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11. 20:37

비정규교수의 제도적 지위와 생계 문제는 교수 사회의 고착화된 계급질서와 사회 곳곳에 번져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에 기인한다. 비정규교수처우 문제 등 대학 내 민주화 요구를 가로막는 관료화된 교수 사회의 구조, 그리고‘신분의 벽’(교원 자격)을 경계로 한 침묵의 카르텔 현상에 대한 필자의 비판을 새겨듣고자 한다.

홍영경 (성공회대 비정규교수노조 분회장)



“강사 못 구해 폐강 속출”

이는 2009년 9월 14일자 교수신문 일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이번 학기에 많은 대학의 강좌가 수강신청 인원 미달이 아닌 담당교수의‘정리’ 취소된 사연을 취재한 기사다. 기사는 2학기 강의에 배정되었다가 수강신청이 모두 끝난 상태에서 느닷없이 ‘짤린’ 강사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도 인사 담당부서의 형식요건을 갖춘 해고 통보를 받은 게 아니라 한 다리 건너, 즉 학과 사무실(조교)과 지도 교수에게 들었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보도한다. 그 ‘단칼배기’ 는 강사를 교육자로도 노동자로도 인정하지 않고 학생들의 학습권마저도 배려하지 않는 대학의 독단만이 있다. 그런 비교육적 처사가 우리나라 대학 여지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르칠 적격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제까지 강의를 하던, 학생들에겐‘교수’소리를 듣게 하던 멀쩡한 교육자를 단지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내쳐 교과과정 운영에 차질을 빚은 이 사태는, 다들 잘 알다시피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을 교육현장에 꿰맞추며 일으킨 유감스런 교육 파행이다.

조용한 해고, 조용한 대학가

2학기 개강을 전후해 일어난 혼란은 대체로 소리 없이 진행되어 노조가 있는 소수 대학을 제외하면 대학가는 조용하다. 단지 언론을 통해 보도가 조금 됐을 뿐, 캠퍼스는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이 오간다. 이번 사태는, 법조문에 따르면 2년간 강의한 비박사 강사들을 무기 계약으로 전환시켜야 하는데 대학에는 씨도 안 먹힐 요구라 대량 해고 사태로 번진 것이다. 강사의 고용 유연성은 그야말로 ‘말랑말랑’ 이런 식의 해고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어떻게 최고교육기관에서 그렇게‘배움이 높은’사람들을 손쉽게 정리할 수 있고 또 대량해고가 발생해도 별일 없이 지나가는가?

일반 사업장 같으면 파업이나 농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 사안이건만, 해고 당사자들은 왜 입조차 열지 않는가? 이 기이한 현상은 강사의 고용이보통 전임교수의 추천과 단기채용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데서 비롯된다. 교수임용 절차를 거쳐 정규직에 채용된 전임강사 이상의 교수는 교원에 대한예우로 철저한 신분보장을 받으며 교육과 연구에 자율권을 갖는다. 반면 강사는 그들과 똑같은 교육을 담당하지만 신분이 법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보통 전임들의 천거로 얻는다. (강사 수급에 어려움이 있는 대학들은‘공채’ 하기도 하나 신분이나 조건이 별다르지 않다.) 대학 수가 많지 않던 초기 시절엔 강사직이 교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교원의 신분이었다. 도제 관계의 의미가 퇴색한 지금도 자체 대학원이 있는 큰 대학의 강사는 전임과 사제의 관계에서 출발할 확률이 높다. 특히 지도교수의 영향력으로 모교나 타교에서 강의를 시작하는게 보통이다보니 한 노동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지도교수나 추천 교수에게 누가 될까봐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다. 다른 대학에 출강하려 해도 비슷한 임용과정을 거치기에 몸을 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현재 벌어진 해고대란에 대한 실직 당사자들의 자괴감만 있을 뿐 대학이 무풍지대인 이유이기도 하다. 강사에게 법에 따른‘품격 있는’해고 절차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비정규 교수의 벌거벗은 위상

