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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11 [111호]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저자 강신주를 만나다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1 21:53


소비사회의 명멸하는 스펙터클은 욕망을 구축하고 삶을 포위한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집어등集魚燈을 좇는 동안 우리의 삶에는 무수히 많은 상처가 기록된다. 하지만 이 벌어진 상처 위에 순간의 쾌락이라는 진정제를 삽입함으로써 고통을 유예하고, 상처를 곪게 만드는 것은 분명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상처가 상처로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의 시대에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삶의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을 공유하고자 하는「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저자 강신주를 만나보았다.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 있고, 그로부터 상처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의식하기 어려운 상처를 일깨우는 학문,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학문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 철학자의 사상과 문학가의 문학작품이 각 장마다 대구를 이루는 흥미로운 구성입니다.
    책의 기획의도 내지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 지배받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자본주의적 아비투스를 따르는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에 대한 자각은 힘듭니다. 자본주의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일차 기억덩어리이자 습관덩어리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문제는 기존의 기억을 다른 기억으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아비투스를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아비투스로 대체하는 일이에요. 그때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현실에 대한 진단이겠지요. 따라서저는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가 우리의 내면에 각인시킨 습관체계가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음을 전방위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시도 했어요. 그리고 철학자와 문학가를 짝짓는 구성을 취한 이유는, 이게 상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성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하면 오히려 반발심만 키울 수도 있겠다는 고려 때문이었습니다. 상처를 지적하는 작업이 자칫 상처를 덧나게 하면 안 될 테니까요. 일단 굳어 있는 정서를 말랑말랑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에겐 이성과 감성이 있으니 둘 모두를 같이 공략하자는 것이 기본적인 구성의도였습니다.

●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철학자들을 보면‘생산’의 문제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맑스가 과연 생산의 문제에만 치중했는가라는 점이에요. 노동자 혁명은 강한 공권력에 의해 언제든 탄압받을 수가 있어요. 이론가이자 동시에 실천가였던 맑스가「공산당 선언」에서‘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한 것은 노동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어요.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서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간다. 그러므로 역사는 너희들편이다’라고 생산력을 강조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보드리야르 같은 학자들이 생산력 중심주의라고 공격 했던 거고요. 하지만 실제로 맑스가 생산의 문제에만 치중했느냐, 아니거든요.「자본론」만 봐도 생산 못지않게 유통과 소비의 문제에 대해 강조합니다. 다만 소비의 문제가 덜 강조됐던 이유는 당시의 자본주의가 식민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였기 때문이에요. 국내의 초과생산분을 식민지에서 얼마든 해소할 수 있는 구조였다는 말이고 따라서 이를 해체하기 위해 무엇보다 생산의 지점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컸던 거죠. 하지만 20세기 중후반부터는 상황이 변하지요. 초과 생산분을 강매할 식민지가 사라지고 이제는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시킬 것인지가 문제로 대두돼요. 자본주의가 광고와 같은‘유혹의 기술’을 계발하고, 미국에서‘소비자 심리학’이 대두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 근거하지요. 따라서 핵심은 이거예요. 결국 실천적 문제고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순환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구조, 이 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개입의 지점을 생산으로 잡을 지 소비로 잡을 지 선택해야 되는 문제라는 겁니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맑스는 생산의 지점에, 보드리야르와 같은 학자들은 소비의 지점에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고요.


● 소비가 유혹의 수준을 넘어서 자유를 위한 정언명령으로 정당화되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현재를 긍정하라’라는 수사가 많이 동원되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그때의‘현재를 긍정하라’라는 말의 속뜻은 뻔해요. 자본이 원하는 것은 너희들의 삶을 긍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비하라는 얘기거든요. 니체가 현재를 긍정하라고 했을 때 그 현재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이 순간, 그리고 이 순간. 그런데 자본이 말하는 현재란 소비를 하는 오직‘그 순간’뿐이거든요. 쉽게 말해 돈이 있어서 소비를 하는‘그 순간’은 긍정되지만 다른 시간은 긍정되지 않아요. 니체가 말하는 현재에 대한 긍정과는 너무나 다르죠. 그런데 자본은 버젓이 그런 표현을 쓰고 있어요. 비슷한 예 중 하나가‘노마드’라는 표현이에요. 들뢰즈는 기존의 습관체계에 사는 사람을 정착민, 탈주하는 사람들을 유목민, 즉 노마드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노마드라는 표현을 삼성 같은 곳에서 가져다 쓰고 있지요. 니체와 들뢰즈의 표현에서 자유나 개척의 이미지만 따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소비를 추동하는데 도움이 되니까요.현재에 대한 긍정이나 노마드라는 표현은 어떻게 보면 현 체제에 반(反)하는 내용임에도 그걸 또 전유해서 쓰고 있는,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상황인거죠.


