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2. 23. 09:00

 

 

박우승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출처 : Pixabay

 

2020, 코로나 악재 속에서 20대는 하늘 높이 치솟은 부동산과 취업난을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들 속에서 많은 20대들이 이제는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주식에 발을 들이고 있다. 특히 대학생들은 주린이(주식+어린이)를 자칭하며 자신들이 소유한 다양한 금액의 목돈을 주식 계좌에 쏟아 붓고 기업들간의 자본 경쟁 전쟁터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뛰어들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증권사 6(미래에셋대우,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삼성증권, KB증권, 키움증권)을 합산했을 때 2020년도 20대의 주식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138.8%, 두 배 이상 증가했다. 20대의 신용거래융자는 약1600억대에서 약 4000억으로 늘어났으며 신규 계좌 수 또한 약 250만개를 기록하며 20대들 사이에서 주식 열풍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대가 주식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2017년 비트코인 상승을 목격하고 경험한 세대 이자 유튜브, 텔레그램,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의 소셜 네트워크들의 활성화 등으로 인해 기존의 주식에 대한 정보를 쉽게 받아볼 수 있다는 점, 각종 스마트 폰에서 어플 시스템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짐으로 인해 취업 불황이 닥쳐온 점, 부동산 가격이 급등함으로 인해 막대한 기본 자금이 필요한 부동산과는 달리 적은 자금으로 손 쉽게 벌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20대들 사이에서는 주식에 관심이 쏠려있다. 이와 더불어 20대 대학생들은 통학을 하며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버는 것보다 편하게 용돈 벌이를 할 수 있는 주식을 선호한다.

 

20대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주식 매매는 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 간단히 말하자면 주식의 매매 성향에는 크게 장기투자, 단기투자 이렇게 2가지 종류의 매매 성향이 있다. 장기 투자는 말 그대로 기업의 미래가치를 계산하고 장기적으로 한 종목(기업)에 꾸준히 돈을 넣어놓은 후 미래에 기업이 자신의 목표만큼 성장했을 때 수익을 실현하는 투자이다. 반면 단타, 투기라고도 불리는 단기 투자는 특별히 기업에게 호재가 되는 이슈 혹은 기업이 수혜를 받을 수 있는 테마를 찾고, 그 이슈 혹은 테마가 기업과 만났을 때 일시적으로 가치가 급등하거나 오르는 것을 예상하고 빠르게 해당 기업의 주식에 들어간 후에 가치가 급등할 시 바로 수익을 실현하고 나오는 매매 법이다.

 

두 가지 종류의 매매 성향 중 좀 더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바로 단기 투자이다. 단기 투자는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한순간에 오보 혹은 악재로 인해 급락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양날의 검과도 같은 단기 투자는 언론의 매우 강력한 지배에 놓여있다. 말 그대로 기사 하나에 기업의 시가 총액이 급등할 수도, 급락할 수도, 개인 투자자들이 웃을 수도, 울분을 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몇가지 상황을 예로 들자면 올해 1116일 주식 시장이 끝난 직후 A기자가 찌라시성 오보 기사를 내보냄으로 인해 B 회사의 주가는 급락하며 타격을 입었고, C 회사는 급등하였다. 이후 기사가 오보로 판명 났고, A기자는 3번의 기사 내용 수정을 통해 내용을 정정했지만 급락한 B 회사는 이미 타격을 받아 투자자들이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받았고, 급등한 C 회사 또한 오보로 인해 급락하게 되었다. 이에 양측에서 피해를 입은 많은 투자자들은 국민 청원에 오보를 보도한 A기자를 고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또한 일반 언론보도와는 다르게 주식의 상황을 주제로 하는 증권 해설형 기사도 있다. 이와 같은 기사들은 대부분 빠르게 급등한 주식이나 급락한 주식, 그리고 주목해야 될 주식 종목을 짚으며 그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람들은 기사의 달콤한 속삭임 등에 쉽게 현혹되어 종목에 투자했다가 자칫 낭패를 보기도 한다. 올해 1010일자 상장을 시작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주가도 수많은 언론들이 앞다투어 엄청난 주식 상품으로 보도하였고,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주식에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자신이 보유한 돈들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처음 나온 날짜를 기준으로 주가는 35만원에서 시작했지만, 수일 뒤 14만원까지 폭락 하고 말았다. 신혼부부, 약혼자, 주부, 대학생 등등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막대한 금전적 피해를 보았고, 급기야 주식은 환불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환불 요구가 빗발치는 사태까지 발생 했다.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언론은 주식장에서의 개인 투자자와 기업, 외국인매수자들의 금전적 흐름,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본질적 정치 모델인 주식시장을 자연스럽게 통제하고 권력으로 지배하는, 일종의 헤게모니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알튀세르가 언급한 정치, 문화, 경제의 반영물이 이데올로기적 사회 장치인 언론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최대 반영물인 주식 시장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주식시장은 현재 현대인들에게 거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본다면, 언론은 그것의 존재 자체만으로 오로지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의 구조를 더욱 견고하고 굳건히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결코 언론의 역할이 모든 분야에서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건설해 놓은 주식의 장에서 언론의 역할이 헤게모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현재 견고하게 짜인 신자유주의가 반영된 주식 시장 속으로 너도 나도 들어오고 있는 20대 대학생들은 현재 돈을 쫓음과 동시에 돈에게 쫓기고 있다. 하루에도 엄청난 양으로 쏟아지는 보도는 실시간으로 순식간에 주식 시장이 주목하는 스포트라이트를 예기치 않게 바꾸기도 하고, 한 기업의 시가를 급격하게 떨어트리며 용돈 벌이를 목적으로 돈이 필요해 단기 투자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돈을 쟁취하고자 돈을 쫓아갔지만, 쫓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돈에게 자신이 역으로 쫓기게 되는 그야말로 비극적 코미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수익 실현이 되는 상황도 올 수 있지만, 이 상황도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다. 수익을 실현하기 위해선 하루 종일 주식호가창과 뉴스 기사들, 커뮤니티 등을 수시로 돌려봐야 하며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 정작 본인의 학업에 집중하지 힘든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주식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끊임없이 나오고있다. 하이 리턴인 만큼 하이 리스크, 자신의 종목에 베팅하는 점들이 도박의 특징과 흡사한 부분에서 주식을 도박으로 보는 시선도 아직까지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020년 암울한 시기에 주식 재테크가 꼭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당장 자신의 꿈과 학업을 위해 노력해야 될 학생들이 주식 장에 뛰어들며 언론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집착하고, 주시하며 언론에게 휘둘리게 되는 언론의 노예로 전락하여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신자유주의가 펼쳐놓은 거대한 덫에 빠져 주식 장이 만들어 놓은 돈을 쫓고 돈에게 쫓기는 쳇바퀴 통에 자신들이 들어갈 수 있음을 인지하고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고 경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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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 2021.01.03 12:24  Addr  Edit/Del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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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2. 23. 09:00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김희주

 

 

(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031407001&code=960100)

