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7. 2. 22:26

출처: 쇼노트

 

서강대학교 국제인문학부 미국문화학과 오유민

 

 

0. 폴 리버로 가는 길

얼마 전,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리지>를 관람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극들이 조기 폐막, 혹은 개막 취소가 되고 있어 우울하던 중 오랜만에 도착한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낯선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보러 가는 공연이 무대 위 4명의 배우가 모두 여자인 록 뮤지컬이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문진표를 제출하고 마스크를 코에 꾹 눌러쓴 채 들어간 극장에는 쇠창살들로 이루어진 숨막히는 2층 무대가 서늘한 파랑 빛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그 어느 미친 더위의 여름날로 관객들을 데려가기 위해 두 팔 벌려 기다리는 것처럼. 

 

1. 보든 가의 집

1892 8 4,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 리버에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부유한 사업가 앤드류 보든과 아내 애비 보든이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는데,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이 바로 그들의 둘째 딸 리지 보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어 그녀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아직까지도 미제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연극, TV 시리즈,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뮤지컬<리지>는 이 미궁 속 이야기를 리지, 리지의 언니 엠마, 옆집 친구 앨리스, 그리고 보든 가의 하녀 브리짓이 네 명의 인물로 풀어나간다. 

 

2. 마흔 번의 도끼질 

오랜 시간 동안 텍스트 속, 특히 공연 예술에 있어서의 여성 캐릭터들은 소비적이었다. 성녀와 창녀(악녀)의 이분법적 개념 하에 존재했던 그들의 서사는 오직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존재했고, 욕망을 가진 여성들은 악한 존재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흐름은 점점 바뀌고 있고, <리지> 또한 극 중 네 여성들의 욕망과 선택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해방의 상징, 록 음악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욕망과 선택을 소유하기 위해서 존재했어야만 하는 상황들에서 드러났다. 리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며, 언니 엠마와 함께 거의 집 안에 갇혀 살다시피 지내왔다.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키우는 비둘기들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앨리스와의 만남은 금지된다. 이렇게 자신을 옥죄어 오던 모든 것들에 대한 리지의 강렬한 저항은 통쾌했지만 동시에 씁쓸하다. 폭력과 빼앗김 속에서만 욕망과 저항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남성 스태프가 무대 위에 등장해 쇼파, 혹은 침대로 사용되는 가구를 인(in) 시키고 리지의 옷을 헝클어트리는 연출은 주인공의 참담한 현실과 고통을 극대화시켜야만 관객들이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이 사건이 120년 전 미국에서 자극적 가십거리로만 소모된 것처럼, 오늘 날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소비할만한 가치가 있어야지만 들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날 불편하게 했다.

 

3. 섀터케인과 벨벳 그래스

뮤지컬 <리지>의 네 여성들은 그들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연대라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특히 2막의 의상 변화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성을 잃고 아버지와 계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리지는 2막 시작부터 이전까지 입고 있던 19세기의 드레스를 대신 검정색 가죽의 록커 의상과 헤어 브릿지를 한 상태로 등장한다. 취조와 재판이 진행되며 엠마, 브리짓, 그리고 마지막 앨리스까지 스스로를 억압하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도 꽤 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승리와 자유를 얻기 위한 연합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여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바로 록 음악이라는 점은 더더욱 눈여겨볼만하다. 지금까지의 뮤지컬 역사 속 록 음악의 활용은 수없이 시도되어왔지만, 19세기 말의 극도로 가부장적인 사회의 여성들의 서사를그것도 남성 위주의 표출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록 음악으로 노래함은 이례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는 요소는 바로 공연의 넘버(노래)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록 뮤지컬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마리아에게 허락된 음악이 오직 부드러운 기타 멜로디였음을 되짚으며 나는 <리지>의 음악이 가지는 의의를 체감했다. 쇠창살 뒤로 보이는 6인조 밴드와 호흡하며 무대 위 네 배우들의 벨팅이 겹겹이 쌓아 올려지는 모습을 되짚자면 아직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4. 톤튼에서의 13        

앞서 말했듯이, <리지>는 캐릭터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여성들끼리 힘을 합쳐 권력 혹은 악에 저항하는 모습은 연극. 뮤지컬뿐만 아니라 TV와 영화 등 미디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벤져스와 같은 히어로 무비에서 빠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을 맞대고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은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리지>라는 작품에서 연대를 통한 저항이 가장 적합한 주제의식이었을까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극은 리지와 엠마에 비해 브리짓과 앨리스의 선택의 동기를 제대로 제시해 주지 않는다. 브리짓은 오직 돈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앨리스는? 각 인물들은 자신만의 동기와 욕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이루는 과정에서 서로를 돕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라는 결정 속 암묵적인 서포트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캐릭터성을 연대라는 비교적으로 간단한 키워드로 뭉뚱그려놓은 작품은, 약자로서 뭉쳐야지만 억압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훨씬 더 욕심 부려도, 대담해도,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5. 뉴 베드퍼드의 재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라는 공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의는 매우 유효하다. <리지>라는 공연이 올라가기 전, 제작자들은 여자 배우들만 나와서 표가 잘 안 팔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과 엄청난 호평으로 한국 공연계의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 이은 <리지>, 그리고 많은 젠더프리 캐스팅 공연들의 성공은 이를 단숨에 반증한다. 이제 우리는 올 여성 극,’ ‘여자 배우 원탑 극의 마케팅,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여성 배우의 수()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텍스트와 캐릭터의 필요성과 수요를.

관객들은 답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는 공연이 다시 대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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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7. 2. 17:43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김기혜

 

올해로 한국에서 생활한지 8년차가 되었다. 당장 지난 까지도 직장을 다니던 나는 서울에서 구정을 보내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코로나 기간동안 서울에서의 생활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외국인, 특히 중국인으로써 느끼게 되었던 불편한 시선들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식당에서 있었던 .

 

한국에서도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나고 중국인 입국금지의 여론이 심해지고 있을 밖에서 다닐 때는 가능한한 중국어를 쓰지도 중국어로 페이지를 핸드폰에 띄우지도 않았다. 왠지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2월중순쯤 친구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고 같이 저녁을 먹자는 얘기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별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친구가 만나자고 하니 나도 싫은 것을 한국인들은 오죽하겠냐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약속 날 내가 다니던 직장 근처의 식당가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있는데 옆테이블에 직장인 커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친구와는 오랫만에 만난지라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옆테이블의 남자가 계속 힐끔힐끔 우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이 불편하긴 했지만 중국어를 해서 그런가 보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직원을 부르더니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시선에서 나는 확실한 혐오를 느낄 있었다. 사실 사람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자기가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타난 자기방어적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단순이 중국인이라고 해서 그런 눈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고양이.

