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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4호] 아톰에서 비트로, 출판의 거대한 전환


유재건(그린비 출판사 대표)

 

출판은 지금 아톰미디어에서 비트미디어로의 이행기에 서있다. 킨들과 아이패드로 촉발된 변화의 파고는 지금까지 출판을 지탱해온 아르케(arche)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 무너짐은 위기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기회적 요소 또한 갖고 있다. 마샬 맥루언이 말한 것처럼, “두 개의 미디어가 혼합되거나 서로 만나는 순간은 새로운 형식이 탄생하는 계시의 순간”이고, 이때 우리는 “두 가지 형식들의 경계선 위에서 나르시스의 감각 마비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책의 충격’ 앞에서 출판계는 감각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종이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일한 ‘책’으로 보고 ‘공통형식’(본질)을 추상함으로써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이책과 전자책은 ‘동일한’ 책이 아니다. 구텐베르크 이래 5백년 동안 출판을 지배해온 종이책 산업은 근대의 동일성이라는 지반 위에 구축된 모델로서, 홈패인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고착된(solid) 형태의 아톰미디어다. 그 홈패인 공간을 따라 저자는 쓰고, 출판사는 만들고, 서점은 유통시키고, 독자는 소비한다. 반면 종이책 모델 자체를 의문에 부치면서 등장한 전자책은 매끄러운 공간을 흘러넘치면서(fluid) 작동하는 비트미디어다. 그 매끄러운 공간에서 생산, 유통, 소비는 분절되지 않고 하나로 섞인다. 이 새로운 ‘흐름의 공간’에서는 저자만이 아니라 출판사도 쓰고 독자도 쓴다. 저자(author)는 권위(authority)를 탈각하고 필자(writer)가 되며, 이들은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의 세계에서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만난다. 홈패인 공간에서 개인미디어로 기능했던 책은 이제 매끄러운 공간에서 소셜미디어가 된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책의 생산-유통-소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낳는다.

플랫폼의 변화에 따른 출판미디어의 변화

플랫폼의 변화 양상을 보면,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알다시피 플랫폼이란 원래 무대, 단상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 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를 가리키는 말로, 즉 응용프로그램이 실행될 수 있는 기초를 이루는 컴퓨터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고, 이제는 컴퓨터뿐 아니라 ‘기반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로 넓게 쓰이고 있다. 출판의 경우, 플랫폼이란 하드웨어로서의 디바이스(종이책, 전자책), 응용소프트웨어로서의 콘텐츠(필자의 저작물), 그리고 네트워크(서점,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칭하는 말로, 출판산업의 생산-유통-소비를 떠받치는 인프라 혹은 시스템을 가리킨다.

종이책 시대에 출판사는 출판의 플랫폼 안에서 확고한 지배력이 있었다. 그 지배력의 원천은 하드웨어에 대한 지배력이었다. 종이책이라고 하는 디바이스는 아무나 만들 수 없었다. 책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거니와, 생산-물류-유통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시스템에 외부자는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드웨어에 대한 이런 지배력은 소프트웨어(작가, 저자)에 대한 지배력으로 이어져 플랫폼에 대한 출판사의 지배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한편, 네트워크 지배력은 유통망인 서점이 갖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출판사와 서점은 플랫폼을 지배하는 두 주체로서, 출판물의 생산-유통-소비를 단일한 플랫폼 안에서 배타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트 시대로 접어들면서 플랫폼의 양상은 바뀌게 된다. 변화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의 세 부문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비트화의 진행이 가속화되면서 가장 먼저 출판사는 하드웨어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종이책 시대에 하드웨어인 책은 출판사가 인쇄소나 제본소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하드웨어에 대한 장악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자책 시대가 되면서 하드웨어는 아마존, 애플, 구글 등 거대 기술기업의 차지가 된다. 이들 기술기업들은 하드웨어(전자책 디바이스)와 네트워크를 연결해 콘텐츠의 생산-유통-소비가 단일한 공간 안에서 전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강력한 플랫폼을 만들었다. 이런 구조에서 소프트웨어 즉 필자가 플랫폼 구조 안으로 흡수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일 것이다. 실제로 기술기업은 자사의 플랫폼에서 편집이나 디자인의 표준 포맷 툴을 제공함으로써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전자책을 만들어 플랫폼상에서 유통, 소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플랫폼에서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오픈 퍼블리싱 방식으로 누구나 쉽게 책을 낼 수 있게 됨에 따라 작가나 저자는 더 이상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평평하게(이 말이 모든 저자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무대가 보장된다는 의미에서 평평하다는 것이다) 필자로 불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들은 이제 굳이 출판사를 통해 출판할 필요가 없게 된다. 출판사를 통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따라서 필자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이로써 종이책 시대 때 출판사가 갖고 있던 배타적 지배력은 기술기업의 손으로 다 넘어가게 된다.