최근 넷플릭스는 재미있는 시도 중이다. 각 콘텐츠에서 이용자가 스토리에 개입해 자신의 선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인터랙티브 콘텐츠가 바로 그것이다. 넷플릭스는 현재까지 10개의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공개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그중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를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블랙미러>의 한 에피소드로,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인터랙티브 콘텐츠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2019년도 에미상 최우수 TV 영화 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선택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침 식사로 어떤 시리얼을 먹을 것인지, 버스에서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인지와 같은 선택을 하면서 이용자는 이러한 인터랙티브 방식에 적응하게 된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이용자는 더 중요하고, 심오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입사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동료가 권하는 마약을 복용할 것인지, 아버지를 죽일 것인지, 죽인다면 시체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와 같은 다소 거북하고 피하고 싶은 선택마저 반드시 해야만 한다. 매 선택은 앞으로의 이야기에 영향을 주며, 선택에 따라 결말도 달라진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게임 제작자인 스테판과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어렸을 때 자신의 인형을 숨긴 아버지와 그 인형을 찾느라 어머니의 기차 시간을 바꾸게 한 자신 때문에 어머니를 기차 사고로 잃은 트라우마가 있는 스테판은 아버지를 증오하며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헤인즈 박사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한편 스테판은 독자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책인 밴더스내치를 원작으로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데, 처음으로 출근한 게임 제작사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제작자인 콜린을 만난다. 이후 스테판은 게임을 제작해 나갈수록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환각에 시달리고, 여러 악몽을 꾸며 정신이 피폐해져 간다. 이러한 기본 스토리를 바탕으로 이용자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러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공식적인 결말은 5개이지만 약간씩 다른 매우 많은 결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는 때때로 자신이 정말 선택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선택 분기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약을 버린다약을 변기에 버린다처럼 사실은 같은 것을 물어보는 선택지가 등장하거나, 양쪽 선택지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이러한 선택지가 계속해서 등장하다 보니 이용자 입장에서는 선택에 있어서 몰입도와 흥미가 저하되고 선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른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선택만 해라)식의 전개 또한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특정 선택의 경우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명시적으로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아주 허무한 결말을 보여준 후 처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하나의 결말을 보더라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고 이전 선택지부터 다시 선택할 것을 유도하기 때문에, 결국 이용자들은 제작자가 의도한 결말을 모두 볼 때까지 영상을 반복적으로 시청하게 된다.

이러한 반복 시청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매 분기의 선택이 스토리를 미세하게 달라지게 하기 때문에 다른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한참 전의 선택으로 돌아가서 그 시점부터 다시 시청하며 다시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똑같은 것을 다시 볼 때마다 드는 피로감이 상당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작품 내내 악몽에 시달리는 스테판과 모든 엔딩을 볼 때까지 이 영화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용자가 겹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외에도 스토리 상 많은 아쉬움이 눈에 띄었다. 물론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인 만큼 기술적 한계가 수반되었겠지만, 선택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스토리 탓에 결론적으로 이용자가 맞이하는 결말과 상관없는 너무 많은 장치를 심어 놓았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장치를 위해 너무 많은 내용을 스테판의 꿈으로 처리해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구조가 특히 아쉬운 점이었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는 작품 속 스테판이 자신의 게임에 대해 설명하는 대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이머에게 너무 많은 선택지를 주려고 했었다. 그 가지를 모두 잘라냈다. 게이머들은 자유 의지가 있는 줄 알지만, 결국 엔딩은 내가 정한 대로다. 다양한 결말을 위해 뿌려진 장치들이 이 주제를 중심으로 수렴되는데, 평행세계를 논하던 콜린의 대사 자유 의지가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미로에 갇혀 있어, 그리고 스스로가 자유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 전체가 어떤 단체의 조종 하에 움직이고 있다는 스테판의 망상과도 부합되는 주제의식이다.

 

이용자가 직접 개입하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작품의 주제가 결국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이라니, 역설적이게 느껴진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스테판이 제작한 게임이 성공적으로 발매되는 결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스테판의 게임을 넷플릭스 콘텐츠로 리메이크하려는 한 제작자는 스테판의 게임이 매우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고 이해하며 뉴미디어의 자유도를 언급하지만, 그 역시 제작 중 스테판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상실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미디어가 주는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마저 거짓이었으며 우리 모두는 미디어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결말이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블랙미러> 시리즈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데, <블랙미러> 또한 넷플릭스라는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시리즈임에도 늘 미디어와 기술 발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주제를 다뤄왔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이처럼 역설적인 메시지를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통해 전달한 것은 그 자체로 이용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주제 자체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효과적인 시도였다.

 

결국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선택에 집착하며 좋은 결말을 보기 위해 매 분기로 돌아가 선택을 바꿔가며 반복하는 순간 이용자는 선택의 미로에 빠지게 된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선택 때문에 고통받으며 자유도가 높은 게임 밴더스내치에 집착하는 스테판처럼,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 아무리 되돌아가서 다시 선택을 할지라도 이용자는 결국 자유의지를 상실한 것 같은 씁쓸함을 맛보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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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석사과정 이 가 효 (LI JIAYI)

 

코로나19가 우리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올해 초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수많은 바이러스 중 특히 코로나19 와 같이 생존에 관련된 충격적인 경험에 의해 굵은 전용신경 회로가 구축되면 그 비극성으로 전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 무기력, 스트레스에 중독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이 많다. 하지만 바이러스보다 우리의 삶을 더욱 해치는 것들은 눈으로 보이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한 가을의 밤 영화 <밀양> 다시 찾아보았다.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면서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다소 가벼워졌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 트라우마는 정신 건강의학과의 진료 항목에 해당하는 질병으로 일상에서 평범하게 사용할 만한 단어는 아니다. 사람들은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9·11테러, 대구지하철 참사 등 대형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함께 듣게 된다. 소설, 영화 등 스토리가 있는 문예물에서 트라우마는 ‘주인공의 극복 대상’으로 자주 사용된다. 영화 <밀양> (2007, 이창동 감독) 역시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겪는 트라우마와 그에 대한 대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원작이 라고 할 수 있는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가 있기 때문인지 영화에 대한 기존 연구나 보도에는 소설과 영화라는 형태 변화에 따른 서사 변용에 대한 인식, 교육 측면에서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 이상 지난 만큼 다방면에서 많은 연구가 누적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트라우마 극복 시도 이야기로 읽힐 가능성이 존재 한다. 이에 본 글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주인공 신애가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어떤 트라우마들을 마주하고, 이에 대해 어떠한 대응을 보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트라우마로부터의 회피

 

영화는 차창 너머의 맑은 하늘을 담으며 시작하지만, 그 하늘을 바라보는 주인공 신애의 마음은 편치 않다. 기혼자라면 절대 겪고 싶지 않을 두 가지 사건-배우자의 외도와 그 배우자의 사망-을 겪은 후 아들 준을 데리고 서울에서 밀양으로 이동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밀양으로의 이동은 여행이 아닌 이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삶의 터전이었던 서울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애의 이사는 배 우자의 외도와 배우자의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회피’이다. 배우자의 외도와 사망은 하나만이라도 개인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두 개의 사건을 연달아 겪은 신애에 게 기존의 거주지는 더 이상 안락한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기존 의 거주지에서 그녀는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였지만 이 제 그녀의 위치는 ‘바람핀 남편을 둔 아내’이자 ‘그 바람난 남편이 죽은 아내’로 변화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변화한 시선을 인지 할 때마다 그녀는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두 개의 사건 ‘배우자 의 외도’와 ‘배우자의 사망’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신애는 이사를 통해 이 두 가지 사건이 자신의 의식 차원으로 올라오는 계기 즉, 주위의 시선과 마주치는 빈도를 줄인다. 그리고 이는 신애가 두 사건을 자신의 무의식 단계에 머물도록 효과적 으로 ‘억압’하도록 만든다. 물론 타 지역으로의 이동이 그녀가 겪은 사건들을 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 이동을 통해 신애는 ‘배우자의 외도’와 ‘배우자의 사망’ 중 전자에 대한 부담감을 줄인다. 실제로 밀양에 도착한 신애가 연기한 것은 ‘서울에서 온 돈 많은 과부’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녀의 남편이 ‘외도하고 사망한 사실’은 감춰진 정보가 되고 밀양은 ‘외도하고 죽은 남편의 고향’이 아닌 ‘죽은 남편의 고향’이 된다. 물론 밀양 사람들 중에도 왜 하필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온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애가 말만 하지 않는다면 죽은 남편의 ‘외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정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남동생에게 “난 서울이 싫어. 여기가 좋아. 여기가 왜 좋은지 아니?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나 여기서 새로 시작할거야.”라는 신애의 말은 그녀가 서울에서 느꼈던 부담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새 공간에 진입하는 그 순간 신애의 가족은 아들인 준뿐이기에 신애는 그저 ‘아들과 사는 엄마’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고, 이것은 그녀 가 바라는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신애가 선택한 밀양이라는 공간은 바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남편의 고향이다. 그녀가 거주지를 옮기는 중요한 선택을 하면서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점, 밀양 사람 중에도 그녀가 왜 하필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왔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점 등은, 자신을 배신한 배 우자의 고향으로 가서 새출발을 하는 그녀의 행동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신애가 자신을 찾 아온 남동생과 피아노 학원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애는 남동생과 싸우는 과정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남동생에게 “너 가! 그런 소리하려면 지금 당장 서울 올라가!”라고 외친다. 죽은 남편의 외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신애의 대사 에서 죽은 남편은 ‘그 인간’이기도 했다가 ‘준이아빠’이기도 하고, 보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고, 가족만 사랑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신애에게 죽은 남편은 부정적인 감정과 그리움이 섞인 대상인 것 이다. 즉 신애가 밀양으로 이사하는 것은 친정 가족을 포함하여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과의 연계를 최소화함으로써 배우자의 외도를 부정하고, 배우자가 자신에게 준 충격을 억압한 채 새롭 게 출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moviejaryo/5532)