 

작년 2 충동으로 중국의 캐터리에서 고양이를 한마리 분양받기로 했다. 8월에 태어난 아이는 접종을 맞고 중성화를 해야 데려올 있었기에 당분간은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올해 1 코로나의 발생으로 내가 중국에 수도 아이가 한국에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었다. 상황을 봐서 내가 가서 데려와야 겠다는 계획은 3 중국민항총국의 항공기 제한 운항정책의 발표와 함께 물 건너 갔고 4월이 되어서야 겨우 화물기에 자리를 예약할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운항이 취소되었고 4월말에 다시 화물기를 예약하게 되었지만 운항 며칠 전 수출한 가금류가 한국 검역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당분간 생체는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냥 데려오지 말까하는 생각도 들었었지만 그래도 한번 키우기로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라는 생각에 일단은 조금만 기다려보자, 괜찮아지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5월이 되었고 이번달에는 데려올 수 있으려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급작스럽게 캐터리로부터 항공기 예약이 가능해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몇 개월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양이는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이틀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 

 

요즘에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저녁에는 고양이랑 놀아주고 털을 빗어주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매일매일 밥은 제대로 먹는지 어디 아프진 않는지 서른도 안된 나이에 애를 키우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기 하지만 코로나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고 집과 학교사이를 왕복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에 할 일이 하나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왼쪽은 사진으로 받아봤던 아기 고양이의 모습, 결국 한국에는 오른쪽처럼 근엄하게 자란 고양이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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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7. 2. 17:38

춤추는 대학원생 Marisa Luckie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Marisa Luckie

 

 

나는 춤을 추는 대학원생이다. 프로페셔널 댄서라는 뜻은 절대 아니며 솔직히 3 전까지만 해도 아예 새파란 몸치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춤은 나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자리를 잡게  줄은 상상도 했지만 이런 글을 쓰게  것을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고등학교  <스텝 > 영화들을 눈을 반짝거리면서 봤는데 사람이 몸을 그렇게 움직일  있는 것이 나에겐 무슨 마법 같았다. 케이팝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빠지게 되었을  춤에 더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언젠간 보기만 하지 않고 춤을 직접 배우겠다고 결심했는데대학교  공부로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졸업한 다음에 근처에 댄스학원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 드디어 서울에 와서 어학원을 다니게  계기로 나의 댄스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학원에서 케이팝 댄스 특별 수업을 열었는데 한번 용기를 내서등록하며 시스타의 <SHAKE IT> 나의 운명적인  번째 안무였다. 그때부터 마치 언덕 아래 굴리는 눈덩이처럼 멈출  없었다. 특별 수업은 제대로  동아리로 변하면서 멤버수는  상승했다. 제일 오래된멤버였던 나는 댄스 동아리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댄스 학원을 따로 다니기 시작하며  학원의 공연반 안에들어가서 커버 영상 촬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깜빡할 사이에 댄스는 나의 인생이 되어버리며 춤을 조금이라도 추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때 춤을 추기 시작하지 않았으면 나의 한국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의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를 이루어지는것도 좋았지만 댄스 덕분에 그것보다 훨씬 많은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유학 생활은 아주 재밌으면서 아주 외로울 수도 있다. 따로 취미 생활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은 이상 수업 밖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기회가 많지 않음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데도  여행자처럼 사는 느낌이   있다. 나도 바깥쪽에서 안을 보는 느낌이 들었을 때가 많았다. 춤을 추기 시작한 이후부터 한국에서  삶은 조금씩 존재하기 시작했던  같다. 댄스 동아리에 가면 나의 역할이 있으며 나와 같은취미를 가진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신나게   있었다. 댄스 학원에 들어가자마자 나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에 혼자서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연습실에 가서 친구들과 동선을 맞출   많았다 (물론 혼자서 드라마를  때도 많았지만). 이런 것이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나에게  의미였다.  모든 것들이  소속감의 신호들이었다. 보너스 혜택으로 많은 사람과 소통을 하면서 한국어 말하기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고 솔직히 말하면 근육이 생긴 것도...나쁘지 않았다.

 

다른 유학생들에게 조언  마디를 해줄  있다면 공부만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춤이 아니어도 세상 밖으로 나갈  있게 해주는 활동에 참여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취미를 찾으면 외로운 순간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없다. 다른 문화 속에서 살면서가끔 그런 순간이 어쩔  없이 생긴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밌는 취미 생활에 잠여하면 한국에 있는 동안 훨씬 많고 다양하고 뜻깊은 추억을 만들  있다.

 

요즘은 석사 과정을 하다 보니 예전만큼은 춤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학원은 휴원을 아주 길게 하며 거의   동안 춤을 하나도  췄다. 처음에는 괜찮을  알았는데 휴원을 연장할수록 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대리만족으로 안무 영상을 없이 찾아보았다. 일주일에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흘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다시 깨달았다. 이젠 학원에 가면 회원의 안전을 위해 바로  체크를 하며 수업을 듣는 동안 답답해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함에도, 춤을   있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하다. 

 

석사 과정은 얼마  남으며 졸업해서 취직하게 되면 춤을 얼마나 자주   있을지 아직 모른다. 슬픈 얘기지만 예측할  없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음으로 일단,  순간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공부하는 동안 학원을 꾸준히 다니며 친구들과 재밌게 놀며안무를 열심히 배울 것이다. 나는 지금 춤을 추는 대학원생으로 사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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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6. 1. 22:31

(사진=드라마'킹덤'포스터/넷플리스)

(사진=예술의전당 삭온스크린/예술의전당)

 

(사진=검진을 받고 있는 콜센터 빌딩 거주자들/한겨레)

김아영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코로나 19라는 비상 재난사태는 예술과 일상을 모두 바꿔나가고 있다.

 

1.

우연한 사고이자 불운의 시기다. 그 누구도 앞날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수준의 세계적인 재난 상황은 현실 세계를 극도의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영화관은 문을 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텅 비었고, 상반기 공연을 준비 중이었던 연극, 뮤지컬도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됐다. 상당수의 미술관이 휴관을 선언한 가운데 본의 아니게 휴업 상태를 맞이하게 된 수십만 프리랜서는 생계 걱정에 놓였다. 음식점, 숙박업을 비롯한 주요 서비스업이 상인들과 공장 가동이 멈춘 기업주들은 외환위기보다 더한 불황 같다고 입을 모은다. 예기치 못했던 돌발변수로 인해 노력한 만큼의 성취에 이르지 못하고, 일상적인 삶은 파괴됐다. 

2.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온라인 문화 소비가 생활표준으로 자리를 잡는 모습이다. 모든 것을 집에서 해결하는 ‘집콕족’이 되어 넷플릭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무한 반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프라인 공연에 집중했던 국공립 공연장과 단체도 온라인 공연에 부쩍 힘을 쓰고 있다. 예술의전당의 공연예술 영상화 사업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 세종문화회관의 ‘내 손안의 극장’,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내 손안의 콘서트’, 국립극장의 창극 모두가 유튜브 채널에서 선보인다.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콘서트홀은 기간을 한정해 웹사이트를 무료로 열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빈 국립오페라단도 영상을 무료로 제공한다. 돋보일 것 없었던 ‘방구석’이라는 수식어는 유행이 됐다.

 

 

3.

넷플릭스 속 <킹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 위화감 없이 겹쳐진다.1) 의문의 역병이 퍼져 나라 전체를 위협하는 조선시대 풍경에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신음하는 오늘이 담겨 있다. 특히 주목하는 장면은 좀비와 맞닥뜨려 공포에 휩싸인 관리들이 "상것들이 양반을 공격한다"라고 외치는 부분이다. 역병은 병들고 가난한 백성을 가장 먼저 덮친다. 백성들은 굶주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감염된 인육을 먹고 좀비가 되어 양반들을 공격한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도망갈 방도만 찾는 양반과 고위 관료들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먹을 것을 가득히 챙겨 향연을 즐긴다. “사농공상의 계급이 확실한 시기의 사회 시대상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은희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4.

