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1:18

차별이 곧 악이다

영화 ‘어스’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하태현

 

 

 

어스’가 재미없다고?

 

영화 ‘어스’(이하 ‘어스’)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겐 플롯 구성이 단순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은 애들레이드 가족의 생존을 응원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재미없다는 평이 적잖게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누가 어떻게 살아남고 누가 어떻게 죽느냐는 감독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생존은 비교적 예상할 수 있게 그려졌다. 물론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사이에서 누가 진짜인간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한몫한다. 한편 진짜를 가려내는 추리 과정에 할애된 분량은 적고, 단조롭다. 진짜를 가려내는 것은 감독의 주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스’는 주인공의 생존기를 통해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우리(us)’는 누구이며 우리 밖에는 누가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1968년 미국 산타크루즈 해변에서 어린 애들레이드는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가 두더지 잡기 게임에 한눈이 팔린 사이, 애들레이드는 “영혼의 여행.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달린 거울의 방에 들어간다. 거울에 둘러싸인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만난다. 거울에 비친 상인 줄 알았는데 그가 움직인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실어증에 걸렸다. 그날 이후, 애들레이드는 평생을 도망치듯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애들레이드는 가족(남편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과 떠나는 휴가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산타크루즈로 향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긴장과 두려움이 역력하다. 휴가 첫날 밤, 애들레이드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집 앞에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서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어떤 가족은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애들레이드 가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에 애들레이드는 경찰을 불러보지만, 경찰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가족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이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보며 놀란다. 복제인간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려 하지만, 여러 번의 위기 끝에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는다.

 

나의 모습을 한 미스터리한 외부인

 

1986년 미국에선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s across America)’이라는 캠페인을 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기아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15분 동안 손에 손을 잡는 퍼포먼스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캠페인 규모와 비교하면 자선단체에 직접 전달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남은 것은 대상화된 연민뿐이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 캠페인은 세계 반대편 어딘가에선 굶주림에 고통받는 자가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고자 했다. 그러나 낙관주의적 태도는 현실적인 변화에 도움이 못 됐다. 약자를 향한 캠페인은 지식인과 부유층의 기만에 불과했다.

 

1986년은 역사적으로 기아 퇴치를 위해 미국인이 손을 잡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애들레이드와 레드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미국 내부의 약자들, 우리 안의 우리들을 대변한다. 극 중 애들레이드의 아들 제이슨이 섬뜩한 침입자들을 보고 “우리들이잖아(“it’s us”)”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타인의 얼굴을 띈 외부자가 아니었다. 미스터리한 침입자는 나의 얼굴을 한 외부인이었다.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이질적인 그들은 ‘우리’와 쏙 빼닮았다.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제인간 ‘레드’는 “우리는 미국인이야”라고 답한다. 여기서 복제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유사한 외모를 지닌 도플갱어가 아니라 미국(U.S: United State)의 일반 시민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영화는 ‘미국인으로서의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다. 감독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뻔하게 묻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미국 사회에 속한 ‘우리’는 타인과의 경계선을 어디에 긋고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인 감수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성찰이 되어야만 한다.

 

네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

  

‘어스’의 시작과 끝의 내용은 중심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감독은 미국에 정체 모를 지하 터널들이 무수히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것들 대다수는 누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흔한 음모론의 일종이다. 그곳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던 필 감독은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지하터널에 의미를 부여한다. 지하터널은 생체 실험이 진행되었던 곳이며, 현재는 지하 인간(복제인간)이 사는 곳으로 명명했다. 지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은 오랫동안 지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지하의 복제인간들이 터널에서 나와 손에 손을 맞잡는 캠페인을 다시 재현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부터 첩첩산중에 이르기까지 흡사 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이 퍼포먼스는 1986년의 캠페인과는 결이 다르다. 앞선 캠페인이 굶주린 기아를 향한 연민에 불과했다면, 마지막 장면은 복제인간들의 체제전복적 투쟁이다. 이 영화는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통해 홉스적 사회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미국 사회에 만연하다고 비집는다. 국가와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그들(복제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복제인간들의 분노는 지상의 인간에게 향한다. 그들은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조던 필 감독은 인간의 죽음에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사회의 불안과 분열은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감독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차별의 문제에 관한 경고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

 

지하 터널에서 숨죽인 채 사는 복제인간의 삶은 2019년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유사하다. 복제인간은 생체 실험연구에 의해 육체적으로는 완벽히 복제된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개별적 사유는 불허됐다. 지하의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설정은 특히 상징적이다. 자신의 언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근거와 논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지식인이 지닌 힘의 원천은 언어에 있다.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겐 자신만의 언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소통되지 않는 그들은 통제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한다. 어엿한 사회 구성원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지워질 경우가 많고, 언어화되지 않은 요구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인들을 죄악시한다. 주된 논거는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했고, 미국의 백인들은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같이 정치 권력을 쥔 강자가 내뱉는 언어는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미국의 정서와 담론으로 구체화된다. 복제인간에겐 언어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인종이 다른 것이 흠이 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인의 신분을 지닌 소수인종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와 흑인, 아시아인들은 그의 타깃이 되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발언할 수 있는 마이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들에 눈에 띄는 것 자체가 불쾌함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조용히 살기를 종용받는다. 영화에서 복제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들은 2등 시민이 되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지상의 인간과 묶인(Teathered) 존재다. 그림자와 같이 육체적으로는 지상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환경적 차이로 인해 정서적, 정신적으로는 차이가 벌어진다. 한 소녀는 행복하고 사랑받는 생활을 했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불행하고 처절한 삶을 살았다. 한 소녀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놀았다. 영화에서 양극화된 삶을 사는 두 부류의 기원은 환경적 구조에 있다. 타파하기 위해선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15분 남짓의 게으른 퍼포먼스만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잊히고 그림자로 냉대받고 이들은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가위는 날카로운 양날이 서로 맞물려 물건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도구다. 가위가 인간의 몸을 찌르는 것은 지상 위의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지만, 복제인간에겐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혁명적 몸부림이다.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

 

