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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7호] 포스트모던 시대, 인간과 동물화

 

 

포스트모던 시대, 인간과 동물화

 

 

 

 

강신규_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오타쿠(otaku, 御宅)’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타쿠는 원래 1970년대 일본에서 대두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새로운 하위문화(subculture)의 주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위 선수들사이에서 주고받는 수준에 그치던 이 말은 불행하게도 1988~89년 사이타마현에서 발생했던 한 오타쿠 청년의 여아 연속 유괴살인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때문에 오타쿠에는 비사회적이고 도착적인 성격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가 덧입혀졌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권위 있는 일본 언론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혐오 이전에 오타쿠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꺼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의 문화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이러한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오타쿠 문화에 대해, 나아가 일본의 현재 하위문화에 대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분석하고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를 통해 현대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 오타쿠 문화와 사회적 맥락과의 관련성을 이끌어냄으로써 현대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오타쿠의 등장은 근대 일본의 사회 변화와 관련 맺는다. 1970년대 학생운동이 좌절되고 고도 경제성장이 정점을 지나게 되면서 일본은 전체가 나아갈 목표를 상실해가는데,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 오타쿠이다. 초기 오타쿠들이 선호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 <우주전함 야마토(1974)>, <기동전사 건담(1979)> 등이었다는 점은 당시 목표를 상실해가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두 작품은 국가, 집단, 이데올로기 등 커다란 이야기(거대 서사)를 위해 자신(개인)의 목숨을 바친다는 다분히 국가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같이, 커다란 이야기라는 전제가 있은 뒤 다음으로 개인의 문제가 존재했다. 원래대로라면 국가가 제시해 줄만한 커다란 이야기(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의미)를 만화,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통해 찾고자 했던 사람들이 바로 오타쿠였다.

 

 

 초기 오타쿠들이 선호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 왼쪽:<우주전함 야마토(1974)>, 오른쪽:<기동전사 건담(1979)> 등이었다는 점은 당시 목표를 상실해가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도래와 함께 근대의 세계상은 붕괴되어 버린다. 커다란 이야기는 위상과 지위를 잃어버렸으며, 더 이상 지배적인 담론체계로 기능하지 못한다. 허구세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오타쿠들의 움직임 또한 사라진다. 변화의 기점이 되는 것은 1995<에반게리온>의 등장이다. 오타쿠들은 <에반게리온>을 통해 커다란 이야기를 보충하는 대신, 특정 캐릭터나 만화적인 기호 등에 대해 극단적인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이를 오타쿠 문화에서는 모에()’라 부른다). 시대에 뛰어든 개인의 문제를, 개별 캐릭터(레이, 아스카 등)와 나와의 관계가 대체한다. 이러한 경향은 갸르게(ギャルゲ; ‘girl’에서 파생된 일본어 갸르게임의 합성어로, 미소녀가 등장하는 일러스트와 스토리를 가진 게임을 의미한다)’를 즐기는 과정에서 극대화된다. 갸르게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갸르게에서 펼쳐지는 것은 일상에서 나와 캐릭터 간에 벌어지는 아주 작은 이야기들이다.

 

 

