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4.15 [124호]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2. 2012.02.03 [108호] 2000년대 거대한 변환과 칼 폴라니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04.15 17:26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여 년 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와 낙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성, 죽음, 공동체, 정치, 사랑 등 최근 인문학계 화두를 가지고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을 찾아 나선다. 이 인터뷰는 정동(affect)과 공동체(commune)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는 연구모임 ‘aff-com’(아프-)이 발간하는 아프-꼼 총서’ 1권에 대한 압축적 이야기이다. 


 

 

 

서문에서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변화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정동이론을 참고하셨다고 밝히셨는데요. ‘정동이론이 무엇인가요?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논의들이 서로 의식하지 않은 채 모이면서 정동이론은 거대한 전환을 이루고 있어요. “사람들이 누군가와 이어져 있음(결속)/없음(결속의 부재)이나, 어딘가에 소속됨과 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을 이론의 어휘로 정동(affect)이라고 하거든요. 나아가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이라는 말은 <가상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의 연구로부터 비롯되는데요. 여기서 정동 연구는 일종의 신체에 대한 새로운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터페이스, 즉 우리의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신체들이 결합되면서 형성하는 관계들과 그 안에서 촉발되는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하기 위한 방법론이에요. 한 사회의 변화 또는 방향에 대해 낙담하거나 환멸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이루는 정동의 움직임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은 그만’NO MORE FEMINISM의 집단 정서와 또 다른 페미니즘’ another feminism을 향한 미력한 시도들 사이에서 공전하고 있는 중이다.”

 

책에서는 그러한 정동이론을 여성의 삶에 가장 먼저 대입하셨는데요, 페미니즘의 정치적 함의와 연결시켜본다면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요.

요즘에는 새로운 삶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들과 지속 가능성을 탐색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작업들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렸어요. “아직도 페미니즘이냐?”라고 되묻는 상태인데요. 사실 아직도 다른 방식의 삶을 자기 삶의 문제로서 실천하고, 실험하고, 모색하고, 지속해보려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들은 정치적 실천의 실패를 마치 자기 삶의 실패인 것처럼, 마치 벌을 받듯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새로운 형태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연합)을 통해서 자기 삶의 변화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그런 연대가 바로 보호고치(cocoon)’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게 없죠. 여성가족부나 제가 페미노크라트라고 표현했던 소수 권력화된 페미니스트들의 이미지가 과도하게 강조되면서 페미니즘이 세력화되었다는 부정적인 인식만 갖게 되는 것 같거든요.

 

혼자 사는 여성들의 생존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은 결국 보호고치가 없는 사회에서 내가 세계와 맨몸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위기의 결과이기도 한데요, 그런 감정을 한국 전쟁 직후 폐허의 순간과 연결해주셨어요.

현재 한국 사회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상상적인 자기 이미지는, 깜깜한 세계 속에 혼자 서 있는 모습과 같아요. 자신을 가릴 최소한의 옷이나 보호막도 없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세계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죠. 여기서 만들어지는 불안감은 아무 것도 날 방어해줄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불안감이에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은 분단체제의 특성들, 정치 차원의 이미지 조작, 그리고 전쟁의 원형적 기억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이런 것들이 개인들을 폐허 앞에 끝없이 노출시키고 있죠.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재의 안전을 느끼고 보장 받을 권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게 경제적인 경쟁체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회와 시스템을 유지하는 통치성의 문제일 수도 있죠. 사람들의 존재론적인 안전을 계속 위협해서, 뛰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점에서 너무도 가혹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만 그런 걸까요?

저는 그렇다고 봐요. 이런 현상은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만들어진 역사적 파시즘 체제거든요.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파시즘 동맹국에서는 서로를 미분화해서 적대하고, 그 적대를 강화하기 위해 경쟁체제를 심화시키는 시스템이 만들어졌어요. 이러한 경쟁 시스템은적대적인 집단들을 절멸하고 자신은 살아남는 자발성의 구조를 만들어요. 하지만 위의 국가들이 패전하면서 이 경쟁 시스템 역시 강제적으로 없어져야만 했죠. 제가 지금 연구하는 풍기문란법도 통치를 하는 시스템, 즉 풍을 다스리는 시스템인데요, 이 법이 1920년대 파시즘 체재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에요. 대개의 경우 사회적 적대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시스템의 발생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말하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냉전체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은 1995~1996년도에 시작되려고 했던 탈냉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IMF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에 바로 진입했거든요. 결국 한국 사회에서는 탈냉전의 과제인 파시즘적 구조화와 단절할 수 있는 계기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도 없었다는 말과 동일하죠. 따라서 오늘날의 경쟁시스템을 보다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막연한 의미의 신자유주의 대신, 한국 사회 고유의 구조와 역사를 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해요.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시스템으로 모두가 신자유주의만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상황에서라면, 그런 본래의 시스템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네요.

