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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2호] 수업권, 누구를 위한 권리인가

수업권, 누구를 위한 권리인가

 

김하늘 기자

 

권리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의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학생의 의무를 다하고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는 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대학이 기업화 되고 있다는 말은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니다. 학교가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학교는 이제 더 이상 교육기관이 아닌 경제적 산물로서의 기능만 담당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학교는 경쟁적으로 실력이 출중한 교수 모시기에 전력을 쏟고 있지만, 그것이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고자 함인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것인지 명분이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에게는 학교가 운영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할 의무만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권리가 주어진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들이 학생들의 수업권을 위협한다. 권리를 찾아보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법률은 ‘학교 교육에 있어서 교원의 가르칠 권리를 수업권이라 하고, 이는 교원의 지위에서 생기는 학생에 대한 일차적인 교육상 직무 권한이지만 어디까지나 학생의 학습권 실현을 위해서 인정되는 것이므로 학생의 학습권은 교원의 수업권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해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학내에서는 수업권과 학습권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교수가 수업을 하는 권리도, 학생이 수업을 받을 권리도 수업권이라고 칭한다. 이는 대학이 그만큼 학생보다 교수중심적인 사고로 흘러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는 수업권 문제에 대해 몇 번이나 지면을 할애해 왔다. 그러나 그 성과는 울림 없는 메아리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학생들은 필수 과목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 과목을 신청해야만 했다. 동대학원 박사 과정으로 올라갈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박사과정 A씨에 따르면 “관심 분야의 교수 수업이 석사 신입생 위주의 이론 필수 과목으로 개설되어 버리면 내년을 기약해야만 하고, 타학교의 수업을 들으려 해도 수강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을 뿐 아니라 타학교 학생으로서의 고충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는 원인으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선택 과목수의 절대 부족, 교수책임강의축소제도와 교수 1인당 지도학생수 과다, 신입생 선발 제도 등이 그것이다.

 

선택 과목을 선택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


대학원수업은 한 학기 최소 2과목에서 최대 4과목까지 수강할 수 있다. 수강할 수 있는 수업의 수가 적은 만큼 과목을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석사 2학기까지는 전공필수과목을 위주로 수강 신청을 하고, 한 두 과목을 자신의 관심분야에 따라 선택과목으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학기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심각해진다. 수강신청을 할 만한 과목이 없다는 것이다. 논문학기를 제외하면 석박 과정은 모두 6학기이고 18과목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매 학기 당 개설과목은 10여 과목에 불과하고, 그 중 3과목은 필수과목이다 보니 나머지 과목은 선택 과목이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그 대안으로 이웃 학교인 연세대, 이화여대와 학점 교환제를 시행하고 있으나 매 학기당 교환 학점이 6학점을 초과할 수 없고 타대학원에서 수강할 수 있는 교환 학점은 본 대학원에서 취득해야 할 학점의 2분의 1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상 명시되어 있어 이마저도 제한적인 상황이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는 교수책임강의시간축소 문제를 들 수 있다.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하고자 우리 학교는 2009년부터 교수의 책임강의시간을 축소했다. 교수들의 수업 시수를 연간 15학점에서 12학점으로 줄여 한 명의 교수가 1년에 네 개의 강의를 진행하지만 9학점은 학부 강의이다 보니 대학원 강의는 3학점, 즉 한 과목 뿐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교수의  연구를 장려하겠다는 학교 측의 배려이다. 소형과의 경우 교수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항상 같은 교재와 내용으로 강의가 개설되다보니 교수의 연구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실상은 이와 다르다. 교수의 연구 실적을 논문 발표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할 때, 강의시간 축소 이후에도 교수들의 논문 발표 편수는 뚜렷한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교수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조사에 따르면, 교수들은 대체로 의무 강의 시간보다 더 많이 강의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몇몇과의 경우에는 교수들이 한 학기 과목을 개설해 의무를 다했음에도 학생들을 위해 다음 학기 강의도 자진해서 개설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연구 성과도, 수업의 만족도도, 그 어느 하나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신입생 무더기 선발의 실체


 이렇게 문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학생 수에 비해 교수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소형과의 경우 교수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개설 과목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학생 수가 적은만큼 대학원식 세미나 수업이 비교적 잘 이루어져 수업의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일 수 있다. 대형과의 경우에는 소형과에 비해 교수의 수가 많은 만큼 사정은 낫지만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다양한 수요를 뒷받침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수업의 만족도마저 떨어진다. 필수과목이나 인기강의에는 보통 20여명, 심지어 40명이 넘는 인원이 강의를 듣게 되는 경우도 있어 학부 수업의 연장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대형과와 소형과의 교수 수의 차이가 각 과의 학생 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대학원 신입생 선발 방식 문제와도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우리 대학원은 신입생을 선발할 때 인문사회 13개학과, 이학 4개학과, 공학 4개학과, 학과 간 협동과정 3개 전공, 학연협동과정 7개 연구소를 모두 포함해 석사 530명, 박사 191명으로 신입생 입학 정원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과의 정해진 T.O를 뽑는 것이 아닌 전체 입학 정원의 수를 메우는 형식이기 때문에 비인기과의 지원자가 적으면 인기과의 인원은 상대적으로 더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대형과는 대형과대로, 소형과는 소형과대로 개설 과목 수 부족 혹은 수업의 질적 하락 등의 문제를 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수업 형태는 우리가 수업을 들을 권리를 제한하고 학부 이상의 최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수업권, 마땅히 지켜져야 할 학생의 기본 권리


 이런 문제들의 해결 방안으로 각 과의 신입생 수에 제한을 두어 교수 1인당 지도 학생 수를 줄이거나, 교수와 강사의 임용을 늘려 다양한 강의 개설을 장려하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을 고쳐나갈 의지가 현재로선 없어 보인다. 학생들에게는 절실한 문제를 어린 아이 투정 바라보듯 하는 학교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게다가 학생들이 문제제기를 할 곳이 딱히 없다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사회에 나가 경제활동을 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택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다. 대학원에 와서 석·박사 학위를 받기까지는 엄청난 공부량과 인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다시 ‘학생’신분을 선택한 데는 각자 나름의 목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가 학생들의 이런 필요를 충족시켜주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라고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 추구가 대학원의 존재의 이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대학원이 집중해야 할 것은 교육의 사회화이지 신입생 유치나 유명 교수 모시기가 아니다. 강의의 질 향상과 학생 복지 증진에 목표를 두고 미래 인재 산실을 위한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 또한 학생의 기본권인 수업에 관한 권리를 얼마만큼이나 행사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