 

두 번째 트라우마의 승화 실패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 던 신애의 바람과는 달리 밀양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이사와 함께 ‘바람났던 남편이 죽었다’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덮어 둘 수 있었으나, 어찌 되었건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서울에서 온 과부’ 로 인식한다.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고자 그녀가 선택한 것은 서울에서 온 ‘돈 많은’ 과부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주할 공간과 피아노 학원 문제를 해결한 후, 실제로 땅을 살 것은 아니지만 땅을 보러 다닌다. 그녀는 지역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부동산 의 전화를 받는 모습을 연출하는 한편,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동네 아주머니들과 노래방에서 놀기도 한다. 어느 날, 노래 방에 들렀다가 늦게 귀가한 신애는 집에 아들 준이 없음을 알게 된다. 신애가 부유하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돈을 노리고 준을 납치한 것이다. 신애는 돈이 많은 ‘척’ 했던 것이지 실제로 부유 했던 것은 아니기에 납치범이 요구한 금액을 전부 마련할 수 없 었다. 납치범의 요구에는 못 미치는 금액을 약속된 장소에 가져다 놓지만 준은 사망한다.

 

  새로운 시작의 장소가 하필 밀양이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는 친정 가족들의 반발과 관계 단절, 외지인을 쉽사리 받아들 이지 않는 지역 사람들의 텃세조차도 감내할 정도로 당시의 신애 에게는 삶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납치와 사망이 라는 사건을 겪으며 신애는 삶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상 실한다. 밀양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고 있던 동네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는 치명타를 입었고, 그녀가 결혼과 출산을 통해 만들 었던 자신의 ‘가족’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평소 신애는 동네 약사의 교회 전도를 흘려들었지만 극심한 절망에 빠져 고통스러 워하던 중 스스로 교회를 찾고, 예배에 참여해 울부짖고 통곡함 으로써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억압해 두었던 감정을 분출한다. 이 후 신애는 교회 활동에 매우 열심히 참여하게 되고,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살해범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를 용서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큰 결심을 하고 아들 살해범 면회를 가지 만 그녀가 마주한 살해범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아 마음이 편안하니 당신(신애)도 편안해지라고 말한다. 이에 신애는 ‘유가족인 내가 아직 범인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범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큰 충격을 받고 살해범을 용서 하지 못하고, 자신이 믿었던 신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신애가 아들 살해범을 용서하는데 성공했다면 신애는 자신이 억압해두고 조금씩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슬픔, 분노 등 의 감정을 모두 초월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승화의 단계에 도 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살해범의 용서와 내적인 승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그녀는 자신이 의지하고 믿었던 것 들에 대해 반항한다. 교회 부흥회에서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 예배를 망치고, 미수에 그치기는 하지만 기혼자이고 독실 한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여 정사를 나누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의 반항은 사과를 깎던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 자살시도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들 살해범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통해 승화 단계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결국 용서에 실패함으로써 그녀는 승화에 실패하고, 신애의 트라우마 역시 해소되기는커녕 반항과 자살시도라는 가장 극단적인 반동행동으로 표출된다.

 

트라우마 대응와 나의 생각

 

결론적으로 영화 ‘밀양’은 신애가 두 번째 트라우마 승화에 실패 하고 반발, 반항, 퇴행 등의 행동을 보인 끝에 자살시도라는 극 단적인 선택에 이른다는 점에서, 트라우마 극복에 실패한 인간 이 겪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신애가 집에서라도 자신의 손으로 머리카락 자르기를 시도했다는 점, 그리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의 곁에서 종찬이 거울을 들어주 고 있다는 점에서 신애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영화는 연이어 큰 사건을 겪는 여성이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줌 으로써 트라우마 극복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갖고 트라우마 극복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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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호 규 현

 

[코로나의 초대 : 미디어 속으로]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생리적인 것들과 명예, 재물, 지식과 같은 특정 대상을 향하는 것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매슬로우(Maslow. A. H.)는 이러한 인간의 욕구가 5가지 범주를 갖고 우선순위가 있다고 보았다.(Maslow. A. H. 1943)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및 소속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충족시키고 다루는 방법에 대해 개인은 사회화를 통해 학습하고 내재화한다. 각자만의 ‘욕구 충족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 나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는 이 안정적인 기제가 발동하는 것을 방해하고 때로는 아예 무너뜨리기도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후 코로나19)은 앞서 말한 거대한 위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존 행동 양식을 변화하도록 강요했다. 건강에 대해 집중하게 하고, 만나서 식사하는 것을 지양케 했으며, 교육마저 접촉하지 않은 채 이뤄지도록 바꿨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제약하는 것은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3단계에 해당하는 ‘애정 및 소속의 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한 욕구를 다루기 위해, 미디어 의 이용이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욕구 충족 은 타인 없이 이루기 어려웠으며,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미 공유를 돕는 도구”(나은영,2010)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우리를 어떻게 미디어로 초대했는지,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떠한 변화 를 겪고 있는지 알아보자.

사례 1 : 뉴스

평소에 하루 동안 몇 번이나 뉴스를 확인하는가? 필자는 코로 나19가 심각해진 올해 1월 이후로는 하루에 적어도 5번 이상 은 뉴스를 찾아봤던 것 같다. 뉴스는 코로나19의 소식을 알려주는 가장 공신력 있는 정보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행 초기 에는 수많은 정보가 연일 쏟아져 나왔고, 많은 이들이 보도를 접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방송통신심의위원회,2020.06.02.) 그렇지만, 코로나19는 우리 모두가 처음이었고 이는 뉴스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의 정보 자체가 많은 변수를 지님에 따라, 때때로 어제 전달한 내용이 다음날 수정되기도 하고, 지금 상황을 악용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뉴스이용자는 ‘정확한 정보’를 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다. 즉, 수용자의 주체성 있는 정보선별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강요된 것이다. 이에 발맞춰 학계와 언론사에서는 허위사실을 검증하고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게끔 ‘팩트체크’코너를 더욱 활성화하기도 했다.