네트워크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종이책 시대에 출판 플랫폼에서 네트워크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서점이었다. 그러나 아마존, 애플, 구글의 사례가 보여주듯, 전자책 시대가 되면서 소비자는 서점을 통하지 않고 이들 기술기업의 네트워크에 접속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갖고 있는 디바이스(스마트폰, 아이패드, 컴퓨터, 전자책디바이스 등)를 통해 책을 구매하고 소비한다.

이제 종이책 시대 때 출판생태계의 두 주체였던 출판기업이나 서점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럼, 앞으로 출판사나 서점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출판사나 서점이 필요하기는 한 걸까. 혹 출판사나 서점이 없어도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훨씬 더 활발해지고, 따라서 독자들은 지식을 보다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출판사와 서점은 사라질 것인가

먼저 출판사의 경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함에 따라 손에 쥐는 게 하나도 없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저자/독자와 밀도 높게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출판사는 여전히 존재해야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물론 출판사의 네트워크가 소셜네트워크라 하더라도 당연히 그 하부에는 기술네트워크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앞으로 출판사들은 기술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통제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소프트웨어(필자)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이때의 지배력은 과거와 같은 일방향성의 지배력이 아니라 개방과 공유와 참여에 따른 상호지배력이다), 종이책 시대에 서점과 그랬던 것처럼, 기술기업의 플랫폼 안에서 출판 생태계의 일원으로 공생관계 속에서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드웨어와 네트워크는 기술기업이, 콘텐츠와 소셜네트워크는 출판사가 지배력을 가짐으로써 양자가 공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출판 생태계가 짜여질 것이다. 다시 문제는 지식산업의 원천인 콘텐츠에 대한 장악력이다.

서점의 경우는 아마존처럼 독자적인 디바이스를 개발함으로써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만, 플랫폼은 그 속성상 가장 효율적인 극소수의 플랫폼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서점이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POD(Publish on Demand) 판매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에스프레소 머신(일종의 책 자판기. 디지털 데이터 베이스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유저가 원하는 책을 검색한 다음 버튼을 누르면 3분 정도 만에 즉석에서 제본된 형태의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 같은 것이 좋은 예에 해당할 것이다. 또 하나, 지금까지와 같은 매스모델형의 서점이 아니라 소셜모델에 기초한 전문서점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여 속에 함께 만들어나가는 출판의 플랫폼

종이책이 철저히 시각적인 미디어라면, 전자책은 공감각적인 미디어다. 다시 한번 맥루언의 말을 빌리자면, 비트 기술의 발전은 “순간적 속도의 결과인 시각화할 수 없는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시각을 왕좌에서 내쫓고, 우리에게 공감각 즉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의 밀접한 상호 관련을 되돌려준다.” 이렇듯 감각 자체가 달라졌는데도 지금처럼 종이책 관점에서 전자책을 바라보는 한, 출판의 잠재성은 왜곡되고 축소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공통형식의 추상’이 아니라 ‘탈형식화의 추상’이 필요한 시기다. 지금까지 출판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여겨 왔던 시각매체적 관점의 출판 문법을 과감히 지워 버리고, 상위의 보편성 없이 종이책과 전자책 그 둘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새로운 출판의 형식을 발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횡단적 추상화가 가능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출판의 거대한 평면’에 도달하게 된다. 전통적인 출판의 개념이 사라진 이 평면에서는 신간과 구간의 구분은 말할 것도 없고, 단일한 패키지로 묶였던 지식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리패키지되어 ‘거대한 콘텐츠의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의 과제는 이 평면 위에서 새로운 감각이 요구하는 구체성을 하나하나 획득해 가는 것이 될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대표적인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는 플랫폼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유튜브의 수억 개에 달하는 동영상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올린 콘텐츠다. 특정 개인의 소유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트 소유자는 수십억 달러를 받고 이 사이트를 구글에 팔아 버렸다. 이처럼 비트 세계에서 자본의 착취 양상은 과거 아톰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랫폼은 공공자산의 성격이 강하므로 ‘플랫폼 공개념’에 대한 실천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공재로서의 플랫폼 인프라 위에서 상생적인 경쟁을 통해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 이것이 앞으로 출판 생태계의 중요한 이슈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