● 말씀하신 것처럼 철학자의 전복적 사유를‘문화자본’으로 전유하는 것 또한 자본의 전략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비교해 보면 이렇습니다. 니체나 들뢰즈는 모두 신을 거부해요. 초월적인 것이 아닌 내재적인 것, 다시 말해 개인들의 역량을 강조하기 때문이에요. 어느 참조점에도 근거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족적인 긍정과 향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본이 말하는 삶에 대한 긍정은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화폐에 대한 긍정이에요. 오직 돈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즉 돈이 있을 때에만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거니까요. 돈이 떨어지면 결핍감을 느끼면서 돈이 있을때는 마치 자신이 니체적 삶 혹은 노마드적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돈이 없어도 삶을 긍정하는 것, 나아가 돈에게 자신의 역량이나 향유능력이 길들여졌다면 이를 단호히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니체나 들뢰즈의 생각이니까요. 자본은 판매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가져다가 써요. 대표적인 경우가 티셔츠에 프린팅 된 체게바라겠지요. 그때의 체게바라는 자유로운 개인주의자이자 터프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미지에 불과해요. 체게바라가 어떻게 살았고 어떠한 사회 변화를 꿈꿨는지 등은 소거되고 말죠. 따라서 니체든 들뢰즈든 체게바라든 이런 방식의 전유들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 왜 소비자들은 제한된 자유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가장 좋았을 때만 기억해요. 힘들게 돈을 버는 시간은 잊어버리고 소비할 때의 느낌과 쾌감만 취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만큼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하지만 선택 자체는 자유가 아니에요. 선택지를 만드는 게 자유지요. 자본에 의해 주어진 상품들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문열의「선택」에 보면 황당한 논리가 나옵니다. 자신의 먼 친척뻘 되는 장씨부인 이야기인데 장씨부인이 어렸을 때 굉장히 똑똑해서 남자아이들보다 공부를 더 잘했다고 해요. 그런데 여자가 공부를 할 수 없는 사회조건 하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요. 그런데 이것을 장씨부인의 선택이었다고,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도 자유가 있었다라는 논리로 연결해요. 재차 강조하지만 선택지를 만들지 못하면 자유일 수가 없어요. 장씨부인은 전형적으로 선택지를 만들지 못한 경우죠. 더구나 이 소비 사회에서 선택의 자유라는 것도 일부 사람들만 누리는 자유예요. 단적인 예로, 편의점에서 50만원 버는 분들이 파리 갈까 뉴욕 갈까를 선택할 수 있나요. 자본주의에서 물건이든 무엇이든 소비를 하면서, 즉 자본이 만들어 낸 여러 항목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서‘아, 나는 자유롭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문열의「선택」에서 장씨부인이‘아, 나는 자유롭다’라고 하는 거랑 똑같은거예요. 착각이죠. 인간은 자신의 선택지까지 만들 수 있어야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 부르디외는 미래를‘잠재성의 장’에서‘가능성의 장’으로 재인식하는 것이 혁명의 조건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정치사적 맥락과도 맞닿는 것 같은데요.

부르디외가 지적하는 것은 생계수준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을 때 인간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얘기예요. 단적인 예로 저같이 80년대 학번들은 졸업하고 가장 안 풀린 경우가 전공에 따라 기업에 취직하는 거였어요.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소위 말하는 386 세대들은 생계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독재타도 등의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취업도 안 되고, 된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이고, 심지어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2000년대 이후 대학에서 정치적 시위들이 잠잠해진 이유도 어떻게 보면 부르디외의 지적이 들어맞는 거죠. 현재의 생존이 위태롭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미래, 연대, 이런 것들을 사치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인문학도 마찬가지예요. 80년대 학번들은 전공은 안 들어가더라도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보고 싶은 연극을 보러 갔어요. 지금과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한 가지, 그 당시 우리나라가 산업화되면서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이 보장됐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 누군가가 인문학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고민한다면 지금 조건에서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가끔 386 세대들이 왜 요즘 대학에서는 시위를 안 하냐고 그러는데, 그건 좋을 때 태어났으니 그런 거지요.

● 자본가 마인드 혹은 기업가 정신을 갖는 것이 시대의 덕목인양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삶은 피폐해지고 있는데요.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돈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면 자본가라고요. 그게 부동산이든 오 만원, 오십 만원 어치의 투자이든지 말이에요.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은 착취를 당하는 것이지만 부도덕한 것은 아니에요. 착취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욕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투자라는 형식의, 돈으로 돈을 불리는 행위는 전형적으로 자본가적 행위이고 인문학적으로 부도덕한행위이지요. 다른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번 돈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행위이니까요. 만약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돈 가지고 돈을 불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삶의 원칙을 명확하게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삶의 목표는 전적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불릴 수 있을까에 맞춰져 있잖아요. 그래서 투기가 일어나는 것이고요. 그런데 과연 이러한 삶이 좋은 삶일까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어요. 물론 쉽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해요. 우리가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시간이 오래됐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20년을 이 사회에서 살았다면 20년 정도의 흔적을 가진 아비투스가 자기 안에 구축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해도 자신의 몸은 여전히 CGV 가서 영화보고 싶고 스타벅스 가서 커피마시고 싶어 할 거예요. 바로 바꾸기는 힘들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삶 자체가 우리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우리만의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의 상처로 계속 남을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탈자본적 삶을 위한 실천은 무엇인가요.

