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20:58

자기 민속지학적 접근을 통해 본 내가 <프로듀스 101> 보는 이유

 

사회과학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 장인희

 

주형일(2007)은 스스로가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이유를 밝히며, 그 과정에서 스파이더맨을 좋아하게 된 배경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 문화적 요인들을 다룬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기민속지학은 개인의 경험이 사회의 일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드러내며 사회적 측면을 발견, 해석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민속지학은 주관적임과 동시에 사회적 맥락에 위치하게 된다. 연구자는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와 소통하게 되며, 이 경험을 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또한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을 풀어놓는다는 저에서 자기민속지학의 방법은 연구자가 연구 대상인 식민지인들과 충분히 거리를 둔 채로 진행되었던 기존의 민속지학과 차별화되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민속지학은 “식민지배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맞서서 자신들을 재현하는 수단”이다(주형일, 2007). 자기민속지학에 관한 이러한 논의를 확장하면, 자기민속지학을 특정 문화 외부에서 충분히 거리를 둔 채 서술되는 비평에 대항하여 해당 문화의 경험을 재현하는 수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내가 <프로듀스 101>의 열렬한 시청자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서술해보고자 한다.

<프로듀스 101>은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프로듀스 101>에 대한 내 경험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내가 아이돌 문화의 팬이 된 배경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2007년, 중학교 2학년 때 중국으로 가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때는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DVD로 제작해서 팔곤 하는데, 집에 컴퓨터가 없었던 나로서는 이 DVD가 유일하게 한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였다. 당시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이 중국에서 워낙 인기가 많아 친구들과 한국 예능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좋기도 했고, 또 이것을 통해서 나 스스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곤 했다. 특히 교회에서 만나는 한국 친구들이나 중학교에 몇 없는 한국 학생들 모두 티비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시청에 임했다. 이때는 원더걸스가 한참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이고, 예능이나 시트콤 등에서도 원더걸스가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아이돌은 자연스레 원더걸스가 되었지만, 소녀시대가 Kissing You 활동을 할 무렵부터 자신을 소녀시대의 팬으로 정체화하였다.

당시 소녀시대와 소녀시대의 팬들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소녀시대는 항상 비난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들에 맞서 열심히 변호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우리 소녀시대 누나들을 몰라주는 것이 속상하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온,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팬들과 싸우는 것이 그렇게 싫은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소녀시대 팬으로서 누군가를 옹호하고, 반대파와 싸우는 것은 중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딱히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던 내게 강한 소속감을 선사해주었으며, 같이 열심히 싸우던 친구들과 모종의 유대감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녀시대 팬으로 열심히 활동하던 나는 2012년 대학을 가게 되는데, 마침 소녀시대도 활동이 뜸해지던 시기라 아이돌에 대한 관심은 전에 비해 다소 옅어졌다. 그래도 에이핑크나 걸스데이 등 그 시기 나름 이름을 알리게 된 아이돌에는 지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아이돌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2015년 초 군 생활 후반부였다. 그 당시 후임 중에 남자 아이돌 군무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를 통해 방탄소년단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엔 하는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여유가 있었고, 또 부대 안에서 할 것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친구와 엑소, 방탄소년단 등 여러 아이돌의 군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처음으로 남자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때 경험이 없었으면, <프로듀스 101> 시즌2는 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역하고 나서도 군대에 있던 친구들과는 거의 매일 연락을 했으며, 주말에도 주로 그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아이돌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중심 관심사였다. 전역한 후 2주 정도 지난 무렵 그러다가 <프로듀스 101> 시즌 1이 방영된다.

군 생활을 하던 중 처음 <프로듀스 101>의 pick me 뮤직비디오를 보았을 때, 어딘가 기이함을 느꼈던지라 <프로듀스 101>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군대 친구들이 하나둘씩 <프로듀스 101>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할 것을 부탁하면서 나도 네이버를 통해 상을 하나둘 챙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두 명의 연습생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김청하와 유연정이었는데, 둘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어딘가 불공평해 보고, 단순히 외적인 요소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도 되었고 안타까웠다. 특히나 유연정은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였음에도, 같은 곡으로 경쟁한 조의 음 이탈을 낸 보컬에게 경연에서 패배하는데, 이 모습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그 후부터 나는 유연정과 김청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경연을 지켜보았으며, 그들이 데뷔하는 모습을 보며 모종의 뿌듯함과 위안을 얻었다.

