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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21 [126호] 민주주의가 어쨌다구?
  2. 2012.02.04 [108호] 소크라테스에게 길을 묻다 (1)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11.21 01:27

 

 

민주주의가 어쨌다구?

 

 

최영화/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수료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독일에서 또 다른 독재정권이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니?” 아이들은 주저 없이 답한다. “그런 일은 이 나라에서 다시 발생할 수 없어요.” 그러나 단 일주일 만에 이들의 믿음이 완전히 무너진다. 2008년 독일에서 개봉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화 <디 벨레(Die Welle)>는 실제로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주일간의 파시즘 수업과정과 그 결과를 충격적으로 재현한다. 애초 민주주의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기획된 체험학습이었으나, 점차 권력과 군중심리에 도취된 아이들이 파시즘 운동에 열정적으로 동조하게 된 것이다.

히틀러와 제3제국의 몰락 이후, 나치에 관한 긍정적인 묘사를 철저히 금기시하고 있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단지 나치즘을 비판하거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대신 지난 세기 파시즘의 만행을 목격한 후에도 오늘날 다시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좌파에 대한 대중들의 냉소와 반감이 높은 현 상황은 과거 유럽과 아시아에서 파시즘과 독재정권이 등장하는 데 조건이 되어준 사회경제적 상황과 유사한 면이 있다. 게다가 독재와 파시즘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청년세대들은 그에 대한 경각심마저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하는 것은 결코 기우가 아닌 것이다.

 

영화 속 파시즘 수업에서는 배제를 통한 집단화를 학습한다. 수업 첫날 교사는 성적순으로 좌석을 재배치해 우열을 가린다. 그것이 집단을 위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설명하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지침에 따른다. 이 결정에 반발한 한 학생만이 교실을 박차고 나갈 뿐이다. 여기서 서열화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어떤 집단을 위해 더 좋은 방식인가를 묻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수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분명 민주주의의 미덕이지만, 그 결정에 의해 소수가 배제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어떤 집단주의’, 더 나아가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쉽게 간과된다.

히틀러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총통의 자리에 올랐듯이,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 집단의 수장이 된 교사는 즉시 자신의 허락 없이는 발언을 할 수 없도록 규제한다. 그 밖에도 여러 집단활동을 통해 구성원들이 집단의 위력을 체감하게 만든다. 나치가 히틀러 유겐트를 조직해 운영한 방식처럼 학생들이 권위에 복종하고 권력을 내면화하도록 훈육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다수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이 강압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이 또한 다수의 동의가 반드시 민주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업 이틀째 되는 날에는 복장을 통일하고 조직의 명칭을 물결이라고 지어 집단의식을 갖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유니폼 입기를 거부한 또 한 명의 학생이 왕따를 당해 자연스럽게 수업에서 배제된다. 이런 식의 배제와 추방을 통해 집단의 내적 일체감은 더욱 공고해진다. 교사의 권위에 순응하던 아이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조직을 상징하는 로고를 만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매체인 마이스페이스에 클럽을 개설해 온라인상에서도 항시 집결한다. 나치 식 경례처럼 그들만의 인사법까지 만들자, 아이들은 강렬한 집단의식에 도취돼 패거리를 이루어 다니며 거침없이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 속에서 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주체가 바로 10대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 파시즘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은 집단의식과 집단행동이 세상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던 자신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음을 인정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원자화된 주체로서 느끼는 불안감이 일부 해소되고, 개인적인 경쟁관계가 유대관계로 봉합됨에 따라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 동질감을 통해 집단정체성을 재구성할 수도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주로 배제된 자들이 집단에 소속되길 열망한다. 애초에 아무런 전망이 없는 사람들, 상황이 나아지든 나빠지든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로 남아있게 될 사람들을 바우만(Zygmunt Bauman)잉여라고 일컫는다. 그에 따르면, 잉여는 경제발전과 지구화가 만들어낸 불가피한 산물로서, 생산에 전혀 기여하지도 않고 참여하도록 요청 받지도 않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존재하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 배제된 존재들의 불안과 공포가 타인에 대한 배제를 조장하고, 이것이 잠재적으로 새로운 인종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 파시즘을 소생시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아렌트(Hannah Arendt)도 실천적이론적으로 전체주의가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잠재적 원인을 잉여 존재의 만연에서 찾는다. 실업, 인구과잉, 사회적 아노미, 정치적 불안과 같이 개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현상들이 전체주의적 해결방식에 대한 유혹을 부추긴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이러한 논의들은 높은 실업과 사회적 부정의, 정치적 환멸이 만연해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좌빨이라는 용어가 유대인의 별처럼 낙인의 인장으로 쓰이며, 국민에 대한 국가의 사상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어 있음을 매일 목도함에도 그럴 줄 알았다혹은 그래서 어쩌라고식의 냉소적 반응이 팽배해있지 않은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극우 성향의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와 같은 극단적인 냉소주의 집단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배양된 것이다. 맑스주의 철학자 발리바르(Etienne Balibar)도 유럽에서 네오파시즘의 형성을 지켜보며, “노동과 소비로부터의 배제든, 신분과 인정(認定)으로부터의 배제든, 전망으로부터의 배제든 간에, 배제된 청년들에게 민주주의란 공허한 말이 될 위험이 크다”(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2007)고 지적한 바 있다. 일베 사용자들의 민주화에 대한 조롱이 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들에게 민주화란 자신들을 일베충으로 매도하는 배타적 논리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화 당했다라는 표현에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 지우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일베 회원들이 사회의 지배층이 아니라 여성과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전라도 출신자 등 소수자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민주화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것을 일베충들의 찌질한 유희 정도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배제된 자들의 배제심리가 언제든 새로운 파시즘의 동력으로 결집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 주간의 파시즘 실험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스스로 권력을 가졌다고 오인한 교사는 자신이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학생들 또한 물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자 교사가 학생 전원을 체육관에 소집시킨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이 조직을 배신한 한 학생을 공개처단하고 싶어 하자 교사가 묻는다. “주초에 했던 질문을 기억하나? 독일에서 독재가 다시 한 번 가능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발생했구나. 파시즘이.”

