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1 20:03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어떤 영역이든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대학원이 학문 공동체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형태로 가능하고 없다면 왜 그러한지에 대해 살펴본다. 돈 되는 학문만 육성하는 대학원 정책, 취업을 위해 잠시 머무르는 학생들, 어떤 대안적 담론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학문, 분과 학문의 경계를 고착화시키는 학진 등. 이처럼 많은 요소들이 대학원을 기능적 공간으로 전락시키고 있기에 대학원‘바깥’에서 학문 공동체를 모색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다년간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대안적 담론을 만들어 온 필자를 통해 대학원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대학 안에서도 ‘찬밥’신세인 인문학이 미래의 비전과 삶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을까? 혹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에 돈 되지 않는 인문학적인 가치와 지혜를 원하기나 할까? 대학의 인문학이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학문적 대안공동체는 제공해줄 수 있을까? 그보다 학문적 대안공동체가 가능하기나 할까? 이처럼 거시적인 문제들을 근시안인 필자가 논할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 분야와 관련하여 고민은 해보고자 한다. 요즘 대학 내에서는 몇 년 전과는 달리 인문학의 위기담론은 슬그머니 사라진 편이다. 인문학이 발등의 불은 끈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인문학의 콘텐츠화,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과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의 인문학은 어떠한가?

존 쿳시의 소설집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는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이라는 장이  있다. 얼핏 보면 제목부터가 단편소설이라기보다 학술논문처럼 보인다. 존 쿳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노벨문학상) 작가이자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왜 이런 제목의 소설을 썼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인문학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존 쿳시의 페르소나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소설 속에서 늙은 페미니스트 작가로 등장한다. 그녀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를 만난다. 그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인문학은 '대학의 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대학은 거세되었고, 학문은 돈벌이의 장일 따름이다. 요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하루에 50명이나 총질에 사망하고 강간은 다반사고 대다수는 기아에 허덕인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인문학이 상아탑 바깥에서 무슨 소용에 닿겠는가라는 회의가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인문학은 어떤가?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은 출발부터 대단히 도구적이었다. 인문학의 목적 자체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신분상승의 조건이었다. 사서삼경을 읽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입신양명에 있었고, 벼슬을 하면 가족 전체가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부모들은 경, 대부와 같은 아들의 벼슬에 맞춰 대접받았다. 개인의 영광은 가문의 영광이었고 입신양명은 효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인문학 교육이 계층 상층의 사다리였던 시절은 지났다. 대학 학력은 보편화되었다. 고등학생의 84.5%가 대학에 진학하며, 대학교육이 의무교육이 된 지 오래다. 대학졸업장이 별다른 혜택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없을 때 상대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이런 상황이므로 대학 인문학도 시장논리에 맞춰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생계수단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사회가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 시대에 인문학의 경쟁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분명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금 강단 인문학이 자체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비인문학적인 방법으로 지식생산을 계량화하는 것이다.  
 
온 사회가 한 목소리로 사교육 시장을 비판하는 척하지만 대학의 인문학은 사실 사교육이 없으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사교육의 온상이라는 점에서 학원과 대학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대학의 인문학과는 사교육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살아간다. 인문학과 졸업생들이 가장 ‘만만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온갖 형태의 학원들이다. 학원시장에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배타적으로 보유하기 위해 인문학과들끼리의 다툼이 치열하다. 고학력 실업시대에 인문학의 최대목표는 스스로가 생산성과 경쟁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학진과 인문학의 역설적 관계

대학에는 대학교육의 소비자들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과와 학문의 재생산에 필요한 연구 인력들이 있다. 요즘 그들은 학술진흥재단(이하‘학진’)프로젝트로 살아간다. 학진의 장기 프로젝트는 10년이다. 그 이후에는 연구원 자신과 인문학 자체가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하려면 시장논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인문학을 사회 자본화 혹은 산업화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인문학이 속도와 양으로 승부하자면 시장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 그럼에도 인문학적인 가치를 양화시켜서 어떻게 하든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인문학이 처한 딜레마다. 인문학이 교환가치의 회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연구자들이 연구하면서 살 수 있는 한 가지 현실적 대안은 대학 연구소가 학진과 같은 국가기구로부터 연구지원금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인문학과가 배출한 실업자 구제책의 하나가 학진 프로젝트 인문학 사업들이다. 학진 인문학 프로젝트들은 시간강사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는 것이며 학과로서는 자기 학문의 재생산을 위한 인력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준다. 대학의 유령으로 떠도는 시간강사들이 연구원이라는 안정적인 신분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학진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한 10년짜리다.국가기구로부터 또 다른 지원을 받지 않는 한, 그 다음부터 인문학은 대학이 아니라 경쟁의 무풍지대인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 시장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인문학의 콘텐츠화가 될 것이다. 사실 콘텐츠라는 표현은 수천 년의 역사적 경험, 문화적 내용과 이야기들, 은유들을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하는 상품으로 만들어 되파는 것이다. 모든 연구소들이 인문학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인문학의 자본화에 자발적으로 공모하고 있다. 그 결과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인문학의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에 맡김으로써 인문학이 실종되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도 있다. 학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의 위기를 지연시킴과 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대안적인 학문적 코뮨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대학제도 바깥에서 학문 대안공동체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문학 본연의 복고적인 사용가치를 복원하는 길이다. 인문학 자체를 취직이 아니라 취향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은 인문학 박사가 즐겁게 환경미화원(그것이 엄청난 뉴스거리가 아니라)을 하면서 남은 시간에 시를 읊고 동네아이들 모아놓고 철학을 논하는 것이다. 혹은 환경미화원이 벽화를 그리고, 홈리스가 저자거리에서 철학을 논하고, 저자거리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가 인생을 노래할 수 있도록 인문학이 거리의 학문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그것이 인문학이 가진 사용가치다. 이런 사용가치에 충실하다면 대학바깥에서의 학문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다.  

인문학은 환급작물처럼 재빨리 돈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인문학은 수요보다 공급이 넘쳐난다. 그 점을 받아들이고 가난하게 사는 대신 자유로운 시간에 쿵푸하자는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인문학 자체가 귀족학문이다. 성격이 운명이라고 하지만 학과가 운명인 시대다. 귀족이 아니면서 귀족학문인 인문학을 선택한 것에 대한 나의 책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학문적인 대안공동체를 상정하려면 일단은 대학주변에서 자리잡겠다는 귀족적인 열정을 ‘열정적으로 체념’할 필요가 있다. 교수, 연구원이 될 가능성에 목매고 대학 안에서 유령적인 존재로 10년, 20년을 보내는 것은 대단히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해지는 대가로 값비싸게 구입한 자유 시간에 공부하고 그렇게 공부한 것을 지역사회에 돌릴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그런 공동체 창출을 방해하는 힘들과 즐겁게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유한계급을 꿈꾼다면 대안적인 학문적 코뮨은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자본이 모든 가치를 제패한 사회에서 자본의 욕망과 유혹에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다. 전지구가 돈의 욕망으로 획일화된 시대에 다른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고민하면서 사는 것은 인문학 본연의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인 ‘소비하고 즐겨라’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 명령은 이론적인 정합성, 설득력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실천과 믿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의지와 결단의 문제다. 그러니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도 결심이 굳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남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는 길이기도 하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0:40

박진우 (파리 5대학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박사과정)


아감벤 효과

<호모 사케르>라는 낯선 제목의 책 한 권이 처음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고대 로마법 전통 속에서 ‘희생될 수 없는 존재’ 즉 제의에 바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여도 어떤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이 모순적 존재에 대한 논의는 모두에게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이탈리아 철학자에게 ‘호모 사케르’라는 범주는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 패러다임을 질문하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주권 권력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주권 속에 포함되는 이 모순적 존재,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이 시민, 인권과 같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 범주라는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법과 주권, 정치와 근대 민주주의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게끔 해 주었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을 통해 오랫동안 유럽 내 소규모 지식인 써클 속에서 미학자로 명성을 쌓은, 또한 발터 벤야민 전문가로 기억되던 이 철학자는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 사상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 그는 <호모 사케르> 연작의 또 다른 기획으로 ‘예외 상태’의 개념을 부각시켰다. 그에게 예외 상태란 바로 법의 공백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 법질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법보다 “법-의-힘”이 우선하며, 그것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20세기 정치사를 특징짓는 두 가지 대립적 견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의 무화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의 또 다른 변용이자, 새로운 영역에서의 이론적 시도이다. 

