하고 다양해진 근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사회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권력과 체계가 근대적 통제체제를 강화시켜왔다. 특히 근대로 접어들면서 권력의 성격이 변하여 사회 체계(system)를 발전시킨다. 전통사회에서는 고대적 제도들에 의해 비교적 사회와의 분리 정도가 약한 상태로 제도의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근대사회로 접어듦에 따라 제도들은 생활세계적 삶을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제도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운영되고 힘이 행사되는 기제로 강화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런 체계화의 계기는 생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 자유방임적 시장의 논리라는 경제체계 외에 국가라는 체계의 힘이 시장개입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자본축적으로 인해 경제적 성장은 비교적 자생적으로 제도화되지만, 산업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시장경제에 강제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가는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국가는 더욱 억압성을 띠게 된다. 이 과정을 하버마스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매체에 의해 조종되는 경제와 국가라는 하부체계가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과정을 침해하는 생활세계의 식민화현상이라고 설명한다.

 

. 대안공동체의 실험

푸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근대인들이 권력에 의해 길들여지고, 하버마스의 분석처럼 생활세계가 체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면, 아나키스트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인간이 국가의 족쇄로부터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푸코와 하버마스는 인간이 권력과 체계에 의해 훈육되고 억압되는데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자유로운 생활세계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새로운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체제변동을 위한 혁명보다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생활세계에서 직접 실천하면서 국가체계나 경제체계의 논리와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생활의 변화를 지향한다. 과거 계급주의적 사회운동과는 달리 사회의 모순을 삶의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문제의식 아래 시민사회의 복원과 시민운동을 통한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며, 그런 점에서 신사회운동이라 불린다.

이 운동은 19-20세기에 논의되던 공산혁명론이나 아나키스트들의 사회혁명관과는 다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폐해로 말미암아 근대사회가 모순과 착취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시키는 공산주의 혁명을 목표로 삼고 필요에 따라 공산주의 국가를 용납하는 태도를 취했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종류의 국가는 억압기제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자율적주체적 방식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국가 자체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오늘날 생활양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신사회운동가들은 국가란 억압적인 구조임에 틀림없지만 분화된 사회를 체계 수준에서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제로 인정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초점을 국가를 비롯한 사회체계의 폐지나 재편보다는 생활세계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생활세계적 삶의 복원에 집중시킨다.

이런 신사회운동은 대안공동체를 형성하여 국가체제 내에서 다른 종류의 삶을 체험하고 교육하는 터전을 마련하고자 한다. 대안공동체 운동은 과거 아나키즘과 달리 국가 자체의 소멸을 추구하지 않으며 일정한 영역 내에서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대안적 삶을 경험하고 인성의 변화를 꾀함으로써 전체 사회구조 내에 생활세계를 확보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안적인 다양한 종류의 실험적, 정신적, 교육적 생활공동체를 지향한다. 여기엔 핀드혼(Findhorn)을 비롯해, 트윈오크스(Twin Oaks),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 아난다 협동마을(Ananda Coopertive Village) 등이 포함된다.

이 중 스코틀랜드의 핀드혼은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소위 빛의 네트웍즉 정신적으로 조화를 이룬 사람들로 이루어진 네트웍의 결성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따라서 핀드혼의 초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에 맞추어져 있다. 매년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3-6천명의 사람들을 교육하고 있으며, 이런 교육활동이 그들의 주된 수입원이다. 따라서 핀드혼은 스스로를 정치적 집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공동체이자 수도원이고, 대학이자 빛의 학교로 간주한다. 그러나 핀드혼을 자신의 영구적인 집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대체로 이곳을 정신적인 삶을 영위하고 동시에 실제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얼마 동안 머물러 사는 곳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배울 만큼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한다. 구성원들의 평균 체재기간은 대략 3년 반 정도이다. 핀드혼 공동체의 규칙은 오직 두 가지만 있다. 하나는 불법 약물을 복용할 수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흡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핀드혼의 탈정치적 원칙이다. 핀드혼은 공동체를 어떤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한편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는 예전에 군사기지였다가 버려진 코펜하겐 외곽의 조그만 섬을 공동체로 만든 경우이다. 1971년 프랑스 68운동에 고무된 젊은이들과 집이 없어 머물 데가 없던 사람들이 그곳을 무단으로 점거하였고, 그 후 몇 년 동안 천 여명의 거주자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집단이 156곳의 버려진 군 건물들을 집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곳 주민들은 자주관리 제도 하에서 직업을 새로이 만들어 경제활동을 돕고 있으며, 주민 각자는 공동체 기획과 공공설비를 위해 임대료를 공동체에 지불한다. 이곳의 특징은 고대 덴마크의 합의에 이르는 의사결정 형식인 팅(Ting)의 권위만이 인정된다는 점이다. 팅 모임에서는 모두 원형으로 둘러앉고, 각 거주자는 중앙으로 나아가 말하며, 결정은 다수결보다는 최종적 합의를 통한 모든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합의란 종종 의견이 다른 개인들이 한 집단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서 공동의지를 정식화할 수 없게 만들고 내부 분쟁을 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비해, 팅은 크리스티아니아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재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 결론

대안공동체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의 낙관주의적 오류에 따른 실패를 거울삼아 권력이나 국가체계와 병립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주목하여 현대사회의 질곡을 넘어설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문제점은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비록 대안공동체주의자들은 과거 유토피아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전제로 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본성적으로 질서와 조화를 지향하며 교육과 계몽을 통해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낙관주의적 전망과 맥을 같이 한다.

물질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는 대안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인 걸림돌로 작용한다. 기존의 자본주의적 삶, 국가적 삶과는 다른 양식의 삶을 살더라도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경제적,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동과 일이 필요하며 사유재산의 인정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대안공동체 구성원들은 과도한 노동이나 사유재산 인정, 물질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공동체를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규모가 항상 소규모로 한정되어야만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대안공동체가 점점 커져간다기보다는 그러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소규모의 수많은 공동체들을 여기저기 세워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즉 대안공동체의 크기는 항상 인간적 규모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결국 대안공동체가 대면집단의 성격을 갖는 일차적 집단과 같은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안공동체운동의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대안공동체주의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아직도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지만, 우리가 또한 유의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국가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면서 제한된 공간에서의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대안공동체주의자들은,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넘어서려는 노력으로서 모더니즘 내에 기입되어 있는 것처럼, 항상 자신의 존재를 국가적 삶이라는 큰 테두리 내에서 다른 종류의 삶의 체험을 통해 국가적 삶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안공동체의 일차집단적 성격이 탈정치화의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도시화된 현대사회에서 대면집단적 공동체가 제공해주는 삶의 양식을 다시 체험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공동체는 단순히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이미 이차집단인 현대사회 속에서 다시금 일차집단에 대한 기억을 상기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정치적 질서를 재편하려는 실험적 노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