‘어스’는 ‘우리’와 ‘너희’ 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해야만 하는 사회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가? 성서 말씀인 예레미야 11장 11절은 여러 번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감독은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네 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탁상시계로 11시 11분을 가리킨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노인의 팻말에 적힌 말씀(렘 11:11)은 모두 동일한 숫자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말씀의 본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렘 11:11). 이는 하느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방인에게 침입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국의 파멸과 멸망이 이방인(‘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자)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인터뷰에서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서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악은, 우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를 비판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아야 하는 홉스적 사회는 감독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간 미국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였다. 이제는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고 이로써 자신을 지키려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제노포비아 정치를 소환하고 있다. 정작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외부의 악마는 아무런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은 괴물로 타자화되고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며,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복제인간과 다를 게 없다. 현실 사회에서는 그 복제인간들은 영화에서보다 더 비참한 투명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별이 곧 악이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더는 안전한 땅이 아니다. 애들레이드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도망가기를 선택한다. 애들레이드는 다시는 보조석에 앉지 않는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가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어스’는 지배적 위계질서인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어스’에서 아버지들은 두더지 게임을 하느라 딸을 방치했고, 도플갱어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힘을 과시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애들레이드는 데이브에게 “이제 당신에게 결정권은 없다”고 말하며 가부장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악으로 규정한 그 나라로 떠난다. 진짜 괴물은 멕시코인들이나 이방인이 아닌 차별적 시선을 지닌 미국인들 그 자체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공격하는 사회에선 그 누구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게 한다. 미국 사회는 현재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을 적으로 규정하기 바빠 보인다. 미국 사회는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방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날카로운 언어로 가공되어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에 상처 입히고 있다. 가위로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미국에선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범주 안에 누가 들어가 있는가? 감독은 전작인 ‘겟아웃’과는 달리 ‘우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특정 인종을 앞장세우지 않는다. 흑인 배우가 다수를 이루지만, 그 메시지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명백하지만, 멕시코인에 대한 차별은 비교적 흐릿하다. 차별로 명백해진 것에는 조심스러워지지만, 흐릿한 것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에서 멕시코인 혐오는 대중적이지만,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은밀하고 지속해서 이어진다.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선이 분명해질수록 차별도 분명해진다. 인종에 근거한,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멈춰져야 한다. ‘어스’는 차별적 인식이 어떤 악의 얼굴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차별이 곧 악이다. 조던 필은 ‘어스’를 통해 어쩌면 악은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성찰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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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51

일상공유

 

일반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신동우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Paul Gauguin, 1848~1903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흔히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표현하며, 작품에서의 제목(Title)은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작품 또한 고갱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삶과 그가 느꼈을 혹은 겪었을 다양한 감정들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는데, 특히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는 정서적 상실감과 패배감 그리고 우울함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이고 거기에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살을 기도하기 전,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기고자 했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예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고 교훈을 얻기도 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을 그린 고갱은 단 한 번도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직장인이었지만 당시 프랑스의 금융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고 35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는데 사실 그가 그림 쪽에는 재능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전시회에서 작품을 출품하거나 살롱에서 입선되는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고갱은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하여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늘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다 이상적인 화가 집단을 꿈꾼 고흐와의 만남을 통해 고갱은 고흐의 아를 작업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고 같이 작업하고 다양한 토론을 함께 나누면서도 둘 사이의 의견 차이로 인해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흐가 자신 귀를 자른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귀를 자른 사건보다도 필자가 고갱의 작품을 인용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당시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갱이 작품의 제목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 질문(‘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이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며 사실 이러한 질문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나’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관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도 많은 삶을 살아본 경험이 풍족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내가 선뜻 한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얼마 전, 교정을 산책하면서였다. 다른 대학원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잠깐의 사회생활을 하던 도중에 대학원 진학을 두고 많이 고민 했었던 기억이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때 내렸던 선택으로 인하여 아트&테크놀로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현재 마지막 학기에 이르렀다. 과거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때가 졸업을 앞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은 상황은 조금 다를지라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졸업과 함께 박사과정으로의 진학이나 취업에 관한 고민들 때로는 석사과정을 선택하려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일상에서 늘 시작과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더 많은 고민과 신중한 결정 사이에서 늘 그렇듯이 고민할 것이고 결국은 매 순간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이며,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질 질문들이라 나는 생각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나는 내가 지각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렇게 늦다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 적은 두되 그저 몸 성히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는데,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뒤늦게 한 국제 민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다 늦게 무엇하는 짓인가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 두시까지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하지만 그 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아있는 석사 학위가 아니었다.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찔끔 흘렸던 눈물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이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반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한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세이 “지각인생”, 손석희 아나운서

 

 

마지막으로 공유하고 싶은 내용은 “지각인생”이란 손석희 아나운서의 에세이이다. 약 10년 전에 공유되었던 내용이지만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와 인상 깊은 내용은 비록 그가 남보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나보다는 한참 늦게 시작한 유학과 석사과정에서의 굉장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종이 한 장으로 남을 석사학위보다도 차가운 연구실에서 남몰래 흘렸던 눈물과 절실함에 대한 기억과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 이러한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는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결국은 그가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해 절실함을 갖고 있고 겸허하게 책임을 수용하는 태도 때문인데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수 없는 질문의 끝에서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지금 이때를 다시 돌아봤을 때 그 선택이 후회가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꿈과 열정을 잃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과 가능성을 믿는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잘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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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3:40

무한한 열정을 발산한 두 사람의 이야기

 

일반대학원 심리학과 석사과정 _ 최중휘

 

 

이번 글을 통해, 두 개의 소설책을 추천하고 싶다. ‘달과 6펜스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두 책의 장르는 매우 다르지만 헌신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젊을 때 뭔가에 몰입해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만 가는 것은 나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한 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래서 독자에게 짜릿함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뤘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만만치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뭔가에 미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각 이야기의 세부 감상은 아래와 같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빚어낸 비극 - <용의자 X의 헌신 / 히가시고 게이고 >

뭔가 하나에 몰두해서 산다는 것은 꼭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학이라는 세계에 몰두했고, 그것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건 그의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공 남자는 그에게 수학만 남은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할 뻔 했지만, 그 순간 옆집 사람에게 사랑에 빠져서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 후 그는 그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해서 그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아름답게 사라지고 싶었지만 모든 것엔 변수가 있었다. 수학이라는 완벽한 세상이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예상을 벗어나는지, 이 책에서 보여준다.