재난은 평등한가? 영화 속 좀비가 오늘날의 취약계층과 오버랩될 때 질문은 고개를 든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벡(Beck, 1986/1997)2)은 원칙적으로 위험의 분배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주장했지만, 가장 큰 위험은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배재된 노동계급과 하층계급에 전가된다.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보험사 콜센터의 집단감염 사례는 안전한 재택근무가 일부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이야기일 뿐임을 상기시켜 준다. 학교가 휴교해도 매일 출근해야 하는 중소 하청기업의 파견직과 비정규직은 위험의 외주화를 떠안는다. 일주일에 마스크 한 장으로 버티는 요양보호사는 마스크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 설 필요 없는 공직자나 정치인보다 위험에 취약하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에게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감염 예방법이 더 깊은 고립으로 시련을 가중시키고 나아가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재난은 똑같이 발생하지만, 경험하는 위기의 경중은 계층에 따라 다르다. “좀비가 되고서야 비로소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이 평등해진다는 신분제의 역설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는 <킹덤>이 정치물로서 지니는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든다. <킹덤>이 보여준 좀비 아포칼립스는 계급 특수적인 오늘날의 위험 사회를 보여주는 묵시록적 경고다.

 

5.

소비의 비대면화는 기대이자 공포다. 넷은 여전히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만들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그 위험성에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재난 상황에서 넷 소사이어티가 우리 삶의 가장 유력한 준거집단이 되고, 일상이 영위되는 주요한 생활근거일 수밖에 없다면, 그런 기대와 공포는 그 자체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전망과 직결된다. 우리는 지금 온라인을 통해 콘텐츠를 즐기고, 각종 공연 실황을 접하며,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지친 맘을 위로받는다. 사방에서 홈 엔터테인먼트의 급성장세를 예측하면서 위기로 인해 달라질 일상과 그 속에서 발견할 기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인터넷 소비만을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 사이버-감상은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리얼-감상이 뒷받침되었을 때 힘을 발휘한다. 물론 리얼-감상이 사이버-감상으로 옮겨졌다고 해서 아우라(Aura)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아우라는 창작자와 관객이 리얼로 만나, 삶의 현장의 맥락에 재배치됐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연극이나 뮤지컬, 대중가수의 콘서트를 실황 중계로 보는 것과 현장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행위예술은 어떤가. 창작자가 겸손한 자세로 나서면 관객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관객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작품도 많다. 온라인 기반의 예술 활동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 할지라도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예산과, 시스템, 전문인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는 더는 예전과 같은 예술활동을 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땀 흘려 준비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뒤따르리라는 인과율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문화예술인들의 생존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사이버-감상이라는 지각변동을 가로막거나 거스를 수는 없을지라도 변화의 방향만큼은 분명하게 분별해내야 한다. 

 

6.

재난은 반복되고 불평등은 꼬리를 문다. 향후 팬데믹 재난 상황이 구조화된 계층불평등과 어떻게 교차하며 변형되고 심화되는지를 분석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때의 극장과 공연장, 전시장 등의 운영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모두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객석 간격과 동선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설정해야 하는가. 모든 외부활동이 차단되면 관객과 대면하며 활동했던 예술가들은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 당장 무료로 풀리기 시작한 온라인 공연 중계는 언제까지 무료로 제공할 수 있는가. 여기에 돈을 매긴다면 합리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7.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면 이 모든 악몽이 끝날 것입니다.” <킹덤> 속 서비가 말한 희망의 대사는 결국 끝까지 서로의 곁에 남아 있던 이들의 몫이었다. 각자도생의 끝에서 타인과 접촉을 경계해야 하는 현 사태는 역으로 우리 자신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른 사람과 연결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다른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다리를 끊어버리고 탈출한 이들은 몰살당한다. 반면 함께 힘 합쳐 출구를 모색하는 이들은 그만큼 오래 버틴다. 재난의 희망은 타인에게 굳게 문을 닫아버리는 단절적 소외가 아닌, 문을 열어 서로 구하려 드는 숭고한 헌신에서 다가온다.”3) 우연한 사고이자 불운의 시기를 이겨내는 방법은 여기에 있다.

 


 1) <킹덤>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넷플릭스의 첫 한국 오리지널 제작 드라마이자 사극 좀비물로 주목 받은 영화다. 지난 3월13일 새로운 시즌이 공개되자마자 한국뿐 아니라 태국, 싱가포르 등에서 ‘넷플릭스 오늘의 톱10 콘텐츠’ 1위를 기록했다.

 2) Beck, U. (1986). Risikogesellschaft :auf dem Weg in eine andere Moderne. 홍성태(역) (1997). ≪위험사회ᐨ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 새물결. 

 3) 김선영(2020. 3. 18). [톺아보기]역병이 드러낸 시대의 모순. <아시아경제>. URL: https://www.asiae.co.kr/article/2020031820114408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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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20. 6. 1. 22:16

일상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노력, 대학원 성평등위원회

 

                                                                                                           

윤채영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안녕하세요, 서강대학교 대학원 원우 여러분. 저희는 대학원 성평등위원회입니다. 

 

대학원은 짧고, 또 바쁜 만큼 우리에게 성평등위원회가 있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지곤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19 일깨워 준 것은 소중한 우리의 일상이 백신 개발과 전염병 사태에 대한 예방 및 방역 조치 등 일상적인 노력을 통해 지켜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원 성평등위원회 대학원 원우들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원우들 스스로가 만든 조직입니다. 여러분을 직접 만나뵙기 힘든 지금, 서강대학원신문의 기고글을 통해 성평등한 공동체를 위한 성평등위원회의 활동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대학원 성평등위원회는 대학원 내에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워진 총학회 회칙상의 기구로, 회원들의 성적 자율권 확보와 사건 발생시 적극적인 해결과 피해자 보호,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성폭력과 성차별 예방을 목표로 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성평등 실현과 성적소수자 보호를 위한 대학원 내의 활동을 할 권한과 성평등을 해치거나 성적소수자를 차별하는 행위를 한 회원과 준회원을 조정할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요컨대, 대학원 성평등위원회는 일상적인 성평등 활동과 사건 발생시 이를 해결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이를 위해 대학원 성평등위원회가 하는 활동을 총 세 가지 파트로 나눠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대학원 성평등위원회는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일상적 노력의 일환으로 성평등 교육을 엽니다. 성차별 및 성폭력 사건은 일단 발생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되므로 최대한 예방을 위한 노력을 통해 이를 방지해야 합니다. 2008년 제정된 <서강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성평등과 성적자율권 보장을 위한 시행세칙>에 따르면, “각 과의 대표(학생회장 및 조교장)와 본회의 성평등위원회 위원은 한 학기에 1회 이상 성평등과 관련된 주제의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본회의 회원은 이에 참여한다라고 그 의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2월 말 대학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성평등 교육이 이뤄졌을텐데, 성평등위원회는 거기서 대학원생들의 성평등과 관련한 권리와 의무를 소개해드립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여기 지면을 빌려 여러분에게 이를 안내해드리고자 합니다.

성평등 교육에는 어떠한 내용이 들어갈까요? 일단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젠더권력 상 약자인 여성과 성적소수자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성차별과 성폭력에 해당하는 말과 행동의 예는 어떤 것들이 있고, 왜 그것이 위협이 되는지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과 폭력으로부터 피해자와 공동체를 지킬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 그를 위해 우리가 어떤 원칙을 세우고 행동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무는 총학생회, 성평등위원회, 각 과의 대표 뿐만 아니라 모든 원우(회원)에게 있으므로 성평등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고 또한 일상 속에서도 이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해보는 것을 제안드립니다. 