“군림과 영광”, 혹은 생명정치의 새로운 계보학

이제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벌거벗은 생명’과 주권 권력, 그리고 예외 상태를 거친 다음 저자의 사유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2007년 그는 <군림과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른 <호모 사케르> 연작을, 그리고 <사물의 서명(Signatura rerum) : 방법에 관하여>라는 조그마한 저술을 우리 앞에 나란히 던져 주었다. 그는 이 두 권이 <호모 사케르> 연작의 마지막 한 권을 향한 최종적인 디딤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새 그의 연작은 총 7권이 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렇다면 <군림과 영광>은 <호모 사케르>의 전체 구상에서 하나의 거대한 전환기였을까?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사유가 어느덧 새로운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군림과 영광>이 다루는 1차적인 주제는 근대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됨으로써 새롭게 출현한 ‘통치 기계’의 건설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폴리스)와 가정(오이코노미아)의 구분은 후기 고대에 이르러 기독교 공동체의 성립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하지만 양자의 새로운 결합이 이루어진 계기는 바로 기독교 신학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신의 고유한 능력을 통해, 신비로운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전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감벤은 이 과정에서 방대한 문헌학적 지식을 동원하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도그마 속에 신비로운 “하느님의 경제학(오이코노미아)”이 도입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위계’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교회의 건설과 함께 천사, 그리고 ‘천사의 왕국’에 대한 각종 신학적 논설들을 살펴보면서, 그는 정치와 경제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행정 기구의 탄생이 신학 속에 예고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일찍이 단테가 <제정론>에서 기술하였듯, 천사들의 조직과 위계란 곧 하느님의 행정 기구이다.

근본적으로 <군림과 영광>은 생명정치, 계보학, 통치성에 관한 푸코의 널리 알려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푸코가 바라본 기독교와 근대 사회의 관계가 아감벤에게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계보학이라는 동일한 방법론을 채택하지만, 그의 시선은 규율 장치로서의 기독교라는 인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또 푸코의 강연록 <인구, 영토, 국가> 그리고 <생명정치의 탄생>에 나타난 시장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이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 장치들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근대적 통치성의 각종 장치들과 근원적으로 결합된 신학적 환영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정치가 경제라는 ‘신비로운’ 영역에 자신의 모든 권력을 ‘내어주고’, 정치 스스로는 여전히 다만 우리의 삶에 ‘군림’하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재림하면 천사들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자유주의 및 시장주의라는 ‘하나님의 경제학’이 완성되면, 더 이상 ‘천사’라는 행정 기구들이 담당한 위계의 기능은 불필요하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 - 그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의 완성이다 - 속에서, 위계는 ‘영광’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영광이란 모든 것이 경제에 일임된 사회에서, ‘군림’이라는 정치의 존재 방식의 근원적인 ‘무위(無爲)’ - 아감벤은 이것이 바로 서양 정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 를 우리의 눈앞에서 가려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를 통한 스펙터클은 바로 이러한 형태의 ‘군림과 영광’의 통치 메커니즘을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래 전 철학자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의 결합을 파악하였듯이, 아감벤은 ‘영광’ 속에서 무위, 믿음과 추앙, 그리고 복종이 정치와 결합하는 방식을 파악하고자 한다.

<군림과 영광>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관심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사실 한국사회는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근대성 특유의 현상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아감벤 또한 이 주제를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에 보다 충실한 형태로 이미 <호모 사케르> 1권에서도 다룬 바 있다. 그러면 이처럼 ‘영광’의 스펙터클과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경제 우선의 통치 메커니즘 - 이러한 “군림과 영광”의 사회, 혹은 “스펙터클의 사회” -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가? <호모 사케르>의 연작이 진행되면서, 그가 가장 크게 시달렸던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과연 <호모 사케르>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호모 사케르>가 전개한 수많은 논의들을 거치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화와 그 주체라는 오랜 패러다임을 현대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주어진 논의에서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은 이 물음에 대하여, 다행히도 저자는 우리에게 최종 해답을 전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것 또한 그의 <호모 사케르> 연작이 도달할 최종 기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여전히 ‘완성’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종결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0:38


한보희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주식회사 대한민국, 이 경제 일원론의 시대는 성공과 동시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경제다!”라는 구호는 더 이상 경제적 구호가 아니라 정치적 구호로 반전된다. 게다가 그 경제-정치적 구호에서는 묘한 종교적 근본주의의 냄새가 난다. CEO 대통령 이명박은 ‘생필품의 물가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라’는 개발독재시대의 명령을 내리고 (‘부시-너머’가 아니라 그저) ‘부시-이후’임이 나날이 뚜렷해지는 오바마는 시장주의 경제를 국가-시장주의 경제로 다시 쓰는 일에 매몰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의 죽음으로부터의) ‘정치적인 것’의 재탄생

이 ‘되돌아온 중세’적 세계―신으로서의 자본-권력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체제―의 법은, 마치 카프카의 법정처럼, 삶에 대한 직접적 명령처럼 하달되나 어디에서도 그러한 명령의 실체가 발견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후적 책임의 주체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타자들과의 이해관계의 조율의 장이라는 근대정치의 공적, 공식적 공간이 소멸된 이상한 세계와 마주서 있다. 그 탈-정치적 정치, 탈-경제적 경제의 세계는 이명박이 ‘경제는 심리다’라고 말할 때의 그 ‘심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것은 ‘생각대로 하면 되고…디비디바비디부’라는 유아적 자폐증의 신화적 세계이다. 이러한 자본-권력의 자폐증과 짝을 이루는 것은 소위 ‘사회의 허리’라 불리는 중년층과 그들의 세계인 중간계급적 우주―오이코스―의 붕괴이다. 이 붕괴로부터 남겨진 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 공포에 휩싸인 사회의 잔여들이다. 오늘날 해방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은 바로 이 잔여들―모두에 잠재돼 있는 유령적 주체로서의 ‘호모 사케르’―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새로운 역사의 행위자'로 현행화(actualize) 시킬 수 있는가?

적대, 혹은 ‘윤리에서 정치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판본에는 두 개의 유형이 있다. 하나는 차이와 다양성을 관용하는 진보적 시민 도덕이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indifference)으로 표현되는 탈-정치 문화이다. 전자가 참여적 개혁주의라면 후자는 수동성으로의 퇴행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서로 상반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두 경향은 공히 탈-정치(post-politic)이다. 어째서인가? 정치적 무관심이 '정치'가 있던 자리에 행정이나 치안 서비스가 나타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차이와 다양성의 정치는 ‘정치’를 도덕이나 윤리로 치환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연의 정치란 어떤 것인가? 라클라우와 무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관한 칼 슈미트의 규정―적과 동지의 구분―으로부터 ‘적대(antagonism)’라는 개념을 끄집어내 이를 보편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바로 이 적대의 재발견에 최근 좌파 정치학의 공유지(common)가 있다.

정치적인 것의 요체는 통합과 안정이라는 ‘무덤의 평화’가 아니라 적대를 파고드는 자유의 동학(動學), ‘궁극적 평화를 향한 투쟁과정으로서의 삶 자체’이다. 사회적인 것의 고유한 불가능성―사회란 이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다수자들의 삶과 그들을 하나로 셈하는 주권권력 사이의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할 뿐이다―을 은폐하고 봉합하려는 시도가 소위 통합과 안정과 질서의 정치, 즉 치안(police)이며 치안(공안)은 사회로부터 정치적인 것, 즉 생동하는 사회적 삶 자체를 제거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면 이에 맞서는 정치적 주체화의 투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바틀비’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시차적 관점??에서 멜빌의 소설「필경사 바틀비: 월-스트리트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틀비(의 거부적 몸짓의 표현인 ‘I would prefer not to')에 대한 해석에서 그 가능성의 윤곽을 그린다. 지젝은 ’거부는 해방정치의 시작‘이라는 네그리와 하트의 바틀비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반전을 시도하는데, 요컨대 바틀비의 거부는 해방정치의 출발점이 아니라 근원이며 목표로 간주된다. “하트와 네그리에게 바틀비의 ‘안 하는 쪽으로 하겠다’는 말하자면 단지 식탁을 치우는, 기존 사회의 우주로부터 거릴 획득하는 첫 번째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그 후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공들인 작업으로의 이동이다. (…)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이것은 정확히 피해야 하는 결론이다: 그 정치적 양식에서 바틀비의 ‘안 하는 쪽으로 하겠다’는 그 후 기존 사회의 우주에 대한 ‘규정된 부정’의 끈질긴 긍정적 작업 속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추상적 부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일종의 아르케(arche), 전체 움직임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건설 작업이 그것에 몸체를 부여한다.”(시차적 관점 747쪽)