  한편, 뉴스의 특성상 보며 즐거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겠으나, 더욱 현실이 암담하게 느껴지는 소식이 많았다. N번방 사건, 자연재해, 의료진 파업 등 부정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일들은 이용자들에게 정서적인 피로감을 더욱 가중했다. 뉴스로부터 누적되는 부정적인 정서를 상쇄하기 위해 사람들은 때때로 걱정 없이 즐길만한 다른 콘텐츠를 더 찾기도 했다

 

사례 2 : OTT서비스1) 및 동영상 플랫폼

바깥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증가함에 따라 개인은 안전한 공간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고, 이는 ‘여가’에도 큰 영향을 미 쳤다.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에 대한 사용이 증가했고, 특히 OTT서비스 및 동영상 플랫폼의 이용량은 크게 증가했다. OTT서비스의 경우 시장이 꾸준히 크고 있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스마트폰 등의 미디어 이용 시간의 증가와 영화관 폐쇄 등 여러 조건이 맞물려 호황을 이루게 됐다. 특히, <감기,2013>과 같은 재난 영화들에 대한 이용도 급증했는데(허민녕,2020,02.28), 이는 비슷한 위기상황에서 희망적인 결말이 주는 잉여현실로부터의 만족감을 추구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 대한 이용도 세계 각지에서 증가했는데, 큰 변화는 이들이 즐김의 장 (filed)에 더불어 다양한 정보 공유의 장으로서 입지를 견고히 다졌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급변한 생활양식에 적응하기 위한 유용한 학습 도구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대면 행동이 제약된 시기에 맞춰 홈트레이닝, 요리, 자격증 시험 등에 대한 트래픽이 급격히 증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동영상 플랫폼이 검색 도구로써 더욱 활용되고 있으며, 앞으로 인터넷 상의 정보 접촉 양상에도 차이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례 3 : SNS

SNS는 타인과 연결에 대한 어포던스를 지닌다.(나은영,2010) 어포던스는 환경이 개인에게 어떠한 기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즉, SNS는 본인과 다른 사람 사이의 연결에 대한 기능을 제공하리라는 기대를 준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사람들 간의 집적 연결을 방해하며, 대안인 미디어의 이용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그 결과 각종 메신저와 더불어 SNS의 이용량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권상희, 2020,03.27) 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코로나19에 관해 정제되지 않은 정보를 빠르게 얻 을 수 있다는 기대에 의한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정보는 경험적이고, 언론이나 정부 발표에서는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알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국내에서는 최초 확진자가 등장했을 때와 31번 확진자 이후 확산이 증가한 시기에 트위터 버즈량2)이 매우 높게 증가했다.(닐슨코리아, 2020) 이는 발 빠르게 정보를 얻음과 동시에, 확진자 동선 같은 정보를 리트윗함으로써 서로 주의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트위터나 네 이버카페, 커뮤니티 웹페이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이유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사건은 다양한 가치판단을 내리게 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기준에 관해 판단을 내릴 때 다른 사람과 본인을 비교하려 하며,(Leon Festinger, 1954) SNS는 탁월한 도구가 된다. 지인이나 유명인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거나, 인터넷 공론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본인의 의견을 비교한다. 또한, 코로나19 이전에 타인과 직접 교류가 활발했던 사람의 경우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성이 클 것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게시하거나, 과거에 즐거웠던 순간을 담은 사진을 다시 공유하기도 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밴드, 카카오스토리 등이 해당한다.

 

[미디어 밖에 사람이 있다.]

 

앞서 3가지 사례를 통해 코로나19사태 이후의 미디어 이용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위기와 혼란 앞에서 미디어를 더욱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고, 때로는 혼란으로부터 빠져나와 즐길 거리를 찾는다. 오히려 만날 수 없어서 더욱 간접적으로 타인과 연결하기 위해 붙든다. 이러한 이용양상은 가중되거나 변화가 있었을 뿐, 사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쉽게 지각하지 못할 만큼 미디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글을 쓰고자 했던 의도를 밝히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은 소중하다.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며, 당신도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미디어 안에 존재할 때에는 그 소중함과 가치에 대한 지각이 쉽게 낮아진다. 코로나19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제약하고, 미디어로 초대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강화했다. 문제는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있을 때 극명히 나타난다. 대상이 응당 비판 받을 만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서는 안 될 표현이 너무 나도 쉽게 오간다. 미디어는 아무리 우리 몸에 깊숙이 달라붙더라도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미디어 밖에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디어 밖의 사람을 강조하며, 미디어 속에서 글을 쓰고 있는 호규현(27세)의 모습이다

            

참고자료

 

권상희, (2020,03,27.) 왓츠앱, 코로나19로 사용량 40% 증가, zdnet.co.kr/view/?no=20200327100942

나은영(2010),미디어 심리학.(pp. 33) 한나래출판사

닐슨코리아. (2020) 코로나19 관련 소셜 미디어 빅데이터 분석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자료(2020,06,02.), 「방통위, 코로나19에 따른 스마트폰ㆍPC 방송프로그램 이용행태 조사 결과 공개」

허민녕, (2020,02,28.) ‘컨테이젼’ ‘감기’, 압낭에서 터진 반갑지 않은 인기,msn.com/ko-kr/entertainment/movies/커네이젼감기-안방에서-터진-반갑지않은-인기/ar-BB10vnOu

Festinger, L. (1954). A theory of social comparison processes. Human relations, 7(2), 117-140.

Maslow, A. H. (1943).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50(4), 370?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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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 김 진 호 목사 

 

 

 

출처: 김성민 

 

전광훈, 제대로 일냈다

 

사랑 제일교회는 장위 뉴타운 10구역 조합 측과의 명도소송에서  소했다. 교회가 받을  있는 보상금 평가액인 82억 원의 7배나  구한 탓이다. 이제 법적으로는 강제철거만 남았다. 이에 교인들  당수가 교회에서 철야를 했다. 한데 이는 집단감염이 일어나기  좋은 상황이다. 아마도 그때 돌았던 듯하다. 그러다 전광훈이 주도하고 교인들 대다수가 참석한 8.15 광화문 집회가 열렸다.  교회뿐 아니라 전국의 고위험군에 속하는 교회들의 신자 상당수가 참여했다.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제2차 대감염이 발발했다. 물론  주요 원인은 사랑 제일교회와 8.15 광화문 집회였다. 정부는 8월 30일, 수도권 지역에 대한  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적용을 선포했다. 하반기 경기회복을 기대했던 사회는 급락했다. 위험한 극우주의자 전광훈이 제대로 사고를 쳤다.

 

 

 

변두리 목사, 세상의 중심이 되다

 

그는 이미 1990년대 후반, 막말로 유명한 개신교계 목사사회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수위 높은 발언을 남발했다. 하지만 그를 주 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2003년 개신교3.1절 구국기도회 때, 두 차례나 정권을 빼앗긴 우파 세력의 선거연합이 바닥까지 흔들리 던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되었는데, 무려 20 만의 반정부를 외치는 인파가 모였다. 전광훈은 그때 혁혁한 공로 를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한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개신교의 선거연합이 만들 어졌던 2008년 대선국면에서 전광훈은, 그의 이름이 미미하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이렇다 할 떡고 물도 나눠주지 않았다.

  이후 그는 네 번의 기독교정당 창당을 주도했다. 점점 제법 많 은 목사, 장로를 엮어냈지만, 그들의 교회 신자들은 그 당에 표를 주지 않았다.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붕괴되고,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던 때, 특히 2017년과 2018년 3.1절 구극기도회가 밑바탕이 된 이른바 ‘태극기 애국시민’이 오백만 명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최대인파가 몇만 명을 넘지 못했다. 이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손잡고 정 당을 통해 현 정부의 붕괴를 도모했으나 2020년 4.15총선에서 처 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가 애써 모은 지지자들의 수가 증가 한 것보다 반대하는 이들의 수가 훨씬 더 많이 늘었던 것이다.

  2014년에는 ‘한국교회선교은행’을 만들었고, 몇 년 후 선교카드 5종이 발행되었다. 하지만 이 ‘은행’은 사실상 페이퍼컴퍼니였다. 그리고 5장의 카드는 기존 카드사가 발행한 것이었다. 전광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일종의 카드용역업체를 운영한 셈이다. 그것으로 거대 한 기금을 만들려 했다. 만약 성공했다면 대형 금융사기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같이 제대로만 되었다면 꽤 위험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파급효과는 미미했다. 한데 그가 벌인 일은 아닌데, 뜻 밖에도 대대적인 감염증 사태의 주역이 되었다.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실패 이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위험한 극우주의자로 알려졌음에도 그는 왜 자신이 의도했던 일들에서 번번이 좌절해야 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그의 주요 대중이 사회적 자원을 활용할 능력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이다. 우선 전광훈을 주목해보자.

