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18. 19:07


박권일 (사회학과 석사과정/ '88만원세대' 저자)

이제 되짚어볼 때가 됐다. 서울서 열린 G20 정상회의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건국이후 최대의 국가행사”라며 나라 전체를 G20 광풍 속으로 휘몰아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이에 발맞춘 듯 경제효과 분석보고서를 내놨다. G20으로 한국이 얻을 직·간접적 경제유발효과가 약 24조 원이라고 한다. 뒤이은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의 보고서는 한 술 더 뜬다. G20의 경제효과가 무려 “450조” 원이란다. 한국의 1년 예산이 약 300조 원이란 점을 떠올리면 이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액수인지 조금 감이 올 것이다.

이런 황당한 액수가 나오는 이유, 그리고 같은 행사를 두고 두 연구기관이 계산한 액수조차 이리도 차이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경제효과 계산이 애초에 자의적인 까닭이다. 연구자가 산업연관표 상의 어떤 지수를 어떻게 조합하고, 얼마만큼의 연관값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치가 나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런 분석이 끝없이 나오는 건 물론, 정권이나 기업연관단체들이 혹세무민하기 딱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겠다. 아무튼 “약 24조원” 또는 “450조 원”의 “경제효과”를 가지는 “건국이후 최대의 국가행사”, G20 정상회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간단히 살펴보자.

참을 수 없는 정권의 촌스러움

G20 준비과정에서 서울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불편은 한둘이 아니었다. 준비기간 내내 군사독재시절을 연상시키는 위압적인 치안정국이 지속되었고, 행사장 인근인 서울 강남 일대는 사실상 계엄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민들의 헌법상 자유가 일상적으로 침해받았다. G20을 정치적 국면전환용 또는 정권홍보에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도가 지나치다"는 평가가 해외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이 G20 의장국이 되었을 때 가슴 속에 애국가가 메아리치고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11월 1일자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의 어느 초등학교 4학년이 썼다는 글을 인용, 한국의 G20 호들갑을 작정하고 비꼬았다. 뿐만 아니다. 서울 서대문구청은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서울 G20 정상회의 기간 중 음식물쓰레기 배출을 자제해 주십시오”라는 공문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사는 한편,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인터넷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단연 ‘G20 홍보포스터의 쥐’였다. 어느 대학 강사가 동료와 함께 G20을 풍자하려는 목적으로 포스터에 쥐를 그리고 다녔고, 이를 지켜보던 어떤 시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공안당국은 G20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라며 체포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일종의 그래피티 또는 낙서를 공안사건으로 분류해 구금하고 조직사건으로 ‘엮으려는’ 정권의 시도는, 많은 사람들을 실소케 했다. 이들에게 이번 사건은 미네르바 사건이나 피디수첩 기소 등의 행태에서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졸렬한 면모’를 다시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쌍팔년도에나 볼 법한” 이 정권의 촌스러움에 대한 분노와 비판, 풍자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외국에서 손님 올 때만 반짝 선진국 국민인양 점잔을 빼는 것이야말로 후진국의 징표가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반면, 정작 G20 자체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논의는, 그저 선언적 반대조차도, 참으로 드물었다. 행사가 끝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G20에 대한 ‘시비(是非)’가 그저 MB에 대한 ‘호오(好惡)’로 대체된 이런 현실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의 문제를 징후적으로, 그러나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지 모른다.

무기력한 결론, 불투명한 전망

G20 정상회의 의제만 놓고 봤을 때, 대부분의 매체가 ‘미국의 KO패’라는 말로 회의결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멀지않은 미래에 환율전쟁이 본격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회의에서 내내 최대의 쟁점은 미국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주장이었다. 양적 완화라고 하니까 뭔가 어려운 말 같지만, 쉽게 말해 달러를 그냥 찍어내겠다는 소리이고, 이를 통해 자국의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과격함을 넘어 무식함에 가까운’  환율조작을 하는데 다른 나라들, 특히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들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이들 나라들이 자국화폐의 절상효과와 자국경제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일제히 경기부양에 뛰어든다면 본격적인 환율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데 공감하지만, 이를 위해 자국경제의 희생을 감수할 나라는 어디도 없다. 이번 서울 G20에서는 각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도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회피하는 이른바 ‘파레토 최적’ 전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다시 확인되었을 뿐이다.