지젝에게 바틀비의 거부는 행위의 수동적 거부(‘하지 않겠다’)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안 하는 쪽으로 하겠다’)이며 바틀비는 그저 ‘~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틀비는 죽음에 이를 만큼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했고, 그러한 충동을 삶의 공준으로 삼았다. 그게 무엇일까? 지젝은 바틀비에게서 자폐적 절망이나 ‘죽어버리자’는 자살욕구가 아니라, 존재론적 부정성의 간극을 찾아낸다. ‘바틀비의 물러남’으로부터 ‘새로운 질서의 구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틀비의 물러남’을 ‘새로운 질서’의 구성적 규준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요컨대, ‘바틀비를 넘어서!’가 아니라 ‘바틀비를 향해서!’가 우리의 방향이다.

이때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죽음을 향한 한 길을 가는 자’라는 그의 외적 행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바틀비는 우리가 불가피한 ‘현실(reality)’이라고 여기는 이 분명한 세계 전체가 실은 한낱 허깨비들의 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캄캄한 번갯불’의 내리침이며, 어떤 것(something)과 다른 어떤 것 사이의 중간단계가 아니라 어떤 것과 그것의 자리이자 공백인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 사이의, 이를테면 1과 0 사이의 간극이다. 경제와 정치의 경계, 법과 삶의 경계가 형해화된 이 신화적 탈-정치의 시대의 극복은, 물질적 현실과 보다 ‘고차적인’ 다른 현실의 차이를 이 현실과 그 자체의 공백 사이의 내재적 차이?간극으로 환원하는 것, 다시 말해 “물질적 현실을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그것을 ‘비-전체(non-all)’로 만드는 공백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바틀비의 거부의 몸짓은 이 내재성으로의 초월, 지젝이 ‘시차적 전환’이라 부른 유물론적 메타노이아(metanoia)를 가리킨다.

시차적 전환, 또는 유물론적 메타노이아

이 복잡한 얘기의 핵심은,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다. 자본주의는 지구적 차원에서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한편에 고등의 문명적 삶을 향유하는 소수의 부유한 인간들이 있고, 총체적으로 악화되는 삶 속에 속절없이 죽어가는 다수의 인간-이하들이 있다. 인간-이하로 추락 중인, 따라서 기존의 체계에선 점점 셈해지지 않게 되는 이 다수들―그것이 대중(Demos)이든 다중(multitude)이든―이 집합적 정치행위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못하고 동물적 수준으로 추락해 새로운 노예제 사회가 공고화 되느냐가 문제다. 이 투쟁은 새로운 보편성의 이념을 필요로 하며, 그 이념은 이미 다수의 불만 그리고 사실상 이 세계적 문명의 실체인 다수의 역능과 저항들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제까지 자신의 선조들―피억압자들―이 투쟁 속에 성취해온 모든 문명적 가치들을 죄다 몰수당하고 있는 이들이 그러한 박탈의 고통 한복판에서 자신의 역사와 존재 의미―역사의 이념적 성좌배치(constellation)―를 기억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것은 일국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며 그 공격 목표는 위계적 권력구조와 자본주의적 착취 체제 일반이 될 것이다. 오늘날 억압된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이러한 과제에 대한 주체적 각성이다.

포스트모던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넘어서려는 지젝의 도전

여기서 현대 해방정치가 처한 지적, 실천적 교착상태를 극복하려는 지젝의 시도, 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 할 만한 ‘바틀비적 전환’의 요점은 우리의 주관적, 내면적 각성을 뜻하는 것(회심)이 아니라―그것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행위에의, 영구혁명적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행위인가? (언제나 주권권력과 자본의 코드로 환원되는) ‘현실’이라는 환상을 몰아내는 행위, ‘어둠(실재)의 빛’으로 ‘빛(현실)의 어둠’을 몰아내는 계몽의 행위, 바틀비적 거절의 행위, 촛불의 행위이다. 우리는 바로 그 무위의 행위, 무욕의 욕망의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 그것은 벤야민이 ‘진보의 태풍에 저항해 역사의 잔해를 향하는 천사의 날개짓’이라고 묘사했던 것인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은밀한 목록을 간직한)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에 가까울 것이다. 해방의 정치는 이제 발전적 미래가 아니라 억압된 과거를 향해 전진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0:34

박진우 (파리 5대학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박사과정)


 

정치판은 당파적 이익들의 각축장이 된지 오래다. 68년 이후 부모, 선생, 지도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민자들 탓에 공동의 가치도 흔들린다. 대중 소비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의 머릿속엔 사적 이익과 무분별한 욕망뿐이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묘사했듯이,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는 민주주의에 그 기원이 있다. 이것이 1980년대 프랑스에서 공화주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공통 통념이다. 그들은 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를 참조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을 한정하고, 공론 영역을 회복하고자 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의 종언 속에서 정치를 되찾으려는 이러한 담론들과 대결하면서 그의 정치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특히 아렌트와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라는 두 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가깝고도 멀기에 주목할 만하다.


말과 행위를 박탈당한, 시민권 없는 인간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초판(1990)에서 인용된 아렌트와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1996)에 나오는 아렌트를 대하는 랑시에르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변화는 1995년 대규모 파업 당시, 좌파 공화주의 지식인들이 파업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공공선을 주장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과 공론 영역의 자율성을 주장한 자들의 이론적 토대 자격으로 소환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누구임’과 ‘복수성’을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현상’의 공간, 즉 정치적 공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뤼케이온의 철학자가 그냥 삶과 잘 사는 삶, 소리와 말을 구별하고 전자를 정치 영역에서 몰아내야 했듯이, 아렌트는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렌트가 정치적 행위의 기본 요소로 설정하는 말과 행위는 결국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한 구분을 전제한다. 랑시에르는 공적이거나 정치적인 것 자체에 고유한 어떤 것이 있다는 관념을 문제 삼는다. 그런 관념은 결국 정치를 하기로 운명 지어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구별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엔 아렌트가 공통의 능력으로 상정하는 말과 행위가 이미 나눔의 대상이며, 이 나눔과 셈을 다시 짜기 위한 싸움이 정치다.

인권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을 검토하는 랑시에르의 글은 두 사상가의 쟁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서 인간과 시민의 관계는 무엇인가? 시민권과 구별되는 인권이란 있는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는 자신이 몸소 겪어야 했던 난민의 지위를 떠올린다. 그리고 국가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인간 자체는 인권은 고사하고 인간성 자체를 박탈당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자체라는 계몽 시대의 추상적 관념에 근거한 인권은 한낱 허구다. 오히려 정치에 참여하려면 쾌와 불쾌를 표시하는 소리가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생물학적 필요에서 벗어난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이미 인정받은 존재, 즉 정치에 대한 몫을 부여받은 시민들이어야 한다. 시민에게만 인권은 유의미하므로 인권과 시민권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렌트는 권리를 갖지 않은 자의 권리인 인권이 아니라 정치 자체에 대한 권리, 권리를 가질 권리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권리인 시민권을 갖기 위해 벌이는 투쟁은 정치인가 아닌가? 아렌트에게 그것은 고유한 정치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랑시에르는 이렇게 묻는다. 말과 행위를 박탈당한 인간들은 어떻게 그들의 말을 들리게 만들고, 그의 행위를 보이게 만들 수 있는가?