일이 삶의 수단이라면 삶의 목적은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사랑에 완벽함이라는 게 있을까? 흔히 아무런 조건 없이 존재만으로도 사랑하는 것을 완전한 사랑이라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까지 허락할 위험이 있다. 영화 '마더'에서 엄마는 아들의 범죄에 대한 목격자를 발견하자 본능적으로 그를 해치고 만다. 그렇게 보면 이상적인 사랑은 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존재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그 수학자는,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이런 헌신적인 희생이 나온다. 비록 그녀의 선택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끝까지 헌신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다. 헌신적인 사랑이라,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이 소설에서 수학 선생은 삶을 살아갈 이유도, 그만둘 이유도 없어서 자살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옆집 여자는 그 이후부터 그가 살아갈 목적이 된 것이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충성의 맹세.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결국 감정적이고 약한 모습으로 무너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욕망보다는, 순간순간 행복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더 현명한 태도인 것 같다. 하루하루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모르는 인생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이런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 -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하루아침에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왔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림만을 향해 달려가는 스트릭랜드(주인공). 그 과정 중에 한 치의 흔들림과 오차도 없이 올곧은 그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강렬한 열정이 오히려 그를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 사람, 죽음 등 세속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로부터 해탈하고 그의 온 정신은 오직 하나, 그림뿐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스트릭랜드와 같은 삶을 꿈꾸곤 한다.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만 열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면 좀 더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뭔가를 직업으로써 고를 때 그 직업 자체에 대한 선호뿐만 아니라 그 직업의 수입, 전망, 사회적 위치, 그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 등을 고려한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따져보면 결국 다 비슷비슷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선 이런 현실적인 조건이 모두 동일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된다.

스트릭랜드는 그런 우리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누구나 스트릭랜드처럼 잃어버린 꿈을 향해 달려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꿈은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접어야만 하는 수많은 젊은이를 비웃듯 스트릭랜드는 그런 현실을 빗겨나간다. 현실은 이미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그의 사후에나 인정받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가 직접 밝힌다. “나는 그려야 해요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102p(책속에서).

우리의 열정에 위와 같은 조력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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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3:39

21세기에서 맞이한다, <꾿빠이, 이상>

 

일반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_ 신도현

 

 

 

나는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수많은 가 있는 거요?

-가무극 <꾿빠이, 이상> -

 

혼란의 기대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극, 서울예술단 <꾿빠이, 이상>(9.21-9.30/CKL스테이지)은 김연수 작가의 소설 <꾿빠이, 이상>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 가무극이다.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에서 이상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진실과 거짓 간의 불분명한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면, 가무극 <꾿빠이, 이상>진실과 거짓 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통하여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연수 작가는 인터뷰에서 둘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은 언어로 표현한다. 나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글을 썼고, 오세혁 작가는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글을 썼다.” 비록 두 작품의 제재는 다르지만, 공통된 메시지는 존재하는 듯하다. 불분명한 경계.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정체성. 이 메시지는 가무극 <꾿빠이, 이상>을 관통한다.

<꾿빠이, 이상>의 메시지가 신선하고 기분 좋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받쳐주는 연출에 근거한다. 오루피나 연출은 인터뷰에서 김승희 시인의 언어를 빌린다.

“(이상은) ‘하이브리드 예술가이자 언제나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지적 노마드였다.

그는 소설을 시처럼, 수필을 시처럼, 시를 의료 진단서처럼 썼고, 시에 그림을, 기하학적 도형을, 숫자판을, 인쇄기호 등을 도입해 타이포그래피 등을 실험했다.”

오 연출은 이상의 하이브리드 예술가적 측면 혹은 이상의 콜라주성에 주목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꾿빠이, 이상>의 주제와 표현방식을 잇는다. 다양한 시선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시인 이상, 가무극이라는 총체적 장르, 그리고 극과 관객을 이어주는 이머시브 씨어터. 이 표현 형식들이 A도 아니고 B도 아닌 <꾿빠이, 이상>, 그리고 그 의미를 창조한다.

서울예술단의 브랜드 가무극은 음악()과 춤()와 극()을 혼합한 총체극이다. 서울예술단의 표현을 빌리자면 또한 가무극은 서구의 극문법 뮤지컬과 한국의 전통적인 극 표현 및 제재와 정서를 결합한 브랜드이다. <꾿빠이, 이상>에서 이상을 하나의 얼굴로 정의할 수 없듯,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역시 하나의 장르적 정의로 설명하기 어렵다. 뮤지컬의 문법을 기대하고 온 이에게는 현대 무용의 장을, 무용공연의 문법을 기대하고 온 이에게는 뮤지컬의 극적 서사를 제시한다. 혼합적 장르 특성 탓에 혼란스러워 하는 후기도 종종 인터넷에 게재된다. 이는 서울예술단이 수 년 간 단체의 극 정체성에 대해 질문 받는 이유이자 단체 스스로도 고심하는 지점이다. 허나 이 혼합성은 <꾿빠이, 이상>과 만나 되레 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그야말로 서울예술단이 할 수 있는 극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이다.

콜라주 같은 장르 가무극이 이머시브 형식를 만난다. 이머시브 (immersive), 말 그대로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극 형식이다. 극장과 로비의 경계가 없는 그 혼돈의 장소에서 극은 바로 시작된다. 관객들은 가면을 쓰고 극의 일부가 된다. 가면을 쓴 채 이상에 대해 그는 누구였을지 웅성이며 소리 내어 이야기한다. 이상의 단일한 얼굴을 쓴다. 그리고 무대 내부로 들어가 이상의 집합적 정체성 혹은 얼굴의 일부가 된다. 관객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이상의 일부이기에 그들은 집합적 정체성을 만들며, 동시에 그 속에 존재하게 된다. 삼면 무대 자유석에 앉아 그들은 어느 방향, 어느 시선을 정하지 않은 채 자유로이 이상의 얼굴 찾는 여정을 목격하고 증명한다. 하나가 아닌 모두 다른 맛의 양갱을 받아먹고 소화하며 이상의 얼굴 찾기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오감도난장장면에서 모두 가면을 벗으며 이상의 정해진 얼굴은 없다, 모든 얼굴이 이상이다라는 극중 이상의 깨달음을 함께 맛본다. 극이 끝나서도, 극장과 로비에서 나누는 극의 후기와 즉각적 반응들은 극 후의 또 다른 극을 이어간다. 각자 다른 감상이 모여 하나의 <꾿빠이, 이상>이 되기에 극은 끝났어도 살아간다.

이상의 얼굴 찾기. 이 극에서 이상은 진정 누구였을까하는 고민은 이제 어느 정도 지난 고민이 되어버렸다. 이상이 19세기에서 20세기를 좇았듯, <꾿빠이, 이상>20세기의 이상에서 21세기의 메시지를 좇는다. 20세기서 21세기까지 달려온 포스트모더니즘. 단일한 구조가 있다는 환상을 깨부수는 후기구조주의. 이상의 유일한 얼굴은 누구도 찾을 수 없다. 혹은 모든 얼굴이 그의 얼굴이다. 모든 얼굴이 콜라주 되어 그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치 여러 시선의 얼굴을 평면으로 그려내는 이상의 시는 알 길 없고 복잡하고 모호하며 그로테스크하다. 그리고 <꾿빠이, 이상> 역시 복잡하고 모호하며 어느 한 관객이 말하듯 과도해보일지 모른다. 여러 장르의 표현법을 섞어놓아, 이것저것 작품을 걸어놓은 전시회처럼 보일지 모른다.

