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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4호]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요훈 ('디지털 세계의 엘리스' 저자)



최근 구글, MS 등 IT 기업을 중심으로 인터넷에 노벨상을 주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인터넷은 전세계 국가와 인종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소통과 토론 문화를 활발하게 열어나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세계 평화에 기여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다시 말해 검열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 자유롭게 교환되고 토론될 때, 민주주의는 더욱 성장할 수 있으며 그게 바로 세계 평화라는 논리다. ‘자유로운 의사교환 = 민주주의 = 평화’라는 논리는 2009년 이란 사태 때 이란 정부가 SNS서비스중 하나인 트위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았을 때도 등장한 적이 있다. 이란 사태 이후 미국 학계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트위터를 이용할 수 있는 검열 회피 기술을 개발해 보급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트위터는 민주주의를 촉진시키는가

사실 이런 주장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건 때는 팩스를 통해 중국 내부의 상황이 해외에 알려질 수 있었기에, ‘팩스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북유럽 국가들이 말하는 팩스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며, 통신 기술의 발달은 이런 자유를 증진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06년 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위키피디아는 이 군사 쿠데타에 대한 속보를 모아주는 정보 센터 역할을 했었다. 2005년 미국 코넷티컷 상원의원 선거에서 블로거들은 조직적인 캠페인을 펼쳐 당시 친 부시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정치인을 낙마시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시크릿 오브 코리아’ 블로그에서 한국 내 유명인사들의 미국 내 부동산 거래에 대한 정보를 올려, 이를 이슈화 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클레이 서키(Clay Shirky)의 말대로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구가 주어’진다면,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집합 행동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고재열(시사in 기자)-허지웅(영화 평론가) 트위터 논쟁(이하 ‘고-허 트위터 논쟁’)’에서 고재열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거나 ‘트위터가 이슈의 패자 부활전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터넷을 통한 손쉬운 정보 파급과 집합 행동이 가능해졌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맥루한의 말마따나 모든 미디어는 그 자체의 속성을 지니고, 그 미디어의 속성이 그 미디어를 통한 사람들의 말하기 또는 관계맺음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인터넷 고유의 ‘망송 구조(Netcast structure)'는 기술적으로 전체 참여자가 의사 소통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런 망송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관심의 공동체들은 언제라도 가벼운 형태의 집합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인가 기술인가

반면 앞서 말한 ‘고-허 트위터 논쟁’에서 허지웅이 지적하는 것처럼, 위와 같은 이야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도구를 어떻게 써서 세상을 어떤 쪽으로 바꿀 것인가라는 이야기가 감춰져 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과 현실에서 정말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결국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다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말은 ‘몇몇 사람들이 트위터를 사용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니 당신도 그런 힘을 가지고 싶다면 트위터를 시작하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 말에 감명되어 트위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다시 그런 언사를 말한 사람의 영향력을 강화시켜주는 일-그 사람의 발언으로 트위터 이용자가 이렇게 늘었다-이 된다. 돌고 도는 흐름의 시작에는 현실의 유명인이란 권력을 배경삼아 남들보다 더 많은 팔로어(트위터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발언자가 있다.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첫 번째 발언자의 권력이 계속 강화되어 감에 따라 나중에 참여한 사람은 그 사람만큼의 권력을 획득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블로거 leopord의 지적대로 트위터는 기껏해야 “현실 권력 관계의 재반영”에 불과하게 된다. 실제로 많은 팔로어를 가지고 있는, 그래서 ‘게이트키핑된 뉴스의 패자 부활전’이라도 보다 쉽게 실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트위터 사용자는 대부분 현실에서도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실 권력 관계의 재반영에 불과한 트위터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권력 이전이라면 모를까, 어떤 권력 관계의 전복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권력 관계의 전복이 없는 변화라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말은 많은 부분 공허한 수사로 전락하고 만다.

게다가 손쉬운 정보 파급과 집합 행동이 바로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여기서 상식적으로 그렇게 된다고 말하면, 그건 자신의 몰상식을 드러내는 일밖엔 되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도구를, 그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과대 선전이다. 한국에서 적용되고 있는 인터넷 실명제 등의 정책에서 보듯이, 어떤 기술 도입에서 오는 변화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초래할 정도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국가는 언제라도 합법적인 수단으로 그것을 전유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란과 중국에서 이미 트위터를 차단하고 있고,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듯 이미 한국에서 트위터를 하나의 검열 대상으로 지정한 상태다. 어떤 기술적 가능성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더라도 그만큼의 자유 영역, 다시 말해 기술이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된다면,  기술적 가능성은 현실의 공염불로 전락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분법적 시각을 경계하며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은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 vs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흘러갈 소지가 다분하다. 이를 두고 김규항처럼 단순한 견해 차이라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진중권처럼 이번 논쟁을 그저 수사학적 표현을 두고 일어난 해프닝, 또는 미디어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논쟁에서 고재열은 자신의 발언 뒤편에 숨겨진 배경을 드러내지 않았고, 허지웅은 기술 도입에 따른 변화를 단순히 도구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로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어떤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도입되는지, 그래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를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트위터 도입으로 인해 생기는 변화만을 이야기한다면, 그리고 나머지 것을 단순히 ‘대중들의 상식’에만 맡기고자 한다면 그건 매우 위험하다. 나치와 괴벨스에 의해 라디오와 영화가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지적되는 문제에 대한 고민 자체를 회피하거나 ‘수사학적인 표현’이라고 말 돌리는 태도는 잘못하면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것이 언제라도 국가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미디어라면 더더욱.

그와 더불어 트위터로 대표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도구라는 식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도 반대한다. SNS가 단순히 다른 활동을 촉진시키거나 저해하는, 그런 것에 불과하다면 별도로 떼어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시간에 어떻게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마크 포스터의 지적대로 ‘그럼 누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냐’는 식의 발상은 구시대적 발상에 불과하다. 다른 미디어를 통해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입으로는 ‘트위터는 도구다’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트위터란 도구를 이용해 누군가를 선동하겠다’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적확하게 변화를 읽어내고 적응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두 관점 모두에서 보여지는, 어떤 기술이나 사람들을 변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는 사고 방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기술과 사람, 또는 그 밖에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는 맥락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꾸는 것도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적확하게 변화를 읽어내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어떻게 기술을 수용하고 그 기술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흐름을 읽어내야만 한다. 지면이 짧아 다 적을 수는 없겠지만 간단하게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분노합시다. 무한 RT 해주세요!’라고 말하지 말고,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하자.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얘기하고 그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를 잘 듣자. 어떤 이들의 무의미한 반복 공격에 일일이 다 대응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가장 많이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감대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낮은 수위의 집합 행동을 고민해 보자. 새로운 미디어를 통제하려는 국가 권력의 시도에 대해 맞서 저항하자. 세상의 흐름을 잘 살피고 그에 맞는 이야기를 풀어놓자. 그 안에서 계속 권력 관계의 전복을 유도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고민해 보자. 비록 그것이 어쩌면 무의미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물고기가 물을 탓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해류를 잘 탄 물고기가 멀리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쩌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 가서 닿게 될 지도 모른다. 당신과 내가 원하는 곳이 같은 곳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 한줄 요약 : SNS를 도구로 여기지 말고 변화된 환경으로 여기고 적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