감성적 판단을 통한 몫 없는 자들의 탈정체화

현실에서 인간과 시민은 언제나 분리되어있다.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구별이 있었고, 참정권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이 있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저 인간일 뿐 자들, 형식적으로만 시민으로 명명될 뿐인 자들이 법과 사실의 괴리를 문제 삼고, 인간과 시민의 바로 그 틈을 주체화하는 한 「선언」은 다시 쓰인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의 구별을 제거하거나 법과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 예외상태를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터를 제거하는 일이 된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선언」의 인간은 추상이며, 그것은 사실 텅 비어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텐가? 바로 그 공백 때문에 인간의 자리에 여성, 노동자, 이주민, 심지어 ‘아무나’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성은 교수대에 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여성은 연단에 오를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져야만 한다”는 올랭프 드 구즈의 추론은 바로 그 틈과 공백 때문에 유효한 것이 아닌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적 권리 주체의 죽음과 똑같이 취급되었다면, 거꾸로 벌거벗은 생명조차도 정치적 삶이니 말이다. 요컨대 권력을 실행할 자격을 갖지 못한 자의 생명이 철저히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세계와 그것이 정치적 삶으로 간주되는 세계를 함께 놓음으로써 불일치와 비틀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핵심이다. 이렇게 행사되는 한에서만 인간의 권리는 단순히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권리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화 과정 속에 있는 인민의 권리가 된다. 

인간과 시민의 틈을 주체화하는 것, 가정적이고 사적인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이고 빛나는 삶의 무대에 나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옮겨야 한다.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전개된 취미판단 또는 감성적 판단을 전유한다.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취미판단의 무사심성을 정치화했다. 그런 판단은 확장된 심성과 사고를 바탕으로 불편부당하게 판단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정치인들에 대해 거리를 확보하고 전체를 관찰함으로써 세계적 관점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렌트는 공론장을 정신(의 활동) 안으로 옮겨오려다가 행위자와 관찰자를 구별할 뿐 아니라, 후자를 정치적 행위 자체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초정치적인 존재로 만든다. 반대로 ‘남의 자리에 있기’를 가능케 하는 취미판단에서 랑시에르가 끌어내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사유될 수 없는 것 등의 나눔에서 몫을 갖지 않는 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는 탈정체화이다. 그것은 불편부당함과 합의를 위한 소통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몫들의 나눔 체계에 대한 위반, 불일치로 이른다.

이역(異役/移役)으로서 무대에 서기

아렌트와 랑시에르 모두 연극 무대의 비유를 쓴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아렌트가 현상(appearance)의 공간이라는 표현을 썼듯이, 랑시에르도 인민의 외양/출연(apparenc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렌트는 칸트에 대한 강의에서 “행위자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그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dokei hois allois)이다”라고 했다. 이는 행위자(배우)인 정치가가 관찰자(관객)인 시민들의 doxa, 즉 의견과 명성을 좇는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랑시에르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남에게 보일 수 있는가 없는가?’ 자체가 정치의 근본 문제라고 보았다. 이것은 철학의 진리로부터 정치의 의견을 떼어내려던 아렌트의 기획을 더 밀어붙인 것이 아닌가?

공적인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던 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정체성(배역)과 거리를 두면서, 그것을 배가(doubler)시켜야 한다. doubler라는 단어는 연극에서 ‘대역’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무대에서 빠지고 다른 배우를 채워 넣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배역 내에서 배우들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대 밖의 스태프나 대사 없는 배우가 자신의 역이 아닌 다른 역,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역을 대체보충하여 다른 등장인물들과 말을 섞는 상황을 말한다. 이점에서 doubler는 대역이라기보다 이역—다른 역(異役)으로 옮기기(移役)라는 이중의 의미에서—에 가깝다.

정해진 배역보다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연극을 스스로 연출하고 무대에 오르기(出演) 위해서는 말을 빼앗긴 자들이 “마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을 하는 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를 두고 성마른 자들은 인민의 출연이 겉모습과 가면들로 넘쳐나는 환영극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주장하듯 사회적 불평등이 언제나 평등 위에 세워진다면, 상징적인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이 마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이미 인민이 가진 평등한 능력을 현시하는 동시에, 평등 전제를 입증하는 행위인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0:32

서동진(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최근 우리는 새로운 푸코의 목소리를 경청하게 되었다.그것은 새로운 푸코의 초상과 함께 도착하였다. 그 푸코는 근대 정치 이성(합리성)의 분석가로서의 푸코이다. 이 때의 푸코는 에피스테메의 고고학자로부터 자아의 심미적 윤리의 전도사로서의 푸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것은 흔히 일군의 푸코 연구자들을 통해‘통치성’이론가로 특권화되기까지 한 푸코이다. 푸코는 이른바 통치성이란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근대 정치 이성의 대표적인 유형이라고 할 자유주의를 분석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근대 국가의 계보학을 작성하는 일이었다.푸코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자유주의 세미나 3부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세미나를 연속적으로 진행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세미나에서 이뤄진 강의와 대화가 묶여,『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영토, 안전, 인구』,그리고『생정치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공간되었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전과 이후의 푸코를 잇는 새로운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었고, 근대 정치의 조건을 사유했던 희귀한 이론가로서의 푸코와 해후할 수 있게 되었다.

통치성과 근대 국가의 계보학

이 시기 푸코의 작업을 요약하는 개념을 꼽자면 이는 단연 통치성(governmentality)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대 정치 이성(합리성)의 형성과 변모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개념적 탐침임엔 분명하지만 이는 완결적이고 정합적인‘이론’이라기보다는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을 위한 이론적 도구라고 보아야 옳다. 저 유명한 기율적 권력이란 모델을 제시했던『감시와 처벌』을 출간하고『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란 이름으로 묶인 세미나가 진행될 때까지 푸코는 권력에 대한‘바깥으로부터의 사고’에 충실하였다. 그것은 주권(혹은 권리)과 법이란 관점에서 권력을 인식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철학(리바이어던의 모델)과 거리를 두는 한편 권력의 기원적인 중심으로서 경제를 가정하고 계급지배란 관점에서 사고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 이로부터 그는 18세기를 전후하여 서유럽사회는 시민의 권리를 성문화, 조직화하는 법률적인 코드와 사회적 신체를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훈육 메커니즘을 결합시킨,‘주권적 권력과 훈육적 권력의 복합체’를 통해 지배되었다 주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은 그가 부정하려던 권력 모델을 단순히 전도시킨 것이란 점에서 상당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통치(성)이란 개념에 도달하는『영토, 안전, 인구』에 이르면서 푸코는 이런 과거의 권력 모델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통치는 권력의 세 가지 형태의 계기 가운데 하나로 파악될 때 효과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푸코는 지배, 권력의 게임 그리고 통치를 구분하면서 그가 분석하려고 했던 미시적 차원의 권력 작용을 권력 게임이라 부르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권력 관계와 제도를 지배라 하면서 그 사이에 통치를 놓는다. 통치란 간단히 말해 행동방식 혹은 행실에 대한 통솔(conduct of conduct)을 통해 권력이 작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는 크게 두 가지의 차원을 통해 생산된다. 하나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화이다. 먼저 지식과 권력은 권력이 행사되고 작용하는 표면, 즉 그 대상을 구성하고 그 대상에 권력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장치, 절차,계산의 형식 등을 두루 망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는 근대 사회의 통치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테크놀로지로서 안전기구,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으로서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다시 말해 생명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보장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 종(種)(인구),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지식 형태로서 정치경제학을 꼽는다.