주로 비공식 절차를 거쳐 교육활동을 하는 강사들, 그들의 현재 위상은 어떤 것일까? 대부분의 대학에서 강사는 교육의 절반가량을 맡고 있고 강의 시수는 보통 교수보다 적어 각 대학의 강사 수는 교수의 수를 넘어선다. 이런 풍토를 가능하게 하는 건 고등교육법 상에서 교육 또는 연구를 맡길 수 있는 자를 “교육과정의 운영상 필요한자”로 규정한 애매모호한 시간강사 조항 때문이다. 대학들은 이를 십분 활용해 강사를 아주 요긴하게 써 먹는다. 교과부의 묵인 아래 보통 전임교수의 충원을 50~60%대로 낮추고 그 부족에서 생기는 일반교과과정의 큰 공백을 대체로 시간강사에게 떠맡기며 (겸임, 초빙 등의 비전임도 둘 수 있으나 그 수가 많지는 않다) 학사를 편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5년도 교육통계를 보면 4년제 대학의 경우 전임교원 확보율이 약 60%로 전임교원(49,200명) 대 시간강사(58,315명) 비율이 44.8 : 55.2였다 (강사에 대한 통계는 어림수기 때문에 별로 믿을 건 못 된다).

2009년 통계가 아직 나오지 않은 지금, 2008년도 통계에는 전임이 54,329명으로 3년에 걸쳐 5천여 명 증가했고 강사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통계마저도 제공하지 않으니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학부생이 한 8만여 명 증가한 것에 비추어 보면 교수 대 강사 비율에 별다른 개선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고등교육의 큰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교육통계처럼 주무부서인 교과부는 태만하다 할 만큼 늘 강사문제를 방치해왔다. 그 틈을 타 교수 임용의 문을 좁혀 강사에게 대학 교육의 중책을 맡긴 상황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흔히 ‘전업 시간강사’ 라 불리는 대학강사는 대학교육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굳은 지 오래다. 이제 많은 강사의 교육과 연구 능력은 교수와 별반 차이가 없고 그 규모로 보더라도 하나의 전문 직업군이다.

강사가 도제가 아닌 독자 연구 능력을 갖춘 학자로 그 위상이 변모했어도 전임교수의 권력을 중심으로 한 대학의 철옹성 구조는 여전하다. 그동안 대학들은 자의적으로 대우교수, 강의전담교수 등의 자리를 만들었고 대우를 좀 더 격상한 비정년(Non-Tenure Track)교수직까지 두기도 했지만 이들은 전임 확보율을 올리기 위한 소수의 ‘무늬만 교수’들이었다. 비전임의 태반은 강사이며 이들에게는 법에 근거도 없는 시간당 보수 지급을 철칙으로 하고 전임 교수에게 그 인력 조달을 계속 일임하고 있다. 강사 임면권이 형식으로는 총장에게 있으나 실제는 전임 교수가 쥐고 있다(이번과 같이 법 시행과 관련된 인사 문제에서는 대학본부가 중심이 된다. 학과의 자율 결정이라고 잡아떼는 대학도 있지만). 공채 방식으로 임용되어도 단기채용에 시간급 대우는 똑같고 기간이 차면 알아서 나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주로 인맥으로 연결된 체제를 유지하는 이유는 사회보험이나 퇴직금 등의 부대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낮은 임금으로 고급인력을 대규모로 쓸 수 있는 데다 그들의 교권이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아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부대비용이라야 얼마 안 되는 산재 보험료와 고용보험료인데 이마저 거부하는 대학도 많다). 공채가 허울인 것은 바로 이런 관행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교과 개설이나 학과 회의 등에 열외인 강사는 처분을 기다리며,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신자유주의와 교수사회의 승자독식주의

법에 버림받고 주무부서가 돌보지 않는 강사에게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대학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고용 안정을 꾀할 리 없다. 강사를 대등한 학자요 교육자로 보지 않는 대부분 교수들 또한 자신들의‘파이’가 줄어들까 하여 강사들의 여건 개선에 나서지 않는다. 어느 보직 교수처럼 강사에 대해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 이라는 배타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바로 자신의 얼굴에 침 뱉기인 줄은 모른다. 대학 수강 신청 안내 책자에 보면 담당 교수란에 전임교수와 강사는 동등한 자격으로 이름이 올라 있고 강의평가도 같은 기준으로 받는다. 그것은 강사와 교수의 강의에 질 차이가 없음을 전제한다. 그러면서 검증 운운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결국 강사를 싸구려 시간급으로 대학 정규교육의 절반에 상시 쓰고 있는 대학은 학생들에게 사기치고 있거나 노동 착취를 하는, 두 가지 불의 중 하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교수임용의 문을 좁혀 강사에게 대학 교육의 중책을 맡기면서 고용이 불안정한 일용직에 놓고 교육자로도 연구자로도 대우하지 않는 이 부당행위는 대학교육 및 학문 발전을 가로막는 작태다. 승자 독식 체제에서는 다양하고 좋은 연구 성과가 나오기 어렵다. 수많은 패자는 그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정해진 서열에 목소리가 잠겨 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강사는 언제라도 그 알량한 지위마저 잃을 수 있는데다, 처우가 기본 생활마저 위협할 수준이라 이대학 저대학을 돌며 적정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강의를 해야 하니 학자로서의 연구능력 또한 소진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그리고 이는 대학교육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강사들이 처한 열악한 여건은 우수한 학생들이 국내 대학원 진학을 꺼리게 하는 한 요인이 된다. 활발한 학문 논쟁보다는 사제지간의 질서가 우선하는 국내 대학에 뛰어난 학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학은 소수의 능력자로는 발전할 수 없다. 다양한‘끼’가 발산되도록 수평의 문을 넓혀 자극을 할 필요가 있다.

