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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4호] 스마트폰을 든 스마트몹


김명석(생각 실험실 대표)


이 글은 스마트폰을 예찬하는 글이다. 스마트폰이 가져올 변화를 과대평가하는 맥락은 거창하다. 먼저 기술결정주의라는 다소 끔찍한 견해를 생각해보자. 이 견해에 따르면 기술은 사회 내 다양한 가치들을 결정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 구조와 역사까지 결정한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도입된 후 인류에게 닥친 문명화와 도시화 과정을 이제 와서 우리가 과연 되돌릴 수 있을까? 기술결정주의는 여러 가지 전제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몇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다양한 힘들 중에서 기술은 중추적 지위를 차지한다. 인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기술 혁신은 사회의 진보를 주도해 왔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도입되고 그것이 그 사회에 일단 정착하게 되면, 그 기술의 진보와 혁신을 막을 만한 다른 사
회적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회가 기술을 보유한 만큼, 또한 기술 혁신을 이룬 만큼, 그 사회는 변화한다.

물론 기술결정주의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태까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정치적 의사결정을 통해 기술 진보의 방향을 사회가 통제해 온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극우 우생학, 대량살상, 핵무기 확산, 인간생체실험, 기술 양극화, 생태위기 등의 문제들은 시민들을 자극하여,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기술의 진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기술이 문화와 정치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으로 진보한다고 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술 발전은 기술 그 자체의 속성만이 아니라 기술 개발자와 사용자의 욕구에도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술의 자기조직화에 반대하고, 기술이 오히려 사회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기술결정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 견해를 ‘기술의 사회적 구성주의’라 부른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술을 통제하는 사회적 힘은 단순히 기술이 실패할 때만 발휘되지 않는다. 특정 기술이 성공하고 확산되는 것도 사회 체제에 의해 결정되는데, 기술의 실패뿐만 아니라 성공조차도 사회적 산물이라는 말이다. 가령 단순히 해당 기술의 탁월성을 바탕으로 판단해 볼 때 인텔의 칩, IBM 호환기종 PC,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등의 성공은 설명할 수 없다.

이제 다음과 같은 거창한 물음을 던져 보자. 스마트폰의 진화는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사람들이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만큼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오직 우리 사회의 진보 수준만큼만 스마트폰이 진화할 것인가? 그래서 사회의 지배자들이 기성 체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스마트폰 기술을 통제하고, 결국 스마트폰 사용자들을 기만하게 될 것인가? 이 물음은 기술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과 세계, 인식과 실재를 매개하는 매체 일반의 문제를 건드린다. 여기서 매체란 안경 현미경 망원경 보청기 계산기 승용차 통신수단에서부터 언어 신화 종교 신문방송 과학 예술 철학까지 모든 인식 도구들을 포괄한다. 이런 인식 도구들이 발전하는 만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진보하는가? 만일 사회가 도구의 진화를 통제한다면, 그리고 사회의 지배자들이 그 통제 방식을 결정한다면, 사회의 권력 구조가 특정 도구의 확산과 사용 방식에 반영될 것이고, 기존 구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도구 사용자들을 조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도구의 진화가 사회 진보를 촉진한다면, 혁신적 도구의 확산은 사회의 혁신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를 장악해 가고 있는 기술 시스템