다음으로 통치성은 주체화의 원리란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특히 푸코는 이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통치하다는 것’이 가리키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분석을 할애하였고, 그 결과가 히브리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어 중세의 기독교적 서구를 경유하고 다시 근대 국가에서 통치란 형태로 변용된‘사목권력’에 대한 분석이다. 사목권력이란 군주와 신민이란 관계를 목자-양떼란 관계와 결합시키면서 개인, 가족, 공동체같은 다양한 삶의 현실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갈 것인지를 배려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푸코는 사목권력이 훗날 국가에 의한 통치, 그가 정치적 통치, 혹은 줄여 그냥 통치라고 부를, 국가를 통한 권력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통치성에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의 이행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푸코는 근대 권력을 (군) 주권적 통치성에 대응하는 법률-사법적 체계, 기율 메커니즘 그리고 안전기구로 구성된 것으로 분석한다. 법률- 사법적 체계는 법적 코드를 통해 확정된 허용과 금지의 이분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기율 메커니즘은 특정한 성향이나 기질, 행위 습관, 신체적 특성을 가진 인간형을 생산하고 이를 감시, 진단, 교정하는 광범위한 기술과 결합시키면서 작용하는 권력 형태이다. 반면 안전기구는 문제가 되는 현상을 개연적 사건들 속에 끼워놓고 이를 비용의 계산속에서 평가하고 대응시킨다. 금지와 제재, 감시와 기율이란 방식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평균치를 산정하고 그 반경 안에서 인구-시민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근대 권력의 지배적 형태인 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역사적인 변화를 겪는다. 푸코가 신자유주의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역사라는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푸코가『영토, 안전, 인구』이후에 진행한『생정치의 탄생』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푸코는 제3공화국, 나치즘의 등장을 전후로 하여 독일에서 등장한 프라이부르크 학파, 질서자유주의자로 불리기도 하는 초기의 신자유주의와 우리가 흔히 시카고학파라고 부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분석한다.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자유주의의 ‘실패’를 보완하고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통치성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 놓인 거리는 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사회적 신체의 지형학이란 렌즈를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통치성의 특징은 경제적 삶의 세계와 거의 동일한 것이라고 할 ‘사회(적인 것)’를 고안하고 이를 국가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자연화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질서란 관점에서 사회를 통해 시장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구상하며 국가가 그런 사회 형성의 책임을 가진다고 보았다. 반면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미국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삶의 세계는 물론 교육, 보건, 복지와 같은 종래 사회적 삶의 세계로 생각되었던 영역을 기업화하고 주체를 기업가적 주체 혹은 기업가적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개인, 집단, 조직, 사회체로 주체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와 사회 사이에 놓인 거리는 사라진다.

푸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 놓인 도약점

흥미롭게도 푸코는 지금 우회한 채 도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푸코를 읽어야 하며 이것이 유용함을 주장할 때 우리가 마주하는 푸코는 회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준거점으로서의 푸코이다. 이를테면 발리바르가 해방, 변혁 그리고 인륜성의 정치로 근대 정치의 세 가지 성분을 말할 때, 푸코는 변혁의 정치를 사유한 사상가로 마르크스와 맞먹는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랑시에르의『불화』에서도 푸코는 역시 음화처럼 존재한다. 그가 민주주의를 행정관리(police)로부터 분리하고 본연의 정치라 부를 수 있을 것의 정체성을 세공하려고 할 때 근대 국가의 통치화를 분석한 푸코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다. 이는 바디우에게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네그리의 푸코와는 완연 다르다. 제국의 생정치적 생산을 분석하기 위해 참조된 푸코는 긍정적인 푸코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참조점으로 서의 푸코가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이때의 푸코는 오류의 푸코가 아니라 외려 정치적 사유의 한계라는 지점에서 있는 이론가로서의 푸코일 것이다. 착취와 예속을 넘어서는 해방의 정치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푸코가 제공한 근대 정치의 조건에 대한 분석을 피할 수 없고 또 그 위에서 도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정치의 조건을 반성하는 일을 경유하지 않은 채 정치를 재발명한다는 것이 어렵다면, 당연히 푸코는 참조되어야 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0:22


조정환 (도서출판 갈무리 공동대표, 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안또니오 네그리의 정치철학적 혁신은 1963년, 자신이 속해 있던 이탈리아사회당에서의 탈당에서 시작된다. 그는 기독민주당과의 연정에 참가한 사회당이 노동계급에게 내핍과 희생과 노동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 사회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노동계급 해방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이 해방의 근거이기보다 노동자들에 의해 공격되고 파괴되어야 할 훈육의 체제라는 생각 위에서, 노동을 통한 해방이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것은 이후에‘노동거부’운동 으로 표현된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인 빠올라 메오 등과 함께 사회당을 탈당한 네그리는 이탈리아 산업복합단지인 마르게라 항구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자본론』세미나를 조직했고 이후 마리오 뜨론띠, 로마노 알꽈띠, 라니에로 빤찌에리, 쎄르지오 볼로냐 등과 함께『노동계급』을 창간하면서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운동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1968년 혁명은 프랑스를 비롯한 여타의 나라들과는 달리 10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실제로 해방구의 창설에까지 이르렀다. 노동자 기초위원회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이 실업자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생태운동, 반핵평화운동, 주민운동, 무장운동 등과 연결되어 이탈리아 권력 및 관료기구의 한 구성요소로 전화한 낡은 좌파운동과 대립했다. 이것이 1970년대 10년동안 이탈리아를 뒤흔든 폭풍이었다. 네그리는 이 폭풍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투쟁의 이 사회적 확산을 노동계급의 재구성으로 이해했다. 그는 1968년의 혁명이 공장 울타리를 넘어 학교, 가정, 사무실, 쇼핑센터 등 폭넓은 사회 속에 산포되는 노동을 보여줌과 동시에 저항력의 전사회적 확산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계급재구성 개념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1973년 이탈리아 공산당이 연정에 참가함과 더불어 노동자주의 운동의 구성원들이 크게 동요하여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네그리로 하여금‘아우또노미아’(자율)라는 이름하에 여성운동, 학생운동, 실업자운동, 동성애자운동, 이민자운동, 생태운동, 반핵운동 등과 보조를 맞추며 비의회적이고 비제도적인 혁명운동을전개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 토대로 작용했다.

네그리의 이론적 작업들

10년 이상 지속된 이탈리아의 혁명적 소요는 1979년 4월 7일의 대탄압을 계기로 잠복하게 된다. 네그리도 이때 알도 모로 수상 납치살해 사건의 주모자로 무고되어 기소되었다. 감옥의 네그리는 스피노자와 맑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권력의 시간과는 다른 구성의 시간을,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탐구한다. 이 탐구는 두 가지 과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1970년대의 확장하는 운동에서 발명한‘사회적 노동자’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동의 사회적 산포에 대한 자본의 대응과 권력 재합성의 방향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네그리에게 1960년대 초 노동자주의 운동의 발명이라는 첫 번째 혁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혁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셸푸코, 질 들뢰즈와 가따리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을 깊이 섭렵하고 페미니즘 운동의 적극적 문제제기를 수용하면서 비트겐쉬타인과 메를로 퐁티의 철학 속에 담겨있는 탈근대적 잠재력을 탐구해 나갔다.『야만적 별종』에서의 잠재력에 대한 탐구,『자유의 새로운공간』에서 코뮤니즘 개념의 혁신은 이 탐구의 성과이다.

제자이자 친구인 마이클 하트와 함께 수행한 1990년대 이후의 작업에서 네그리는『디오니소스의 노동』을 통해 산 노동의 창조적 힘을 다시 한 번 긍정했는데, 이것은 1960년대에 자신도 속해 있었던 노동자주의의‘노동거부’전략을 혁신하는 것이었다. 임금노동은 여전히 거부의 대상으로 이해되지만‘산 노동’은‘살아 있는 형식부여적불’로,‘살아 있는 시간에 의한 사물들의 형성’으로,‘사물들의 과도성, 그것들의 순간성’,권력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활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유의혁신을 통해 네그리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1994년 사빠띠스따의 봉기, 1995~6년 프랑스, 독일, 한국 노동자들의 총파업, 1999년 씨애틀 시위, 2000년 아르헨티나 봉기,2003년 반전시위 등을 사회주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21세기적 혁명의 시간들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주권 형태로서의 제국과 특이성들의 접속으로서의 다중

네그리는 2000년에 지구화, 금융화, 유연화, 정보화를 통해 작동해 왔던 신자유주의적 흐름들이 20세기를 지배한 제국주의적 주권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주권형태의 구축을 알려주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에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제국’ 주권 하에서는 어떤 민족국가도 더 이상 단독으로 지배할 수 없다. 제국은 네트워크 권력이다.