이후 복학을 한 후 간간이 유튜브를 통해 방탄소년단의 안무 영상은 봤지만, 또다시 아이돌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다 3학년 2학기 디자인과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디자인과 수업은 굉장한 시간과 노동을 들여야 하는 과제가 많았으며, 대부분 단순 노동이라 텔레비전을 틀어놓지 않고는 힘들었다. 이때, Mnet에서는 <프로듀스 101> 시즌2를 열심히 방영하였다. 거의 어느 시간 때에 틀어도 해당 방송을 볼 수 있었으며 그렇게 보다가 강다니엘, 김재환, 옹성우라는 친구를 발견하였다. 강다니엘의 방송 초반 모습은 소형 기획사에서 나온, 눈에는 띄지만 관심은 못 받고 데뷔와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친구였다. 하지만 굉장히 수수하고 주변에 두면 좋을 것 같은 동생 같았는데, 이런 친구가 욕심 많아 보이는 이대휘에게 밀리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김재환은 아예 소속사 없이 참가한 연습생이었는데, 소속사를 통해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춤 실력이 보컬 실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른 연습생이 연습실을 다 떠날 동안 춤을 밤새 연습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계속 눈에서 아른거렸고, 그냥 지나치기엔 또 너무나 훌륭한 보컬 실력을 가졌었다. 옹성우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데 또 항상 유쾌하고, 자신감은 넘치지만 교만하지는 않은 주변에 있으면 좋을 친구의 모습이었다. 새벽에 과제를 하며 이들을 지켜보며 나는 이들과 강한 유대감을 느꼈으며, 어느 순간 다른 친구들과도 이 <프로듀스 101> 시즌 2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갔다.

<프로듀스 101>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가가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재현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 정동 노동, 잔인한 경쟁 시스템에 대한 분석이 있다. 나 역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이 강조하는 것, 트레이너나 국민 프로듀서 대표가 강조하는 가치들을 볼 때 불편함을 느꼈으며,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계속해서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러한 비판점 너머에 이 프로그램이 주는 묘한 위안과 만족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은 연습생들이 경연을 해나가는 모습을 비추며, 개별 연습생들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비단 프로그램 방영분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개별 연습생의 짧은 영상들을 노출하며, 이를 통해 개별 연습생이 어떠한 서사를 지니느냐에 따라서 승패의 당락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 자체, 이 경연 시스템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개별 연습생들이 구현하는 스토리들은 비단 비판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연습생들의 상황에 강하게 공감하곤 한다. 이 경연은 프로그램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하자마자 직면하게 될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면에서, 특히 개개인의 스토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방식이 실제 우리 사회의 경쟁보다는 깔끔하거나 공정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재환 같은 연습생은 기존 산업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연습생이었다. 이는 김재환 연습생의 비주얼 탓일 수도 있고, 아이돌 산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창법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는 산업과 기획사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러나 그가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준 그의 인생과 서사, 태도는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결국 데뷔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는 개인의 스토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재환이나 강다니엘은 프로그램이 초반부터 주목한 연습생들이 아니었으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하지 못했어도 개개인의 이야기가 공감을 샀던 연습생들은 결국 데뷔에 성공했기 때문에, 김재환, 강다니엘과 같은 친구들의 성공과 그들이 구현한 이야기들에 대해 단순하게 승자독식의 논리라며 비난하는 것은 결과에 대한 사후설명에 불과해 보인다. 이 친구들이 데뷔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모종의 위안을 얻었으며, 우리 사회 경쟁 논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었다. 물론 <프로듀스 101>의 경연은 매우 잔혹하고, 이 과정에서 보이는 감시는 섬뜩하지만, 어떨 땐 대통령과 같은 중요한 자리는 <프로듀스 101>과 같은 방식, 몇번의 경연을 거치고, 협업하는 모습을 보이고, 일상을 공개해 그들의 인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방식으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편파적인 모습이 보여 지면 그 또한 숙련된 시청자들은 기가 막히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연습생들은 나의 좋은 친구가 된다. 나는 강다니엘, 김재환, 옹성우가 나의 현실 친구라 고 착각하곤 하는데, 내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시간보다 이들을 보는 시간이 더 길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진짜 친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렵던 상황의 친구가 성공한 모습을 보며 뿌듯하기도 하고, 내가 그 길에 조금의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상당히 만족스럽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고등학교 때 소녀시대의 팬을 하면서 느낀 점은 누군가의 팬이 되어 팬덤이라는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굉장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프로듀스 101>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같은 연습생을 지지하는 친구들은 든든한 동료들이지만, 꼭 같은 연습생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냥 함께 프로그램과 연습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프로듀스 101> 시리즈를 열심히 시청한다. 새로 시작하는 시즌인 <프로듀스 x 101>에서도 지지할 연습생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특히 아마도 키가 작아 모든 소속사에서 배척을 당한 개인 연습생 최수한에게 관심이 간다. 물론 이 연습생이 성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얻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경험은 나에게는 힘을 돋우는(Empowering)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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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7.05 20:55

