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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2호] 도시는 우리의 것이다

근대 인클로저 운동 이후, 인간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던 공간은 자본이란 초월적 교환체제에 의해 독점적 소유의 공간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공간과 묶여있던 공동체의 기억 또한 점차 희미해지고, 그 빈자리는 오직 숨가쁘게 순환하는 자본만이 간헐적으로 머물다가 떠날 뿐이다. 삶을 성찰케 해야 할 예술조차 일종의 스펙터클로서 자본 순환의 윤활유로 기능하는 시대, 과연 예술이 어떤 실천적 여백을 구축할 수 있을지 예술가이자 활동가인 필자의 생각을 청해보았다.

김강(미술가, 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그들은 나를 그들의 것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를 통제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머물렀다가, 떠났다.
어찌 내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으랴,
그들이 나를 껴안지 못해,
내가 그들을 껴안고 있는데...

- 「Hamatreya」, Ralph Waldo Emerson

거대한 전시장, 서울

감히 얘기하건데 최근, 최고의 예술은 ‘서울시’ 자체가 아닌가 싶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서울시의 풍경은 미술관이나 갤러리 방문을 통해 새로운 미감을 얻고자 하는 관객들의 발걸음을 필요 없게 만든다. 버스에 올라 서울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서 얻고자 하는 미적체험이 이미 서울을 ‘보는’ 동안 체득된다. 미술관에 가서야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비디오 작품이나 설치작품들이 대형 건물의 외관을 장식하고 있으며, 서울시의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아티스틱한’ 공공예술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서울시 그 자체가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변화하기 위해 다이내믹해 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이내믹함은 대형 전광판이나 건물외벽을 예술작품으로 채워가는 것에서 하나의 블록 전체를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창의도시, 컬처노믹스, 도시디자인 등 다양한 구호를 외치며, 서울시는 서울의 여러 경관들을 바꾸어가고 있다. 복원된 청계천은 마치 도시의 거대한 어항처럼 보인다. 도시화가 한창이던 시절, 서울로 이주와 저임금의 도시노동자가 되거나 날품팔이를 하던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곳이 청계천이었다. 하지만 곧 판잣집은 철거되고 개천이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덮이며 근대화의 상징인 삼일고가도로가 생겨났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이런 풍경은 재차 비문화적인 것, 즉 ‘사라져야 할’ 경관이 되었다. 경제지상주의적/박정희적 발전 모델에서 21세기형 문화 도시적 삶으로의 진입을 알리듯, 삼일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청계천의 물줄기는 다시 우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청계천변의 삶은 청계천 8 가 서울문화재단 맞은편에서 현대미술작품의 조형물처럼 ‘전시’되어 그 시절의 삶을 ‘관람’케 한다. 

그러나 이 전시물들의 관람에서 반 보 물러나 잠시 생각에 잠겨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경관 어디에나 서울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문화, 그리고 세세한 기억이 서려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현재의 문화도시정책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서울 공간의 변화가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며 역사를 현재화하는 시민들에게 일종의 무력감을 주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과 사연이 있는 공간이 하루아침에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존재자체도 부정되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니, 이것이 단지 예감으로서의 불안감이 아니라 현실일 수 있음을 우리는 뉴타운 개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기 드보르 Guy Debord 가 지적한 스펙터클사회로의 진입이 국가기구를 통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서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시의 문화도시정책은 문화와 예술을 21세기형 개발의 도구로 전유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은 시각적 경관을 스펙터클하게 바꾸어 가면서 우리의 삶을 강제적으로 통합시키고 있는데, 이는 ‘도시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서울시 행정의 대표적인 발현이다. 개발논리에 포섭되어 그 도구로 전락한 문화와 예술은 공공의 시선 안에서 또다시 ‘규격화’ 된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이하며 삶을 성찰케 하는 예술의 기능이 ‘규격’ 안에서 이것과 저것을 가르며 삶을 피폐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시가 호명하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로서의 ‘예술’일 뿐이다. 정치의 노예로서의 예술이 마치 현 시대의 예술인 것처럼 포장되어 질 때, 인간의 창의력은 식민화되어 스펙터클사회의 가속을 촉진한다. 그러나 예술은 정치의 노예일수가 없다. 오히려 예술은 사회를 성찰하고 다른 방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상력의 힘과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존재들로부터 발현되어야 한다.

