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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7호] 공연관람, 그 천 개의 매력 속으로

네이버 공연전시 인플루언서 / 작가 최 승 희

 

[출처: pixabay]

“어쩌다가 이에 이르렀는가?”

(何故至於斯? - 굴원屈原 어부사漁父辭 중)

 

공연 관람을 시작한 뒤 인생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 로망을 실현하여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 나도 모르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하여 네이버 공연전시판에 고정 집필도 하고 리뷰 책도 내고 했지만,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직장-집-육아의 쳇바퀴를 돌며 평범하게 살던 내가, 어쩌다가 이에 이르렀을까?

대학 시절에 공연 관람에 대한 로망이 생겼는데, 이 로망에 불을 지펴주신 분은 교수님이시다. 수업 중 어쩌다 뮤지컬 이야기가 나왔는 데 그분 말씀이, '인간을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장르가 뮤지컬'이라 하시고, 그 힘은 드라마와 음악의 시너지에서 나온다고. 또,그걸 가장잘 하는(뮤지컬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나라가 어디게~ ? 라고 물으셨는데, 여러분도 한 번 맞춰보시라. 답은?

예상외로, 영국이나 미국이 아니었다. 바로바로, 조선민주주의인 민공화국. 북한의 피바다가극단이라고 한다. 북한에 대한 이미지로 선입견이 있었던 교수님께서도, 피바다가극단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 셨다나 뭐라나.

공연 관람에 대한 내 마음속 씨앗은 그 때 심어진 걸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뒤로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가 펼쳐 졌으니. 로망 따윈 잊고 취업, 결혼, 출산 후 직장과 집과 육아의 무한 루프를 도는 현생 살다가, 아이가 조금 큰 어느날. 마음 속 씨에서 싹이 돋아났나 보다. 크게 관심은 없었으되 조금은 궁금했던 가수 박효신이 출연하는 뮤지컬 <팬텀> 광고를 보고 생긴 호기심. 어렵게 구한 티켓 한 장을 들고서, 난생처음 나 홀로 관극을 감행했다. 그때까지 '눈의 꽃'만 들었지, 그의 얼 굴, 목소리도 잘 몰랐는데. 그랬는데 말이다. 그의 첫 등장 넘버 첫 소절에 엄청난 충격에 풍덩 빠져버려, 공연계 입문의 첫발을 내디딘 그 때 그 순간...

 

0. 레전드(레전)란?

공연계 은어 중에 '레전드(또는 레전)'이란 단어가 있다. 완벽한 공연을 만났을 때를 칭하는데, 박효신의 첫 넘버, 첫 소절 '비극적인 이야기, 내 슬픈노래.' 몸과 마음을 온통 흔드는 충격적인 울림과 성량, 엄청난 높이의 감정의 파도가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충격의 도 가니탕, 시작부터 녹다운 KO패. 그 노래의 느낌은, 영혼에 깊이 상처와 충격을 받은 듯, 가슴 깊이 사무치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노래로 영혼 이 온통 뒤흔들리는 첫경험이었달까.

이후 수많은 레전드를 만났는데, 레전드마다 그 빛깔과 모양과 소리와 향기가 달랐다. '레전드'이란 단어가 본래의 의미는 '전설로 남을 만한 기록'을 뜻하지만, 공연계에서의 레전이 드물지만 또 그렇게 드물지만은 않으니, 감동이라는 것은 객관의 영역이 아니라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 레전이면 레전이다. 그럼, 그동안 내가 겪은 레전의 모양(과 소리와 빛깔과 맛과 촉감)을 알랴드림. To Be Continued !

 

1.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 '지금 이 순간'을 '처음 듣던 순간'.

<팬텀> 종연 후 허전한 마음에, <지킬앤하이드 - 월드투어>를 보러갔다. 충격적인 레전드 첫경험은 했지만, 아직 뮤덕이라기 보다 머글(덕 후에 반대되는 의미로, 일반인이라는 뜻)에 가깝던 나는 그 유명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본 적이 없었다. 공연 제목에 '월드투어'라는 말이 붙기는 했지만, 캐스트는 오리지널팀이 아니라 오디컴퍼니에서 브로드웨이 배우 중 오디션을 보고 뽑은 배우들이었다.