허나 <꾿빠이, 이상>은 단지 이상에게 외치는 복잡하고 모호한 꾿빠이로 끝나지 않는다. 극에 참여한 얼굴들이, 관객들이 있는 한 극은 이어진다. 그들의 이야기로 극은 이어진다. 극중 오감도 난장에서 표현한 이상의 펄떡이는 심장처럼 잦아들다 또 뛰고, 또 뛸 것이다. 웅성거리는 관객의 감상 속에서 <꾿빠이, 이상>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이상이라는 거대한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그렇기에, 그야말로 고은 시인의 말대로, 혹은 <꾿빠이, 이상>의 대사대로 이상은 시인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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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3

 

어떤 위안

 

상수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20179, ‘대단한단편영화제에 다녀왔다. 영화 <연애담>의 감독 이현주의 단편 네 작품을 특별전으로 상영한다는 소식에 얼른 예매를 서둘렀다. 두 여자의 사랑을 담담한 색채로 그려낸 퀴어영화 <연애담>, 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의 대상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개봉 후에도 팬덤(‘팀 연애담’)을 형성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현주 감독 개인이 품었던 지난 짝사랑의 기록이라는 네 편의 영화, <과외>, <우리 결혼해요>, <Distance>, <바캉스>. 영화 안에 그의 삶이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연애담>을 비롯한 네 편의 단편 모두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서사가 실감나게 등장한다. 결혼을 종용하는 엄마 덕에 하는 수 없이 게이 지인과의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레즈비언, 유학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벽장 안의 레즈비언,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홧김에 애인에게 키스해버리는 레즈비언한 사람의 감독이 어떤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보는 것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는데, 한 사람의 또렷한 성장을 체감하는 동시에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서사나 변치 않는 그만의 화법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랬다.

이 글의 제목이 어떤 위안인 까닭은 여기서 내가 영화의 만듦새나 미학에 대한 시시콜콜한 분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전공한 적이 없고 그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러온, 그 날 그 극장에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연애담>을 보고 이현주 감독에게 이성애자들이 로맨스 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편지를 보냈다던 어느 동성애자 관객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날의 극장도 그랬다.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된 <과외><우리 결혼해요> 같은 작품은 화질이나 촬영기법, 등장인물들의 외형이나 미감, 서사의 진행방식 모두 지금과 같지 않아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졌다. 디지털 촬영의 세련됨에 익숙한 나는 민망해져 얼른 다음 작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객석에서 하나 둘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의 반대와 세상의 눈이 무서워 억지로 결혼을 하는 동성애자와 그 연인의 이야기는, 어쩌면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 익숙한 것이 아니었나. 수많은 비평들과 영화이론들이 명징한 언어들로 날을 세워 영화의 의미와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파헤치더라도, 결국 한 축에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부리는 날것의 감정들이 있다는 게 새삼 다가왔다. 그것을 위안, 위로, 공감 따위의 말로 겨우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와 정체성이 맺는 관계에 대해 건조한 언어들로 굳이 풀어내지 않아도, 우리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다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안다.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여 말해보자면 나일 법한’ ‘나와 비슷한모습을 발견할 때 즐거워한다. 불규칙하게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그림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디어에서 재현된 인물들을 구심점 삼아 저마다의 정체성을 구성해낸다.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동력은 아마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은바로 그것이 아닐까? 신부대기실에서 연인의 손을 맞잡는 하은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바람난 엄마의 애인더러 이 아저씨가 엄마 친구야? 영미는 내 친구야!”라고 외치며 키스하는 윤주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그린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은 따가운 비평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소수자를 재현할 때의 정치함은 물론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얼마나 많은 동성 간의 로맨스들이 결국에는 이성애 규범적인 로맨스 공식에 복무하고야 마는가. 그렇지만 많은 이론가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인 허다한 허물들을 명징한 언어로 폭로하기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사랑이라는 그 이름을 가장 살갗에 닿는 언어로 파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 영화 <연애담>이 가지는 미덕도 그것이었다. 분명 보편성이 특별함을 지워내는 순간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 순간에 극장 안 모두를 묶어내는 감정이 분명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이 모두를 휘감는 날것의 감정들을 이론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하게 배치될 수 있을까? 이를 포착해낼 수 있는 더 많은 영화 언어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한 힘겨운 커밍아웃,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결말, 눈물 흘리고 상처받는 퀴어들의 서사에서 벗어나 퀴어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퀴어임이 부각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사에 섞여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억압받는 이야기 또한 그 사회상을 고발한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현주 감독은 누군가에게는 잘 알고도 익숙한 이야기면서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재미있게, 그렇지만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을 절묘하게 탈 줄 아는 이야기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극장에 앉아서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결의 웃음과 울음을 운다는 사실이 가끔은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같은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는 누군가를 확인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그렇게 막연하게 나를 위로한다. 영화관에 온 이유도, 그래서 집중을 하는 정도도, 울고 웃는 순간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던 그 날의 극장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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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1

 

<효리네 민박>과 여성주의 예능의 미래

 

연혜원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

 

여성주의 예능이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예능이라는 극 자체가 여성예능을 어떻게 실패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의 돌무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예능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의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순결하고 신비스러운 성녀와 욕망을 드러내고 도발적인 창녀,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운 악녀의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 타자가 규정한 섹슈얼리티 속에서 하염없이 떠도는 사이 여성 출연자가 가진 고유한 이야기는 희미해지고 여성 출연자들은 도돌이표처럼 남성의 투사체에 갇혀 버리고 말 뿐이다. 한국 예능에서 아름다운 여성 게스트는 늘 남성 출연자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고, 못생긴 여성 코미디언은 언제나 좌절하길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여성 예능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KBS2<언니들의 슬램덩크>부터 EBS<까칠남녀>, On Style<뜨거운 사이다>, <바디 액츄얼리>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성 예능을 표방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까? 여성 예능이라는 포부를 밝힌 프로그램들의 가장 고전적인 오류는 출연자만 여성으로 채운 채 여성주의 예능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언니들의 슬램덩크>가 대표적이다.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여성 출연자로 출연진을 메우고 난 뒤 그들에게 남성적인 시선이 반영된 캐릭터를 덧입히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캐릭터는 아름다운 여성과 못생기고 웃긴 여성으로 양분되어 있다. 양분된 캐릭터들은 때때로 의외성을 보여주며 웃음과 감동을 주지만 일시적인 의외성은 캐릭터를 온전히 전복 시키지는 못한 채 사그라져 버린다.