둘째, 학생회 차원에 성폭력 피해 신고가 접수될 시, 이에 대응할 권한과 의무가 있습니다. 대응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요, 우선 성평등위원회는 피해자가 갖는 권리와 취할 수 있는 대응의 방법을 안내합니다. 사건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두고 함께 판단하여 (1) 학생회 차원의 대책위를 열어 조정절차를 시도하거나 (2) 성평등센터에 사건을 이관하여 상담 및 조정 절차에 도움을 받고, 나아가 (3) 학교 본부 차원의 대책위나 징계위 절차를 요구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학생회 차원의 조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를 입은 원우분들은 학생회 차원에 신고하는 대신 성평등센터에 사건을 접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강대학교 성평등센터는 피해상담부터 진술서 작성, 조정과 이후 대책위 절차까지 도움을 드리고 있기 때문에, 피해를 겪으실 경우 두려움 없이 도움을 청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학교 본부 차원의 대책위가 열리는 경우, 성평등위원들은 학생위원으로서 이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서강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성평등과 성적자율권 보장을 위한 시행세칙(이하 시행세칙)>의 일독을 권하고자 합니다. 대학원 총학생회 회칙상 성평등위원회에 관련한 조항과 그에 딸린 <시행세칙>은 우리 구성원들의 동의에 따라 의결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폭력 및 성차별 사건에 대처하고 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데에는 원우들 차원의 민주적 합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짚으며, <시행세칙> 중 일부 조항을 안내해드립니다. 

<시행세칙> 2 [성평등 및 성폭력의 개념]은 성폭력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인 언사와 행동, 신체적 접촉, 추행, 강간 등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뜻하는 협의의 성적인 폭력(Sexual Violence)뿐 아니라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불균형한 젠더 권력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성별화된 폭력(Gender Violence)를 포괄합니다. 이에는 타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부터 성차별을 조장하는 행위, 2차 가해(피해자 및 사건관련인에게 불리하거나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가 포함됩니다. <시행세칙> 3 [의무]는 사건 발생시와 평상시에 가해자 및 구성원이 지켜야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성원 모두는 반성평등적이거나 성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으며, 사건 발생시 공동체에는 해결 및 재발 방지를 위해 의무가 있습니다. 한편, <시행세칙> 2 [권리 및 원칙]은 사건 발생시 피해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사건 발생시 대책위가 지켜야 할 비공개 원칙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시 피해자는 사건을 신고한 이후 사건을 비공개로 유지하거나, 반복적인 진술을 요구받지 않거나, 가해자로부터의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 별도의 행정상의 조치 등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책위는 이를 위해 최대한 성실히 활동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지면을 빌어 성평등위원회의 활동을 소개해 보았습니다. 성평등한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위해 저희 성평등위원회 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참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새로운 거리두기의 비일상을 보내고 있는 지금이 여러분에게 일상적 성평등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성평등 위원회에 묻는다: 질의응답

 

1. 현재 성평등위원회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짤막한 소개와 성평등위원장은 현재 어떤 분이 맡고 있으며, 선출과정에 대해서 말씀 나눠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성평등 위원들을 모집하는 과정에 대한 소개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성평등위원회는 남궁미 위원장(심리학과 박사과정), 윤채영 위원(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정의진 위원(여성학과 석사과정)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번 성평위에서는 내부 호선을 통해 위원장을 선출했습니다. 성평등위원회의 모집  구성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행세칙상 성평등위원회는/박사과정을 구분하지 않고 성평등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할 의지가 있는 정회원  2으로 구성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평등위원에게는성인지감수성이 요구되므로 모집 공고를 통해 지원서를 모집한 , 성인지감수성  관련 활동 경력을 심사하여 면접을 거친  선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현임 성평등위원회 내에서 남궁미 위원(전임 성평등위원) 위원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2. 원고를 써주신 원생께서는 어떤 이유로 성평등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소견을 나누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성평등위원회에서의 포부나 이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사견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원 총학생회 정책국장이자 성평등위원을 함께 맡고 있는 윤채영입니다. 정책국 업무에 지원을 했던 이유는 개인적인 소신과함께 그것을  수행할  있는 관련 경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학원 총학생회가 인권  성평등을 주요 정책사항으로 두었으며 회세칙 개정 등을 통해 조직과 업무의 기틀을 다시 다지고자 하였기에 정책국장직에 지원하였고, 현재 성평등위원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폭력과 착취로부터안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공동체가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한 의무에는 자칫 침해당하기 쉬운 인권들, 가령여성과 성적소수자의 인권과 함께 상하의 권력관계가 확실한 회사나 대학원 같은 공간에서의  인권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노력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원생들에게  권리가 보장되게   있도록 행동할  있는 권한이 학생회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때문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학부 대학이라는 공간 내에서 여학생협의회장  총교양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성폭력 사건 대책위원회와 성평등교육과 인권교육을 포함한 OR 교양교육 업무를 일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일의 어려움이나 필요성을  알고 있고  사업을 진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성지순례' 영상이 되고 있는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빌게이츠 TED 강연 영상을 아시나요 에볼라 바이러스(2014) 이후인류에 다가올  있는 판데믹에 미리 대처하자는 내용의 강연으로, 우리가 핵미사일 시나리오에는 막대한 자원을 들여 대처하고 있는 반면 그보다 다가올가능성이 높은 전염병 사태에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며 관심과 자원의 투입을 촉구하였습니다.  강연이 2015 3월에 업로드 되었으니, 5이내에  예측이 실현된 것이죠. 성폭력 사건의 경우 어떨까요? 좁은 대학원 사회의 특성상 저희 성평등위원회는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언급조차 하지않지만, 학교 본부 차원의 대책위원회를 포함하면  학기에   이상은 사건 처리를 하게 됩니다. (저희에게 인지되지 않는 사건을 포함하면  많은사건이 발생하고 있을 겁니다.) 바쁜 와중에 성평등교육을 위한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당장은 귀찮은 일일  있지만, 이것은 거의 반드시 발생하는 성폭력사건의 발생을 줄여줄  있고 나아가 사건 발생시 공동체가 바람직한 해결방법이 무엇인지 학습할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원우분들께서  일상을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으로 성평등한 공동체를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3. 성평등위원회에서 사건을 접수했을  해당 사건에 대한 법률적 자문을 구하거나, 도움을 받을  있는 전문가가 준비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문가가계시다면, 어떤 분이신지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성평등위원회에는 법률전문가가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분의 피해 호소  사건처리 과정에 법률 자문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건을처리하는 과정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  무고로 고소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고 피해가 인정되는 경우 가해자에게 취할  있는 조치 등을 판단하는데에 법률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인데요.  경우 최초 신고시에는 성평등위원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답변을 드리되, 필요한 경우 이냐시오 성평등센터상담교수님들께 자문을 구할  있고 나아가 성평등센터의 법률자문가분들께 의견을 구할  있습니다. 현재 성평등위원들 모두 성인지감수성을 갖고활동하고 있고, 최소 1 이상은 대책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 접수  처리를 결심하지 못하시더라도 저희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청하시면 저희가 최대한으로 도움 드릴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건 접수  문의 : 대학원 성평등위원회 sggradsa.gender@gmail.com)

 