본래의 시스템을 아는가의 여부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문제 틀로 전환시켜서 접속시키는 게 중요해요. 예를 들면, 이번 대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SNS에 대해 분석했잖아요. 그 결과 “SNS가 진보정치의 것이 아니었나?”라는 이야기들이 무성했지만, 더욱 중요한 건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비율이 50% 이상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목욕탕, 등산 등 끼리끼리 모이는 아줌마 네트워크들은 70년대 새마을 운동, 나아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애국반 조직들, 청년 조직들, 부락 조직들로부터 생성된 거예요. 박정희 체재를 지나면서 지역단위에 뿌리를 둔 작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사회를 재구조화하는 작업들이 생겨난 거죠. 사실 우리는 SNS와 같은 새로운 네트워크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한국 사회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그물망들이 무엇인가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그 기저에는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죠. 보수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문화가 있고, 욕망이 있거든요. 물론 그 네트워킹 안에 들어가는 게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어서 분석이 쉽지는 않죠. 한국사회의 고유의 구조들을 보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시각 이전에, 보다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거예요.

 

죽음을 묻는 일은 생존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너의 죽음은 나에게 슬픔의 공감과, 우정의 연대를 서명하는 일만이 아니라 나의 생존, 그 익숙한 삶의 감각을 심문審問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산참사나 노 대통령의 죽음을 추방된 죽음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분노를 다시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삶으로 끌어오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하루에 몇 명이 자살한다라는 통계는 이제 식상해졌어요. 표면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죽음에 둔감해졌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감응하지 않는 건 아니죠. 늘 주변에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자살을 목격하며 살잖아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도 실제로는 사회적인 어려움 때문에 삶을 마감했을 수 있고요. 어떤 의미로든 죽음이 삶 속에 드리워져 있는 것일 텐데, 문제는 이조차 익숙해지면서 삶의 패턴이 되고 있다는 거예요. 보통 일상적인 삶을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것은 바로 일상에서의 정치적인 것이에요. 자본주의 소유권이나 재개발 문제 등과 같은 대단한 정치의식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소박한 삶, 행복한 삶 또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부당하게 죽지 않을 권리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죠.

 

벌거벗은 사람들’, 부당하게 죽은 사람들의 존재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용산참사를 두고 우리도 그들과 같이 벌거벗은 삶이다. 그들의 문제는 내 문제이므로 아픔을 같이 해야 한다는 식의 언설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식인들의 과도한 자기연민은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명료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죠.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라는 책에서 홍콩학자 레이초우는 위의 경향을 자기의 서발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어요. 보통 서발턴(subaltern)은 사회적인 계급 구조에 속하지 않는 하층의 배제된 사람들을 말해요. 물론 미국 주류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아시아 혹은 비서구 지역에서 온 학자들은 인종적 소수자들이죠. 하지만 이들은 미국 주류 사회 내에서만 서발턴일 뿐, 자국의 제도 내에서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거든요. 지식인들이 나도 철거민들과 같이 가진 게 없다며 정치적인 동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도 벌거벗은 삶이다라고 동일화하는 것은 문제라는 얘기를 책에서도 하고 싶었어요.