 오타쿠들은 <에반게리온(1995)>을 통해 커다란 이야기를 보충하는 대신, 특정 캐릭터나 만화적인 기호 등에 대해 극단적인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오타쿠들이 이렇듯 커다란 이야기보다 눈앞에 펼쳐진 작은 이야기에, 그리고 현실세계가 아닌 허구세계에 집중하는 것은 양자를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것이 현실세계가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세계가 부여하는 가치규범 중 어느 쪽이 그들에게 유효한지를 저울질한 결과라고 본다. 오타쿠들이 허구세계에 갇히는 것은 사회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가치규범이 잘 기능하지 않아 다른 가치 규범을 만들 필요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주조한 커다란 이야기의 기능부전(機能不全)이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탈역사적 주체성으로 동물을 언급했던 철학자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논의에 기대 현대 일본 오타쿠들의 주체성 변화를 동물화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코제브가 동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헤겔 철학의 인간규정과 관련된다. 코제브가 해석하는 헤겔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 즉 자연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반면, 동물은 항상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산다. 인간은 욕망(desire)을 갖지만, 동물은 욕구(need)만을 갖는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자기의식을 가지고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과 달리 간()주체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욕구는 타자 없이 충족될 수 있으나, 인간의 욕망은 타자 없이 충족될 수 없다. 따라서 동물이 된다는 것은, 간주체적 욕망이 사라지고, 각자가 각자의 결핍-만족 회로를 닫아버리는 상태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오타쿠들은 시대적 상황 속에 자기를 내던지는 대신 탈역사화된 공간 속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차단한 채 자신의 욕구를 직접적 대상을 통해 만족시키는 데 집중하는 욕구-기계이자, 확실히 동물화의 길을 걷고 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아즈마 히로키 논의에서 오타쿠 문화가 어디까지나 포스트모던 사회의 한 사례로서 분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오타쿠가 곧 일본 사회,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를 보여주는 징후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적인 삶, 즉 비오스(Bios)적 삶을 잃어버리는 조에(Zoe)적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본다. 따라서 오타쿠는 배제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현대인의 주체성이 진화한 존재가 된다. 오타쿠들이 특수한 존재인 것이 아니라, 일견 특수해 보이는 그 문화가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국가, 이데올로기 등과 같은 커다란 이야기의 쇠퇴, 그리고 인터넷, 게임,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가상적 환경의 확대는 전세계적 경향이다. 그러한 경향 위에서, 일본의 경우 마침 오타쿠 문화가 발달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포스트모던 사회 논의를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 또한 가능하리라 본다. 커다란 이야기를 말하던 기존 세대의 이면에는 가식, 퇴폐, 비리, 권위주의, 무능이 자리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세대에게 그들은 꼰대들에 다름 아니며, 그들의 메시지는 새로운 세대에게 공감을 주지 못한다. 기존 세대의 근대적 담론은 그 존재의 모순성과 함께 해체되고 쇠락하고 있다. 그들의 가치 규범은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커다란 이야기는 더 이상 생산되지도, 소비되지도 못하고 있다. 대신, 허구세계가 커다란 이야기의 빈자리를 메운다. 디씨, 일베 등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는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징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특정 정치인을 소비하는 방식은 인물이 가진 본질보다 그것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다. 기표와 기의,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세대는 형식을 내용으로부터 분리하고, 형식 자체를 소비한다. 따라서 일베는 보수의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표현을 빌려 종북좌빨과의 대립 자체를 소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민주화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대립을 소비하기 위한 또 다른 기표들의 증식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아즈마 히로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커다란 이야기는 모두 사라진 것일까? 포스트모던 사회에도 경제위기, 환경오염, 민족갈등, 빈부격차, 젠더문제 등 커다란 이야기와 관련되는 이슈들이 존재한다.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이나 정치적 전략, 윤리적 호소가 필요한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는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인간의 전면적인 동물화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존재와 동물화의 해리(解離)적 공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슈들에 대해 인간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커다란 이야기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아무리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이려 하더라도 모든 영역에 있어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일 수는 없게 된다. 어떤 이슈에 관해서는 훌륭한 공적 논의를 전개하는 지식인(인간), 다른 이슈에 대해서는 단순한 소비자(동물)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위기 문제에 열심인 사람이 환경 문제에는 무관심할 수 있고,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사람이 민족갈등이나 젠더 문제에는 둔감할 수도 있다. 우익과 좌익이라는 그룹화가 기능하지 못하게 돼, 단일 이슈마다 여러 입장이 모자이크 상태로 혼재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사회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사회를 사는 인간은 어떤 부분은 인간적이지만, 다른 많은 부분은 동물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근대 사회가 이상으로 삼았던 종합적인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아즈마 히로키는 포스트모던 시대 인간성과 동물성을 함께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대안 혹은 해답을 주지는 않고 있다. 애초에 아즈마 히로키 논의의 목적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오타쿠 문화, 동물화, 근대/포스트모던 등의 개념을 연결시킴으로써 현대 사회에 대해 새롭고 진지하게 고민해보고자 했다. 때로는 현상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그것의 본질에 대한 가장 많은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스스로 오타쿠임을 자처하면서 전망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오타쿠이거나 머지않은 시간 내에 오타쿠가 될 존재들이다. 따라서 오타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후의 논의는 그의 말마따나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 나아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