댓글도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일반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박지현

 

 

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인해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낼 수 있는 댓글 문화가 생겨났고, 많은 사람이 다양한 관심사나 이슈들에 대해 댓글을 통해 활발히 의견을 교류한다. 이러한 댓글 문화는 사용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온라인 공간에서 보장된 익명성의 부작용에 따른 악성 댓글의 폐해 또한 점차 퍼지고 있다.

과거에는 미디어 노출이 잦은 유명인사들이 주로 댓글의 영향을 받았다면,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요즘에는 일반인들의 미디어 노출이 잦아지면서 댓글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댓글에 관한 이슈들이 특정 유명인사들에 국한되어 발생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적용되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댓글에 대한 의견을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해지면서 댓글은 단순히 기사나 게시물에 대한 반응을 넘어 토론의 장으로 그 범위가 넓혀지고 있고, 그에 따른 사이버 폭력 피해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우리 모두 매일 미디어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자신 또한 그렇다. 하지만 댓글과 관련된 연구를 하게 되면서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와 유튜브를 하면서 콘텐츠보다 댓글을 주로 살펴보고 있다.

댓글을 보면 한 콘텐츠에 대해, 또는 사람들이 올린 일상 사진에 대해 사람들이 각각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보면 볼수록 느끼게 된다. 어느 부분이 좋은지, 나쁜지, 왜 좋은지, 왜 나쁜지 이유도 다 다르다. 이렇게 모든 댓글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알게 되어서,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보는 중간중간 무자비한 욕설, 비방하는 글들을 보게 되면 자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사람들은 왜 악성 댓글을 쓸까?

나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소소한 취미로 카톡 테마를 만드는데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을 듯하여 트위터를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초반 팔로워 수가 적었을 때는‘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너무 예쁘다’ 등 좋은 글만 써주시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팔로워 수가 점점 늘면서(내가 만든 카톡 테마 디자인이 꽤 괜찮은가 보다) 이기적인 말, 욕설 등을 남기는 사람도 생겼다. 이 댓글로 인한 마음의 스크래치는 생각보다 컸다. 도대체 무엇이 맘에 안 들길래 저런 말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달린 댓글은 대상이 연예인 등 유명인사에게 달린 댓글에 비하면 양호하지만 한 번도 이러한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던 나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렇게 아픈데 유명인사들은 얼마나 더 아플까? 나는 계정을 삭제하면 그만이지만 미디어에 노출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악성 댓글에 대해서는 늘 이슈화되어왔다. 악플에 대한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터넷과 미디어 매체가 발달하면서 악플에 대한 문제도 빈번히 일어나고 상황도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정보통신진흥원의 주간 기술 동향 통권 1437호의 ‘악성 댓글의 실태와 대응 방안’에 따르면 악성 댓글의 활성화 요인은 익명성, 비대면성, 집단성이라고 한다. 익명성은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욕설, 비방, 그리고 근거 없는 소문들을 보다 자유롭게 인터넷상에 유포시키게 되고, 비대면성은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보지 않게 되므로 만약 폭력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자아의 경우, 인터넷상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더욱 과격하게 나타날 수 있다. 집단성은 같은 악의적 내용을 쓰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심리적 부담감은 분산되고 줄어들게 되므로 악성 댓글을 다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익명성, 비대면성, 그리고 집단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성 댓글에 대한 문제는 계속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악성 댓글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지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일반인 사용자들이 주로 활발히 이용하는 SNS 등에서 악성 댓글로 인한 피해가 많이 발생하면서 악성 댓글의 문제가 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포털 사이트, SNS 등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구글과 직소(Jigsaw,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산하의 창업 초기 기업)에서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악성 댓글을 찾아내 이를 줄이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였고, 또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는 페이스북의 인공지능 시스템인 ‘딥 텍스트(DeepText)’를 이용하여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운 게시물을 걸러내거나 악성 댓글을 직접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악성 댓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제안된 해결방안 등을 살펴보면 악성 댓글을 직접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직접적인 ‘차단’만이 해결책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악성 댓글의 피해를 ‘차단’이라는 극단적 방법이 아닌 댓글 문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사용자가 자신의 댓글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초점을 맞춰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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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1:18

차별이 곧 악이다

영화 ‘어스’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하태현

 

 

 

어스’가 재미없다고?