 

한 시대의 가족 서사는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기원에 대한 인식과, 인간적 결속, 혹은 결속의 기준으로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념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가족이 민족을 상상하는 기본단위가 되거나 사회, 공동체에 대한 상상과도 연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동, 재생산, 공동체에 대한 감각이라는 차원과 가족서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제가 쓴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에도 나와 있지만, 근대체제에서 인간이 세계와의 결속을 상상하는 원초적인 모델은 가족서사를 통해 나타나요. 사실 저의 최근의 관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자살률의 증가와 출산율의 저하인데요. 사실 자살률이나 출산율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홀로코스트 이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자살이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어요. 장 아메리(Jean Amry)자유죽음, 헝가리 출신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임레 케르테스(Imre Kert eacute;sz)청산이라는 표현으로 자살을 대신했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몇 명이 태어나고 죽고 사고가 났다는 것을 인구통계학적으로만 이야기해요. 한 인간의 실존, 그 속에 담긴 생과 삶을 보는 게 아니라요. 매우 가혹한 사회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는 재생산을 거부한다는 일종의 switch off 상태를 말해요.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스위치 오프의 상황을 파시즘 사회와 연결시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파시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을 재생산 기계로 만드는 거예요. 한국에서 여성과 남성은 인간이라는 의미 대신, 생산과 재생산 도구로서의 의미밖에 없거든요. 일본의 파시즘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인 후지타쇼죠(藤田 省三)가 이야기 했듯, 파시즘 사회는 주어진 시스템을 훌륭히 재생산하는 매트릭스에요. 그동안 파시즘 사회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저항들이 있었지만, 자살과 출산 거부는 매우 극단적이고도 파격적인 형태의 저항이죠. 재생산을 멈추면 이 세계는 멈출 수밖에 없거든요. 단지 아이 셋을 낳으면 돈을 주겠다와 같은 정책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운영방식을 보지 않으면 스위치는 계속 꺼지도록 되어 있어요. 이 스위치 오프 상황은 최근 다양한 문화생산물에서 나타나는 자기폐기적인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아무리 파괴적인 영화라고 할지라도 마지막 장면에는 하나의 씨앗, 추억, 생명 등 미래로 이어지는 무언가를 반드시 남기거든요.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의 문화생산물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죠. 저는 <마더>, <박쥐>, <똥파리>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자기 폐기의 양상들, 여기서 그냥 끝내버리는 것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런 상황들이 재생산 기계를 멈추는 현상과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고, 그 기본 플롯이 가족 내러티브인 것이죠.

 

“‘자영의 환상은 노동자에 자기지지 기반을 두었던 참여 정부와의 전략적 차별화의 소산인 동시에, 노동자, 페미니즘 여성 등 기존의 집단적 주체성에 대한 피로감에 젖은 집단들에게 효과적으로 호소하는 대중정치 차원의 선동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 정부를 지지한 이유가 자영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자영의 문제는 앞으로 연구할 중요한 주제 중 하나에요. ‘자영(自營)’은 자기 삶을 자기가 가꾸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말해요. IMF 이전,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의 사람들은 자영이 아닌 벤처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 자영의 판타지는 IMF 이후 대기업, 벤처 등 기업구조의 몰락과 함께 불가능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판타지에는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을 전유하는 것이죠. 이는 성장의 이데올로기 판타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알다시피 한국전쟁 이후 폐허의 상태에서 시장에 펼친 좌판이 작은 가게가 되고 오늘날의 국밥집, 자갈치 할매집으로 이어져 왔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한국 사회 발전의 초석이 되었죠. 요즘 흔히 말하는 한강의 기적’, 그 뿌리에 자리한 것도 자영의 판타지거든요. 하지만 자영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할 수 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계속된 경제성장에 대한 판타지는 자영의 판타지에 내포된 희망을 전유하는 양상이라고 생각하고요, 이후의 작업들을 통해 좀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어요.

 

그런데 왜 지금 다시 파시즘을 고민해야 하나요. 그런 고민을 통해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하나요?