4. 성평등위원회에서는 평균  해동안  건의 신고를 접수받고 대처하는지와 신고 접수 과정이나 대처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어려움은 무엇이있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사건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는 2가지의 경로입니다. 첫째, 직접적으로 대학원 총학생회나 성평등위원회 측으로 사건이 신고되는 경우이고둘째, 성평등센터로 신고된 사건이 학교 본부 차원의 대책위원회가 열려 저희가 학생위원으로 참석하는 경우입니다. 학생회 차원의 대처에 대한 신뢰가 낮기때문인지 학생회 측으로 직접 사건을 신고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강대학교에는 성평등센터가 있고, 성평등센터에서는 상담  진술 절차를거치면서 피해자로 하여금 사건 처리 방식을 숙고한  결정할  있도록 돕기 때문에 성평등센터를 통한 신고 역시 권고드립니다. 현재 학칙상 학교 본부차원의 공식 차원의 절차(ex. 가해 학우에 대한 징계를 위한 징계위원회) 밟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평등센터를 거치도록 하고 있고,  이후 피해자가중재를 바라지 않거나 피신고인의 거부로 중재가 결렬되는 경우에 피해자의 동의를 거친  대책위원회  징계위원회가 열립니다. 대학원 원우분들의 경우성평등센터에 상담을 받으면서 사건을 접수하는 경우가 많고,   대책위원회까지 열리는 경우 거기에 저희 성평등위원들이 학생위원으로 참여하게되면서 사건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대학원 총학생회 차원의 사건접수보다)  많습니다

             대처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아무래도 심적 어려움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저희의 판단이 피해자나 피신고인(가해지목인)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고려 때문에 겪는 부담감이나 두려움과, 피해자 진술서를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포함합니다.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은 대개피신고인(가해지목인)  장소에 있는 것이 두렵고 괴롭기 때문에 공식적 절차를 통한 조치를 요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건의 정도가 중하여  기억이피해자에게 지속적인 괴로움을 주기 때문이며, 이런 사건들은 저희가 진술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성폭력 사건의경우, 피해자를 가해자의 추가적인 가해로부터 보호하고 심리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학업을 마칠  있도록 돕기 위해 공간분리 조치를 결정해야 하는경우가 많습니다. 대책위나 징계위의 판단이 가해자의 미래 계획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건을 판단하고 질의를 하는 과정에서마음을 무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무거운 마음들이 나름의 균형을 갖고 사건을 대할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고, 학생위원의 입장에서 같은원우인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필요한 조치들을 요구하는  의견을 개진하려고 노력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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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 7. 5. 20:58

자기 민속지학적 접근을 통해 본 내가 <프로듀스 101> 보는 이유

 

사회과학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 장인희

 

주형일(2007)은 스스로가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이유를 밝히며, 그 과정에서 스파이더맨을 좋아하게 된 배경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 문화적 요인들을 다룬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기민속지학은 개인의 경험이 사회의 일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드러내며 사회적 측면을 발견, 해석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민속지학은 주관적임과 동시에 사회적 맥락에 위치하게 된다. 연구자는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와 소통하게 되며, 이 경험을 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또한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을 풀어놓는다는 저에서 자기민속지학의 방법은 연구자가 연구 대상인 식민지인들과 충분히 거리를 둔 채로 진행되었던 기존의 민속지학과 차별화되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민속지학은 “식민지배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맞서서 자신들을 재현하는 수단”이다(주형일, 2007). 자기민속지학에 관한 이러한 논의를 확장하면, 자기민속지학을 특정 문화 외부에서 충분히 거리를 둔 채 서술되는 비평에 대항하여 해당 문화의 경험을 재현하는 수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내가 <프로듀스 101>의 열렬한 시청자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서술해보고자 한다.

<프로듀스 101>은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프로듀스 101>에 대한 내 경험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내가 아이돌 문화의 팬이 된 배경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2007년, 중학교 2학년 때 중국으로 가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때는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DVD로 제작해서 팔곤 하는데, 집에 컴퓨터가 없었던 나로서는 이 DVD가 유일하게 한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였다. 당시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이 중국에서 워낙 인기가 많아 친구들과 한국 예능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좋기도 했고, 또 이것을 통해서 나 스스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곤 했다. 특히 교회에서 만나는 한국 친구들이나 중학교에 몇 없는 한국 학생들 모두 티비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시청에 임했다. 이때는 원더걸스가 한참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이고, 예능이나 시트콤 등에서도 원더걸스가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아이돌은 자연스레 원더걸스가 되었지만, 소녀시대가 Kissing You 활동을 할 무렵부터 자신을 소녀시대의 팬으로 정체화하였다.

당시 소녀시대와 소녀시대의 팬들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소녀시대는 항상 비난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들에 맞서 열심히 변호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우리 소녀시대 누나들을 몰라주는 것이 속상하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온,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팬들과 싸우는 것이 그렇게 싫은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소녀시대 팬으로서 누군가를 옹호하고, 반대파와 싸우는 것은 중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딱히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던 내게 강한 소속감을 선사해주었으며, 같이 열심히 싸우던 친구들과 모종의 유대감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녀시대 팬으로 열심히 활동하던 나는 2012년 대학을 가게 되는데, 마침 소녀시대도 활동이 뜸해지던 시기라 아이돌에 대한 관심은 전에 비해 다소 옅어졌다. 그래도 에이핑크나 걸스데이 등 그 시기 나름 이름을 알리게 된 아이돌에는 지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아이돌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2015년 초 군 생활 후반부였다. 그 당시 후임 중에 남자 아이돌 군무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를 통해 방탄소년단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엔 하는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여유가 있었고, 또 부대 안에서 할 것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와 엑소, 방탄소년단 등 여러 아이돌의 군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처음으로 남자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때 경험이 없었으면, <프로듀스 101> 시즌2는 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역하고 나서도 군대에 있던 친구들과는 거의 매일 연락을 했으며, 주말에도 주로 그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아이돌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중심 관심사였다. 전역한 후 2주 정도 지난 무렵 그러다가 <프로듀스 101> 시즌 1이 방영된다.

군 생활을 하던 중 처음 <프로듀스 101>의 pick me 뮤직비디오를 보았을 때, 어딘가 기이함을 느꼈던지라 <프로듀스 101>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군대 친구들이 하나둘씩 <프로듀스 101>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할 것을 부탁하면서 나도 네이버를 통해 상을 하나둘 챙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두 명의 연습생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김청하와 유연정이었는데, 둘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어딘가 불공평해 보고, 단순히 외적인 요소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도 되었고 안타까웠다. 특히나 유연정은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였음에도, 같은 곡으로 경쟁한 조의 음 이탈을 낸 보컬에게 경연에서 패배하는데, 이 모습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그 후부터 나는 유연정과 김청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경연을 지켜보았으며, 그들이 데뷔하는 모습을 보며 모종의 뿌듯함과 위안을 얻었다.

이후 복학을 한 후 간간이 유튜브를 통해 방탄소년단의 안무 영상은 봤지만, 또다시 아이돌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다 3학년 2학기 디자인과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디자인과 수업은 굉장한 시간과 노동을 들여야 하는 과제가 많았으며, 대부분 단순 노동이라 텔레비전을 틀어놓지 않고는 힘들었다. 이때, Mnet에서는 <프로듀스 101> 시즌2를 열심히 방영하였다. 거의 어느 시간 때에 틀어도 해당 방송을 볼 수 있었으며 그렇게 보다가 강다니엘, 김재환, 옹성우라는 친구를 발견하였다. 강다니엘의 방송 초반 모습은 소형 기획사에서 나온, 눈에는 띄지만 관심은 못 받고 데뷔와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친구였다. 하지만 굉장히 수수하고 주변에 두면 좋을 것 같은 동생 같았는데, 이런 친구가 욕심 많아 보이는 이대휘에게 밀리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김재환은 아예 소속사 없이 참가한 연습생이었는데, 소속사를 통해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춤 실력이 보컬 실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른 연습생이 연습실을 다 떠날 동안 춤을 밤새 연습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계속 눈에서 아른거렸고, 그냥 지나치기엔 또 너무나 훌륭한 보컬 실력을 가졌었다. 옹성우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데 또 항상 유쾌하고, 자신감은 넘치지만 교만하지는 않은 주변에 있으면 좋을 친구의 모습이었다. 새벽에 과제를 하며 이들을 지켜보며 나는 이들과 강한 유대감을 느꼈으며, 어느 순간 다른 친구들과도 이 <프로듀스 101> 시즌 2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갔다.

