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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2호]전체성과 그 잉여들 :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모두의 것’으로

세계화의 대항담론으로 로컬화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중심-주변이 곧 권력-저항과 등치관계일 수 있을까. 어쩌면 주변적 공간을 움직이는 동력이 또 다른 중심화에 대한 반동적 욕망일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문화기호학과 정치철학적 사유를 통해 중심-주변이라는 손쉬운 이분법적 도식을 탈각하고, 중심과 주변을 가로지는 불분명한 경계에서부터 사유를 구축하려는 필자의 논의를 실어보았다.



김수환(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전지구화를 배경으로 로컬의 문제를 사고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른바 ‘전복의 딜레마’다. ‘중심’을 비판하고 ‘주변’을 재인식하려는 지향은 흔히 중심과 주변의 전위(轉位)를 꾀하려는 욕망에 의해 인도되기 쉽다. 위계의 전복이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틀 자체를 향한 근본적인 반성을 동반하지 않을 때, 이것은 끔찍한 반복만을 가져올 뿐이다. 중심-주변 모델이 빠져있는 곤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중심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다른 중심(혹은 바깥)을 모색하는 대신, 중심화 하는 체계 자체를 내부로부터 탈중심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중심화 하는 체계 내부에서 그것을 내파(內波)할 수 있는 탈중심화의 계기들을 발견해내고, 나아가 그것을 ‘새로운 보편성’의 자리로서 적극적으로 재사유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역사의 종말’이 점차 구체성을 띠고 정치의 소멸이 불길하게 예고되는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을 향한 다양한 모색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체계의 전체성으로부터 탈구된 존재자, 전체성의 셈과 몫으로부터 누락된 ‘비-부분’ 혹은 ‘잉여’를 향한 비상한 관심이 그것이다. 누락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그래서 마치 유령처럼 현전하는 이 잉여는, 전체성의 언어 자체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본연적 반성의 계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체성과 통합의 논리, 치안 police 과 국가 state

랑시에르에게 ‘치안’과 ‘정치’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치안은 사회적 신체를 잘 정의된 서로 다른 부분들로 끊임없이 분할하려는 의지를 갖는다. 그와 같은 분배란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그래서 ‘자리’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활동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적’ 분배의 작용은 반드시 특정한 존재자들을 누락시킨다. 자신의 몫을 지니지 않기에 사회의 식별가능한 부분에 포함되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셈해지지 않는’) 이런 잉여의 존재들(“몫 없는 자들”)은, 사회라는 구성체 내부에서 치안의 논리에 따라 자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정치란 이 치안의 논리가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것들을 있다고 말하는 것, 보여지지 않고 들려지지 않는 것들을 보이고 들리게끔 만드는 활동이다. 그것은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잉여로서 기입하는 보충적 주체들의 행위”인 것이다. 요컨대, 정치와 치안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 공백과 보충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 만일 치안이 몫 없는 자들의 몫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면, 정치는 언제나 몫 없는 자들의 몫이라는 보충 또는 공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랑시에르가 말한 치안의 논리는 바디우에게서 ‘상태’라는 명칭을 얻는다. 상태란 그가 “상황 situation ”이라 부르는 것을 하나로 셈하는 임무를 맡은 모종의 메타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바디우는 사물들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의미에서의 ‘국가’이기도 한 ‘State’라는 용어의 애매성을 활용한다. 랑시에르에게 치안이 사회적인 것의 ‘상징적 구성’을 의미했듯이, ‘국가/상태’는 집단을 셈하는 역할을 맡은 넓은 의미에서의 ‘재현체계’를 뜻한다. 문제의 핵심은 재현체계로서의 국가가 결코 자신에게 속한 상황 전체를 재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상황 상태로서의 국가는 언제나 어떤 구체적인 집단의 성원들을 셈으로부터 누락시키는바, 국가의 셈은 비록 상황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헤아려지지는 않는, 즉 그것 속에 고유하게 포함되지 않는 “정원외적 요소 élément surnuméraire”를 반드시 내포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혁명적 정치란 바로 이런 국가의 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다시 말해 “국가가 행하는 부분집합의 셈을 거부하고 그 셈에서 누락된 대중의 현실을 직접 셈하는 것”이다.