결국 11월 12일 발표된 G20 서울정상회의 선언문은 하나마나한 얘기만 무기력하게 늘어놓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견된 일이었다. 1999년 WTO 장관회의를 무산시킨 이른바 ‘시애틀 전투’로부터 촉발되어 이제는 도도한 전지구적 사회운동이 된 대안세계화운동(Alter-globalization Movement) 진영이, 다양한 이념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G20과 같은 형태의 경제위기 대처방식을 반대해온 공통적인 이유가 있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목표를 버리지 않고서는 인민의 삶을 개선시키기는커녕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된 형태로 반복될 뿐이라는 점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사태의 주범들인 영미권 국가들이 반성은커녕 금융경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롭게 작당한 모임이 바로 G20 정상회의라는 형태였고, 그런 태생적 한계 속에서 G20 회의가 인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 이를테면 ‘고용 없는 성장’과 ‘불안정노동의 확산’ 등을 해결할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했다. 더구나 G20이 선정된 과정도 지극히 폐쇄적이고 반민주적이다. 20개 국가에게 세계경제의 운명을 결정해달라고 누가 부탁했는가? G10도 G100도 아닌 G20이어야할 필연적 이유는 무엇인가? 왜 부잣집 애들 몇몇이서 가난한 애들 인생을 결정짓는가?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G20 자체의 시비를 가리는 이러한 논의가 한국에서는 활발히 벌어지지 못했다. MB에 대한 혐오와 소위 “국격”에 대한 조롱만 재생산되었을 따름이다. 여기서 대학의 무기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에서 ‘이론적·실천적 진지’로서의 대학을 말하는 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세계자본주의가 G20 무대에서 보여준 어떤 무기력은 우리가 “시대착오”라 내다버렸던 것들이 귀환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지난 수십 년간 혹독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진행해온 영국의 대학교에서 ‘시대착오적’인 폭력시위와 집권당 건물점거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하준의 신간은 왜 ‘인터넷’과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세탁기’와 ‘국가의 역할’을 이야기함으로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나.

사실, 2008년 시작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기세등등하던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센 물결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이 확실히 많아졌다. 많은 자유주의자들, 중도좌파들이 한때 인기를 끌던 ‘제3의 길’ 노선을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던 주체들 역시 조금씩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지배당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투쟁하는 주체가 따로 결정화된 게 아니기에, 이들은 언제든 대안적 세계화의 흐름에 환승하거나 나아가서는 능동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여전히 섣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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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11. 21:02


<조난 프리타, 遭難 フリーター, A permanent Part-timer in distress, 이와부치 히로키, 2007 >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부치’의 기상시간은 6시 반. 불 꺼진 방에서 밤새 명멸하던 TV 화면은 이른 시간에 켜진 형광등의 새된 빛에 그 고즈넉함을 잃는다. 식사를 하며 뉴스를 좇는 졸린 눈도, 이를 비추는 캠코더의 화면도 명징한 초점 없이 부유한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생경해 보이는 이 아침풍경의 주인공은 분명 그이지만 또한 그가 아니기도 하다. 마리오네트 marionette (*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인형극)처럼, 그의 일상은 대부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움직인다. (출퇴근용인 자전거조차 그의 소유가 아니라 회사의 물건이다!) 물론 완전히 타의라곤 할 수 없다. 줄을 끊는 과감함을 선택하는 대신 줄이 끊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버텨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분명 그 자신이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전적으로 탓할 수도 없다. 자신의 의지로 수렴될 수 없는 모종의 체계 하에서 오롯하게 자족하기란 쉽지 않은 - 가능하기는 한가 - 일이므로. “난 누구에게 지고 있는 걸까?” 그 답은 질문하는 자의 혼란만큼이나 불투명하다.