네그리는, 주권의 이 새로운 형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식의 보수적이고 친체제적 함의를 전혀 담지 않은 채, ‘제국은 다중에 의해 불러내어진 주권형태’라고 말한다. 이것은, 제국이 오늘날 전 지구적 시민 전체의 삶-정치적 직물로 되었음에 대한 승인이면서도 바로 제국의 생존과 발전논리의 한 가운데에 투쟁과 대항의 힘을 새겨 넣으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제국이 다중의 디오니소스적이고 잡종적인 힘에 대한 이차적이고 반작용적인 포획 논리에 다름 아님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을 불러온 ‘다중’은 누구인가? 이 개념이 1970년대 이후 네그리가 발전시킨 사회적 노동자 개념을 일국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수준으로 확장한 것이자 내재적이고 미시적인 삶의 깊은 지평으로 심화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사회적 노동의 개념을 풍부화시키는 주요한 고리이다. 노동은 사회 속으로 산포되면서 소통, 정보, 지식 등 비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전화하며 다른 노동형태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헤게모니적 역할을 수행한다.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는 결코 양적 헤게모니가 아니며 노동의 잠재력에서 나타나고 있는 측정불가능한 헤게모니이다. 비물질노동의 대두는 서비스업, 문화산업, 정보산업과 같은 새로운 산업형태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농업과 산업과 같은 물질노동을 비물질적 생산 네트워크에 편입시킨다.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으로 구성된 총체적 생산네트워크를 가로질러 생성되는 주체성이 다중이다. 그러나 다중은 노동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등과 같은 분화된 사회적 실체들이나 혹은 그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권에의 종속을 거부하면서 저항하고 투쟁하며 창조하는 특이성들의 접속으로 나타난다. 다중은 그 어떤 정체성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창조적 활동성들의 다양체를 의미하지만 그 활동들은 공통적 생산물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활동들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 창조적 활동성들은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재생산으로 회귀한다. 여기에서 노동은 삶을 돌보는 잠재적 힘으로서의 정동의 표현으로 된다. 코뮤니즘은 더 이상 사회의 상층에 현실적으로 옹립되어 있는 권력의 수준에서 정의되지 않고 이 내밀한 행동의 힘으로서의 정동의 수준에서, 잠재력의 수준에서 정의된다.

제국 속에서의 저항, 그리고 제국을 넘어서기

네그리는 이 잠재적 코뮤니즘의 힘이 제국의 그물망에 걸려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코뮤니즘을 현실화하는 문제는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가 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빼기의 방법이다. 여기서 빼기가 어떤 실재적 공간상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권력이 부단히 더하기의 방법, 적분(積分)의 전술을 통해 작동하는 한에서 빼기는 저항과 분가분하다. 대탈출은 탈출을 가능케 하는 저항 없이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자본의 사회주의적 관리의 붕괴는 사회주의로부터 주민의 대탈출에 의해 가능해졌지만 그것은 1953년 동독 노동자들의 봉기, 1956년의 헝가리 노동자들의 투쟁,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중들의 투쟁, 1980년대 폴란드 연대노조의 투쟁과 같은 저항적 움직임들의 결실이었다. 네그리는 오늘날 저항이 이민의 법적 제한에 대항하는 전 지구적 시민권의 쟁취를 향해, 정동과 지성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대의 공통적 노동을 사적 전유질서화 하는 것에 저항함으로써 무조건적 보장소득의 쟁취를 향해, 그리고 현대의 생산수단이자 동시에 생산력인 지성, 소통, 정보, 정동에의 보편적 접근권의 쟁취를 향해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한 제안이 아니다. 이것은 제국 속에서, 제국에 대항하며, 제국을 넘어서기 위한 집단적이고 공통적인 창조의 길에 대한 제안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19


원용진(신방과 교수)

인간의 조건과 소통

해녀의 잠수는 보물 캐기다. 숨 가쁜 잠수를 하지만 해녀는 바다 밑바닥 모든 것을 샅샅히 건져 올리진 않는다.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도움될 만큼만 건져 올릴 뿐이다.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방식도 이 같지 않을까.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그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과거의 삶에 담긴 보물을 캐 현재로 가져온다.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연다. 해녀의 잠수 작업처럼 보물을 캐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인간 능력을 아우구스티누스는탄생성(natality)이라며 노래했다.

바다 속 보물을 캐는 행위는 해녀 자신 만을 위한 것은아니다.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과도 연관됨을 해녀는 알고 있다. 그의 잠수는 결코 개별적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물 밖의 세상과 절연하거나 선행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성 속 삶, 세계-내-존재가 곧 해녀의 삶이다. 바다, 보물, 바다 바깥의 타인을 인식 대상으로 삼기도 이전에 이미 해녀는 그 세계 안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복수성을 내포하는 존재다.

해녀의 잠수 뒤에는 인간의 탄생성, 복수성이라는 존재 조건이 어른거리고 있다. 해녀의 잠수 뿐 만이랴. 인간의 어떤 행위도 그 존재조건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런데 그 존재조건이며 인간의 능력이기도 한 탄생성과 복수성이 전에 없던 새로운 조건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보물을가져오며, 남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인간 능력이 점차 위험한 조건 속에 처해 가고 있다. 더 가쁜 숨을 몰아쉬고 더 많은 물질을 해하는 해녀의 운명처럼 말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이란 인간 조건, 인간 능력에 대한 논의가 체계화되고, 그를 도모키 위한 노력의 경주가 요청된 이래로 그들은 오히려 더욱 질곡에 빠져들었다. 복수성을 숨막히게 하는 치열한 개인주의와 탄생성을 움쩍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이기적 공동체 주의 탓이다. 그리고개인주의와 이기적 공동체주의의 조합을 통해 사회는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 조합 앞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몸을 숙이고 있다. 화폐가 인간을말하고, 화폐가 인간을 평가하는 정치실종, 사회실종의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해서 탄생성, 복수성을 부정하는 구심력을 거슬러가며 탄생성, 복수성을 되살리자는 원심력적 호소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었다.

원심력적 호소가 너무 적은 탓이었던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심력적 호소는 구심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간간히 귓등을 스쳤을 뿐이다. 구심력에 탄력을 붙이는 국가적 관성 탓이다. 애초 사적 개별 존재인 인간에 이기적 경제지상주의가 덧 씌여질 즈음 개별 존재는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이 가진 탄생성과 복수성이 아직 완전히 고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적 관성은 개별적 존재의 방황을 이기적 경제 지상주의 공동체 형성을 통해 끝장내려 했다. 개별적인 채로 유적(類的)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인간의 갈등적 존재론을 현대 국가들은 이기적 경제지상주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봉합하려 했다. 개인의 자기 소외까지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창조해 총체적 유적 존재로 인간을 이끌면서 헤겔의 상상력 까지 넘어서는 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도달한 셈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총체성이 다 뒤덮지 못한 틈으로부터 그 도전장의 얼굴들이 삐져나온다. 혹은 그 틈들에 도전장을 밀어 끼워 본다. 총체성과 그가 다 뒤덮지 못한 틈새를 대결시켜 보려 한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관계의 끈을 잇고 변화를 모색한다. 어설프게 이뤄진 개별적 존재와 유적 존재 간 봉합에 균열을 꾀하려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이질적인 틈새를 발굴하고, 그에 해석을 부여하고, 새롭게 틈새를 만들려 한다.

봉합된 듯한 총체성에 눌려 숨죽여 온 틈새 찾기, 찾아낸 틈새와 허세부리는 총체성의 관계 맺기, 틈새 간의 관계 맺기 작업을 두고 소통이라 이름 붙인다. 모험적 관계맺기, 이질적인 것과 줄 대기, 그를 통한 새로운 모색을 포괄하는 개념이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때론 평화적이지만 가끔씩은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바다 속을 긁어내는 거대 해녀에 맞서 그러지 말기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숨가쁘게 그를 거부하며 개별 존재를 조직해 만든 해녀 공동체의 항의 이 모든 것들이 그에 속한다.

해녀가 바다와 만나길 거부했다면 애초 해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을 통해 해녀는 새로운 영양가를 찾아냈고, 그를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소통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탄생성과 복수성을 더 단단하게 한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으로 인한 당혹함이나 낯설음을 풀기 위해 과거를 캐고, 타인을 고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은 탄생성과 복수성이라는 인간 조건을 흐르게 해주는 엔진일 수밖에 없다.

탄생성과 복수성을 눌러 숨막히게 한 국가 그 엔진인 소통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소통에 끼어들기 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정교하게 혹은 폭압적으로 이뤄지는 국가적 프로젝트 탓에 소통도 비틀거리게 된다. 같은 기표를 활용하되 다른 기의를 갖도록 강제하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같은 생각을 갖도록 하는 홍보, 전달의 의미로 소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습속을 만들어 낸다. 습속 만들기 국가 프로젝트 탓에 이질적인 것은 제거의 대상이 된다. 탄생성은 잊어야 할 유산으로 읽어낸다. 복수성은 거추장스러운 이념으로 처리되고 말 뿐이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더더욱 죽이는 전체주의적 경제 지상주의 사회로 가는 경향이 짙어지고있다.
 