생애 초연 <지킬앤하이드>는 시작부터 매혹적인 넘버들의 향연이 었고, 국내 배우 공연을 1도 본 적 없어서인지 외국 배우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그들의 영국 액센트, 그거 들을 때 느껴지던 묘한 쾌감. 첫 '파 사드', 오~ 갓상블(God + Emseble). 주연배우들도 좋지만 앙상블팀의호흡이 특히 좋았다. 앙상블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희열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 분위기는 그닥 호의적이지는 않았으니, 우리나라 관객들은 워낙 잘 하는 한국배우들(조승우 배우 외)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공연 초반의 박수는 박하다고 느꼈다. <지킬 앤하이드>의 킬링 넘버 '지금 이순간'은 생각보다 더 초반에 나왔다.주연 캐스트는 카일배우. 그는 한국 무대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 자리 이 넘버에 칼을 갈았을까. 그가 노래하는 동안 팔다리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무대 연출과 효과도 나의 감정을 극대화시켰다. 각양 각색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는 2천개 시험관, 딱 2층 센터에 있는 내 자리로 점점 다가와 눈을 멀게할 듯 쏘아댄 조명(조눈멀), 팔다리를 왕복하던 그 서늘한 기운은 점차 더 빨리 왕복하고 강렬하게 진동하다가, 이윽고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 조명이 센터로 옴과 동시에 내 심장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헉~ 소름이 끼친다는 말은 들었으되 이렇게 심하게 물리적으로 느끼는 것이 소름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지금 이순간'을 처음 들었던 그 순간.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그때까지도, 초면의 카일 배우가 얼마 나 잘할까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관조적이면서도 호의 적이지 않던 관객들을 그 순간 모조리 굴복시켰다. 엄청난 박수와 호응, 객석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고, 이후 레전. 남은 모든 퍼포먼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배우의 연기, 노래, 앙상블은 말할것도없고,극 자체의 스토리와 넘버, 오케스트라 연주, 함께보던 관객, 음향, 무대, 그 날 공기와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PERFECT! 머글이 덕후가 되던 순간, 지금 이 순간!

 

2. 뮤지컬 <레베카> - 스며드는 즐거움

<지킬앤하이드> 즐겁게 회전 돌다가, 생애 첫 <레베카>를 보러 갔다. <레베카>를 직관하기 전부터 이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컸는데, 가장 유명한 넘버 '레베카Act2'에 대한 기대감에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몇 년 전 머글 시절 어느 날, 뮤지컬 넘버를 유튜브에 자동 재생해놓고 신나게 집안일을 하던 중, 귀에 확~ 꽂혔던 노래가 바로 '레베카 Act2'. 하아, 이런 공연을 그 동안 나는 1도 보지 못하고 긴 세월 머글로 살아왔군! 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괜찮다. 앞으로 볼 공연도 무궁무진하므로.

내 생애 첫 <레베카>는 신영숙 댄버스로 선택했다. 객석 분위기가 무척 좋았는데, 함께 했던 관객들도 모두 나와 같은 마음으로 공연을 기대했나보다. 관객의 박수 함성이 엄청났고, 특히 남자 관객들의 함성 과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공간을 채우고있던 다른 관객들과 함께 고조 된분위기를 즐겼다. 이 날 공연에서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송창의 배우를 무대에서 처음 봤을 때, 그 미모에(!) 깜짝 놀랐던 일. TV보다 훨씬 더, 너무 잘 생겼자나! 남자다운데 아련하면서 보호해 주고픈 생각이 마구 일어나는 저 분위기 어쩔거야. 그 시즌<레베카>에서, 그는 내게 오만하고 상처 많은 귀족 막심드 윈터 그 자체였음을.

그래서, 신영숙 - 송창의 배우 조합으로 공연 관람을 계속했다. <지킬 앤 하이드>는 첫 관극이 가장 좋았고 재미가 점점 덜해졌지만, <레베카>는 볼수록 더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액트2‘ 넘버만 좋았는데, 다른 넘버도 좋아지고 듀엣도 좋고 삼중창도 좋고, 이 노래도 좋고, 저 노래도 좋고. 볼수록 더 좋아졌던 신기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주연 외 에, 최민철, 정영주, 이소유(이정화) 배우도 좋았다. 팬텀이나 지앤하에서 같은 충격적인 장면은 없지만, 음정도 제대로 못 맞추는 노래를 부르며(실제로 넘버를 불러보면, 아주 어렵다),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를 띠고 몸이 가벼워져서 붕붕이를 뛰는 기분. 그런 기분으로 귀가했었다.