그 누구에게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차라리 그는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갑다. 캠코더로 찍힌 거친 색감의 영상에는 사회에 대한 냉소가 묻어난다. 영화를 이끄는 두 가지 원동력은 전체 비정규직 비율이 30%에 육박하고 20대에 한정할 경우 50%를 넘어서는 일본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과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체념’이다. 따라서 그는 젊음의 특권인 저항권을 방기하지 말라고 채근하는 어른들과 감싼 동정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매스컴들을 향해 냉소한다. 당사자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할 바에야 외부인들의 변죽울림은 자기충족 이상의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린 것은 외부를 향한 냉소가 아닌 내부를 겨냥하는 냉소, 뼈 속까지 파고드는 자괴감이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실제로 노력이나 해봤냐는 정규직 고교동창의 날 선 비난 앞에서 그는 침묵한다. 매스컴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투사로 비춰졌지만 그의 솔직한 심정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직업, 즉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일견 모순적이지만, 사회에 대한 냉소가 자신에 대한 냉소로 전이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의 한편엔 그런 사회로 어떻게든 편입되고 싶어 하는 체념적 욕망이 스멀거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냉소의 방향을 역전시킨다. 냉소가 세상을 향할 때 인간은 적어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을 향한 냉소가 마냥 긍정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의 방어기제임에는 확실하다. 반면 냉소가 자신을 향할 때, 더구나 그 냉소가 세상의 시선을 내면화한 냉소일 경우 인간의 자존감은 허물어진다. 그 자리엔 자신을 스스로 패배자로 규정하는 자학만이 남겨진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을 아직 철저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언젠가는 잡지를 만들고 싶고 “많이많이 사랑하며 많이많이 웃고 싶다.” 무기력한 삶보다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고 싶고 ‘오랑우탄도 할 수 있는’ 단순 노동보다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 그렇다. 그에게도 꿈과 욕망이 있다. 다만 그 꿈과 욕망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할 뿐이다. 이런 그를 사회는 공상가 내지 철부지로 단정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그 평가를 뼈아프게 인정한다. 시골 고향을 떠나 굳이 외지에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결국 도시적 삶이 주는 ‘자극’ 때문 아니냐는 어머니의 핀잔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극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냉소를 그나마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가슴을 부글거리게 하고 머리를 뜨겁게 하는 어떤 열망 때문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비루한 삶을 버텨내도록 하는 원동력이자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하는 버팀목이다. 비록 그 열망 또한 언젠가는 냉소에 의해 싸늘히 식어버리고 마는 것일지라도.

소위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사회에 향한 냉소와 자신을 향한 냉소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고,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에선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일본 청년 이와부치의 삶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가까운 미래, 어쩌면 이미 현재의 모습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영화 을 통해 던져졌던 물음은 지금-여기서 현재화 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은 사회를 향한 냉소를 자신을 향한 냉소로 전이시키지 말고 사회를 향한 열망으로 순치시켜야 한다고, 즉 정치적 단결을 통한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깔려있는 당위적 요청, 즉 정치적 투쟁에 선뜩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적 망설임’들에 대한 계몽주의적 요청마저 전적으로 옳은 것일까.

투쟁을 요구하는 수사들이 풍기는 단호함은 피를 끓게 하는 화려함을 있을지언정, 88만원 세대가 갖고 있는 불안감의 정체를 면밀히 살펴보는 세심함은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불안은 분명 냉소와 열정 사이를 오고가는 방황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방황은 유별난을 있 아니다. 역사상 모 방젊음은 이런 종류의 방황을 통해 성장 해왔고 더구나 그것은 젊음의 특권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방황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현재 88만원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불안의 특유함은 외려 ‘방황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 이것과 저것 중 빨리 하 현재선택하라는 재촉에서 비롯한다. 개인들로 하여금 각자가 직면하는 불안감의 정체를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지 않는, 효율성과 목적성 위주의 분위기가 문제인을 있을지언사회적 투쟁에로의 촉구그러므뜩찮은 것@결여하고 러한 식의 비쁽들이불안에 대한 각 개인들 스스로의 숙고과윕 결누락될 여지그러크기 때문이다. 과연 개인적 열망 결즉시언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있 비록 개인적 열망들의 분출을 근원적으로 보장키 위한 ‘과윕’일지라도줬언사회적 열망만이 답이자 최우선이라는 주장들이 다소 폭력 자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개인적 열망들의 이질성을 이질성으로 남겨두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사회적 열망을 접속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느리지만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비록 불안 속에 머물지라도 그 누구의 삶이 아닌 나만의 삶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이와부치‘들’의 존재가 절실하다.

곽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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