통합의 공정, 메타언어적 ‘자기기술’과 ‘예외상태’

치안이나 국가가 상징적 구성이나 재현 체계라 할 때, 결국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체계 내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셈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통합 기제 자체의 본질일 것이다. 로트만에겐 ‘자기기술’이라 불리는 이 통합의 공정은 체계의 ‘메타언어’의 관점에서 번역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기호적 공간 밖으로 축출하는 배제의 메커니즘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재현되지는 않은 체계의 비-부분들은 (마치 유령이 된 것처럼)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내몰린다. 주목할 것은 이 과정이 단순한 주변화가 아니라 원칙적인 ‘비존재화’의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체계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체계의 (문)법에 의해 ‘유기되어 있는’ 상태다. 

즉 아감벤이 지적하듯이, 체계의 잉여존재(“호모 사케르”)는 그저 체계 바깥으로 외재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바깥에 놓이며, 바깥으로 밀려나 있으면서 동시에 안에 붙들려 있다(“포함적 배제”). 체계의 잉여존재는 그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간의 ‘경계선상’(안도 밖도 아닌 곳)에 제거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항존 하고 있다. 따라서 체계의 메타구조가 누락시키고 있는 이런 자리들, 상황에서 빠져있지만 여전히 그에 속해있는 이 존재들이야말로 해방의 정치학이 기반해야 할 잠재력의 처소, 뛰어야 할 ‘로두스 섬’인 셈이다.
 
탈정체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모두의 것’으로

따라서 관건은 정치적 통합의 잔여들, 체계의 식별불가능한 이 잉여들을 어떻게 해방의 정치학을 위한 (잠재적) 작인으로서 새롭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인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무엇이 이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단연 그들이 “지배질서에 따라 정해지는 자리와 정체성의 분배에서 단절하기를 명시”하기 때문이라고 답해야 한다. 기존질서에 자신들을 편입시키는 정체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함으로써만, 즉 정치적 장 속에서 모든 인식가능한(적법한) 재현의 형식들로부터 스스로를 “탈정체화”함으로써만 그들은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에 진입한다. 

무언가를 박탈당한 존재는 정치적 특성이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 정치적 ‘우리’가 정체성의 ‘꽉 참’이 아니라 ‘텅 빔’으로 옮겨가는 이 지점이 잉여의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넘어(혹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체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순간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모두의 것’을 창안하는 잠재력을 보고자 하는 랑시에르의 생각은 그래서 모든 차이들을 횡단하는 새로운 ‘보편성’을 정초하려는 바디우의 기획과도 맞닿는다. 

나아가 랑시에르가 “사이의 공간 in-between”이라 부른, 그리고 바디우가 “공백의 가장자리”라 부른 사건적 존재들의 자리는, 또한 로트만이 학문적 삶의 후반기에 깊게 천착했던 ‘경계’의 문제에 직결된다. 경계란 명확하게 식별되는 단일한 선분이 아니라 다층위적인 복잡한 공간, 일종의 ‘이중 언어 지대’로서 나타난다. 이 경계는 언제나 변경을 맞댄 두 문화, 인접한 두 기호계 모두에 속하기에 본질상 “복수 언어적”이다. 이 주변적 사이-지대(경계)에서 가동되는 것은 메타적 구조를 통한 완벽한 번역(가능성)이 아니라 “번역불가능성의 상황에서의 번역”이다. 힘겹고 부정확한 번역을 창출하는 이 과정은 반드시 번역되지 않는 여분의 잔여를 전제하게 되며, 바로 이 여분, 번역되지 않는 잔여가 새로운 (부적당하지만 똑같이 정당한) 번역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대 정치철학과 문화기호학 이론에서 잉여의 자리는 유기적 전체성이라는 관념을 내부에서 흩어놓는 내적 계기이자 전체성의 언어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묻게 하는 물음의 장소로서 나타난다. 기존의 재현체계로는 명명(식별)불가능한 ‘잉여’의 자리들과 적극적으로 관계하며, 그 자신이 공백과 보충이 되어 그것을 낳은 세계질서 자체의 논리를 드러내는 일, 바로 이것이 로컬을 향한 지향 localitology 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로컬이 자신의 잉여성, 그 내재적 예외성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의식할 때,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두의 것’으로 열리는 진정한 ‘공통의 무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