저는 현재 파시즘과 관련해서 불안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어요. 특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낙차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야생동물보호구역>을 보면 한강에서 자살한 시체를 꺼내어 지갑을 털어 사는 사람인 악어가 등장해요. 한강이 있고, 한강변 저 쪽엔 실제 동네이지만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강남의 빌딩들이 배경으로 나타나죠. 악어는 강남의 반대편에 있고요. 그런데 한강변 저 쪽이 쪽’, 이 둘 사이를 잇는 다리에서 사람들이 끝도 없이 강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이런 내용이 한국 사회의 파시즘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구조화하는가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파시즘 사회는 적대를 구조화해서 건널 수 없는 간격들을 만들어 놨거든요. 게토의 주민이 된 한강변 이 쪽 사람들은 저 쪽으로 절대 넘어갈 수 없어요. 저 쪽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모두가 이쪽에서 죽거나, 죽은 자에 기생해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든 죽은 자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저 세계로 넘어가야 해요. 그래서 삶과 죽음’, ‘게토’, ‘반경이라는 게 핵심적인 용어죠. 그리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불안이라는 정동은 바로 이러한 구조에서 생기는 거예요. 이러한 불안은 자책감을 동반하고 계속해서 자기폐기를 양산하죠. 심지어 강남 사람들조차 강남이 신기루라는 것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어요. 기득권층은 자신이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인데, 가진 사람들조차 이런 구조에서는 모두 다 무너지는 거예요. 결국 모두가 불안한 사회에서는 증오가 싹트게 되는 것이죠.

사랑은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는 유일한 길이며, 안전한 장벽 대신 너에게로 열린 위험한 길을 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윤리 주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사실 사랑하기엔 너무 불안한 존재가 대학원생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바디우는 사랑과 예술이 인류의 진리공정이다라고 얘기해요. 사랑, 예술, 발명이 똑같다는 의미죠. 인류는 본래 자신이 가진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 능력, 잠재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예요. 삶의 지속가능성에서 본다면, 대학원생들이 하는 새로운 지식 추구의 활동들은 상당히 문제가 많잖아요(웃음). 대학원생이하는 사랑이 단지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라, 직장인과 같은 일반인들이 하는 사랑의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죠. 함께 밥을 먹고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의 사랑이 일반인들이 맺는 사랑의 관계방식과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생들이 코뮌(commune)을 만들어서 우리도 예술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어도 좋을 것 같네요.

현재는 그런 의미의 자기 조직화자기 가치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생들이 하고 있는 사랑은 드라마에 나오는 특별한 연애도 아니고, 기념일을 챙길 수 있는 보통의 연애도 아니죠.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특유한 무언가를 만들고, 또 만들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을 의식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애도 급진화 할 수 있는 거죠. 주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의 연애는 항상 결여되고, 부족하고, 모자란 것처럼 생각되지만, 역으로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도 있잖아요. 사회는 계속해서 자기 삶의 가치를 얘기할 수 없도록 그렇게 수세로 몰아가고 있거든요. 그렇기에 여럿이 함께 자기 삶의 가치들을 인정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나 기반, ‘보호고치’, ‘다메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인생은 자기 책임이다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aff-com은 우리의 신체가 그 자체로 다른 존재, 다른 것들과 정동됨을 배울 때만이 가능한 그런 접촉면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aff-com의 이론과 실천은 이러한 인터페이스로서의 삶-연구-글쓰기의 실험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학문의 식민성도 심하지만 지역성 문제를 무시할 수 없잖아요. 부산에서 대안적인 연구공동체 ‘aff-com(affect+commune)’을 하시면서 어떤 즐거움이나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아프콤이 인문·예술중심의 대안적 모임을 지향하게 된 건 저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저는 이 지역에 연고나 기반이 없는 순전한 뉴커머이고 일 때문에 이주한 사람이거든요. 이 사회를 다시 저의 새로운 사회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비정규직 연구자로 살 때 겪었던 어려움들을 잘 알기 때문에 서울에서 했던 연구 공동체나 학술운동들을 함께 해보고 싶었어요. 연구나 작업들은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네트워크들 속에서도 진행하지만 그곳과는 달리 새로운 논리와 방식으로 진행되는 여기만의 세계를 만들 필요가 있거든요. 물론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이 있죠. 좀 비관적인 얘기지만, ‘내가 평생 여기에 있어도 이방인으로 있겠구나라는 현실적인 전망도 해요. 기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외롭거나 미래가 안 보일 때도 있거든요. 아프콤이 저에게 그런 기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저희 팀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프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날 기회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관성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주말에도 불이 켜진 연구동을 보며 다들 무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나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건 선생님이 되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겠지하며 한숨을 쉴 때도 있고요.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제가 어떤 얘기를 하던 사실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가 될 뿐이라 참 어려워요. 오늘날 연구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을 제가 다 가늠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일단 현실 논리를 따져봤을 때 인풋 대비 아웃풋이 가장 분명한 게 공부예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솔직한 노동이자 단순한 노동이라고 생각하고요. 또 한 가지, 공부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걸고 있는 게 분명히 있거든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확신 할 수 없지만, 사실 우리가 하는 공부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투여되고 있나요. 그렇기에 공부를 한다는 건 단지 개인적인 동기나 호불호로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포기할 수 없고 그 가운데서 의미를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 의미들을 사회적·현실적으로 찾아가고 또 만들어 가는 것이 공부를 계속 하게 만드는 추동력이지 않을까요. 그 속에서 자기 확신과 열정이 상승하며 형성되거든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가치를 만들어내고 담론화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46