 

여성을 응시하는 여성주의 예능

 

<까칠남녀><뜨거운 사이다>는 최근 한국사회에 불 지펴진 페미니즘 담론을 토크쇼 포맷으로 옮겨오면서 여성예능에서 여성주의 예능으로 도약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과거 방송에서 감춰져왔던 여성의 진짜 경험와 욕망을 여성의 목소리로 드러내고, 남녀관계와 일상생활에 대한 페미니즘적 시각을 보다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했다. 그럼에도 여성주의 토크쇼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범주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이다. 과도기라는 표현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결여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다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범주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범주 되어 있고, 왜 범주되었는지에 대한 집요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과도기를 거쳐낸 여성주의 예능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 예고편을 JTBC<효리네 민박>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효리네 민박>과 응시하지 않는 연습

 

<효리네 민박>이 가진 미덕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응시하지 않으면서 여성 주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지점에 있다. 이 같은 내러티브 방식은 역으로 여성 주체를 여성에서 벗어난 고유한 주체로 승격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와 아이유는 여자 연예인에게 뒤따라오는 흔한 수사들로 설명 당하지않는다. <효리네 민박>에서 편집과 자막은 이효리가 민낯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지 않으며, 나영석의 수많은 예능들이 여배우들의 배우스러움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이효리와 아이유를 가수스러움에 가두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효리네 민박>은 간편하게 가부장적인 규범에 기대어 극을 해석하지도 않는다. 이상순이 아무리 집안일을 잘 한다고 해서 이상순을 쉽사리 ○○주부라 부르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진보에는 제작진만큼이나 출연자들의 기여가 컸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결혼 생활과 여자 연예인에게 흔히 기대하는 역할극에서 탈피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이효리라는 개인의 수행적 역할은, <효리네 민박>에서 여성이라는 범주와 가부장적 상징틀을 해체하고, 출연자 각각의 고유한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예능이라는 장르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다소 경악스러운)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효리네 민박>은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사실 <효리네 민박> 이전까지 이효리 또한 여성 출연자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왔다. 그동안 이효리가 돋보였던 이유는 섹시한 여가수망가지는 여자라는 두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가 충돌하는 장면을 가장 매력적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는 이러한 전형성에서 탈피해 최초로 이효리라는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극의 성공이었다. <효리네 민박>은 예능 산업에서 남성의 섹슈얼리티 기준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의 가능성을 입증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효리네 민박>의 성공을 단순히 이효리 부부에 대한 대중들의 관음증과 이들 부부가 가진 예능감, 그리고 아이유의 스타성으로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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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47

베트남은 성장 중

 

이현지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

 

하계학술문화탐방을 기회로 베트남을 가게 되었다. 이전부터 왜 베트남이 매력적인 투자지인 것인지 궁금하였기에 이를 해소하는 것이 이번 문화탐방의 목적이었다. 밤늦게 베트남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35일동안 베트남의 다낭, 호인안, 후에를 둘러보았다. 이 글은 35일동안 내가 생각하고 느낀 베트남에 대한 글이다. 주의할 사항은 이 보고서는 객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관광객으로써 좋은 점만 보려하고, 대표적인 것만 보려하였기에 상당히 주관적인 글이 될 것이다. 이를 주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란다.

 

베트남의 경제

KOTRA에서 발간한 “2017 베트남 진출전략에 따르면, 201512월 한국과 베트남간의 FTA 발효 이후 베트남과의 교역량과 투자 규모는 점점 증가하여 지난 2016년에 베트남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수입 점유율은 18.5%로 중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또한 한국의 누적 투자액은 521억 달러로 베트남 최대 투자국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와 같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베트남이 젊은 국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이후 경제 개방을 한 베트남은 경제 개발의 후발자이며, 매년 5~6%씩 경제성장률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구 또한 약 1억 명으로 생산가능인구 비중이 2015년 기준 70.8%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베트남 시장에 진출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현재도 제조업에 대한 투자규모가 가장 크게 나타나지만, 최근 투자규모가 증가하고 있는 산업은 부동산이다. 20157월 베트남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및 임대제한 정책을 완화하여, 베트남에 살고 있지 않아도 외국인이 베트남에 있는 부동산을 취득하여 임대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오피스 시장에 대한 투자가 주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경제성장률 상승과 함께 매년 신생 기업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오피스 수요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오피스와 상업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의 주요 도시 중 다낭후에를 베트남 중부지역의 경제거점이자 관광도시로 지정하였다. ‘다낭은 레저 여행 수요와 한국을 비롯한 중국인 등의 여행 수요가 현재 폭증하고 있는 지역이며, ‘후에는 베트남 역사문화의 모든 것이 있는 도시로 부동산 투자 전망이 밝은 곳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카페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오토바이와 카페이다. 특히 카페의 경우 한국보다 훨씬 그 수가 많고 색다른 모습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카페의 문은 모두 열려 있으며 탁자와 의자가 카페 앞 길가에도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카페 중 한국기업인 공차도 다낭에 있었다. 한류 영향 때문인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카페들이 있었지만, 그 중 공차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호이안의 경우 구시가지로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이 예쁘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과거에는 건물들의 용도가 어떤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다양한 상점과 카페 및 식당으로 변모해있었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예쁜 호이안은 상점들의 간판 또한 개성이 있었다. 카페의 내부는 생각보다 협소하였지만 직접 커피콩을 갈아서 내려주는 커피는 맛있었다.

흔히 동남아의 이미지는 위생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카페든 식당이든 어느 곳을 가도 화장실이 항상  청결했던 것 같다. 화장실이 깨끗하고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위생도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사소한 점이 베트남의 위상을 높여주는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베트남의 카페나 상가들은 모두 유니크하고, 그들의 문화가 적절히 묻어나와 매력적이었다. 특정 관광지나 도시에만 한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프랑스의 식민지화로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현재에도 꾸준히 찾아오는 외국인들의 수가 많아서 인지 몰라도 상점의 인테리어들은 한국보다도 아름다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베트남의 거리

베트남 중부지역의 경제거점이자 관광도시로 지정된다낭에서는 계속 도시화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거나, 아파트 및 호텔을 건설하는 모습은 어디에든 존재했다. 매일매일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낭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듯하였다. 심지어 한국어로 부동산이라고 적혀있는 간판도 보였다. 부동산이 있을만큼 한국인의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들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다낭에 한창 건설 중인 호텔, 아파트 및 상가를 소개하는 정보가 많이 있었다.


