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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26호] 새로운 ‘인간적인 것’을 위하여 새로운 ‘인간적인 것’을 위하여 - 권력이 빚어내는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들 ▲ 자신 몸을 묶는 방식으로 사이렌으로부터 벗어난 오디세우스, 생존을 위한 자기희생의 신화 속 모델이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이해수 자기 다스림의 기술 ‘자기를 다스림’이란 것은 그저 단순히 살아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갖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활동이다. (어떤 생명체가 인간의 형체를 갖고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인간적인 것’이란 범주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으로서 표현되든, 예절, 겸손과 같은 도덕적인 덕목으로 표현되든, 공동체에는 인간을 인.. 더보기
[119호] 여러분이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추구하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이 * 이 글은 2011년 10월 8일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에서 지젝이 했던 연설을 번역한 것이다. 새로 번역하기보다는 다수의 국내 번역본을 참고해서 오역을 바로 잡고 글을 매끄럽게 하는 데 치중했음을 밝힌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그들은 우리가 모두 패배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자들은 저 곳 월스트리트에 있습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 아닙니까?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 금융위기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 더보기
[114호] ‘비시대적’ 매체론을 위하여 글 곽성우 기자 교정 곳곳 대자보란에 군데군데 붙어 있는 포스터들을 보며 올해 초 한 대학생의 선언을 상기한다. ‘김예슬 선언’이라 지칭되는 이 선언은 한국 대학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우리 사회의 치부를 건드리는 돌팔매질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거부의 몸짓이 최초엔 바로 대자보라는 다소 낡은 매체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물론 김예슬 선언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급속도로 전파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며 사회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보다도 선언의 행간을 채우고 있는 고민의 흔적, 즉 그 ‘내용’이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따라서 단순 시발점에 불과할 수 있는 대자보라는 형식에 집중해보자는 것, 요컨대 내용적 측면이 아닌 ‘형식적 측면’에서 김예슬 선언을 논해보자는 것은 다소 사변.. 더보기
[112호] ‘토건망국’을 향한 질주를 멈춰라 정부가 ‘일로영일’(一勞永逸)을 내세운 호랑이 해의 봄도 어느 덧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오랜 안락을 향한 대한민국의 국책 사업은 땅을 파고 산을 깎는 반(反)녹색 성장을 지향하며 전국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토건주의를 일선에서 비판하고 있는 필자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홍성태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 한국이 토건국가의 덫에 걸려 고통 받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화와 고성장에 성공하고 ‘진정한 선진화’의 문턱에 이르렀으나, 토건국가의 덫에 걸려 위기에 처하고 만 것이다. 토건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막대한 혈세를 탕진해 소중한 국토를 파괴하는 기형적인 국가, 투기와 부패의 만연을 초래하는 개발 국가를 말한다. 이러한 토건국가를 개혁하지 않는 한 ‘선진화’는 불가능.. 더보기
[111호] 에로스의 에토스, 혹은 경계의 심연에 뛰어든 자들을 위한 엘레지 한보희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티모시 트래드웰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곰을 너무나 사랑했던 이 남자는 매년 여름 알래스카 국립공원 내 회색곰 서식지에 무단으로 들어가 몇 달씩 곰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친구’이고 ‘이웃’이었던 여우와 곰들에게 이름을 붙여 말도 걸고 함께 놀기도 하면서 태초의 인간인 아담을 흉내 냈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트래드웰은 곰들과의 생활을 셀프카메라로 찍어 사람들 앞에 내놓았고, 이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야단스러운 자기현시, 일종의 쇼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처음 시작될 때는 그런 기미가 보인다. 그러나 이 괴짜 환경보호운동가의 ‘곰들과 함께 춤을’이 13년 만에 끔찍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쇼일 수가 없었다. 2003년 가을, 트래드웰은 여.. 더보기
