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27호] 기념일의 재구성: 포스트모던 기념일의 사회 원리

 

 

기념일의 재구성: 포스트모던 기념일의 사회 원리

 

 

김성윤_중앙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새해가 되면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다. 조금이라도 세심한 사람이라면, 새로 구입한 다이어리에 각종 기념일을 적어 넣는 것이다. 애인과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의 생일, 애인과 처음 만난 날 혹은 결혼기념일 등등. 그 날들은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원색 계통의 색깔로 적힌다. 기억하기 위해서다. 특별한 날이지 않은가. 어디 그뿐일까. 스마트 시대에 기념일을 따로 관리해주는 어플리케이션까지 있을 정도다.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환희는 이 날을 기념함으로써 보증된다. 몇몇 빈 칸에 채워질 2월 초콜릿, 3월 박하사탕, 10월 잭--랜턴(Jack-o'-lantern), 11월 빼빼로, 12월 십자가 등은 일종의 보험료와도 같다.

 

기념해선 안 되는 기념일?

발렌타인데이, 할로윈, 빼빼로데이 등이 과잉소비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별 날도 아닌 것이 마치 무슨 명절처럼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더 희한한 풍속이 나타나기도 해서, 초콜릿과 빼빼로 대신 찹쌀떡이나 가래떡을 주고받자는 등 다양한 거울 이미지들이 제시되기도 한다. 외래문물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지키자는 친근하지만 진부한 발상이다. 혹은 조야한 잉문학 마인드에서 마케팅과 상술에 속으면 안 된다는 비난들이 나오기도 한다. ‘빼빼로데이는 롯데제과의 마케팅 전략에 불과해.’ ‘그런데도 왜 그렇게 그 날에 목메니?’ ‘너희들은 속고 있는 거야.’ ‘가래떡마저도 상술인데 그걸 모르니?’

이벤트 데이에 대한 비난들은 이 날이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나온다. 기념이란 집합적인 기억을 추출하여 표상하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을 동일화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벤트 데이에 부정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집합성, 기억(과 망각), 표상, 동일화 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예컨대 발렌타인데이에 어떤 보편적 집합성이 있기나 한 걸까. 그 날 왜 하필 초콜릿을 주고받아야 하는 걸까. 그래봤자 각 개인들은 소비자로 호명 받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벤트 데이의 관행과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들은 오늘날 기념일을 둘러싸고 기억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왜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구성원들이 과거에 같은 시간을 보냈었고 또 현재를 같이 보내고 있다고 동의만 된다면, 그 구성원들은 하나의 사회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념일의 문제는 전체사회가 어떻게 상상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운용될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성도 없고 공공성도 없는 날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념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다소 의아한 구석이 있다. 이 역사도 없고 공적이지도 않은 날이 사회적으로 기념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는 세계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조일 수 있다. 그동안 일반명사로서 기념일에는 명절과 국가기념일 같은 것만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이벤트 데이가 점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여겨진다는 것은 굉장히 역설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듯, 명절은 오랜 관습에 따라 생겨난 아주 좋은 시절, 국가기념일은 어떤 특정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념일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대로라면 이벤트 데이는 기념되어선 안 되는 날이다. 관습의 바깥에 있고 제정된 바도 없는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기념일의 성립

이벤트 데이의 이러한 원리는 굉장히 익숙한 문화논리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든 창작물이 역사적 뿌리와 무관하고 정서적 깊이를 찾기 힘들며 권위 있는 형식에 대항하고 통속적인 유희를 유도한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던하다고 개념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이 상업문화 및 소비문화로 연결된다면 그러한 판단은 매우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벤트 데이의 기념 관행에는 설날 같은 역사도 현충일 같은 엄숙성도 없다. 경축행사 같은 공식 의전도 필요 없으며 단지 선물을 주고받고 연인들끼리 팔짱을 낀 채 거리를 활보하면 그뿐이다. 명절의 공동체의식이나 국가기념일의 국민의식보다는 이벤트를 향유하는 소비자의식이 더 중요할 따름이다. 기존의 기념일들과는 철저히 단절적인 셈이다.

이벤트 데이는 역사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현상이 역사적으로 출현한 경향이라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째서 우리는 이 포스트모던 기념일을 기리게 된 것일까. 할로윈이나 빼빼로데이가 비교적 최근에 유입되거나 창안된 것이라지만, 한국사람들이 초콜릿을 주고받았던 것은 무려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그 이전이 기념일의 역사에 있어서 국가기념일의 전성시대였다면,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시간 기념의 포스트모던한 관행이 등장한 것이다.