 

3. 뮤지컬 <엘리자벳> - 스탕달 신드롬

내가 처음 만났던 완벽한 뮤지컬 <엘리자벳>. 2012년 초연 당시 머글 시절에 보고 좋은 기억을 가졌던 공연이고, 공연계 입문 후 다시 만나 게 됐다. 시작부터 너무 멋진 넘버 '프롤로그', <엘리자벳> 특유의 비장 치명적인 넘버들은 제대로 취향저격이다.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폼나게 걸어 내려오는 토드(박형식 배우). 분장 의상 멋지고 잘 생겼는데, 카리스마가 약하다고 느껴져서 아쉬웠다. 노래할 때마다 스릴하다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 공연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조피 대공비역에 이소유 배우가 아니라는 점. 도저히 캐스팅을 맞출 수가 없어서. 주연 캐스트는 옥주현 배우. 옥주현 배우가 잘 하는 것은 알지만, 왜인지 나는 그동안 옥주현 배우와 안 맞았었다. ’엘리자벳‘이 옥주현 배우의 인생캐라고들 하던데, 노래도, 연기도, 미모도, 1막 엔딩 여주인공의 킬링넘버 '나는 나만의 것'도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 방황하는 엘리자벳 서사가 너무 길어서. 공연은 계속되고 드라마는 진행되어, 정해진 엔딩의 에필 로그에 도달했다. 프롤로그와 같은 장면, 같은 넘버. 내가 좋아하는 수미상관 구성으로. 그리고 끄읏~ 커튼콜.

시작부터, 오늘은 레전은 아니겠구나 생각하고 마음 내려놓고 봤었다. 조금씩 삐걱대는 공연이라 느꼈다. 공연 초반, 부 음악감독님의 오케스트라 밀당도 이 생각에 한몫 했었고. 그런데 어라? 오늘 관객들, 꽤나 박수가 후하다? 박형식 토드는 2막이 되어서야 컨디션을 회복하 더니 커튼콜에서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즉에 좀 그러지. 박수를 잘 치는 나는 신나게 박수치고 소리도 좀 질러주고, 커튼콜 후 기분좋게 차로 향했다. 계단을 뛰어 내 차에 안착했을때.?

Oh, My God!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차에 시동을 거는데, 차가 아닌 내 몸이 너무 떨렸다. 숨도 잘 못쉬겠다. 출발 후에도, 30분 동안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요가 선생님이 스쿼트 20개 시켰을 때처럼 떨리는 다리로 어찌어찌 운전을 하면서도, 왜 이러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가, 긴장한 탓인가. 위가 쪼그라든 것 같다. 운전에 방해가 될 정도로 흥분됐지만, 진정하자. 집에는 무사히 가야지. 숨 쉬어, 숨!

그렇다. 이게 다 <엘리자벳>때문이다. 공연 내내 나는 차선이었던 캐스팅의 아쉬움, 극 내용과 주제의 부실함을 생각했다. 실존했던 여인 엘리자벳의 잘못과 시어머니 조피의 잘못, 그리고 남편 요제프의 잘못 등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평소대로 리뷰를 적었으면, 주인공들의 행 동을 곱씹는 긴 리뷰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벳>에서 내용의 부실함 따위가 다 무슨 상관일까. 오늘 최선의 캐스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퍼포먼스가 완벽하지 않음에도불구하고, 고백하건데 나는 <웃는남자> 막공 끝날 때보다 더 몸을 떨며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벳>은 <엘리자벳>, 그 치명적인 매력의 넘버, 넘버, 넘버들. 모든 결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비장 치명적인 넘버의 향연. 아, 오늘 관객들의 박수가 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환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한명이었던 나. 머리로 느끼지 못했지만, 내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오늘 ‘레전’. 역시 <엘리자벳>은 <엘리자벳>, 내가 처음 만난 완벽한 뮤지컬. 머리보다 몸이 느낀 레전. 스탕달 신드롬 이 이런 것인가.

 

4. 관극은 즐거워

자유 기고문을 의뢰받고 개요를 생각할 때, ‘공연의 즐거움에 대해 쓰고, 이어 초보관객에서 고수가 되는 단계까지 써봐야지’ 라고 생각했었 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내게 주어진 지면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혹여 다시 2편을 쓸 기회가 있다면, 대극장 뮤지컬로 시작한 관극 생활이 점차 어느 분야까지 진출할 수 있는지 적어보고 싶다. 글에서 언급한 공연들이 대극장 뮤지컬들이라서, 독자들이 대극장 뮤지컬만 레전드가 있는 것인가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번 원고는 주로, 입덕 초기의 날것 그대로의 신선했던 경험 위주로 썼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행운이란 어느 분야에나 적용된다. 그 때 내가 느꼈던 그 신선한 감각과 살아 팔딱거리는 듯한, 어느 공연을 보더라도 처음 이었던 경험치가 부족하던 내가 그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는 아직 신선한 감각이 날 것 그대로이지 않은가. 여러분도 공연을 처음 접할 때의 나처럼 ‘천개의 매력’ 속으로 풍덩 빠져보고 싶지는 않으신지?

 

 

최승희

●「하얀나무 극장에 가다」 저자

●네이버 공연전시판 고정 집필(2019~2020)

●네이버 공연전시 인플루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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