구본우(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2000년대 거대한 변환과 칼 폴라니

만약 리스크의 정확한 계산이 실제로 가능했다면,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이 말해왔던 것처럼, 인류에게 가장 효율적이고도 안전한 유토피아의 세계가 열렸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는 리스크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사회 전체를 이 리스크 계산의 바탕 위에 움직이도록 만든다는 것이 바벨탑을 쌓는 일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사회 전체가 자본시장이 됐을 때, 사회는자본시장의 논리를 감당할 수 없고 자본시장의 운동 방식은 사회의 변화무쌍함을 감당할 수 없다는 단순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의 지구 경제는 자유로운 시장 거래, 지구적 자본시장 통합, 치솟는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사람들이 금융보호주의, 보호무역주의, 금융기관의 국유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실로 거대한 변환을 예감케 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 19세기 자유주의가 현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가고, 세계대전, 파시즘의 등장, 대공황 등 일련의 폭력적 사태를 거치면서 맞이했던 거대한 변환의 시기를 살았던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저서『거대한 변환』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배와 유토피아

‘사회에서 경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폴라니에게 있어 평생의 과제였다. 이때, 경제의‘실체(substantive)’의미와‘형식적(formal)’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일 수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실체적 경제란 인간과 환경이 끊임없이 제도를 매개로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반면 형식적 경제는‘어떤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리적 추론으로 구성되어 있다.실체적 경제가‘사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형식적 경제는 목적 수단 관계의‘논리’에서 시작한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경제의 의미를‘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순간 발생한다.

첫째, 논리적 형식이 복잡한 실재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형식적 경제 이론은 비록‘자연’,‘보편’의 옷을 입고 있다할지라도 결국에는 세계에 대한 특수하고 인위적인 해석의 결과물이자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유토피아적 상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형식적 경제와 실체적 경제가 동일한 것이라는 인식, 다시 말해 형식적경제의 논리들이 곧 실재하는 사실들의 반영이라는 인식이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거대한 전도가 발생한다. 사실상 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떼어내고 구별하기 어려운 세계의 요소들을‘노동’,‘토지’,‘화폐’라는 허구적 상품형식의 이름을 붙여 서로 분리해내는 것, 희소성 상태와 합리적 인간이라는 공리로부터 도출된 형식논리에‘시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상품형식들이 이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이 사유습관이 실재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을 때, 세계의 모든 사실들은 시장이 파놓은 수로를 따라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내며 움직여 간다.

두 번째 문제는 아무리 강력한 형식적 경제이론도 실체의 경제를 완전히 포섭할 수는 없으며, 세계를 영구히 지배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실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동은 형식적 경제이론이 구성한 유토피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율배반을 산출하며,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사회는 이 유토피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연한이 끝난 유토피아를 계속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현실과 유토피아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가고 굉장히 폭력적이고 파국적인‘형식’(form)의‘변환(transformation)’,즉 거대한 변환이 야기된다.