 

영화 ‘어스’(이하 ‘어스’)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겐 플롯 구성이 단순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은 애들레이드 가족의 생존을 응원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재미없다는 평이 적잖게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누가 어떻게 살아남고 누가 어떻게 죽느냐는 감독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생존은 비교적 예상할 수 있게 그려졌다. 물론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사이에서 누가 진짜인간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한몫한다. 한편 진짜를 가려내는 추리 과정에 할애된 분량은 적고, 단조롭다. 진짜를 가려내는 것은 감독의 주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스’는 주인공의 생존기를 통해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우리(us)’는 누구이며 우리 밖에는 누가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1968년 미국 산타크루즈 해변에서 어린 애들레이드는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가 두더지 잡기 게임에 한눈이 팔린 사이, 애들레이드는 “영혼의 여행.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달린 거울의 방에 들어간다. 거울에 둘러싸인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만난다. 거울에 비친 상인 줄 알았는데 그가 움직인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실어증에 걸렸다. 그날 이후, 애들레이드는 평생을 도망치듯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애들레이드는 가족(남편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과 떠나는 휴가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산타크루즈로 향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긴장과 두려움이 역력하다. 휴가 첫날 밤, 애들레이드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집 앞에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서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어떤 가족은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애들레이드 가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에 애들레이드는 경찰을 불러보지만, 경찰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가족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이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보며 놀란다. 복제인간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려 하지만, 여러 번의 위기 끝에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는다.

 

나의 모습을 한 미스터리한 외부인

 

1986년 미국에선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s across America)’이라는 캠페인을 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기아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15분 동안 손에 손을 잡는 퍼포먼스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캠페인 규모와 비교하면 자선단체에 직접 전달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남은 것은 대상화된 연민뿐이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 캠페인은 세계 반대편 어딘가에선 굶주림에 고통받는 자가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고자 했다. 그러나 낙관주의적 태도는 현실적인 변화에 도움이 못 됐다. 약자를 향한 캠페인은 지식인과 부유층의 기만에 불과했다.

 

1986년은 역사적으로 기아 퇴치를 위해 미국인이 손을 잡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애들레이드와 레드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미국 내부의 약자들, 우리 안의 우리들을 대변한다. 극 중 애들레이드의 아들 제이슨이 섬뜩한 침입자들을 보고 “우리들이잖아(“it’s us”)”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타인의 얼굴을 띈 외부자가 아니었다. 미스터리한 침입자는 나의 얼굴을 한 외부인이었다.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이질적인 그들은 ‘우리’와 쏙 빼닮았다.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제인간 ‘레드’는 “우리는 미국인이야”라고 답한다. 여기서 복제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유사한 외모를 지닌 도플갱어가 아니라 미국(U.S: United State)의 일반 시민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영화는 ‘미국인으로서의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다. 감독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뻔하게 묻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미국 사회에 속한 ‘우리’는 타인과의 경계선을 어디에 긋고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인 감수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성찰이 되어야만 한다.

 

네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

  

‘어스’의 시작과 끝의 내용은 중심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감독은 미국에 정체 모를 지하 터널들이 무수히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것들 대다수는 누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흔한 음모론의 일종이다. 그곳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던 필 감독은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지하터널에 의미를 부여한다. 지하터널은 생체 실험이 진행되었던 곳이며, 현재는 지하 인간(복제인간)이 사는 곳으로 명명했다. 지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은 오랫동안 지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지하의 복제인간들이 터널에서 나와 손에 손을 맞잡는 캠페인을 다시 재현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부터 첩첩산중에 이르기까지 흡사 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이 퍼포먼스는 1986년의 캠페인과는 결이 다르다. 앞선 캠페인이 굶주린 기아를 향한 연민에 불과했다면, 마지막 장면은 복제인간들의 체제전복적 투쟁이다. 이 영화는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통해 홉스적 사회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미국 사회에 만연하다고 비집는다. 국가와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그들(복제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복제인간들의 분노는 지상의 인간에게 향한다. 그들은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조던 필 감독은 인간의 죽음에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사회의 불안과 분열은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감독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차별의 문제에 관한 경고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

 