오직 교원 자격 부여만이 해답

이번 비정규직법에 따른 파동을 보며 우리 대학이 성숙하려면 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현장에 혼란이 올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자리만 차고앉은 무능한 교과부에는 말도 아깝다.) 법 적용을 회피하기 위해 비박사를 가지쳐내며, 이를 교육의 질 향상으로 둔갑시킨다. 박사학위가 없어도 그 분야의 실력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강사의 교육 경력 등은 자원으로보지 않는 외눈박이 대학이 강사들을 박사 강사로 다 교체한들 그들의 여건을 개선할 노력을 할 리 만무하다. 법을 유리하게만 이용하는 대학 입장에서는 박사를 쓰는 것이 비정규직 운영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강사는 몇 년 쓰면 ‘갈아야 한다’ 발상을 하는 대학이 전공자가 버젓이 있는 과목을 폐강하며 외치는 교육의 질은 별로 기대할 게 없다. 진정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면 강사를 교원으로 들이는 일이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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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4. 21:08




전국의 대학들이 공사 중이다. 낡은 건물이 리모델링되고 새 건물이 올라선다. 하지만 새롭게 늘어나는 공간들이 온전히 학문적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의시설 유치라는 이름으로 수익시설들이 하나 둘 대학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의 물리적 확장이 학문의 확장이 아니라 자본의 확장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계 속에서 대학의 기업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요란한 공사 터의 가장자리에 소위 시간강사, 즉 비정규 교수들이 비껴 서있다. 비정규 교수란 ‘시간강사를 비롯해 외래, 겸임, 객원, 대우, 강의 전담, 연구 교수 등 정년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한 학기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임용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소위 임시직 강사’를 말한다. 임시 고용직이기에 이들을 위한 대학 내 공간은 빈약하다. 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국공립대학 시간강사의 공동 연구실은 평균 116명당 1개, 사립대학의 공동 연구실은 평균 136명당 1개’라고 한다. 덧붙여 보통 서너 개의 대학을 오고가며 강의를 하기에 이들이 주로 머무는 장소는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라 이동 중의 지하철, 고속버스, 혹은 열차이다. ‘보따리장수’라는 자조적인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대학 공간의 주변에서,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대학의 주변인, 비정규 교수

비정규 교수들의 물리적인 주변성은 그 법적 지위에서 비롯한다. 고등교육법 제14조 제2항은 “학교에 두는 교원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총장 및 학장 외의 교수, 부교수, 조교수 및 전임강사로 구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시간강사들은 애초부터 교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교원은 아닌 존재. 이처럼 비정규 교수들은 법적으로도 주변화 되어 있다. 물론 1977년까지 이들도 교원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 체제에 비판적인 젊은 지식인들을 제도권에서 몰아내거나 순응시키기 위해 박정희 유신정권이 교육법을 개정한 이후부터 이들은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박탈당했다.

교원과 비(非)교원의 차이는 상당하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전임교원은 개인 연구실과 정년 보장 등의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대로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내에 개인 연구 공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과 연구 기자재의 이용에도 제한을 받는다. 또한 보통 한 학기마다 구두로 채용이 이루어지는 관행 상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고용 불안정성이 매우 크다. 기본적인 4대 보험 혜택은 먼 나라 얘기다. 덧붙여 비정규직 보호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기간제법 제4조 제1항에 “박사 학위(외국에서 수여받은 박사 학위를 포함한다)를 소지하고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예외조항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현실적인 차이는 경제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비정규직 교수들의 경우 따로 프로젝트에 참여해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여타 활동을 하지 않는 한 생계는 오직 강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울과 수도권의 시간강사 평균 연봉(평균 4.2시간 강의×30주×3만 7,000원)은 ‘487만 5,000원’이며 전체 시간강사 연봉 추정액(주당 9시간 강의×30주×3만 7,000원)은 ‘999만 원’이다. 이는 전임강사의 평균 연봉 ‘4,123만 8,000원’에 한참 못 미치는 액수일뿐더러, 2008년 4인 가구의 연평균 최저 생계비인 ‘1,519만 176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이다. 물론 이 또한 강의가 보장됐을 때의 얘기이고 여러 대학을 오고가며 사용하는 교통비 등 여타 지출비등 까지 고려한다면 실수입은 훨씬 줄어든다. 비정규직 교수들의 주변적인(marginal) 법적 지위는 이들의 삶을 한계적(marginal)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권리 없는 의무, 대가 없는 노동