신자유주의라는 유토피아

신자유주의는 리스크 계산이라는 또 다른 유토피아에 기초해 있다. 금융공학의 힘을 빌려 리스크를‘객관적으로’측정할 수 있다는 신화는 세계 대전 이후 주춤하고 있었던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자유주의의 강령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교과서에서 말하듯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가격은 미래효용 혹은 미래수익에 기초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미래의 수익이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면 이 상품을 둘러싼 가격 흥정도 어려운 것이 되고, 가격체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 시장, 특히 온갖 신용관계가 확산되어 있는 시장은 한 순간에 기능 정지 상태에 빠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시장은 국가나 공동체 같은 전통적 리스크 관리자와 불편하게 동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80년대를 전후하여 시장의 행위자 스스로가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실현시킬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사실상 리스크 평가 모델에 기초하고 있는 시가 회계가 새로운 회계기준이 됐다. BIS 비율, 순영업자본 비율, 지급여력 비율 같은 각종 금융기관에 대해 리스크 계산에 기초한 금융 규제가 시행됐다. 각각의시장 행위자들이 계산된 리스크를 반영하여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가격과 현금수익을 투명하게 공시하고, 리스크에 대한 안전대책을 스스로 확보한다. 그리고 다른 시장행위자들은 이 공시된 가격과 계산된 리스크 수준에 기초하여 투자 및 거래 여부를 결정한다. 리스크 계산과 투명한 공개라는 규칙 외에는 다른 어떤 시장 규제도 필요치 않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기업, 은행, 가계와 같은 집단들의 위상과 행위를 변화시켰다. 국가는 국공채 금리 조절과 재정 회계를 따라 움직이는 또 다른 시장 참여자가 됐으며,공공정책, 사회복지정책은 시장 변동과 사회적∙산업적∙사회적 살림살이 사이의 완충망이 아니라 시장 변동의 충격을 살림살이에 고스란히 전달하는 전동장치가 됐다. 기업은 시장의 변동에 따라 자산을 매매하고 비용을 조정하는 —대표적인 비용 조정 대상은 노동 비용이다— 자본시장 투자자가 됐으며, 은행은 산업적 자금 배분을 수행하는 집단에서 계산된 리스크와 수익성을 따라 움직이는 투자자로 변화했다. 가계 역시 보험, 연금, 주식투자, 부동산 투자로유지되는 투자 단위가 됐다. 기후, 범죄, 은퇴 후의 삶, 사람의 몸과 같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요소들이 금융투자 상품으로 변모했고, 사회 전체는 시장, 특히자산이 거래되는 자본시장의 움직임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사회의 복원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는 기나긴 변환의 초입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이지만, 그 변환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 변화의 방향이 어떤 것일지, 그 깊이는 얼마나 될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중장기적인 변환의 큰 방향에 있어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창조해 나가야 할 질서에 대해 폴라니의 기획은 어떤 혜안을 던져줄 수 있을까? 폴라니에 따르면, 가치 평가는 초역사적이고 자연적인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사회가 지향하는 특수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특정한 사회적 자원이나 인간 행위는 해당 사회의 목적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 가치 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사회는 사회의 목적에 맞는 가치의 할당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과 체계를 고안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평가 또한 이윤 혹은 자산의 증식이라는 목적에 기초하여 평가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역사성-사회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평가가 무목적성, 자연성이라는 환상은 오직 시장과 같은 특수한 제도가 특권화되고 자연화된 결과의 소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장이냐 국가냐의 이분법은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기 위한 적합한 틀이 아니다. 폴라니가 보기에 사회는 언제나‘전체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는 특수한 동기나 특수한 기능들로 환원될 수 없다. 시장과 국가를 대립시켜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특수한 기능을 표현하고 있는 특정한 제도들을 특권화하는 시도일 뿐이다. 시장 경제의 모델은 소비자로서의 인간의 삶의 측면들을 제도적으로 특권화한 것이고, 국가중심의 명령경제의 모델은 생산자로서의 인간 삶을 제도적으로 특권화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발견되는 사회의 통합 형태는 단일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진화과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중 어느 하나의 제도 형식을 중심으로 전체적 인간 삶을‘조직’하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인간과 사회 전체의 황폐화를 초래할 뿐이다. 폴라니의 기획은 언제나 사회 자체를 최대한 온전하게 드러내고, 전체로서의 사회를 복원시키는 것에 있었다. 제도나 절차는 사회의 목적과 인간에 대한 상상에 종속되어야 하며, 언제나‘사회란 무엇이고 인간의 살림살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열려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도록 고안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변환의 시기,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은 언제나 폴라니를 포함하여 과거 어느 시대 사람의 몫도 아니요, 미래 후손의 몫도 아니다. 우리시대의 몫이다. 수많은 수학적 가치평가와 금융공학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환상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난 지금, 사회가 무엇이고 인간의 살림살이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는 폴라니의 한마디는 꽤 주의깊게 들어야할 목소리라 생각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