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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64호] 섬광기억

유지연 기자

 

기억이 사진처럼 찍히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아침에 출근해 창가 끝자리에 앉았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툭툭털며 아침 기사를 훑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가 목을 타고 짜르르 흘렀다. 눈이 푸석푸석해서 안약을 넣었다. 안경을 차에 놓고 왔다. 꼬고 앉았던 다리를 풀고 책상 아래 떨어진 슬리퍼를 더듬더듬 찾았다. 기획 회의하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지. 그때였다. 세월호 전원구조 보도를 본 것은.

보도국 천장에 달린 4개의 모니터에 일제히 기울어진 선박의 영상과 함께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헤드라인이 보였다. 볼륨을 높였다.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요. 학생들은 전원이 구조가 됐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학생이 324명이었고요, 선생님들이 14명이었습니다.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라는 앵커의 말이 들렸다. 단원고등학교 현장에 나가 있는 취재기자의 모습이 보였고, 그 시간 학부모들은 전원구조 보도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섬광기억’은 심리학 용어로 매우 놀랍거나 정서적으로 각성을 일으키는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포착된 사진(snapshot)과 같이 그 사건을 매우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느꼈던 감정,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 그 당시의 상황 등에 대해 선명하게 기억하고, 이것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다. 슬픔이나 무력감, 당혹감 같은 거대한 감정을 발산한 순간이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챌린저호의 폭발사고, 911테러 당일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주 쉽게 떠올린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2014년 4월 16일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일상의 바쁨에 잠시 잊고 살았을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안산과 서울 시청 앞의 분향소에는 추모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우리는 집회에서, 서명운동에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계속해서 말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그 다짐은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에 작게 또는 크게 기여해 왔다는 저마다의 고백이었다. 매해 국가적 대형사고가 되풀이 돼도, 국가의 대처가 미흡하고 문제가 많아도,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워도 우리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세월호 참사는 그 사건을 살아서 경험한 모든 사람들을 ‘살아남은 자들’로 만들었다. 현장에 있었던 소수의 생존자와 미디어의 이미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목도했던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남아있는 자들이다(이광호, 2015).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는 있을 수 없으며, 사건 이후의 모든 이는 무력감과 부끄러움을 가진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국가의 역할과 사회 구조에 대한 총체적 질문 앞에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유가족에게 언제든 찾아오라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가족을 피하고 정권유지를 위해 세월호 참사를 외면했다. 세월호 참사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 정치 프레임으로 소비되었으며 아이들의 비극적인 죽음마저 정치의 굿판에 소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공약하며 당선됐지만, 끝내 세월호 참사의 해결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은 “박근혜는 아이들을 버렸고, 문재인은 부모들을 버렸다.”고 이야기 한다(이영광, 2022).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흐르면서 “잊지 않겠습니다.”의 의미는 모호해지고 희미해졌다. 세월호는 불편한 단어가 됐다. 단체와 개인성향에 따라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금기어가 됐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사고를 왜 모두가 기억해야 하냐고, 추모를 강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든 죽음은 사회적이다. 아이가 통학버스에 치여 죽었어도, MT에서 천장이 무너져 죽었어도, 밤늦은 길에서 폭행당해 죽었어도, 집에서 학대로 죽었어도, 어느 하나 사회구조와 무관한 죽음이 없고, 사회적 의미를 갖지않는 죽음은 없으며, 그리하여 사회가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죽음이란 없다(이준희, 2022).

 

<출처: 416연대>


우리가 ‘REMEMBER 20140416’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노란 팔찌를 마주할 때 호흡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끔찍한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수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난도질당하는 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세월호 참사가 그 이전의 어떤 사고나 죽음보다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뒤흔든 까닭은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과 자각 때문일 것이다. 나의 가족, 친구, 지인이 아니더라도 공동체를 이끌어나갈 다음 세대를 잘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회성원으로서의 부채의식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일들은 잊힌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잊어 왔다. 개인적이지 않은 사회적인 일은 더 빨리 잊히고, 그걸 같이 기억하기 위한 장치를 만드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내년이면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된다. 10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이다. 세월호 참사를 잘 알지 못하는 그 아이들이 자라나 이 세상을 채워나갈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에 대해 말해 줄 책임이 있다.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대처했으며, 남은 이들의 삶은 어떠한지, 다음 세대에게 ‘잘’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래야 다음 세대의 세상이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는 행위에는 한 사회가 분명히 공유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세월호를 기억할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첫 번째 기억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자신이 하고 있던 일과 관련된 무엇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말하면서 그날 그 순간 하고 있었던 아무 의미 없는 활동을 먼저 기억한다. 추모란 기억하는 것이다. 꼭 아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말하기다. 말하기를 통해 상실의 시간을 채우고, 새로운 것을 채운다. 그날, 그 시간의 나를 기억하고 가족, 연인, 친구, 커뮤니티에 나누는 일도 훌륭한 추모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존재를 확인하며 기억의 띠를 이어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