거대 해녀가 바다를 헤집으며 개별 해녀를 숨막히게하고, 자원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숨막힌 해녀와 고갈되는 자원을 대하며 푼 돈을 협상하고 어쩔 수 없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소통했다고 자부한다. 바다와 해녀 그리고 미래 뿐 만 아니라 소통조차도 질곡의 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둡고 내일은 더더욱 암흑이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설 수 있는 기반조차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더 절실하고, 소통을 질곡에서 꺼낼 의지는 더더욱 요청된다. 그것만이 희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질곡에서 구해내 탄생성, 복수성을 회복하기위한 희망 프로젝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봉합된 것처럼 보이는 총체성에서 틈새 찾기가 첫 번째일 듯하다.총체성에 포섭되지 않았던 삶, 포섭 바깥에서 벌이는 삶 그런 틈새 찾기가 소통을 구하는 첩경이다. 그런 삶은 창조해내는 일 또한 소통의 전제다. 좀 더 열린 존재되기,포용적 유적 존재되기를 위한 본보기들을 찾고 구성해내야 한다. 다시 바다 속을 뒤지듯 과거로부터 보물을 캐는 생성적 연구 작업도 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분자적 운동은 어떨까.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여 그 고집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증이 아닌 다른 것에 모험적으로 접근해보고 즐겨보는 분열증적 분자 운동도 소통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다. 그러기 위해선 견고하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모든 자율적인 존재들의 연합이 그런 분열증적 분자운동이 가져올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그 장소에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이접(離接)의 화신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코스모폴리탄 되기라고 말해버리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중심을 찾고, 그에 기대는 집착하는 것은 버릴 일이다.중심을 뺀 (n-1)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운동일지 모른다. 중심을 자처했던 모든 것들은 탄생성과 복수성 그리고 소통을 배신했다. 중심은 틈새를 남기지 않을 총체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존재론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반동적 총체성을 부수기 위해 찾은 저항적 총체성은 필연적으로 저항마저도 배신하게 됨을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지켜보아온 터이다.


해녀가 사라지고 있음은 탄생성, 복수성 그리고 그의 엔진인 소통이 질곡에 처하고 있음의 알레고리다. 하지만 아직 물질을 하는 해녀가 남아 있음을 희망의 메시지다. 국가적 봉합 프로젝트가 아직은 허술함을 보이고, 그에 도전장을 내밀 순간이 있다는 징후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만큼의 긴 시간 동안 바다도 살아야 하고, 그 안의 보물도 살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알레고리에,메시지에, 징후에 눈길을 주어야 함은 당연함을 넘어서 의무적인 일일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05



우찬제 (국어국문학과 교수)


말의‘홍수’와 소통의 위험

『홍수』에서 르 클레지오는 안개와 폐허의 장벽 뒤에서“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낙원”을 응시한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미묘하고도 아련한 희열을 주던장소였다. 그런데 인간은 결정적이고 급속하게 그 낙원을 상실했다. 실낙원의 증후는 다채롭지만, 그 중“소리들은 소란으로 변”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말[言語]들은 그 광란의 무용을 다시 시작했다. 말들은 서로 얽히고 덧붙여지고, 분할되고 하는 것이다.”말의 광란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말은 인간의 정신을 넘어서고, 정신은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소란한 소리로부터 인간의 소외 양상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말들은“계속 이어지고 거대해지는데, 정신은 그만 십분의 일초가 부족하여 정신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이윽고 그 말은 수많은 불균형이 폭발한 후에 무(無)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광란(狂亂)과 밤과, 소리가 울려퍼지는 야수 같은 선풍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하여“한층 더 은밀하고 더 굉장한 말들”은 존재의 리듬을 파열하기에 이른다.“행복과 고통의 전언”도 균열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리의 소란과 언어학대로 인해 르 클레지오의 주인공은 마침내 실어증에 걸린다. 현대 문명과 인간 삶에 대한 비판과 부정 의지가 남달랐던 작가다운 성찰이다.

소리가 존재의 숨결 혹은 존재의 리듬에서 일탈한 채 소란한 광란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절망과 비판이 비단 르 클레지오만의 몫일 수는 없다. 한국의 젊은 작가 한유주 또한 말의 대홍수 시대에 절망한 경우다. 그녀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말의 대홍수 시대를 살고있다. 소란스러운 말, 거친 말, 폭력적인 말,“어떠한 반성도 회의도 추억도 갖지 못”(「그리고 음악」)한 말들이 횡행하는 부정적인 수사학의 시대를, 한유주는 야만적인 삶이고 문화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반성적 영혼의 숨결이 거세되었기에, 존재든 말이든 그 고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한유주는 생각한다.“경험은 초라했고, 그래서 가진 것이 없었다.”(「지옥은 어디일까」). 세상에“슬프고 광포한 일들”은 무수히 일어나지만,“슬픈 일들은 어떤 사람들의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들을 환영처럼 드리우고 세계의 뒷면으로 숨어들어”(「달로」)가는 형국을 지긋하게 응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범어 어원에서 숨결을 뜻하는 리듬, 그 생명의 원천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리듬이 거세된 현실에 대한 도저한 인식이 한유주로 하여금 종종‘음악’의 세계로 이끌리게 한다.「그리고 음악」,「암송」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리의 소란이나 그 때문에 형성된 증오는, 진정한 인간적 리듬을 함축하는 음악에의 동경을 통해서만 겨우 넘어 설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소통을 위한 리믹스

『펭귄뉴스』,『악기들의 도서관』의 김중혁 또한 소통을위한 예민한 귀를 지닌 작가다. 그의「자동피아노」는“어째서 소리가 모이면 음악이 되는 것일까, 소리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하는 것일까, 왜 어떤 것은 소리이고 어떤 것은 음악일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두 피아니스트의 대화를 주조로 하는 소설이다. 비토는“음악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음을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몸으로 육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음, 소리가 선재한다. 피아니스트가 음을 만들어내서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만 투명한 마음으로“자신의 몸을 통째로 예술에게 빌려줘야 한다고”비토는 강조한다. 실제로 비토는 개별의 소리들이 제값을 잃지 않으면서도 음악으로 통합되고, 그 음악이 속한 음악 장(場)에 허심탄회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런가 하면 다시 독립적인 소리로 생명을 지닌 채 세계로 되돌아가는, 그런 리듬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자 한 예술가로 이야기된다. 가령 비토가 연주하는 소리를 전화기를 통해 주인공이 듣는 장면에서는, 독립적인 소리/음이 음악으로 수렴되고 음악을 통해 다시 소리/음들이 확산되는, 수렴과 확산의 원환적 반복과 순환을 통해서 소리와 존재의 숨결을 탐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눌 수 있다. 이때 개별 소리와 전체로서의 음악은‘따로-함께’공존한다. 나누어지는 듯 어우러지며 공존한다. 연주자와 음악, 수용자의 관계도 그와 흡사하게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근대 이후 인간과 예술을 괴롭히며 숨결의 리듬을 방해하던, 주체와 객체의 험악한 분열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연주가 이루어지는 현재시간의 연주 행위는 독주일 수 없다. 소리/음, 음악, 연주자, 수용자가 서로 스미고 짜이며 진정한 소통을 위한 생명의 리듬을 합주한다. 작가 김중혁이 꿈꾸는 음악적 황홀경은 이런 리듬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경지다.

이런 맥락에서 김중혁의「엇박자 D」의 세계 역시 흥미롭다. 음치에 가까워 박자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던 ‘엇박자 D’는 학창 시절 합창 공연을 망쳐놓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무성영화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공연 기획자인‘나’와 함께 무성영화와 음악을 리믹스한 공연을 한다. 공연의 끝에 그는 회심의 리믹스 작품을 관객들에게, 특히 학창 시절 합창을 같이 했던 옛 친구들에게,선사한다.“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20년 전 바로 그 노래”라고‘엇박자 D’가 말하고 있거니와, 한 사람의 소리가 둘, 셋, 넷, 다섯 사람의 소리로 바뀌면서 합창이 되는데, 합창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음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잘못 부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그런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가 매우 아름답고 절묘하게 어우러졌다고 느낀다.“아마도 엇박자 D의 리믹스 덕분일 것이다. 22명의 노랫소리를 절묘하게 배치했다. 목소리가 겹치지만 절대 서로의 소리를 해치지 않았다. 노래를 망치지 않았다.”각각의 소리가 어느 한 곳으로 귀속되거나 구속되지 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소리를 해쳐 어설픈 혼돈의 도가니를 만들지도 않은 절묘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각각의 소리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 서로 호응하는 상호주관성의 지평에서 상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생명을 얻는 장관이다. 합창이면서 독창이고, 독창이면서 합창인, 이 세계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개인과 집단의 조화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조화의 리듬을 통해 생명력 있는 리듬의 형성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같은 인류의 오래된 과제는 새삼 환기된다. 특히 합창/집단의 세계에서‘엇박자 D’는 타자화된 소수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작가가 탐문한 바‘엇박자 D’에 의한 절묘한 리듬의 세계는 매우 웅숭깊은 것이 아닐 수 없겠다.