 베트남은다낭의 바다 근처에 한국의 강남처럼 계획도시를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파트를 건설 중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아파트를 매매하는 것은 외국인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이곳 아파트 분양가는 20평대가 5천만 원 정도이며, 제일 가격이 비싼 것은 1억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이지만 한 달 월급이 평균 30만 원대인 이곳 사람들은 지불할 수 없는 가격임에 틀림없다.

베트남의 국가 부는 전체 중 상위 10%가 대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수영장이 있는 주택과 외제차를 보고 예상은 하였지만 베트남의 소득 격차 또한 큰 것 같았다.

 

베트남의 사람들

베트남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말이 안통해 손짓발짓으로 말을 건내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주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봐 주었다. 게다가 어딜가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베트남 국민의 평균 연령대는 낮다고 한다. 이들의 노동력이 베트남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 학술문화탐방을 통해 처음 계획하였던 것을 모두 보고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베트남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아직 개발될 가능성이 뛰어나며, 생산가능인구가 많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 투자를 하는데 발목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투자지로는 매력적일 것이다. 한국이 베트남과 꾸준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사과하고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베트남의 대표적이고 좋은 점만 보고, 베트남을 자세하고 깊게 알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지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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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41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으로부터 본 문화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중심으로

 

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이소라

 

관람객과 소통하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은 그림이고, 마크 로스코는 이를 매우 잘 충족시키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여 마크 로스코전을 문화 체험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주로 추상주의 작품들인데 추상화라는 예술 작품을 매개체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그림 속에 담아냈을지, 관람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추상화는 외부세계를 나타내는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예술가의 내면세계만을 표현하기 위해 발전한 양식이기 때문에 화가의 감정을 매우 잘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는 그림에 자기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이를 관람객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표현성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크 로스코전시는 그의 작품 경향에 따라 초기 작품부터 순서대로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의 그림이 시작되는 입구 부분의 벽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마크 로스코의 말이 있었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이는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이다.

 

1. 신화제작자(Mythmaker) -신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정

그의 초기작은 주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 많아서 전시장의 초반에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과거 고대인의 신화를 이용한 것은 감정적인 부분을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 더 잘 표현해서 그림에 담긴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마크 로스코는 예술가는 아이와 같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는 아이들처럼 자유롭고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했다.

또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rnst Heinrich Haeckel)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유년시절은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를 반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술가가 아이와 같다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는 원시인이나 고대인이고 이는 곧 예술가가 이들을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1942년 로스코는 신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거기에 자신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표현했다. 이는 당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인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신화적 그림에는 당시 사람들이 처한 비극적인 사회상을 직시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2. 색채의 시대(Age of Colour)- Multiform

로스코 작품의 세계에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구역에 다다르면 색채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색채이다. 특정한 색을 자주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정서를 나타내며 색채는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내는 색채에 따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의 크기도 점점 커졌는데 커다란 캔버스 안에서 색채들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퍼지다가 다시 뭉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마다 색채가 배치된 방법도 다양하고 색채를 그려낸 기법도 다양해서 그가 전하려는 여러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진1] NO.2 (넘버2) 1947 캔버스에 오일

 

 그의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을 사람들은 멀티폼(Multiform)이라 칭하며 종종 살아있는 유기체로 비유한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큐레이터인 해리 쿠퍼(Harry Cooper)는 그의 에세이에서 멀티폼을 생명 기원 이론인 원시 수프(primordial soup)’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이 만나 소통이라는 스파크가 더해지면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감정이 살아서 전달된다.

 로스코는 그림에 비극을 표현하여 관람객에게 비극적 숙명에 처한 인간을 직시하게 했고 비극, 황홀과 같은 인간 고유의 감정을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비극적인 모습의 그림 이면에는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모습도 존재해서 사람들의 감정을 치유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감정의 소통을 이룬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는 관람객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며 자신이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또한 그는 색채를 통해 자신의 회화 작품에 내면세계의 감정을 표현하여 관람객의 내면과 소통하였다. 그리고 한 곡의 음악처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달하여 관람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에 자신의 그림을 내걸 때는 그림의 배치에서부터 조명의 밝기와 비추는 각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서 그가 그림에 담은 감정이 보는 이에게 잘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술에 있어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진정한 예술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빚어진 예술은 곧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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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39

우리는 무슨 색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 영화 <라라랜드>를 보고 나서

 

경제학과 석박통합과정생 배보근

 

 대학원에 진학한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다채로운 삶보다는 반복적인 시간과 똑같은 공간이라는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것인가?’ 스스로 물음을 던져본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한 나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맞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라는 말로 위안을 하면서 하루를 버틴다. 앞으로 맞닥뜨릴 많은 일과 고민, 그리고 더 많은 비교 대상들이 난무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고 있다.

 그렇게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면서 평소에 즐기던 문화생활과 여행은 추억으로 남기게 될 즈음에 라라랜드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너무 강렬하게 라라랜드라는 영화가 마음에 닿았다. 어디에서나 봤을 것 같은 꿈과 사랑이라는 이중적 플롯을 지닌 영화이지만 화려한 카메라 기술과 감독의 세심한 손길로 세밀하게 만든 수작이다. 특히 재즈의 변주, 색의 변화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방식과 배우들의 연기력은 정말 흠잡을 데 없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감독의 섬세함 하나하나를 이야기하지 않기에는 아까워 (color)’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라라랜드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배색이다. 초반에 화려한 원색의 향연에만 눈을 빼앗기기 쉽지만 단 한 장면도 색을 허투루 사용한 장면이 없다.

 첫 번째로 원색과 검정(무채색)의 대비이다. 이것은 꿈이라는 화려함과 현실이라는 어두움의 대비를 말한다. 극 중에는 이런 두 요소를 대비시키는 장면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오프닝 곡인 ‘another day of sun’의 가사를 잘 들어보면, ‘불빛이 사라진 관객석’, ‘빛들이 수 놓인 스크린'이라는 의미의 가사가 나온다. 원색이 표방하는 화려함은 무대와 음악, 배우라는 예술인들의 꿈, 그런 꿈을 향한 순수함을 나타낸다. 반면에 검은색은 생활고와 먹고사니즘과 같은 꿈과는 거리가 먼 삶과 현실을 나타낸다. 미아의 오디션 장면은 항상 원색 배경에 원색 의상이며, 미아가 봄에 간 파티에서는 원색 옷의 파티 참가자들과 검은색 옷의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애를 하기 전 미아의 의상은 원색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메신저스 일을 하는 세바스찬은 아예 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두 번째로 사랑을 표현한 보라색이다. 영화 포스터를 장식한 것처럼 보라색은 극 중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색이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언덕 위에서 처음 본 하늘의 색, 영화 관람을 약속한 후 세바스찬이 부두에서 본 하늘색,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에서 쓰레기통, 이 장면에서 미아의 가방색, 집에서 둘이 피아노 앞에서 노래할 때 미아의 드레스, 회상 신에서 미아가 성황리에 연극을 마친 뒤 입고 있는 보라색 원톤 드레스, 마지막 신에서 홈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아의 의상이 그렇다. 영화의 색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까 색을 중구난방으로 쓰는 것 같지만, 몇몇 색은 특정한 장면에서만 사용한다. 그 중 첫 번째로 보라색은 사물에는 대체로 진한 보라색, 미아의 의상은 연보라색, 하늘은 파스텔 톤으로 표현한다. 좀 더 나아가면 파스텔은 전반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색으로, 연애를 시작한 미아의 의상은 전반적으로 원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바뀐다. 데이트하는 세바스찬의 의상도 흰 셔츠 일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변한다.

