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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3호] 나는 연애를 모른다


어둠의 왼손(수유너머 연구원)



좋아하는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대다수인 커뮤니티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면서 ‘잘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대학 새내기였던 나에겐 대단하게만 느껴졌었다. 서로 ‘자기’라고 호칭하는 여자친구와 손을 꼭 잡고 걸어다니면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뿜어내기도 했고, 찌질하거나 무지한 동기들에게 호통도 잘 쳤고, 어르기도 잘 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회의 장을 맡고 있었고, 여성학 모임에도 열심이었다. 나는 그녀의 카리스마가 좋았다. 그녀는 내게 준 책 속지에, 나를 보면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며 “이렇게 만난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고 적었다. 마지막으로 각인되어있는 기억은, 남자친구의 손을 붙들고 걸어가는 아련한 뒷모습.

어느 날,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들 쉬쉬하면서 죽음의 원인을 수군거렸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쉽게 찾은 이유는 바로 연애였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영정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잔인한 이들은 화장터 앞에서 임신이었던 것 아니냐며 정황을 밝혀낼 방법을 늘어놓거나 죽음의 이유를 단정하며 말로 비수를 꽂았다. 유골을 뿌리러 떠난 검은 바닷가에서 나는 다짐했다. 당신처럼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신념 혹은 스스로를 꺾지 않고도, 난 잘 살아내겠다고. 어떻게든, 살겠다고.

삶이 전쟁인 나날들이 있었다. 외부의 적은 모호해져 간다는데, 웬일인지 여자들의 삶은 그리도 팍팍해 보였다. 어떤 이는 ‘혁명의 적’이 연애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커플들의 지배에 맞서 솔로레타리아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우리의 비루한 일상은, 강의실에서 노골적인 성차별, 성희롱이 버젓하게 자행되어도 꿈쩍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운동권과 진보진영의 가부장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람들이 따르고 좋아하던 부총학생회장이 연애관계를 빙자한 성폭력 사건으로 뒷말이 무성했다. 과내에서는 데이트 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너무 빤한 시나리오지만, 가해자는 고개 뻣뻣이 들고 다니며 되려 자기가 마녀사냥의 희생자라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단과대 건물에 그저 여학생들의 공간을 하나 만드는데도 진이 다 빠졌다. 남자들이란, 아예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거나, 아니면 토론해야하는 관계였다. 난 정말로 다들 어쩌면 그렇게 쉽게 연애들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의 손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잡설

나는 철갑을 두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아의 벽이 단단하면 할수록, 다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못되게 굴고 싶었고, 착한 여자라는 평가가 싫었다. 웃음을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의 “사귀자”는 말에, ‘이미 사귀고 있는 거 아닌가? 아는 사람으로, 선후배로, 친구로, 섹스파트너로, 애인으로… 대체 뭘로 사귀자는 말이지?’라고 생각하며 엉뚱한 표정만 지은 적도 있으니 좀 꽉 막혔달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말하는 연애는 간단했다. 연애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말에 돌아온 대답이라고는, 화장을 하라거나 살을 빼라거나 헐렁한 티 쪼가리를 벗어던지고 좀 붙는 옷이나 치마를 입으라는 조언들이었다. 소울메이트를 운운하면, 눈이 너무 높다는 반응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를 가진 두 존재가 어떻게 몸과 마음을 나누고 애틋함을 갖게 되는지, 그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더구나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떠오르는 그 이성애적 각본들이 허접하게 느껴졌고 어떤 면에서는 싫기까지 했다. 연애 관계 속에서 당연하다고 치부되는 어떤 식의 전형성, 결혼이라는 제도적 관계로만 한정짓고 고착되는 닫힌 상상력,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 섹스를 둘러싼 불공정한 모함과 편견들.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그저 연애하라고? 아, 재미없어. 난 연애보다는, 그저 편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관계들로 숨통이 트이는 것이 더 좋았다.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한 때는 원나잇 스탠드를 해야 된다고 외치기도 했지만, 글쎄 … 그것 역시 곧 시들해졌다. 일종의 판타지였던 것을 알게 되었달까. 어차피 그것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거라서, 호감이라는 것이 이어지면 마찬가지로 연애라고 규정해야 하는 무엇이 될 수도 있는 게 썩 시원치가 않았다. 진정 내가 원하는 관계의 깊이는 그저 하룻밤 쿨하게, 그리고 바이바이, 그 이상이었다. 개인사를 덮어둔 채로 서로의 삶에 대한 앎이 부실한 상대와 맞는 아침은 그저 서걱거리기만 했다. 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겁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는 사랑을 원했지만, 연애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좋은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 굳이 남자일 필요는 없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와는 무척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온 사람과 만나면서, 아주 잠시 행복하고 자주 비참해져본 적도 있는데. 누구를 만나던,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못할 때, 상처투성이로 소금밭을 걷는 것처럼 아팠다. 한편으론. 오르가즘은 혼자서도 가능했으니 굳이 애타게 특별한 타인을 찾아야 할까. 스킨십과 같이 ‘남의 살’이 땡길 때를 제외하곤, 대체로 연애보다는 우정이 훨씬 나았다. 정 애인이 없으면, 친구끼리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지만, 난 그건 싫다. 일단 뭔가 존재의 화학작용이 있어야지, 먼저 물리적으로 애쓰는 건 그다지… 애니웨이.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연애들
  
아마 연애의 이야기는 외부에서 규정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독백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각각의 연애들에 씌워지는 색깔과 맛이 다 다르겠지. 돌이켜보면, 나의 20대는 ‘살기 위해’, 내가 무엇에 신나하는지, 어떤 관계로 행복해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등을 탐색하며 여러 우회로를 거쳐 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애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결국 친밀한 타인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더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부딪히는 접점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꼭 ‘연애 관계’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우회로를 다 설명해 무엇할까.

적어도 지금의 내게 분명한 것이 있다면, 나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연애하지 않고 있던 나의 상태가 그리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연애 관계 밖의 사랑에 취해 충만한 삶을 예찬할 수도 있고, 굳이 ‘남녀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인생의 우연과 자신의 선택이 결합해 ‘발견’되고 ‘확장’될 수도 있으며, 관계를 배타적으로 닫아두지 않고 ‘삼투압’이 가능한 상태로 상상할 때 ‘의미 있는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들 … 이다. 더 나아가면 사람이 항상 사람과 연애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이나 사물과 연애할 때도 있고, 불특정 다수와 연애하듯 살 수도 있다. 너무 연애의 남발인가? 이쯤 되면, 나는 어쩌면 ‘연애’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누가 좀 안다면, 같이 한번 … 까이꺼 뭐, 컴온 베이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