리듬과 숨결의 소통을 위하여

소란스런 소리로부터 진정한 숨결을 지닌 리듬, 그 역동적이고 발견적인 가치를 모색할 수 있는 음악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은, 넓게 보아 문학적 정의의 추구에 동참하는 것이나 한 가지다. 여기서 음악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혹은 리듬을 추구한다는 것을,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구성, 그러니까 선율과 화성의 요소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음악에서의 리듬도“음 길이와 그 강세만을 가지고 결정하기 어려운 복잡성” (서우석,『시와 리듬』)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학에서도“단지 언어의 객관적 사실들 속에서 작업하기 위해서, 즉 측정되고 객체화된 선조적 시간 속에 잔류하면서 창조적시간화의 행위를 무시할 때 리듬의 본질을 놓치고”(김성도,『기호, 리듬, 우주』)말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듬은 변화무상하고 역동적인 불안정성 속에서 존재의 숨결과 기미들을 길어 올린다. 리듬은“흐름이자 동시에 과정”(김성도)이다. 현재 속에서 주체가 대상과의 구체적인 교섭과 대화 과정을 통해 역동적 의미를 창조적으로 생산해내는 게 리듬, 곧 존재의 숨결이다.

요즘 학문장에서 융합이나 통섭의 담론이 흔히 강조된다. 예의 담론이 지향하는바 역시 진정한 소통을 통해 존재의 리듬 내지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려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리듬이 훼절된 존재 상태는 위험하다.위험 상태는 진정한 소통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 소통을 촉진한다. 그러면 존재의 리듬은 더욱더 헝클어지고 악화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진실의 소통이 필요하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탐문하는 것이 바로 진실의 자리다. 그런데 그것이 파편적 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융합되고 통섭된 진실이라야 온전한 소통의 지평을 낳을 수 있고, 존재의 리듬,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2:52


 

 


 

 





 

 













 

김경만(사회학과 교수)


학문에서의 소통이란 무엇이며 또 기능은 무엇인가? 대학원 신문사에서 소통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주저 없이 응낙한 이유는 내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그 사전적 의미가“막히지 않고 잘 통함”인데, 학문에서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우리는 어떤사람이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할 때 이 사람과“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였으며, 지금도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합리성 개념과도 소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합리적(rational 혹은 resonable)인 사람인가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소통이 되는 사람, 즉대화가 되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아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는 두 가지의 반응을보일 수 있다. 첫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든, 그런 답에 대한 근거를댐으로서 자신의 답을 정당화하는 아버지들이 있고, 둘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며 무시하는 아버지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첫째 타입의아버지가 합리적이고 소통이 잘되는 아버지일 것이다.좀 더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첫 번째 타입의 아버지는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비판적 합리성을 가진 아버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대화”를 통해서, 혹은 더 나가서“논쟁”을 통해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는 것이“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과 평가, 그리고 논쟁의 부재

짧은 글에서 더 복잡하고 현학적인 얘기를 하는 것보다 곧바로 이런 소통적 합리성이 국내의 사회과학, 인문과학계에 존재하는가를 얘기해보자. 학문에서 소통의 정도는 위에서 언급한 소통적 합리성이 학문에 참여하는 사람들, 즉“사회과학자들”사이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소통이누구와 누구사이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서구의 사회과학과 우리 사회과학만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과학자들, 즉 전문가(professional)들 간의소통이 서구에 비해서 매우 떨어지는 반면, 대중과의 소통은 매우 활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점은 금방 이해될 수 있다. 서구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텔레비전과 대중 매체, 예를 들면 신문, 혹은 일반 잡지-신동아 등-에 글을 기고하는 사회과학자들을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회과학의 사명, 사회적 책임, 혹은 지식인의 사회적 기여라는 이름 아래 대중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때로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강연하지만, 이런 형태의 소통은 위에서 언급한 합리적소통-즉, 대화 당사자 간의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왜냐면 이런 방식의 소통은 사회과학자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전해주는 것이기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소통은 대중이 사회과학자들의 일방적 지식전달에 대해서 반대나 이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서“쌍방적이며 합리적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더해서 한국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소통의 문제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속한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은 등한시 한다는 데서 찾아 볼 수있다.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이 원활한가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지표는 물론 학술지 안에서의 소통이다. 학술지에 내는 소위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글들은 사회과학 장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끼리 만의“소통의 장”(communicative field)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논문들을 학술지에기고만 할 뿐 이들 글들에 대한 상호 비판과 감시,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이 국내 사회과학계에는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국내 학술지에 서로에 대한 비판과 논쟁적 글이 실리지 않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로도 확인되지만, 여러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도 입증될 수 있다.


관료주의화된 등재제도

우선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 등재 후보지를 선정하는 제도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에 사회과학의 장 (field)-즉 전문가들만이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 존재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 제도를 만들었을까? 나는 사회과학자들, 인문과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교협도, 또 개별 학회도 이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등재지 제도가 만들어졌는가? 서구의 학술지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나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등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들이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에 등재됐기 때문에 유명한가라는 질문은 정말 우스운 질문이다. 이들 학술지들은 Thomson사에서 SSCI를 만들기 오래 전에 이미 학자들 사이의 소통과 경쟁을 통해서 그 집단에서 가장 뛰어나고 창의력 있는 글이라고 평가 받은 글들만을 게재함으로써 그 권위와 명성을 쌓아온 학술지들이다. 즉, 서로의 연구에 대한 치밀한 비판과 논쟁을 통한 소통을 통해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를 선정하는 심사에 참여해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저명 학술지로 선정되는 것은 심사를 몇 명이 하느냐, 얼마나자주 출간되느냐, 게재 거부율이 얼마나 되느냐, 학술지를 발행하는 학회의 회원 수가 얼마나 되느냐 등의 소통의 본질적 의미와는 하등 관계없는 피상적 항목에 매겨지는 점수로 환산되는 지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년 전에 한국의 유수한 학회에서 초청받아서 강연했더니 자기 학회에 가입하라는 신청서를 주면서 꼭 가입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회 회원수를 늘려야 자신들의 학회지가 등재지가 되는데 도움이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관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겠지만, 그 책임이 바로한국의 사회과학, 인문과학자 자신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거의모든 학회지가 등재지가“되어가고”있고, 현재 아닌 것들도 등재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 그 원래의취지와는 반대로 등재지 제도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모든 학술지가 등재지가 되어가고, 따라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를 구분해내려는 애초의 취지는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인문,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국내에서는 전문가들끼리 소통-지적 산물에 대한 상호 비판과 논쟁, 평가-이 부재한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표절과 중복게재, 소통의 부재가 야기한
한국 사회과학의 질적 현실

사회과학자 상호 간의 소통의 부재를 여지없이 나타내는 또 하나의 슬픈 얘기를 덧붙이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우리나라처럼 사회과학자들이 정치권에 흡수되어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나라도 흔치 않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정치하지 말아야한다 뭐그런 식상한 얘기가 아니라 소위 훌륭한 사회과학자라고 해서 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탁되어서 소위“인사청문회”에 회부됐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제기되는 표절, 중복게재 의혹이다. 연일 텔레비전 토론회와 신문, 잡지 등에 등장해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해서 마치 깊은 지식을 가진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권에 발탁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거의 모두가 표절과 중복게재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말 개탄해야 할 것은 이들이 표절하고, 중복 게재를 했음에도 이를 알아 채지조차 못한, 혹은-만일 사실이라면 더 슬픈-알았더라도 감히 폭로하지 못해온, 학자들 간의 소통이 부재하는 한국 사회과학의 현실일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