방금 얘기했듯이 화폐의 역능, 무한히 증식하는 그 힘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돈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투기가 일어나는 상황이 바뀌어야지요.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책의 결론부에 썼듯이 모든 사람들이 기업에 취업을 안 하거나 다 같이 소비를 안 하면 자본주의는 아마 붕괴할 거예요. 하지만 곧 문제가 생기죠. 생산에 참여를 안 해서 돈을 안 벌고 그래서 소비를 안 하면 무엇을 먹고 살 것이냐. 가능한 답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에 참여를 안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돕고 사는 것이에요. 그렇게 공동체를 이뤄서 그 공동체를 계속 키워나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것은, 그러한 공동체가 커졌을 때 자본주의가 그 공동체를 가만히 놔둘까하는 점이에요. 실제로 20세기 초반에 독일에서 지역공동체 활동이 있었는데 공권력이 강력하게 탄압해서 해체시킨 사례가 있어요. 자본주의는 자본을 신처럼 모시는 체계인데 그 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온전할 수 있을까, 자본을 모시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가 마치 종교탄압 하듯 이들을 탄압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사실이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주제예요. 전통적인 혁명 없이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돈으로 투기 안하고 서로 돕고 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방식의 수정주의적 운동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라는 주제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운동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고 또 그 이상의 대안이라는 것을 던지고 싶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렇게 복된 시스템이 아니고 오히려 그 시스템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된 의도였으니까요. 다시 말해 상처만 정확하게 진단하면 그걸로 족하다라는
입장이었습니다.

● 성급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엿보입니다.

저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요. 그것이 혁명이나 변화를 꿈꿨던 사람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에요.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그리고 같이 가고 싶지 제 의도대로 그들을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폭력이거든요. 그래서 정치철학적인 글을 쓴다고 해도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그렇게 현실에 대한 진단을 공유한 다음에 나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해서 이야기 하며 같이 나아가고 싶어요. 다시 말해, 저는 성급하게 어떤 지향점을 제시하는 정치적 지도자이기 보다는 사람들 옆에서 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철학자, 인문학자로 남고 싶다는 말이에요. 사람들과 함께 삶의 문제, 실천의 문제, 미래의 문제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저는 충분하다는 생각이고요. 삶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해요. 따라서 그 과정을 어떻게 걷는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되묻고 고민하는 것이 철학하는 사람의 역할이자 또한 제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인문학의 ‘소비’ 와 ‘유행’ 현상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외국의 최신이론을 옷이라고 비유할 때 그 옷을 수입해 들여오면 처음에는 당연히 우리 몸에 안 맞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르고 오려서 우리 몸에 맞추면 돼요. 그러면 우리 것이지요. 수입, 괜찮아요. 논의가 풍성해질 수 있다면 어떤 사상이 들어와도 상관없어요. 다만 그 사상이 우리 몸에 맞는지,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을 보호해줄 수 있는지, 우리 몸의 차가웠던 부분을 따뜻하게 해줄지를 성찰하고 재단해야 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노력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저 옷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라는 성찰 없이, 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생각으로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다니거나 다른 옷이 들어오면 휙 버리거나 하는 식이예요. 나아가 그렇게 수입한 옷들이 안 맞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니까 또 다른 옷들을 끊임없이 수입하고요. 혹여 맞을까 하면서요. 사상이 유행처럼 겉돌 수밖에 없어요. 처음 우리 몸에 걸쳐봐서 맞으면 잘라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계속 게을리 한 결과인 것이지요. 그런데 또 수입한 옷을 자를라치면 민감하게들 반응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무조건 잘라야 된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의
어떤 담론도 그걸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는 우리의 삶이고, 따라서 우리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수 없다면 어떤 옷이든 잘라야 하는 거죠. 이런 생각이 공유된다면, 저는 요즘 유행하는 아감벤이나 칼 슈미트나 그 어떤 학자의 사상이든 들여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아감벤의 사상이 우리의 정치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도움을 준다면 수입해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다만우리 몸에 맞게 고쳐서 아감벤이 도저히 못 입는 옷으로 재단해야 되겠지요. 아감벤의 이 부분은 팔이 너무 길다 그러면 자르고, 주머니가 너무 작다 그러면 넓히고, 이런 식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예요. 외국의 어떤 철학과 사상이든 이런 식으로 소화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곽성우 /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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