<프로듀스 101>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가가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재현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 정동 노동, 잔인한 경쟁 시스템에 대한 분석이 있다. 나 역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이 강조하는 것, 트레이너나 국민 프로듀서 대표가 강조하는 가치들을 볼 때 불편함을 느꼈으며,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계속해서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러한 비판점 너머에 이 프로그램이 주는 묘한 위안과 만족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은 연습생들이 경연을 해나가는 모습을 비추며, 개별 연습생들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비단 프로그램 방영분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개별 연습생의 짧은 영상들을 노출하며, 이를 통해 개별 연습생이 어떠한 서사를 지니느냐에 따라서 승패의 당락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 자체, 이 경연 시스템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개별 연습생들이 구현하는 스토리들은 비단 비판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연습생들의 상황에 강하게 공감하곤 한다. 이 경연은 프로그램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하자마자 직면하게 될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면에서, 특히 개개인의 스토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방식이 실제 우리 사회의 경쟁보다는 깔끔하거나 공정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재환 같은 연습생은 기존 산업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연습생이었다. 이는 김재환 연습생의 비주얼 탓일 수도 있고, 아이돌 산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창법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는 산업과 기획사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러나 그가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준 그의 인생과 서사, 태도는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결국 데뷔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는 개인의 스토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재환이나 강다니엘은 프로그램이 초반부터 주목한 연습생들이 아니었으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하지 못했어도 개개인의 이야기가 공감을 샀던 연습생들은 결국 데뷔에 성공했기 때문에, 김재환, 강다니엘과 같은 친구들의 성공과 그들이 구현한 이야기들에 대해 단순하게 승자독식의 논리라며 비난하는 것은 결과에 대한 사후설명에 불과해 보인다. 이 친구들이 데뷔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모종의 위안을 얻었으며, 우리 사회 경쟁 논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었다. 물론 <프로듀스 101>의 경연은 매우 잔혹하고, 이 과정에서 보이는 감시는 섬뜩하지만, 어떨 땐 대통령과 같은 중요한 자리는 <프로듀스 101>과 같은 방식, 몇번의 경연을 거치고, 협업하는 모습을 보이고, 일상을 공개해 그들의 인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방식으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편파적인 모습이 보여 지면 그 또한 숙련된 시청자들은 기가 막히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연습생들은 나의 좋은 친구가 된다. 나는 강다니엘, 김재환, 옹성우가 나의 현실 친구라 고 착각하곤 하는데, 내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시간보다 이들을 보는 시간이 더 길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진짜 친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렵던 상황의 친구가 성공한 모습을 보며 뿌듯하기도 하고, 내가 그 길에 조금의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상당히 만족스럽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고등학교 때 소녀시대의 팬을 하면서 느낀 점은 누군가의 팬이 되어 팬덤이라는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굉장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프로듀스 101>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같은 연습생을 지지하는 친구들은 든든한 동료들이지만, 꼭 같은 연습생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냥 함께 프로그램과 연습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프로듀스 101> 시리즈를 열심히 시청한다. 새로 시작하는 시즌인 <프로듀스 x 101>에서도 지지할 연습생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특히 아마도 키가 작아 모든 소속사에서 배척을 당한 개인 연습생 최수한에게 관심이 간다. 물론 이 연습생이 성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얻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경험은 나에게는 힘을 돋우는(Empowering)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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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 7. 5. 20:55

댓글도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일반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박지현

 

 

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인해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낼 수 있는 댓글 문화가 생겨났고, 많은 사람이 다양한 관심사나 이슈들에 대해 댓글을 통해 활발히 의견을 교류한다. 이러한 댓글 문화는 사용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온라인 공간에서 보장된 익명성의 부작용에 따른 악성 댓글의 폐해 또한 점차 퍼지고 있다.

과거에는 미디어 노출이 잦은 유명인사들이 주로 댓글의 영향을 받았다면,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요즘에는 일반인들의 미디어 노출이 잦아지면서 댓글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댓글에 관한 이슈들이 특정 유명인사들에 국한되어 발생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적용되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댓글에 대한 의견을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해지면서 댓글은 단순히 기사나 게시물에 대한 반응을 넘어 토론의 장으로 그 범위가 넓혀지고 있고, 그에 따른 사이버 폭력 피해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우리 모두 매일 미디어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자신 또한 그렇다. 하지만 댓글과 관련된 연구를 하게 되면서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와 유튜브를 하면서 콘텐츠보다 댓글을 주로 살펴보고 있다.

댓글을 보면 한 콘텐츠에 대해, 또는 사람들이 올린 일상 사진에 대해 사람들이 각각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보면 볼수록 느끼게 된다. 어느 부분이 좋은지, 나쁜지, 왜 좋은지, 왜 나쁜지 이유도 다 다르다. 이렇게 모든 댓글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알게 되어서,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보는 중간중간 무자비한 욕설, 비방하는 글들을 보게 되면 자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사람들은 왜 악성 댓글을 쓸까?

나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소소한 취미로 카톡 테마를 만드는데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을 듯하여 트위터를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초반 팔로워 수가 적었을 때는‘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너무 예쁘다’ 등 좋은 글만 써주시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팔로워 수가 점점 늘면서(내가 만든 카톡 테마 디자인이 꽤 괜찮은가 보다) 이기적인 말, 욕설 등을 남기는 사람도 생겼다. 이 댓글로 인한 마음의 스크래치는 생각보다 컸다. 도대체 무엇이 맘에 안 들길래 저런 말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달린 댓글은 대상이 연예인 등 유명인사에게 달린 댓글에 비하면 양호하지만 한 번도 이러한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던 나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렇게 아픈데 유명인사들은 얼마나 더 아플까? 나는 계정을 삭제하면 그만이지만 미디어에 노출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악성 댓글에 대해서는 늘 이슈화되어왔다. 악플에 대한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가 발달하면서 악플에 대한 문제도 빈번히 일어나고 상황도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정보통신진흥원의 주간 기술 동향 통권 1437호의 ‘악성 댓글의 실태와 대응 방안’에 따르면 악성 댓글의 활성화 요인은 익명성, 비대면성, 집단성이라고 한다. 익명성은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욕설, 비방, 그리고 근거 없는 소문들을 보다 자유롭게 인터넷상에 유포시키게 되고, 비대면성은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보지 않게 되므로 만약 폭력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자아의 경우, 인터넷상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더욱 과격하게 나타날 수 있다. 집단성은 같은 악의적 내용을 쓰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심리적 부담감은 분산되고 줄어들게 되므로 악성 댓글을 다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익명성, 비대면성, 그리고 집단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성 댓글에 대한 문제는 계속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악성 댓글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지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일반인 사용자들이 주로 활발히 이용하는 SNS 등에서 악성 댓글로 인한 피해가 많이 발생하면서 악성 댓글의 문제가 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포털 사이트, SNS 등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구글과 직소(Jigsaw,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산하의 창업 초기 기업)에서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악성 댓글을 찾아내 이를 줄이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였고, 또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는 페이스북의 인공지능 시스템인 ‘딥 텍스트(DeepText)’를 이용하여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운 게시물을 걸러내거나 악성 댓글을 직접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악성 댓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제안된 해결방안 등을 살펴보면 악성 댓글을 직접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직접적인 ‘차단’만이 해결책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악성 댓글의 피해를 ‘차단’이라는 극단적 방법이 아닌 댓글 문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사용자가 자신의 댓글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초점을 맞춰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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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 4. 30. 01:18

차별이 곧 악이다

영화 ‘어스’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하태현

 

 

 

어스’가 재미없다고?