 세 번째로 의상의 변화이다. 세바스찬이 브라운 수트를 몇 번 입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지막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단 한 번 올 브라운 수트를 입는다. 중간에는 톤이 업된 브라운 수트를 미아와 첫 영화 관람 때와 친구의 파티에서 연주할 때 두 번 입고 나온다. 이는 둘 다 사랑스러운 감정, 순수함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브라운은 세바스찬에게 퍼스널 컬러이다. 그러므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영화 중간에는 브라운의 색이 나오지 않는다. 잘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을 극의 첫 장면, 세바스찬의 첫 장면인 고속도로 위에서 브라운 셔츠를 입고 있다. 그 상태로 삼바 타파스 앞에서 자신의 꿈인 재즈 클럽을 한 번 더 되새긴다. 세바스찬이 삼바 타파스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가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연속된 장면에서 의상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브라운이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세 장면은 분명 연속된 장면이다. 하지만 의상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간 장면에서 현실에 쫓기는 세바스찬의 셔츠는 어두운 회색 내지 밝은 검정으로 봐도 좋다. 시간상으로 연속된 장면이라고 구성할 수 있는 장면들을 굳이 나눈 것이다. 자신의 꿈인 재즈클럽 사장을 되뇌는 세바스찬과 피아노 앞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을 순수한 브라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색의 의상을 극 중간에는 전혀 입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셉스(Seb’s)의 사장으로 나타났을 때 입고 나옴으로써 순수한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것을 시사한다.

 네 번째로 조명을 이용한 색의 변화이다. 색에 관한 감독의 섬세함은 조명을 봤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세바스찬이 클럽에서 징글벨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처음 클럽에 입장하면서 사장과 인사하고 피아노에 앉기 전까지 세바스찬의 의상은 검정과 흰색이다. 전형적인 현실의 색. 하지만 피아노에 앉은 세바스찬에게 조명이 약간 밝아지면서 짙은 푸른색, 그리고 연주에 몰두할 때는 파란색으로 더 밝아진다. 생활고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의 심경과 곧 꿈에 대한 열정을 찾는 변화를 같은 의상, 다른 조명으로 표현한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로 5년 뒤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의상 색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은 5년 뒤 장면에서 차에서 내린 미아의 의상을 보는 순간이었다. 절대 무채색만의 의상은 입지 않았던 미아가 완전한 흰색과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액세서리마저도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바뀌어 있다. 이전에는 에메랄드 목걸이, 녹색 귀걸이를 주로 했다. 배우라는 꿈을 이뤘기 때문에 연기는 더 이상 꿈이 아닌 생활, 즉 현실이 되었다. 혹은 5년의 시간 동안 성공을 위해서 현실적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세바스찬은 엄청난 성공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재즈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욕심, 재즈 클럽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를 표현한 브라운의 수트는 순수한 꿈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영화를 보는 내내 세심하게 표현한 색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두 주인공은 꿈과 현실이라는 고민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극 중의 색들을 자연스레 삶에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색을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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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6:20

재원의 성격으로 충족되지 않는 공공성 - 자율과 참여로 공공의 가치 구현해야

 

 

 

김소연_연극평론가

 

 

대학로X포럼은 페이스북 그룹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연극 및 공연예술인들의 토론 플랫폼으로 현재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그 중 하나인 지난 해 국립극단에서 진행된 창작극 개발 프로젝트작가의 방’. 논쟁은 한겨레 기사, “[단독] 국립극단도 검열했다... “‘개구리같은 작품 쓰지 말라강요”(2017316.)에서 촉발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계간 [연극평론] 2017년 봄호에 발표된 고연옥의 기고국립극단 작가의 방’, 왜 극작가를 교육, 교정하려 하는가?”에서 있었다. 두 글의 제목에서도 대비되듯이 지금 논쟁은 국립극단이 운영한 특정 프로그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공공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여러 쟁점들로 전개되고 있다.

 

 

검열과 공공극장

 

검열은 최순실 게이트에서 시작되어 대통령 탄핵심판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비록대통령(박근혜)탄핵소추안에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이 포함되지 않아 탄핵심판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김기춘, 조윤선이 구속되었고 앞으로 진행될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에서도 검열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주요한 사건으로 다뤄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여론은 박근혜 정부의 검열이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특검 수사가 김기춘, 조윤선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검열의 기획, 실행, 지시를 밝혔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실행과정까지 밝힌 것은 아니다. 또한 특검의 수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작가, 단체, 작품에 대한) 직접지원에 한정되어 있을 뿐, 국공립기관단체의 검열 정황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이것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잇단사과에 대한 예술계의 반응이 차가운 이유다. 사과 받고 싶어도 무엇을 사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겨레 보도는 검열이 국립극단, 즉 국공립기관단체에서도 이루어졌다는 증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보도 이후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홈페이지를 통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 있었지만 직원 개인의 견해라는 사과문을 발표한다. 곧이어개인의 견해로 지목된 정명주 국립극단 공연기획팀장은“(국립극단은) 소수의 편향적인 의견으로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다수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해명을 대학로X포럼에 게시한다.

이에 대해 처음 문제제기를 기고한 고연옥 작가‘( 작가의 방책임작가)를 비롯해 구자혜, 김슬기 등 참여 작가들은작가의 방에 대한 논란이 검열이냐 아니냐에 대한 사실 확인으로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다는 글을 각자의 페이스북에 게시한다. ‘개구리같은 작품은 쓰지 말라(이든 그런 논란을 국립극단은 피해야 한다이든)는 검열 혹은 가이드라인만이 아니라 모호한 계획, 급작스러운 프로그램 변경 등등 국립극단 측은 작가들에게는 내내 불편한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국립극단은 모호하게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성과(그런데 그 성과의 기준 역시 모호하다)만을 암암리에 재촉하는 무례하고 무책임한 권력이었던 셈이다.