 

한국개신교의 중심부 엘리트가 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미국교회와의 연줄망이다. 긴 얘기가 필요하지만 여기선 간략히 결론만 말하겠다. 미국보수파 정치세력과 미국교회와의 연결망에 엮이는 것이,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인 한국사회에서는 교회 차원을 넘어서 사회 형성에까지 절대적 의미를 지녔다. 하여 그 연줄망에 엮이는 것이 한국교회의 엘리트가 되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려면 몇몇 주요 교단에 속해야 한다. 한데 전광훈은 그런 교단 출신이 아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규모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는 전형적인 변두리 지도자였지만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개신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한편 최근에는 규모 뿐 아니라 교회가 입지한 지역도 중요하다. 적어도 강남권(강남, 강 동, 분당)에 속한 대형교회여야 그 교회 담임목사가 개신교 내에서 말 발이 먹힌다. 한데 알다시피 전광훈은 대형교회 목사도 아니고, 강남권 교회의 목사도 아니다.

 

한편 흥미로운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개신교 목사들이 학력 에서 뛰어난 엘리트들이 아님에도, 목사사회에서 학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교단 신학교들 중 어느 학교 출신인가, 그 학위가 문교부인가 학위인가 교단인가 학위인가 등 깨알 비교가 작용한다. 그리 고 이른바 ‘더 성공한’ 이들은 위조된 박사라도 받아야만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에 있게 된다. 전광훈은 그런 학력 서열에서 제일 하층에 속한다.

 

  하여 그가 개신교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기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개신교 연합단체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기관인 한 기총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랐던 사실은, 그가 회장이 될 당시 이 기관은 거의 폐가에 가까운 주인 없는 저택 같은 상태 였다. 이것은 한기총 회장으로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자원을 모으기가 여의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해서 그는 일찍부터 ‘선교카드’라는 이름의 독창적인 자원 모델을 찾아내야 했고, 한기총이 이단으로 지목했던 종파의 지도자를, 이단 해체와 함께 한기총 공동회장으로 추대하기까지 했다. 이 종파가 꽤나 부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개신교 주류가 되는 길을 막았다.

 

광신도 현상

 

그를 추종하는 대중은 어떤가? 여기서 전광훈이 벌인 종교운동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넓게 보면 그는 종교적 열광주의 운동의 지도자다. 흔히 이런 지도자를 한국개신교에서는 ‘부흥사’라고 부른다. 한데 종교적 열광주의 현상은 종종 반사회적 성향을 지닌다. 그런 성향의 종교인들을 흔히 ‘광신도’라고 부른다. 한데 최근 한국에서 광신도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시기는 1990년대 후반부다. 시기상으로 보면 이른바 ‘IMF대란’이라고 부르는 외환위기가 일어난 그 즈음이다. 이때 두드러진 현상은 사회 양극화가 극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개신교 내에선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교회의 지배적 인 흐름이 귀족주의로 이동하였다. 이런 귀족화 현상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졸부형 귀족주의’와 ‘웰빙형 귀족주의’가 그것이다. 한데 전자는 그 이전에도 있었던 현상이기에 특이한 것이 아닌 반면, 후자는 한국 교회나 사회에서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라면 이것(자신의 풍요)을 어떻게 할까”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문제는 이런 폼나는 귀족주의를 따라 할 수 없는 이들이 교회에 적지 않았던 데 있다. 교회의 제도나 담론은 웰빙형 귀족주의를 선망하면서 재구축되었다. 그러자 교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대대 적으로 교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크게 보면 이탈한 자들이 재정착한 곳은 두 범주로 나뉜다. ‘비정치적 광신도 집단’과 ‘정치적 광신도 집단’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종단이 신천지였다면 후자는 이른바 극우개신교의 아스팔트신자들이 되었다. 후자의 경우, 2018년 이후 전광훈이 그 중심에 우뚝 섰다. 편의상 이들을 ‘전광훈 현상’이라고 부르자.

 

전광훈 현상의 모든 대중이 광신도인 것은 아니다. 또 그 대중 이 외환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실패자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현상에 속한 이들의 계층적 속성과 종교적 속성이 대체로 그렇다는 얘기다.

 

하여 전광훈의 대중은 대체로 자원이 빈약하다. 또 그들이 자원을 동원할 능력도 부족하다. 여기에는 다른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 하여 광신도 현상은,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 의의 기원》에서 다룬 것 같은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가령 사회를 통합할 만한 국가의 능력을 초과하는 엄청난 난민이 발생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끄럽지만 극한적 위험으로 우리를 몰아가지는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코로나19다

 

문제는 ‘코로나19’다. 실제로 전광훈은,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의 능력에 의한 것도 아닌데, 사회를 위험에 빠뜨렸고 일약 스타가 되었다. 물론 전광훈이 위험한 세상의 주역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기에 등장할 위험한 존재를 부르는 재앙의 예언자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하여 우리는 그가 거짓 예언자임을 증거해야 한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그와 같은 이의 말에 왜 현혹되는지를 묻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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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원양해

 

출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h4/event/pandemic/)

 

 

‘포스트’라는 접두사는 단순히 무엇의 이후라는 의미에서 나아가 무엇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함의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 처음 발발하여 전 세계로 확산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체의 곳곳에서 발견되던 ‘포스트-코로나’라는 단어에 의문이 들었던 것은 바로 이 ‘포스트’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 때문이었다. 패딩과 코트를 입어야 했던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 바이러스가 다시 패딩이나 코트를 입어야 할 계절이 돌아오고 있는 이 시점까지 지속되리라고 믿지 않았으며,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몇몇의 예측이 분명 과장된 괴담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싸운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없다는 당연하고도 씁쓸한 진리로 인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이후 코로나)는 분명 그 필연적인 일을 보다 더 가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데에 적절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간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가장 큰 단위인 국가 간의 불화까지, 코로나의 등장 이후 여러 사람들은 서로의 바운더리를 보다 공고하게 형성하고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서로 간의 경계가 보다 단단해지는 시대, 21세기는 너무나도 역설적인 길을 걷고 있다.

 

  21세기의 아이러니는 전 세계가 지구화와 탈경계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이전과는 구분되는 포스트-코로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구화와 개인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21세기 사회가 개인화에 가까운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타인과의 접촉이 가능한 장소에서 반지름 2m의 공간을 만드는 미시적인 개인화와 최대한 집에 머무르며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디지털네트워크를 통해 대체하는 거시적인 개인화를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경계를 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워지면서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던 움직임은 멈춰지게 되었다. 이는 모두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한 일들이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이러한 지침들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는 디지털 매체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가상 현실의 모습을 보면 어색하다고 느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우리는 변화한 사회적 규범에 물들여진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환경에 놓이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신체를 그 상황에 맞게 적응시켜 나가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변화한 사회와 때로는 마찰을 일으키고 때로는 변화한 것들을 수용하며 차차 익숙해졌지만,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8개월이 지난 현재, 이 사태의 순간성을 믿었던 사람들마저도 과연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조금씩은 품게 되었을 것이다. 코로나의 종식을 기원하며 일상생활을 유예하거나 중단했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지, 코로나와 공존하며 생활을 지속해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김초엽의 「최후의 라이오니」는 팬데믹으로 인해 멸망한 행성을 탐험하게 된 유품 정리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로몬’이라는 종족에 속하는 개체로, 로몬은 “보편의 인간 종보다 훨씬 담대하고 강인하며 용감”하다는 특성을 가지는 데에 반해 주인공은 다른 로몬들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연약한 개체이며 종족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로몬들은 멸망의 현장에 남겨진 유품과 자원을 정리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주인공은 일반적인 로몬들보다 약하고 모자란 존재이기에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3420ED라는 행성에 홀로 파견을 가게 되고, 자신의 결함에 대한 근원을 찾기 위해 그는 그곳으로 떠난다. 폐허가 된 행성에서 주인공은 그 곳에 남겨진 기계들에게 붙잡히고, 기계들의 대장인 셀은 주인공을 ‘라이오니’라는 사람으로 오인한다. 셀을 제외한 나머지의 기계들은 주인공이 라이오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기계들로부터 행성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듣게 된다.