 

영화 ‘어스’(이하 ‘어스’)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겐 플롯 구성이 단순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은 애들레이드 가족의 생존을 응원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재미없다는 평이 적잖게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누가 어떻게 살아남고 누가 어떻게 죽느냐는 감독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생존은 비교적 예상할 수 있게 그려졌다. 물론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사이에서 누가 진짜인간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한몫한다. 한편 진짜를 가려내는 추리 과정에 할애된 분량은 적고, 단조롭다. 진짜를 가려내는 것은 감독의 주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스’는 주인공의 생존기를 통해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우리(us)’는 누구이며 우리 밖에는 누가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1968년 미국 산타크루즈 해변에서 어린 애들레이드는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가 두더지 잡기 게임에 한눈이 팔린 사이, 애들레이드는 “영혼의 여행.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달린 거울의 방에 들어간다. 거울에 둘러싸인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만난다. 거울에 비친 상인 줄 알았는데 그가 움직인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실어증에 걸렸다. 그날 이후, 애들레이드는 평생을 도망치듯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애들레이드는 가족(남편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과 떠나는 휴가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산타크루즈로 향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긴장과 두려움이 역력하다. 휴가 첫날 밤, 애들레이드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집 앞에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서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어떤 가족은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애들레이드 가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에 애들레이드는 경찰을 불러보지만, 경찰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가족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이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보며 놀란다. 복제인간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려 하지만, 여러 번의 위기 끝에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는다.

 

나의 모습을 한 미스터리한 외부인

 

1986년 미국에선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s across America)’이라는 캠페인을 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기아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15분 동안 손에 손을 잡는 퍼포먼스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캠페인 규모와 비교하면 자선단체에 직접 전달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남은 것은 대상화된 연민뿐이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 캠페인은 세계 반대편 어딘가에선 굶주림에 고통받는 자가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고자 했다. 그러나 낙관주의적 태도는 현실적인 변화에 도움이 못 됐다. 약자를 향한 캠페인은 지식인과 부유층의 기만에 불과했다.

 

1986년은 역사적으로 기아 퇴치를 위해 미국인이 손을 잡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애들레이드와 레드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미국 내부의 약자들, 우리 안의 우리들을 대변한다. 극 중 애들레이드의 아들 제이슨이 섬뜩한 침입자들을 보고 “우리들이잖아(“it’s us”)”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타인의 얼굴을 띈 외부자가 아니었다. 미스터리한 침입자는 나의 얼굴을 한 외부인이었다.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이질적인 그들은 ‘우리’와 쏙 빼닮았다.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제인간 ‘레드’는 “우리는 미국인이야”라고 답한다. 여기서 복제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유사한 외모를 지닌 도플갱어가 아니라 미국(U.S: United State)의 일반 시민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영화는 ‘미국인으로서의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다. 감독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뻔하게 묻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미국 사회에 속한 ‘우리’는 타인과의 경계선을 어디에 긋고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인 감수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성찰이 되어야만 한다.

 

네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

  

‘어스’의 시작과 끝의 내용은 중심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감독은 미국에 정체 모를 지하 터널들이 무수히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것들 대다수는 누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흔한 음모론의 일종이다. 그곳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던 필 감독은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지하터널에 의미를 부여한다. 지하터널은 생체 실험이 진행되었던 곳이며, 현재는 지하 인간(복제인간)이 사는 곳으로 명명했다. 지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은 오랫동안 지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지하의 복제인간들이 터널에서 나와 손에 손을 맞잡는 캠페인을 다시 재현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부터 첩첩산중에 이르기까지 흡사 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이 퍼포먼스는 1986년의 캠페인과는 결이 다르다. 앞선 캠페인이 굶주린 기아를 향한 연민에 불과했다면, 마지막 장면은 복제인간들의 체제전복적 투쟁이다. 이 영화는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통해 홉스적 사회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미국 사회에 만연하다고 비집는다. 국가와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그들(복제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복제인간들의 분노는 지상의 인간에게 향한다. 그들은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조던 필 감독은 인간의 죽음에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사회의 불안과 분열은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감독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차별의 문제에 관한 경고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

 

지하 터널에서 숨죽인 채 사는 복제인간의 삶은 2019년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유사하다. 복제인간은 생체 실험연구에 의해 육체적으로는 완벽히 복제된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개별적 사유는 불허됐다. 지하의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설정은 특히 상징적이다. 자신의 언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근거와 논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지식인이 지닌 힘의 원천은 언어에 있다.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겐 자신만의 언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소통되지 않는 그들은 통제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한다. 어엿한 사회 구성원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지워질 경우가 많고, 언어화되지 않은 요구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인들을 죄악시한다. 주된 논거는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했고, 미국의 백인들은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같이 정치 권력을 쥔 강자가 내뱉는 언어는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미국의 정서와 담론으로 구체화된다. 복제인간에겐 언어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인종이 다른 것이 흠이 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인의 신분을 지닌 소수인종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와 흑인, 아시아인들은 그의 타깃이 되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발언할 수 있는 마이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들에 눈에 띄는 것 자체가 불쾌함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조용히 살기를 종용받는다. 영화에서 복제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들은 2등 시민이 되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지상의 인간과 묶인(Teathered) 존재다. 그림자와 같이 육체적으로는 지상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환경적 차이로 인해 정서적, 정신적으로는 차이가 벌어진다. 한 소녀는 행복하고 사랑받는 생활을 했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불행하고 처절한 삶을 살았다. 한 소녀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놀았다. 영화에서 양극화된 삶을 사는 두 부류의 기원은 환경적 구조에 있다. 타파하기 위해선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15분 남짓의 게으른 퍼포먼스만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잊히고 그림자로 냉대받고 이들은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가위는 날카로운 양날이 서로 맞물려 물건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도구다. 가위가 인간의 몸을 찌르는 것은 지상 위의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지만, 복제인간에겐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혁명적 몸부림이다.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

 