왜 비정규 교수들의 교원 지위는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 전임교원들에 비해 하는 일이 없어서? 비정규 교수들은 전체 대학 수업의 절반 이상을, 전임교원들이 꺼리는 교양수업들 같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을 도맡아 한다. 수업 준비에서부터 강의, 그리고 학생에 대한 평가까지 수업과 관련하여 전임과 비전임 사이의 업무량의 차이는 없다. 대학이 전임교원들에게 요구하는 연구 성과 또한 비정규 교수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외려 전임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 성과를 쌓아야 하는 처지를 고려한다면, 연구 의무를 기준으로 전임과 비전임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모대학교 교무처장’처럼 시간강사들을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뿌리 깊은 편견과 계급의식의 소산이다. 연구력을 비교해 봐도 그렇고, 강의 평가에 관한 통계를 봐도 ‘교양 강의의 경우 시간강사가 좀 더 높게, 나머지 전공과 교직 강의에선 좀 낮게 평가’되고 있으며, ‘평균 하면 전임과 시간 강사에 대한 수업 평가는 비슷한 것’으로 드러나 전임과 비전임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대학 내 의사결정 과정에 비정규직 교수들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외려 차별적 차이이다.

이러한 불균형에 일정부분 동의하면서도 국가와 대학은 재정 상태를 이유로 비정규 교수들에게 교원과 전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등록금과 늘어나는 수익성 건물 앞에서 돈이 없다는 말은 변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대학 전체 예산에서 시간강사들의 강의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2009년 주요 사립대학이 쌓아 놓은 적립금만 해도 약 ‘6조원’ 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간강사의 연봉을 1,000 만원에서 3,000 만원으로 현실화할 때 20만 명의 신규 인원을 채용할 수 있는 액수이다. 현재 시간 강사는 ‘7만 명’ 정도이다. 이처럼 대학은 전임교원과 동일한 양질의 노동력으로 대학 강의의 절반이상을 충당하면서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있다. 비용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훌륭한 경영 수완이라 할 수 있다.


침묵, 대학 내 정치적인 것의 말소

비정규직 교수 7 인의 죽음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고용 유연성 기조는 대학의 상업화와 맞물려 비정규 교수의 처우 개선을 가로막는다. 다른 비정규직들과 마찬가지로 비정규 교수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려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잉여인간’으로 취급받고 있다. 故 한경선 박사가 남긴 유서의 내용처럼, 대학의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라는 초기의 순수한 열정’을 ‘이 사회에 대한 환멸’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대학 사회의 ‘침묵’이다. 전임교원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규 교수들조차 이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는 한국의 대학 사회가 여전히 수직적 계급 사회임을 드러낸다. 학문적 성과와는 별개로 ‘대인 관계 부족’이라는 전임교수의 주관적 평가와, 지연과 학연과 파벌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대학 사회 안에서 비정규 교수들은 감히 ‘찍힐까’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 임용과 관련해 알게 모르게 거래된다는 ‘뒷돈’은 그래서 구조적 산물인 것이다. 전임교수들은 비정규 교수가 생산한 잉여를 누리며 편히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지만, 정작 대학 내의 민주화에는 무관심하다. 비정규 교수들 또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쉽게 자신을 합리화 하거나 체계의 논리를 내면화 한다.

이러한 침묵 상태, 주변적인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언어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단일한 공간을 울린다. 그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들은 실현될 기회를 상실하고 정치적인 모든 것은 말소된다. 비정규 교수들의 한계 상황이, 그리고 이 구조적 모순을 자양분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체계를 내면화하는 대학 사회의 모습이 이를 예증한다. 과연 벼랑 끝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대학 사회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 그 정치적 실천이 절실하다.

글 곽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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