 

  “행성계의 세 번째 궤도에 홀로 떠 있던” 행성이라는 점에서 3420ED는 태양계의 세 번째 궤도에 위치한 지구를 연상시킨다. 지 구와 닮은 구석이 있는 그곳은 불멸의 세계였다. 죽지 않는 인간이 되는 법 을 터득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로장생을 유지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다. 인접 문명들은 불멸을 위해 건강한 신체와 자의식, 기억을 복제하는 기술을 혐오하였고 복제된 개체의 진실성을 증명하라고 요구 했지만 3420ED의 사람들은 요구에 응하는 대신 자신들의 벽을 단단 하게 쌓아올렸다. 고립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그들은 행복했고, 그 것이 완전하다고 믿었지만 어느 날 전염병D가 발발하고 만 것이다. 불멸을 당연한 전제로 여기고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죽음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공포가 학습되었다. 속절없이 퍼져가는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해쳤고 결국 3420ED는 멸망하고 말았다.

 

  라이오니는 불멸인의 복제 과정에서 탄생한 결함 있는 개체였다. 선천적인 결함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이해하는 유일한 개체였던 라이오니는 집단으로 폐기처분될 위기에 놓인 기계들을 구해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인해 조성된 공포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멸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세계는 멸망을 향해 달려갔고 살아남은 불멸인들은 폐허가 된 고향을 버리고 우주로 떠났다. 라이오니는 셀을 포함한 기계들과 살아가고자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망가진 세상을 복구할 수 없었다. 행성은 더 이상 라이오니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결국 그는 돌아오겠다는 약 속을 한 뒤 3420ED를 떠났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셀은 라이오니를 기다리며 행성을 살 수 있는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라이 오니를 닮은 주인공은 이제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를 연기하며 행성의 완전한 멸망을 맞이한다. 주인공은 로몬들의 구조선 덕분에 무사히 귀환하지만 그는 눈을 감으면 여전히 라이오니와 셀이 서로의 손을 잡고 불행하지 않게 행성의 멸망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3420ED는 지구에서 착안한 가상의 행성일 것이지만, 지구와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람들이 불멸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불멸을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에 의문을 제기 하는 이들과의 교류를 차단한 것. 그러나 이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3420ED의 불멸인들에게 불멸이 지극히도 당연한 노멀이었다면, 지구의 우리에게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노멀들이 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믿음이나 세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이 세계에 완전한 절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이나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은 모두 그 시대의 당연한 노멀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비상식적인 것들로 판단된다. 불멸인들의 불멸이라는 노멀 또한 마찬가지이며, 21세기 우리의 상식적 기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를 당연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거나 그것을 불신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때로는 혐오한다.

 

  팬데믹의 힘이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절대적인 노멀들을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 세계화, 다문화사회와 같은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노멀은 코로나의 힘으로 인해 파편화의 길을 걷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사람들과 물리적인 접촉이 동반된 교류를 하는 지극히도 당연한 일상들이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까지 믿어왔던 세계에 대한 신뢰성을 잃도록 만든다. 절대성에 대한 신뢰가 약해질 때 우리는 공포를 경험하고, 감각 된 공포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급기야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등지게 하고 만다.

 

  소설은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 즉 주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한 소설이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체로서 가지고 있던 노멀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우리의 주체성은 흔들리고 만다. “어떤 죽음은 다른 삶을 지탱하는 것”인 만큼 살아있는 주체로서의 뚜렷한 감각은 타자의 생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주체성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다른 주체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타자의 자리로 아득바득 끌어내리려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은 감염병 보다 빠르게 전파”되고,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는 혐오를 기반으로 한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코로나의 향방은 전문가들조차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형태를 띠고 있다. 최악을 가정하는 습관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생존을 위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롭게 도래할 지도 모르는 포스트-코로나의 시대에서 주체의 자리를 견지하기 위해,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또 다른 주체들과 공존하기 위해 새로운 노멀을 찾아야만 한다. 코로나가 21세기의 방향성을 개인화의 방향으로 트는 데에 기여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탈경계의 윤리를 곧바로 폐기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그로 인해 서로와 공생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 숙명을 안고 있는 현시대의 우리는 원치 않았던 감염병의 확산을 최소화해야 함과 동시에 그보다 발빠른 전파력을 가진 폭력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팬데믹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윤리와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인 것이다. 연결과 분리, 주체와 타자, 공존과 자립을 포괄할 수 있는 뉴노멀에 대해. 분명 한 가지의 작은 힌트는 자신의 결함을 받아들이고 다른 개체들과의 공존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최후의 라이오니’에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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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10. 16. 09:00

시민건강연구소 김새롬  

공공의대와 의대정원확대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행동이 9월 7일, 대한전공의협의회의 파업중단결정으로 일단락되었다. 의과대학 본과 4학년 학생들은 국시거부투쟁(?)을 철회하지 않았고, 의과대학 교수들 역시 단체행동으로 인해 제자들이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2020년 의사들의 집단 행동이 완전히 종료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의대생, 전공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직 각각이 기존의 대표를 탄핵하거나 새로운 대표를 뽑기 위해 분주한 상황임을 생각해보면,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당장 다시 시작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판단해도 무방해 보인다.

 

  비교적 코로나19 방역에 성공적이었던 한국 공공보건의료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높아진 상황에서 발생한 전국적인 의사들의 집단 행동은 시민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필수인력을 남기거나, 협상을 전제로 파업 기간을 미리 정해놓고 병원을 떠난 것이 아니라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포함하는 전체 전공의의 무기한 업무 중단이 선언되자 정부 역시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 특정 문구를 고집하며 내부 의견수렴을 이유로 합의를 번복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정책안에 대한 루머를 확대재생산하며 가짜뉴스를 생산·공유하는 모습은 사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민들을 더욱 황당하게 했다.

 

  의사집단 내부에 공유되고 있었던 정책비판과 풍자를 담아 만들었을 의료정책연구소의 “의사파업에 반대하시는 분들만 풀어보세요” 라는 제목의 카드뉴스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서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고 있었던 시민들조차 이들의 저의를 의심하게 했다. 시민들은 전교 1등과 공공의대 입학생, 수도권의 큰 병원과 지역의 공공병원, 값 비싼 면역항암제가 필요한 남성 폐암 환자와 생리통으로 한약을 처방받으려는 여성을 비교하는 시험지를 받아들고 각자의 불편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질문하게 되었다. 수능성적이 좋은 순서대로 의사를 뽑는 현재의 입시 제도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할까? 환자가 몰리는 대학병원이 없는 지방에서는 위급한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어떤 의사를 찾아가야 할까?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생리통에 대해 내가 찾아간 의사들이 큰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생리통이 생명에 위독한 질환이 아니기 때문일까?

 

자료원: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페이스북 (현재는 삭제된 상태임)  

  “의사는 공공재가 아닙니다”라는 의사들의 구호 역시 보건복지부 관료의 발언에 대한 반발을 넘어, 우리 사회가 답해야 할 질문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방, 교통, 교육 등과 더불어 보건의료는 근대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국 외로 눈을 돌려보면 의료기관 운영에서 의료인력 고용과 훈련까지 모두를 국가가 책임지는 영국의 국가보건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가 유명하고, 가장 시장화된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미국 역시 전체 의료기관 중 국가나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 하는 공공이 차지하는 병상이 20%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한국의 경우 전국민건강보험제도를 통해 재정을 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 병상 중 공공으로 분류되는 병상은 계속해서 줄어들어 현재 9%가 채 되지 않고, 공공 영역에서 일하는 의사 인력의 비율도 10.7%에 불과하다.1) 국민들이 보건의료에 대해 느끼는 심정적인 거리 역시 영국과는 크게 다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의 개막식에는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동병원인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Great Ormond Street Hospital) 에 대한 공연이 포함되었다. 한국의 의료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의료인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국가마다 보건의료의 위치나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NHS에 대한 공연, Source: http://dailym.ai/3kuEUHJ

  이런 점에서 의사 직종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자원 취급하는 발언이 집단적 분노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료의 공공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의료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서 의료는 공공재여야 하고, 국가가 더욱 적극 적으로 공공의료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공공의료강화에 대한 기존의 주장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의료 기관과 직접 고용하는 의료인력을 더 늘려야 하는 공적 소유의 문제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보건의료의 공공성(publicness)은 이와 같은 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다.