[110호] 냉소와 열망 사이: ‘88만원 세대’, 불안 속에 머물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부치’의 기상시간은 6시 반. 불 꺼진 방에서 밤새 명멸하던 TV 화면은 이른 시간에 켜진 형광등의 새된 빛에 그 고즈넉함을 잃는다. 식사를 하며 뉴스를 좇는 졸린 눈도, 이를 비추는 캠코더의 화면도 명징한 초점 없이 부유한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생경해 보이는 이 아침풍경의 주인공은 분명 그이지만 또한 그가 아니기도 하다. 마리오네트 marionette (*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인형극)처럼, 그의 일상은 대부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움직인다. (출퇴근용인 자전거조차 그의 소유가 아니라 회사의 물건이다!) 물론 완전히 타의라곤 할 수 없다. 줄을 끊는 과감함을 선택하는 대신 줄이 끊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버텨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분명 그.. 더보기
[109호] 벼랑 끝에서의 추락 -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 전국의 대학들이 공사 중이다. 낡은 건물이 리모델링되고 새 건물이 올라선다. 하지만 새롭게 늘어나는 공간들이 온전히 학문적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의시설 유치라는 이름으로 수익시설들이 하나 둘 대학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의 물리적 확장이 학문의 확장이 아니라 자본의 확장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계 속에서 대학의 기업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요란한 공사 터의 가장자리에 소위 시간강사, 즉 비정규 교수들이 비껴 서있다. 비정규 교수란 ‘시간강사를 비롯해 외래, 겸임, 객원, 대우, 강의 전담, 연구 교수 등 정년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한 학기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임용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소위 임시직 강사’를 말한다. 임시 고용직이기에 이들을 위한 대학 .. 더보기
[109호] 아내폭력과 『똥파리』 최지나 (여상힉협동과정 석사과정)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는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가족’을 보여준다. 영화 『똥파리』 속 인물들의 가족은, 가족 개개인들이 평생에 걸쳐 지게 될 짐짝이나 다름없는 공포와 상처의 기억이다. 이는 가족이 결코 자원이 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며, 드러낼 수 없는 금기와도 같았던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적나라한 재현에서도 젠더의 프레임을 적용하면 ‘아내 폭력’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영화 『똥파리』가 저예산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가족만이 희망이다, 내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한국사회의 가족담론에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가족이야기를 재현하는 방.. 더보기
[109호] 이명박 정권의 정체 ‘언론 독재’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무릇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가장 중요한 공론장이다. 공론장이 닫혀있을 때,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소통 부재’를 드러내는 상징이 바로 서울 광화문의 ‘명박산성’이다. 물론, 대한민국 한 복판의 네거리를 가로막아 섰던 명박산성은 촛불항쟁이 수그러든 뒤 사라졌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서울 용산 철거민들의 참사 앞에, 화물노동자들의 절규 앞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행렬 앞에 명박산성은 견고하게 서있다. 더구나 ‘공권력’이 그들을 ‘로마병정’처럼 지키고 있다. 문제는 권력과 민중의 소통 공간이어야 할 언론이 되레 명박산성을 옹호하는 데 있다. 아니, 공권력을 부추기며 명박산성을 함께 지키는 데 있다. 청와대와 국회.. 더보기
[108호] 붉은 입술, 차가운 사랑 김명석 (이화여대 철학과 강사) 벚꽃이 펄펄 내렸다. 네 눈동자는 부풀어 올랐다. 네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힐긋 본 네 볼은 몹시도 미끄럽고 뽀얗다. 해가 진 저녁 벤치에 앉아 짤랑거리는 미루나무와 몽환 같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너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유난히 두툼하고 빨간 입술. 소리는 날아가고 너의 색깔과 움직임만이 그 공간에서 잔치를 이루었다. 사랑하고 싶어. 사랑해. 나에게 일어났던 그 느낌을 굳이 사랑이라 불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너 역시 날 사랑하기 시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았다.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너는 내 생각이 났다고 고백했다. 무슨 음악을 들어도 나와 함께 듣고 싶어 음악을 멈추었다. 그러나 불행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