한편, <개구리> 논란이 검열 사태로 이어지는 동안 이 작품의 제작자인 국립극단은 어떠한 책임 있는 태도를 취했는가[김재엽], 검열 논란에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것은 (공공단체인) 국립극단의 책임방기이다[임인자], 국립극단이 (공공단체로서) 객관적인 공론을 중시한다면 먼저 공론장을 만들어라[이연주] 등등의 의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각주:1]

 

 

공공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질문들

 

다소 길게 국립극단작가의 방논란을 소개하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검열이 박근혜, 김기춘, 조윤선 등의 불법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 공공극장 공공성의 허약한 토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검열이냐 가이드라인이냐, 강요냐 의견제시냐는 문제를 회피하는 의도적 논란이다. 직원 개인의 견해라는 해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연옥 책임 작가를 비롯하여 참여 작가들의 증언 그리고 국립극단 측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국립극단에서 공연하고 싶으면 논란을 일으키는 작품은 쓰지 말라는 메시지로 발화되었고 그렇게 수용되었다. 이는 근거 없는 모호한 기준으로 창작을 제한하는 검열이다.)

작가의 방참여 작가들을 비롯하여 이번 논쟁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국립극단의책임이다. 왜 국립극단은 작가를 존중하지 않는가, 왜 국립극단은 제작한 작품의 책임을 예술가 개인에게 떠넘기는가, 왜 국립극단은 검열이라는 사태 앞에서 명백한 해명과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가, 왜 국립극단은 예술에 당연히따르게 마련인 서로 다른 견해의 충돌을 건강한 공론장으로 수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는 국립극단이 국가의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공공단체로서, 특히 연극계의 공적자원의 상당 부분이 집중되어 있는 공공단체,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공공기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공적 의무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재원으로 운영되는 극장을 공공극장이라고 부른다. 직접 공연을 제작하지 않고 공연단체들에게 발표공간으로 제공되는 대관 중심 공공극장(대표적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아르코예술극장, 대학로예술극장을 들 수 있다)이든 직접 공연을 제작하고 자체 제작공연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제작 중심 공공극장(대표적으로 국립극단이 운영하는 명동예술극장, 국립중앙극장 등을 들 수 있다)이든 대관료와 티켓 수입이 있지만 운영의 대부분은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공공극장은 공공재원이 투입된다는 이유로 정부 행정조직에 준하는 운영규칙을 따른다.

국가가 이렇게 공적 자금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극장과 예술의 공공적 가치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주체들은 극장과 예술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고 (불법 검열을 거부하고), 공적 재원으로 한국 연극의 미래를 발굴하며 (예술가들은 기관의 사업 목표를 수행하는 용역계약자가 아닌 파트너이며),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극장이 우리 사회의 이슈에 대해 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공공극장의 공공성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공공극장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지난 가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광화문광장에는 매주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촛불을 들고 모였다. 바로 그 광장 한복판에서 세워진광장극장블랙텐드천막극장에서는 겨울 내내 공연이 올라갔다. 17일 천막극장을 설치하고 16일 극단 고래 <빨간시>를 시작으로 탄핵심판 다음 날인 311일 야외퍼포먼스 <우리가 헌법이다_헌법퍼포먼스>로 마지막 프로그램을 끝낸 후 318일 천막극장이 해체되는 과정까지.. 이 극장은 기부와 후원 등의 자율적 참여로 운영되었다. 한겨울 새벽, 연극인, 동료예술가, 광화문캠핑촌의 해고노동자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자재를 나르고 뼈대를 세웠다. 해체 역시 연대의 퍼포먼스였다. 모든 공연은 일체의 제작비나 개런티 없이 진행되었고, 공연 팀은 공연만이 아니라 극장 운영의 공동 운영자로 극장 관리와 공연 진행을 함께 했다. 극장운영위원들은 보드이자 스탭으로서 프로그래밍을 비롯하여 극장의 운영방향을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다. 직접 공연을 올리지 않았지만 젊은 연출가들은 극장무대감독으로 공연 팀의 공연 진행을 돕고 극장운영에 참여했다.

광장극장블랙텐트의 이러한 경험은 공공극장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넓혀준다. 광장극장블랙텐트 선언문에서는 이 극장이 박근혜 정부의 공공극장이 배제한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임시 공공극장이며, 시민들과 함께 연극의 미학적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험극장이라고 선언한다. 비록 제한된 조건이었지만, 극장 프로그램은 물론 운영에서도 공공극장이 구현해야 할 공공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고 그 답을 구하고자 실천했으며 동료들과 시민들을 설득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그래서 공공극장이라 불리는 우리의 공공극장들이 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광장극장블랙텐트는 스스로 던지고 실천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야 공공극장의 공공성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을 것이다.

비단 광장극장블랙텐트만이 아니다. 지난 해 5개월간 계속 되었던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를 비롯하여 검열과 정책파행으로 창작환경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던 박근혜 정부 시절 연극계에서는 무엇보다 연대가 활발했다. 연출가동인제로 운영되는 연극실험실혜화동1번지의세월호를 비롯한 일련의 기획들, 젊은 연극인들의 연대로 운영되고 있는화학작용’, 끊임없이 미학적 급진성만을 요구하는 신진 지원 프로그램들과 달리 혹은 그러한 프로그램들마저도 돌아보지 않는 20대 연극인들의 연대로 치러지고 있는이십할페스티벌등 이미 연극계에는 다양한 이슈와 과제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 네트워크가 활발하다. 앞서 언급한 대학로X포럼은 서울연극제대관탈락 사태 때 공공극장의 공공성 훼손의 문제에 대해 연극인 개개인의 연대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어 연극계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검열과 문화정책 파행으로 연극계의 창작환경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국공립극장들에서도 배제가 이루어졌던 정황들은 너무나 많다. 국공립극장들에 공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연극계의 다양한 노력들로 연극의 공공성, 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공적 제도에 기입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다. 이제 공적 재원과 행정조직운영규칙이 아닌 공공적 가치를 묻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공극장을 상상하고 실천할 때다.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야 할 공공극장은 자율적 운영과 참여로 공공성에 대한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는 그런 극장이어야 한다.

  1. 주1) 국립극단‘작가의 방’에 대한 각 필자들의 글은 페이스북 그룹‘대학로X포럼’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groups/1524165964529525/permalink/18961794439948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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