스펙터클에서 벗어나기

“스펙터클 사회를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데 요망되는 것은 실천적 힘을 작동시키는 인간들이다.” 라고 기 드보르가 지적하듯, 결국 스펙터클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실천적인 인간에게서 나온다. 자신의 삶을 직접 경험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는 스펙터클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반응이다. 비록 우리의 삶이 스펙터클의 축적물인 시각적 이미지들의 범람과 피상적인 관계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실천적인 인식은 그것을 넘어서려는 행동을 만들어낸다.

“아트 크로쉬 Art Cloche 는 파리시에의 삶을 재창조할 것이다. 파리시는 이미 죽었으며, 예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더욱 죽은 도시이다. 파리에는 그저 매스 미디어와 광고만 있을 뿐이다. 아트 크로쉬는 살아있는 공동체, 그것만을 위해 ‘스쾃’이라 부르는 공간을 선택한다.”라고 주장하며 도시의 빈 건물을 점거하고, 새로운 삶과 예술의 공동체를 꾸렸던 예술가들이 8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 등장했다. 또한 2000년대에는 ‘사막과도 같은 도시의 빈 공간을 사용하여 오아시스를 만들자’라는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서울에 등장했다. 즉 도시의 무의식과도 같은 ‘빈 공간’에 주목하여 그 ‘빈 공간’을 다른 형태의 삶과 예술이 실험되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예술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예술가들을 ‘스쾃티스트 squatist ’ 라 한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소유를 통해 부가 축적되고 권력이 행사되는 현상에 전면적으로 저항하여, 공간을 탈영토화 하는 것을 목표로 빈 건물을 점거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적소유권 강화에 대한 예술적 저항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점거된 빈 공간을 자신들의 내밀한 창작공간으로 삼아 교류와 소통의 공간으로 변화시켰으며, 엘리트주의적 예술관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독점의 공간이 아닌 나눔과 상생의 공간으로 영토를 변화시켜가는 그들의 활동은 폐쇄적인 고급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이 아닌 삶과 통합되어 하나의 미래적 대안을 제시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러한 스쾃티스트들이 만들어 가는 공간이 ‘스쾃 squat ’ 이다. “스쾃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종류의 ‘공간’에 관계한다. 토지, 건물, 빈터, 주거지, 창작실 등의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가는 스쾃은 소유권의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함께 꾸는 꿈을 제시한다. 그러하기에, 함께 꾸는 꿈이 직접 행동을 통해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갈 때, 스쾃은 단지 물리적 ‘공간’에만 관계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 규격화된 삶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스쾃은 규격의 틀을 흔들리게 하며, 위엄 있는 삶의 태도를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빈민, 여성, 가족, 인종, 노동, 생태, 자율, 이주노동, 노숙인, 예술, 문화 등 모든 종류의 운동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것 또한 스쾃이다. 안주하지 않는 삶, 움직이는 삶, 인간전형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것, 저항의 양식을 새로이 창안하는 것, 예술가의 정체성을 언제나 재구성하는 것 모두가 스쾃에 포함된다.”



소유권에서 사용권으로, 소비에서 나눔으로

현대 도시에선 공간소유의 유/무로부터 불평등과 권력구조가 창출된다. 정부기관 역시도 공간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독선적 소유주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공간은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체 commonwealth ’ 다. 따라서 이 공통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에 관한 권리를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이에 도시의 빈 공간을 다른 형태의 삶과 예술을 위해 사용하길 원하는 스쾃티스트의 등장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를 갖게 된다. 우리는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 몇몇 일부가 그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기더라도 공간은 소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 발언과 자기 의지의 관철은 ‘소유’의 문제를 떠나 ‘나눔’과 ‘상생’, 대안적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도시 공간은 우리 모두의 것이자, 우리는 그 공간에 대한 소유의 권리가 아니라 사용의 권리를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