‘어스’는 ‘우리’와 ‘너희’ 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해야만 하는 사회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가? 성서 말씀인 예레미야 11장 11절은 여러 번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감독은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네 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탁상시계로 11시 11분을 가리킨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노인의 팻말에 적힌 말씀(렘 11:11)은 모두 동일한 숫자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말씀의 본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렘 11:11). 이는 하느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방인에게 침입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국의 파멸과 멸망이 이방인(‘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자)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인터뷰에서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서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악은, 우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를 비판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아야 하는 홉스적 사회는 감독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간 미국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였다. 이제는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고 이로써 자신을 지키려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제노포비아 정치를 소환하고 있다. 정작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외부의 악마는 아무런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은 괴물로 타자화되고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며,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복제인간과 다를 게 없다. 현실 사회에서는 그 복제인간들은 영화에서보다 더 비참한 투명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별이 곧 악이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더는 안전한 땅이 아니다. 애들레이드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도망가기를 선택한다. 애들레이드는 다시는 보조석에 앉지 않는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가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어스’는 지배적 위계질서인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어스’에서 아버지들은 두더지 게임을 하느라 딸을 방치했고, 도플갱어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힘을 과시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애들레이드는 데이브에게 “이제 당신에게 결정권은 없다”고 말하며 가부장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악으로 규정한 그 나라로 떠난다. 진짜 괴물은 멕시코인들이나 이방인이 아닌 차별적 시선을 지닌 미국인들 그 자체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공격하는 사회에선 그 누구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게 한다. 미국 사회는 현재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을 적으로 규정하기 바빠 보인다. 미국 사회는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방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날카로운 언어로 가공되어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에 상처 입히고 있다. 가위로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미국에선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범주 안에 누가 들어가 있는가? 감독은 전작인 ‘겟아웃’과는 달리 ‘우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특정 인종을 앞장세우지 않는다. 흑인 배우가 다수를 이루지만, 그 메시지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명백하지만, 멕시코인에 대한 차별은 비교적 흐릿하다. 차별로 명백해진 것에는 조심스러워지지만, 흐릿한 것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에서 멕시코인 혐오는 대중적이지만,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은밀하고 지속해서 이어진다.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선이 분명해질수록 차별도 분명해진다. 인종에 근거한,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멈춰져야 한다. ‘어스’는 차별적 인식이 어떤 악의 얼굴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차별이 곧 악이다. 조던 필은 ‘어스’를 통해 어쩌면 악은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성찰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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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 4. 30. 00:51

일상공유

 

일반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신동우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Paul Gauguin, 1848~1903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흔히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표현하며, 작품에서의 제목(Title)은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작품 또한 고갱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삶과 그가 느꼈을 혹은 겪었을 다양한 감정들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는데, 특히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는 정서적 상실감과 패배감 그리고 우울함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이고 거기에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살을 기도하기 전,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기고자 했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예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고 교훈을 얻기도 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을 그린 고갱은 단 한 번도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직장인이었지만 당시 프랑스의 금융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고 35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는데 사실 그가 그림 쪽에는 재능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전시회에서 작품을 출품하거나 살롱에서 입선되는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고갱은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하여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늘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다 이상적인 화가 집단을 꿈꾼 고흐와의 만남을 통해 고갱은 고흐의 아를 작업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고 같이 작업하고 다양한 토론을 함께 나누면서도 둘 사이의 의견 차이로 인해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흐가 자신 귀를 자른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귀를 자른 사건보다도 필자가 고갱의 작품을 인용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당시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갱이 작품의 제목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 질문(‘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이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며 사실 이러한 질문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나’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관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도 많은 삶을 살아본 경험이 풍족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내가 선뜻 한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얼마 전, 교정을 산책하면서였다. 다른 대학원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잠깐의 사회생활을 하던 도중에 대학원 진학을 두고 많이 고민 했었던 기억이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때 내렸던 선택으로 인하여 아트&테크놀로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현재 마지막 학기에 이르렀다. 과거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때가 졸업을 앞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은 상황은 조금 다를지라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졸업과 함께 박사과정으로의 진학이나 취업에 관한 고민들 때로는 석사과정을 선택하려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일상에서 늘 시작과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더 많은 고민과 신중한 결정 사이에서 늘 그렇듯이 고민할 것이고 결국은 매 순간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이며,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질 질문들이라 나는 생각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나는 내가 지각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렇게 늦다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 적은 두되 그저 몸 성히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는데,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뒤늦게 한 국제 민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다 늦게 무엇하는 짓인가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 두시까지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하지만 그 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아있는 석사 학위가 아니었다.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찔끔 흘렸던 눈물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이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반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한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세이 “지각인생”, 손석희 아나운서

 

 

마지막으로 공유하고 싶은 내용은 “지각인생”이란 손석희 아나운서의 에세이이다. 약 10년 전에 공유되었던 내용이지만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와 인상 깊은 내용은 비록 그가 남보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나보다는 한참 늦게 시작한 유학과 석사과정에서의 굉장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종이 한 장으로 남을 석사학위보다도 차가운 연구실에서 남몰래 흘렸던 눈물과 절실함에 대한 기억과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 이러한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는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결국은 그가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해 절실함을 갖고 있고 겸허하게 책임을 수용하는 태도 때문인데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수 없는 질문의 끝에서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지금 이때를 다시 돌아봤을 때 그 선택이 후회가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꿈과 열정을 잃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과 가능성을 믿는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잘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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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 12. 18. 13:40

무한한 열정을 발산한 두 사람의 이야기

 

일반대학원 심리학과 석사과정 _ 최중휘

 

 

이번 글을 통해, 두 개의 소설책을 추천하고 싶다. ‘달과 6펜스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두 책의 장르는 매우 다르지만 헌신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젊을 때 뭔가에 몰입해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만 가는 것은 나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한 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래서 독자에게 짜릿함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뤘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만만치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뭔가에 미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각 이야기의 세부 감상은 아래와 같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빚어낸 비극 - <용의자 X의 헌신 / 히가시고 게이고 >

뭔가 하나에 몰두해서 산다는 것은 꼭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학이라는 세계에 몰두했고, 그것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건 그의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공 남자는 그에게 수학만 남은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할 뻔 했지만, 그 순간 옆집 사람에게 사랑에 빠져서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 후 그는 그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해서 그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아름답게 사라지고 싶었지만 모든 것엔 변수가 있었다. 수학이라는 완벽한 세상이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예상을 벗어나는지, 이 책에서 보여준다.

일이 삶의 수단이라면 삶의 목적은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사랑에 완벽함이라는 게 있을까? 흔히 아무런 조건 없이 존재만으로도 사랑하는 것을 완전한 사랑이라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까지 허락할 위험이 있다. 영화 '마더'에서 엄마는 아들의 범죄에 대한 목격자를 발견하자 본능적으로 그를 해치고 만다. 그렇게 보면 이상적인 사랑은 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존재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그 수학자는,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이런 헌신적인 희생이 나온다. 비록 그녀의 선택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끝까지 헌신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다. 헌신적인 사랑이라,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이 소설에서 수학 선생은 삶을 살아갈 이유도, 그만둘 이유도 없어서 자살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옆집 여자는 그 이후부터 그가 살아갈 목적이 된 것이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충성의 맹세.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결국 감정적이고 약한 모습으로 무너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욕망보다는, 순간순간 행복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더 현명한 태도인 것 같다. 하루하루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모르는 인생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이런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 -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하루아침에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왔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림만을 향해 달려가는 스트릭랜드(주인공). 그 과정 중에 한 치의 흔들림과 오차도 없이 올곧은 그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강렬한 열정이 오히려 그를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 사람, 죽음 등 세속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로부터 해탈하고 그의 온 정신은 오직 하나, 그림뿐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스트릭랜드와 같은 삶을 꿈꾸곤 한다.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만 열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면 좀 더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뭔가를 직업으로써 고를 때 그 직업 자체에 대한 선호뿐만 아니라 그 직업의 수입, 전망, 사회적 위치, 그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 등을 고려한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따져보면 결국 다 비슷비슷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선 이런 현실적인 조건이 모두 동일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된다.

스트릭랜드는 그런 우리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누구나 스트릭랜드처럼 잃어버린 꿈을 향해 달려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꿈은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접어야만 하는 수많은 젊은이를 비웃듯 스트릭랜드는 그런 현실을 빗겨나간다. 현실은 이미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그의 사후에나 인정받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가 직접 밝힌다. “나는 그려야 해요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102p(책속에서).

우리의 열정에 위와 같은 조력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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