 

그러나 그가 실험의 종료를 선언하자 아이들이 저항한다. ‘물결이 해체되는 순간, 조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되고 그들은 다시 무력감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십대 청소년으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돌아갈 곳이 물결뿐인 한, 이 파시즘 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이 파시스트 조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파시즘의 도래를 막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케케묵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경멸뿐만 아니라 좌파에 대한 반감으로 언제든지 파시즘 운동에 동조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배제된 대중들이다. 일베 게시판에 학위와 자격증을 인증해가며 스스로를 통상적인 잉여와 구별 지으려는 이나, 자살한 조부의 사진을 찍어 게시하며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소년은 모두 어떤 면에서 스스로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자들이다. 쉼 없이 분란을 일으켜서라도 세상에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자들, 그들을 박멸해야 할 벌레 정도로 여기는 한, 파시즘은 어떻게든 오고야 말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발생한 역사적 파시즘만이 파시즘인 것이 아니다. 파시즘을 과거에 이미 발생했고, 얼마든지 다른 양상을 띠며 반복될 수 있는 대중운동으로 보는 편이 역사의 실패로부터 배우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따위의 천진한 구호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주도한 파시즘과 똑같은 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건만 갖춰진다면 그보다 더 유연하면서도 더 강력한 형태의 파시즘이 출현할 가능성은 잠재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오늘날 한국에서 파시즘이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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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7:57


엄정식(철학과 명예교수)

소크라테스에게 길을 묻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과 고대 아테네의 역사적 상황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치던 그 절박한 상황이 우리의 입장과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들과 우리들 사이에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엄청난 거리가 가로놓여 있고, 또 급속한 과학 문명의 발달로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양자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고 이것을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이 더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유사점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아테네를 통해 한국을 보다

우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결 구도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아테네는 오늘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했던 반면, 스파르타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공산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적 평등과 국가적 일체감을 강조하였다. 사실 그러한상황에서 싹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오늘날 조국의 분단을 초래하고 남북한의 대결을 첨예화했다고 볼 수도 있는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분단의 구조가 한민족의 발전을 저해하고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들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아테네와 남한 사이에는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여 상업주의가 정착되고, 이에 따른 개인주의적 민주화 과정이 급속하게 진전되었다는 유사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치의 창조에 관여하게되며, 따라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혹은 가치의 다원화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을 정치적으로 반영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상업화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업주의가 팽배해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욕구가 분출하고 이해가 서로 충돌해서 투쟁과 분규가 끊길 날이 없고, 허술한 통치 체제를 틈타서 각종 부정과 부패, 퇴폐와 향락 등의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테네와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세번째 유사점인 것이다. 아마 이 밖에도 고대 아테네와 현대의 우리나라 사이에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분단의 대결 구조 및 퇴폐와 향락을 조장하는 상업주의 그리고 민주화란 미명 하에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정치 풍토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표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 던져진 소크라테스의 질문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크라테스의“너 자신을 알라”라는 외침은 지금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시민들을 향해서도 울려 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일깨우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우선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다음 자기의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적 무지의 자각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의 행적과 죽음에 임하는 태도로부터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들을 놀랍게도 많이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이며 반성적 생활 태도 그리고 자율성, 합리성 및 도덕성을 강조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한 사람이면서 다른 성현들과 달리 제자를 거느리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지식이나 지혜를 과시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떠한 선입견이나 전제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누구와도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에서 개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어떠한 종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논증을 통해서 검토한 후 그 결과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비판적 합리성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정치적이든, 지적이든 혹은 종교적이든 무조건적 권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판적인 태도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까지 겨냥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고, 이것은 곧 삶 전반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이어졌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결국 아테네 시민들의 분노를 자초했고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그것은 성숙한 시민의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으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인권의 신장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갈등 구조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접근 방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위대한 면모는 역시 그의 이른바 ‘철학적 순교’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결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지인들의 배려로 탈옥의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 준법정신, 신과의 약속 이행 등으로 그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독배를 마신다.물론 이러한 그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가령 국가관이나 종교관 혹은 법리적 해석에서 그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고려한 세 가지 사항, 즉 자율성, 합리성, 공평성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민주 사회의 토대 : 자율성, 합리성, 공평성

소크라테스가 생사의 기로에서 맞이한‘도덕적 상황’에서 우선 염두에 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이었다. 무슨 결정에 도달하든 그는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친지의 충고나 관습 혹은 주위의 억압이나 위협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을 능동적으로 판단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그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였다. 여기서 그가염두에 둔 것은 감정에 치우치거나 충동에 의해 행동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나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특전이며 최선의 기능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였다. 특히 상황이 절박하고 위태로울수록 더욱 냉철한 이성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결과가 지닌 공정성을 문제 삼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혹은 해로운지가 아니라 과연 옳은 것인지 혹은 그른 것인지만 고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판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자신에게 해롭다고 하더라도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그것을 선택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성의 기초이자 정의의 원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도출한 덕목은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는 민주사회의 성숙한 시민의 자질을 갖추는 데 특히 중요한 사항들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면 사회적 혼란을 줄이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자만심을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전횡과 부패, 종교적 권위와독단에도 숙고와 반성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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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신애 2014.03.14 00:58  Addr  Edit/Del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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