 

  공공성은 주로 교육과 사회복지, 보건의료 등 사회적 권리와 관련된 영역에서 공공정책과 관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나 제도의 형태를 논의하는 데에 활용되는 개념이다. 좁은 의미에서 공공성은 국가의 소유를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공공성은 사회적·정치적 권위의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공적 가치(public value)에 부합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의미를 포괄한다.2) 이런 점에서 의료의 공공성은 단지 공공병상이 전체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가 아니라, 보건 의료가 시민들의 요구와 국가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구조와 과정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된다

 

  물론 공적 소유의 문제는 중요하다. 코로나19 유행 대응 과정에서도 의료기관의 공공성은 공적 소유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많은 공공병원이 코로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존의 계획을 포기하고 정부의 방역 정책에 따랐다. 일부 공공병원의 경우 1월 말부터 음압격리병동 운영을 위해 사전대비훈련을 하고, 자동문을 설치해 동선을 분리하고, 선별진료소를 설치해 코로나19 의심환자를 받았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중환자실을 보유한 민간병원들은 코로나19 환자를 보지 않는 “국민안심병원”으로 지정받아 기존의 진료를 지속했다. 물론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다른 심각한 질병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 료하는 병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민간의료기관이 국가적 재난 대응에 할애할 수 있는 자원과 인센티브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가 군대와 자원봉사자 등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해 코로나19 대응에 나서던 시기에도 민간의료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고, 팬데믹 상황에서도 시장의 이해관계에 더 강하게 묶여있는 민간의료기관의 모습은 한국의 보건의료에 대한 공적 통제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의견을 반영하고, 공적 가치를 주장할 방법이 요원한 거대한 시장에 가깝다. 어떤 병원이 어디에 더 필요한지, 우리 지역 병원에서 어떤 진료과목을 늘이고 줄이는 것이 좋을지, 적자가 지속되는 병원을 더 잘 운영하기 위해 어떻게 병원을 변화시키면 좋을지 우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공공병원조차도 개별 진료에 대한 고객의 소리가 아니라 시민들의 집합적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이니, 보건의료에 대한 시민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위한 제도를 운영하는 여러 나라와 달리 한국 에서는 의료기관의 운영과 보건의료정책이 사회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조차 힘들다.

 

  어쩌면 2020년의 의사파업은 한국의 시민들이 어떤 의사와 보건의료체계를 기대하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남겼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지, 아파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의사와 어떤 관계를 맺기를 기대하는지, 주당 88시간이라는 살인적인 근무시간을 버티는 전공의들의 억울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지역 간 의료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 어 느 것 하나 시민들의 동의와 정치적 결정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다. 의사파업이 보여준 또 하나의 교훈은 의사나 정부가 보건의료 정책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가장 절실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는 시민들의 정치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1) 건치신문(2020.09.18.) “병상 수 기준 공공의료 비중 매년 감소”. https://bit.ly/3cbxbvl

2) 김선, 김창엽, 이태진. (2015). 공공성 개념에 기초한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유형화. 비판사회정책, (48), 9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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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7. 2. 22:26

출처: 쇼노트

 

서강대학교 국제인문학부 미국문화학과 오유민

 

 

0. 폴 리버로 가는 길

얼마 전,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리지>를 관람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극들이 조기 폐막, 혹은 개막 취소가 되고 있어 우울하던 중 오랜만에 도착한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낯선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보러 가는 공연이 무대 위 4명의 배우가 모두 여자인 록 뮤지컬이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문진표를 제출하고 마스크를 코에 꾹 눌러쓴 채 들어간 극장에는 쇠창살들로 이루어진 숨막히는 2층 무대가 서늘한 파랑 빛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그 어느 미친 더위의 여름날로 관객들을 데려가기 위해 두 팔 벌려 기다리는 것처럼. 

 

1. 보든 가의 집

1892 8 4,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 리버에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부유한 사업가 앤드류 보든과 아내 애비 보든이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는데,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이 바로 그들의 둘째 딸 리지 보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어 그녀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아직까지도 미제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연극, TV 시리즈,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뮤지컬<리지>는 이 미궁 속 이야기를 리지, 리지의 언니 엠마, 옆집 친구 앨리스, 그리고 보든 가의 하녀 브리짓이 네 명의 인물로 풀어나간다. 

 

2. 마흔 번의 도끼질 

오랜 시간 동안 텍스트 속, 특히 공연 예술에 있어서의 여성 캐릭터들은 소비적이었다. 성녀와 창녀(악녀)의 이분법적 개념 하에 존재했던 그들의 서사는 오직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존재했고, 욕망을 가진 여성들은 악한 존재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흐름은 점점 바뀌고 있고, <리지> 또한 극 중 네 여성들의 욕망과 선택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해방의 상징, 록 음악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욕망과 선택을 소유하기 위해서 존재했어야만 하는 상황들에서 드러났다. 리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며, 언니 엠마와 함께 거의 집 안에 갇혀 살다시피 지내왔다.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키우는 비둘기들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앨리스와의 만남은 금지된다. 이렇게 자신을 옥죄어 오던 모든 것들에 대한 리지의 강렬한 저항은 통쾌했지만 동시에 씁쓸하다. 폭력과 빼앗김 속에서만 욕망과 저항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남성 스태프가 무대 위에 등장해 쇼파, 혹은 침대로 사용되는 가구를 인(in) 시키고 리지의 옷을 헝클어트리는 연출은 주인공의 참담한 현실과 고통을 극대화시켜야만 관객들이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이 사건이 120년 전 미국에서 자극적 가십거리로만 소모된 것처럼, 오늘 날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소비할만한 가치가 있어야지만 들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날 불편하게 했다.

 

3. 섀터케인과 벨벳 그래스

뮤지컬 <리지>의 네 여성들은 그들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연대라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특히 2막의 의상 변화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성을 잃고 아버지와 계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리지는 2막 시작부터 이전까지 입고 있던 19세기의 드레스를 대신 검정색 가죽의 록커 의상과 헤어 브릿지를 한 상태로 등장한다. 취조와 재판이 진행되며 엠마, 브리짓, 그리고 마지막 앨리스까지 스스로를 억압하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도 꽤 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승리와 자유를 얻기 위한 연합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여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바로 록 음악이라는 점은 더더욱 눈여겨볼만하다. 지금까지의 뮤지컬 역사 속 록 음악의 활용은 수없이 시도되어왔지만, 19세기 말의 극도로 가부장적인 사회의 여성들의 서사를그것도 남성 위주의 표출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록 음악으로 노래함은 이례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는 요소는 바로 공연의 넘버(노래)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록 뮤지컬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마리아에게 허락된 음악이 오직 부드러운 기타 멜로디였음을 되짚으며 나는 <리지>의 음악이 가지는 의의를 체감했다. 쇠창살 뒤로 보이는 6인조 밴드와 호흡하며 무대 위 네 배우들의 벨팅이 겹겹이 쌓아 올려지는 모습을 되짚자면 아직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4. 톤튼에서의 13        