이전만 하더라도 집합적 시간 기억의 방식은 대중을 수동적으로 호명하든 어떻든 간에 그 테두리가 공적 영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국가든 시민사회든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공적 영역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으로 묶임(bonding)의 시간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즈음에 유행하기 시작한 이벤트 데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공적인 것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한계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을 붙들고 엮어낼 만한 표상이 요동치면서 견고하기만 했던 집합적 동일성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벤트 데이의 등장은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살아왔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던 방식은 철저하게 과거와 연결된 시간 감각을 통한 것들이었다. 명절이나 국가기념일 등은 (그 기원의 자명성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집합적 기억이 과거로부터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하고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인 우리 시대의 미래 비전은 시공간 개념의 정상성을 뒤바꿔놓았다. 이제는 과거로부터의 추세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그리고 견고한 기원이 아니라 유동적인 분산성으로 이해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기념일의 민간화와 새로운 사회적 결속

발렌타인데이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 데이들을 보면서 국적불명의 상품화 논리를 떠올리는 감각적 반응은 그런 점에서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날들은 당연히 우리가 알아왔던 역사나 공적인 관행에 모두 작별을 고한다. 초콜릿, 사탕, 빼빼로 같은 것들은 단순히 유별난 상품이 아니라 태극기나 애국가처럼 오늘날 (적어도 젊은 세대) 한국인들의 집합의식을 드러내는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에 신무기 퍼레이드와 고공낙하 시범 그리고 에어쇼가 있었던 것처럼, 이벤트 데이에는 신상품 퍼레이드와 나레이터 모델 쇼 그리고 빼빼로 게임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무언가 집합적인 기억을 공유하고 기념함으로써 그 표상을 매개로 한국사회의 대중들이 등가적으로 동일화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묶임이 국가를 매개로 하느냐 혹은 시장을 매개로 하느냐 하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기념일의 민간화 현상은 사회에서 국가폭력을 떼어낸다는 의의가 있지만, 그 빈자리에 시장을 들였고 나아가 모든 것이 경제적인 것에 종속되게끔 했다. ‘황소의 고삐가 풀림으로써 오래지 않아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그 자리를 자기조정적 시장이 꿰찬 형국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은 객관화된 교리나 이를 매개하는 의례 없이도 초콜릿과 빼빼로라는 물신 앞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들은 과거를 지우는 대신, 상품과 친밀성을 거래함으로써 인간성 파괴와 관계 단절이라는 미래의 공포로부터 안전을 도모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중대한 역설을 보여준다. 이런 광경을 두고서 신자유주의와 (그것의 문화논리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공성을 파괴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이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할 만도 하다. 얼핏 보기에도 그러한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콜릿이나 빼빼로 같은 상품이 아닌, 시장의 논리로는 포섭되지 않는 다른 대체물로써 기념일을 재조직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문제는 포스트모던 기념일을 즐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은 그런 이벤트들이 상술에 불과할지언정 자신들이 공적이거나 사회적인 삶에서 멀어졌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러한 상품의 세계야말로 오늘날의 공적인 삶을 지탱해주는 핵심이 아닐까.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적경제적인 것이 공적정치적인 관심사가 됐다는 점, 따라서 상호작용과 결속조직화 그리고 상징질서 등과 같은 사회적인 것들이 우리가 아는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편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적인 것이 파괴되고 사회적인 것이 끝났다는 식의 낭만주의적 감각만으로는 포스트모던 기념일의 시간 감각이 가지는 효과를 제대로 인식해낼 수 없다.

  

 

 포스트모던 기념일이 오면 우리는 국민보다는 소비자로서 동일화된다.

 

 

포섭과 배제의 새로운 분할선

예의 포스트모던 기념일들은 우리가 어떤 집합적 시간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사회의 조직 원리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가 국가에 동일화되던 과거에는 사회적 성원권(membership)이 국민으로 부름을 받느냐 여부에 달려 있었다. 에어쇼에 열광하고 조기를 게양하면서 국가기념일에 동원되고 참여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사회적 관계가 보증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성원권의 분할선, 즉 포섭과 배제의 기준선은 전혀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과거와 같이 국적보다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관건이다. 진열된 상품에 열광하고 심지어 직접 초콜릿을 만들면서 이벤트에 동원되고 참여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와 유사한 의례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유력한사회적 관계에 포섭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기념일이 오면 우리는 국민보다는 소비자로서 동일화된다.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명절이든 국가기념일이든 혹은 포스트모던 기념일이든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조건으로부터 탈동일화하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역사의 어떤 역설들이 작동하여 작금의 재동일화 논리로 귀결되는지를 진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국민으로부터의 탈동일화가 어찌하여 소비자로의 재동일화로 귀착되었는지를 말이다. 포스트모던 기념일이란 현대적 시간에 대한 집합표상인 동시에 오늘날 정치적 무의식의 징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