매체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할 수는 없다. 다만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의 특성에 주목하고 이 특성의 중요성에 집중하자. 하나마나한 이야기이겠지만 스마트폰은 무생물이고 능동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가로등과 CCTV가 도시에서 점차 번식하듯이 스마트폰도 거대한 시스템 내에서 번식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무생물 개체가 번식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기술계’라고 부를 수 있는 거대한 기술시스템 또는 기술생태계이다. 이곳에서는 기술, 기술제품, 기술개발자, 기술사용자, 마케터 등이 복잡한 연계망을 이루고 있다. 스마트폰은 기술계의 한 부분인 정보통신 기술계에서 서식하는데, 이곳에는 유무선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계적 통신망, 그 망 내에서 하이퍼링크를 통해 얽혀 있는 정보망, 이 정보들을 검색할 수 있는 엔진과 브라우저, 이 정보를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입출력하는 하드웨어들, 글 그림 음성 동영상 등 다양한 양식의 정보를 산출하는 컨텐츠 생산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류역사에서 20세기는 아마도 정보통신 기술계가 세계적 수준으로 구축된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개인 컴퓨터, 정보 저장 매체들,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 무선정보통신 등이 국가와 국가, 도시와 도시, 방과 방, 개인과 개인을 연결해 놓았다. 19세기에 에디슨이 발전기, 전압을 분배하는 수단, 전기 소비를 측정하는 계량기, 비용 청구 방식, 전기 설비를 확대시키는 법률 등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하여 거대한 전력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20세기의 기술혁신가들은 정보통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마트폰은 21세기 초 이 시스템의 정점에서 탄생한 매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티브 잡스는 어쩌면 정보통신 시스템의 완성자로 기억될지 모르는데, 그 이유는 지금 그가 기술 경제 정치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기존 정보통신 시스템 안으로 규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 구글,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아이튠즈, 위키피디어, 블로고스피어 등 정보 저수지와 사회 연계망이 있다면, 이 네트워크의 다른 끝에는 개인 단말기로서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리고 그 유사품들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정보와 단말기를 이어주는 3G망과 와이파이가 혈관과 신경망처럼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될 것이고, 이 전체를 실제 세계에 구현하는 하드웨어들, 기술자들, 컨텐츠 생산자들, 프로그래머들, 판매자들이 이 기술생태계 안에서 적응하고 증식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계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단계에서 개인들은 새로운 정보통신 수단을 사용할지 말지, 어떤 기술을 선호할지 상당한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통신 기술계의 혁신적 잡종 엔지니어들이 개별 사용자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술 시스템을 만드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사회 전체가 이 시스템의 지배를 받게 되는 기술결정주의 단계가 시작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계 안으로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도시에서도 전원에서도 사막과 산악에서도 살기 힘들어진다. 철의 사용을 거부하고 아직도 나무 막대기로 경작을 하는 부족, 전기 사용을 거부하는 소수 공동체들이 점차 사라지듯이, 정보통신 기술계 바깥 변두리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잠깐, 나는 이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스마트폰의 출현과 스마트몹

한편 이 기술계를 자신의 생활세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제 마침내 이동성과 휴대성이 극대화된 초소형 개인 컴퓨터, 바로 스마트폰을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의 출현은 봉화에서 전화기 그리고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긴 정보통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길고 넓은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기술시스템이 완비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온갖 어플리케이션을 장착하고 있어 원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입출력할 수 있는 소형 PC를 개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사소한 사건이 아니다. 웹 2.0이 출현한 이후, 소수의 오프라인 지배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위키 기반 집단 정보 창고들, 블로그 기반 개인 매체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사회연계망 등이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는 중인데, 웹 2.0 기반 정보망과 스마트폰 사용자들의 결탁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집단정신의 현상학’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하지만 아직은 사소한 징조에 불과한 사건 하나를 이야기해보자.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50만이 되지 않는 한국의 트위터 사용자들 중 일부가 선거의 판도에 사회과학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주로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투표를 독려했는데, 선거가 끝난 후 심지어 여당에서도 트위터에서 투표 독려가 패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것이 징조인 이유는 트위터를 하는 사람의 수가 대한민국 전체 유권자 수와 비교해 보면 몹시도 적은 수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국의 트위터 사용자가 1000만 명이 되고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1000만 명이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과연 오프라인 지배자들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자행하고 있듯이, 포털과 거대 언론과 유착하여 여론과 정보, 의견과 정서, 이슈와 아젠더를 계속 통제할 수 있을까?

창대하게 시작한 글을 이제 미약하게 끝내고자 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비록 정보통신 기술계가 너무 비대해져 개별 사용자들이 통제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예속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시스템이 너무 커서 소수의 지배자들이 전체 시스템을 지배할 수 없고, 그래서 그들이 대중을 지배하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기쁜 소식이다. 최근 위키리크스 사례는 초강대국 미국조차도 자신들의 일급비밀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보다 더 중요한 희망의 근거는 정보통신 시스템 자체가 본성상 사회적 연계망, 상호참조의 지식망, 실시간 의사소통에 의해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은 어쩌면 정보통신 기술 시스템의 바로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매체이자 기술이다. 시각이 굴절된 사람은 좋은 안경을 써야 하듯이, 이제 정보가 굴절된 사람은 좋은 스마트폰을 써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더 똑똑해질 수 있고, 스마트폰은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더 똑똑해지기 위해 우리는 오프라인의 불량 지배자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수평적 동료들의 의견들에 끊임없이 접촉해야 한다. 이러한 수평적 대화만이 개인이 더 똑똑해지는 길이고, 우리 스스로 사회 자체를 점차 혁신해가는 스마트몹이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