앞서 말했듯이, <리지>는 캐릭터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여성들끼리 힘을 합쳐 권력 혹은 악에 저항하는 모습은 연극. 뮤지컬뿐만 아니라 TV와 영화 등 미디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벤져스와 같은 히어로 무비에서 빠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을 맞대고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은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리지>라는 작품에서 연대를 통한 저항이 가장 적합한 주제의식이었을까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극은 리지와 엠마에 비해 브리짓과 앨리스의 선택의 동기를 제대로 제시해 주지 않는다. 브리짓은 오직 돈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앨리스는? 각 인물들은 자신만의 동기와 욕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이루는 과정에서 서로를 돕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라는 결정 속 암묵적인 서포트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캐릭터성을 연대라는 비교적으로 간단한 키워드로 뭉뚱그려놓은 작품은, 약자로서 뭉쳐야지만 억압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훨씬 더 욕심 부려도, 대담해도,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5. 뉴 베드퍼드의 재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라는 공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의는 매우 유효하다. <리지>라는 공연이 올라가기 전, 제작자들은 여자 배우들만 나와서 표가 잘 안 팔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과 엄청난 호평으로 한국 공연계의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 이은 <리지>, 그리고 많은 젠더프리 캐스팅 공연들의 성공은 이를 단숨에 반증한다. 이제 우리는 올 여성 극,’ ‘여자 배우 원탑 극의 마케팅,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여성 배우의 수()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텍스트와 캐릭터의 필요성과 수요를.

관객들은 답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는 공연이 다시 대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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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7. 2. 17:43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김기혜

 

올해로 한국에서 생활한지 8년차가 되었다. 당장 지난 까지도 직장을 다니던 나는 서울에서 구정을 보내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코로나 기간동안 서울에서의 생활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외국인, 특히 중국인으로써 느끼게 되었던 불편한 시선들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식당에서 있었던 .

 

한국에서도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나고 중국인 입국금지의 여론이 심해지고 있을 밖에서 다닐 때는 가능한한 중국어를 쓰지도 중국어로 페이지를 핸드폰에 띄우지도 않았다. 왠지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2월중순쯤 친구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고 같이 저녁을 먹자는 얘기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별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친구가 만나자고 하니 나도 싫은 것을 한국인들은 오죽하겠냐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약속 날 내가 다니던 직장 근처의 식당가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있는데 옆테이블에 직장인 커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친구와는 오랫만에 만난지라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옆테이블의 남자가 계속 힐끔힐끔 우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이 불편하긴 했지만 중국어를 해서 그런가 보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직원을 부르더니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시선에서 나는 확실한 혐오를 느낄 있었다. 사실 사람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자기가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타난 자기방어적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단순이 중국인이라고 해서 그런 눈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고양이.

 

작년 2 충동으로 중국의 캐터리에서 고양이를 한마리 분양받기로 했다. 8월에 태어난 아이는 접종을 맞고 중성화를 해야 데려올 있었기에 당분간은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올해 1 코로나의 발생으로 내가 중국에 수도 아이가 한국에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었다. 상황을 봐서 내가 가서 데려와야 겠다는 계획은 3 중국민항총국의 항공기 제한 운항정책의 발표와 함께 물 건너 갔고 4월이 되어서야 겨우 화물기에 자리를 예약할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운항이 취소되었고 4월말에 다시 화물기를 예약하게 되었지만 운항 며칠 전 수출한 가금류가 한국 검역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당분간 생체는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냥 데려오지 말까하는 생각도 들었었지만 그래도 한번 키우기로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라는 생각에 일단은 조금만 기다려보자, 괜찮아지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5월이 되었고 이번달에는 데려올 수 있으려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급작스럽게 캐터리로부터 항공기 예약이 가능해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몇 개월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양이는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이틀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 

 

요즘에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저녁에는 고양이랑 놀아주고 털을 빗어주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매일매일 밥은 제대로 먹는지 어디 아프진 않는지 서른도 안된 나이에 애를 키우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기 하지만 코로나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고 집과 학교사이를 왕복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에 할 일이 하나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왼쪽은 사진으로 받아봤던 아기 고양이의 모습, 결국 한국에는 오른쪽처럼 근엄하게 자란 고양이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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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7. 2. 17:38

춤추는 대학원생 Marisa Luckie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Marisa Luckie

 

 

나는 춤을 추는 대학원생이다. 프로페셔널 댄서라는 뜻은 절대 아니며 솔직히 3 전까지만 해도 아예 새파란 몸치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춤은 나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자리를 잡게  줄은 상상도 했지만 이런 글을 쓰게  것을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고등학교  <스텝 > 영화들을 눈을 반짝거리면서 봤는데 사람이 몸을 그렇게 움직일  있는 것이 나에겐 무슨 마법 같았다. 케이팝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빠지게 되었을  춤에 더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언젠간 보기만 하지 않고 춤을 직접 배우겠다고 결심했는데대학교  공부로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졸업한 다음에 근처에 댄스학원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 드디어 서울에 와서 어학원을 다니게  계기로 나의 댄스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학원에서 케이팝 댄스 특별 수업을 열었는데 한번 용기를 내서등록하며 시스타의 <SHAKE IT> 나의 운명적인  번째 안무였다. 그때부터 마치 언덕 아래 굴리는 눈덩이처럼 멈출  없었다. 특별 수업은 제대로  동아리로 변하면서 멤버수는  상승했다. 제일 오래된멤버였던 나는 댄스 동아리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댄스 학원을 따로 다니기 시작하며  학원의 공연반 안에들어가서 커버 영상 촬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깜빡할 사이에 댄스는 나의 인생이 되어버리며 춤을 조금이라도 추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때 춤을 추기 시작하지 않았으면 나의 한국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의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를 이루어지는것도 좋았지만 댄스 덕분에 그것보다 훨씬 많은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유학 생활은 아주 재밌으면서 아주 외로울 수도 있다. 따로 취미 생활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은 이상 수업 밖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기회가 많지 않음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데도  여행자처럼 사는 느낌이   있다. 나도 바깥쪽에서 안을 보는 느낌이 들었을 때가 많았다. 춤을 추기 시작한 이후부터 한국에서  삶은 조금씩 존재하기 시작했던  같다. 댄스 동아리에 가면 나의 역할이 있으며 나와 같은취미를 가진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신나게   있었다. 댄스 학원에 들어가자마자 나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에 혼자서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연습실에 가서 친구들과 동선을 맞출   많았다 (물론 혼자서 드라마를  때도 많았지만). 이런 것이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나에게  의미였다.  모든 것들이  소속감의 신호들이었다. 보너스 혜택으로 많은 사람과 소통을 하면서 한국어 말하기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고 솔직히 말하면 근육이 생긴 것도...나쁘지 않았다.

 

다른 유학생들에게 조언  마디를 해줄  있다면 공부만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춤이 아니어도 세상 밖으로 나갈  있게 해주는 활동에 참여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취미를 찾으면 외로운 순간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없다. 다른 문화 속에서 살면서가끔 그런 순간이 어쩔  없이 생긴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밌는 취미 생활에 잠여하면 한국에 있는 동안 훨씬 많고 다양하고 뜻깊은 추억을 만들  있다.

 

요즘은 석사 과정을 하다 보니 예전만큼은 춤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학원은 휴원을 아주 길게 하며 거의   동안 춤을 하나도  췄다. 처음에는 괜찮을  알았는데 휴원을 연장할수록 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대리만족으로 안무 영상을 없이 찾아보았다. 일주일에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흘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다시 깨달았다. 이젠 학원에 가면 회원의 안전을 위해 바로  체크를 하며 수업을 듣는 동안 답답해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함에도, 춤을   있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하다. 

 

석사 과정은 얼마  남으며 졸업해서 취직하게 되면 춤을 얼마나 자주   있을지 아직 모른다. 슬픈 얘기지만 예측할  없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음으로 일단,  순간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공부하는 동안 학원을 꾸준히 다니며 친구들과 재밌게 놀며안무를 열심히 배울 것이다. 나는 지금 춤을 추는 대학원생으로 사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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