지하 터널에서 숨죽인 채 사는 복제인간의 삶은 2019년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유사하다. 복제인간은 생체 실험연구에 의해 육체적으로는 완벽히 복제된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개별적 사유는 불허됐다. 지하의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설정은 특히 상징적이다. 자신의 언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근거와 논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지식인이 지닌 힘의 원천은 언어에 있다.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겐 자신만의 언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소통되지 않는 그들은 통제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한다. 어엿한 사회 구성원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지워질 경우가 많고, 언어화되지 않은 요구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인들을 죄악시한다. 주된 논거는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했고, 미국의 백인들은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같이 정치 권력을 쥔 강자가 내뱉는 언어는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미국의 정서와 담론으로 구체화된다. 복제인간에겐 언어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인종이 다른 것이 흠이 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인의 신분을 지닌 소수인종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와 흑인, 아시아인들은 그의 타깃이 되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발언할 수 있는 마이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들에 눈에 띄는 것 자체가 불쾌함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조용히 살기를 종용받는다. 영화에서 복제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들은 2등 시민이 되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지상의 인간과 묶인(Teathered) 존재다. 그림자와 같이 육체적으로는 지상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환경적 차이로 인해 정서적, 정신적으로는 차이가 벌어진다. 한 소녀는 행복하고 사랑받는 생활을 했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불행하고 처절한 삶을 살았다. 한 소녀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놀았다. 영화에서 양극화된 삶을 사는 두 부류의 기원은 환경적 구조에 있다. 타파하기 위해선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15분 남짓의 게으른 퍼포먼스만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잊히고 그림자로 냉대받고 이들은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가위는 날카로운 양날이 서로 맞물려 물건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도구다. 가위가 인간의 몸을 찌르는 것은 지상 위의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지만, 복제인간에겐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혁명적 몸부림이다.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

 

‘어스’는 ‘우리’와 ‘너희’ 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해야만 하는 사회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가? 성서 말씀인 예레미야 11장 11절은 여러 번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감독은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네 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탁상시계로 11시 11분을 가리킨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노인의 팻말에 적힌 말씀(렘 11:11)은 모두 동일한 숫자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말씀의 본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렘 11:11). 이는 하느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방인에게 침입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국의 파멸과 멸망이 이방인(‘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자)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인터뷰에서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서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악은, 우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를 비판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아야 하는 홉스적 사회는 감독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간 미국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였다. 이제는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고 이로써 자신을 지키려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제노포비아 정치를 소환하고 있다. 정작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외부의 악마는 아무런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은 괴물로 타자화되고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며,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복제인간과 다를 게 없다. 현실 사회에서는 그 복제인간들은 영화에서보다 더 비참한 투명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별이 곧 악이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더는 안전한 땅이 아니다. 애들레이드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도망가기를 선택한다. 애들레이드는 다시는 보조석에 앉지 않는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가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어스’는 지배적 위계질서인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어스’에서 아버지들은 두더지 게임을 하느라 딸을 방치했고, 도플갱어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힘을 과시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애들레이드는 데이브에게 “이제 당신에게 결정권은 없다”고 말하며 가부장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악으로 규정한 그 나라로 떠난다. 진짜 괴물은 멕시코인들이나 이방인이 아닌 차별적 시선을 지닌 미국인들 그 자체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공격하는 사회에선 그 누구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게 한다. 미국 사회는 현재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을 적으로 규정하기 바빠 보인다. 미국 사회는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방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날카로운 언어로 가공되어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에 상처 입히고 있다. 가위로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미국에선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범주 안에 누가 들어가 있는가? 감독은 전작인 ‘겟아웃’과는 달리 ‘우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특정 인종을 앞장세우지 않는다. 흑인 배우가 다수를 이루지만, 그 메시지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명백하지만, 멕시코인에 대한 차별은 비교적 흐릿하다. 차별로 명백해진 것에는 조심스러워지지만, 흐릿한 것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에서 멕시코인 혐오는 대중적이지만,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은밀하고 지속해서 이어진다.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선이 분명해질수록 차별도 분명해진다. 인종에 근거한,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멈춰져야 한다. ‘어스’는 차별적 인식이 어떤 악의 얼굴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차별이 곧 악이다. 조던 필은 ‘어스’를 통해 어쩌면 악은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성찰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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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51

일상공유

 

일반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신동우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Paul Gauguin, 1848~1903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흔히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표현하며, 작품에서의 제목(Title)은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작품 또한 고갱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삶과 그가 느꼈을 혹은 겪었을 다양한 감정들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는데, 특히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는 정서적 상실감과 패배감 그리고 우울함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이고 거기에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살을 기도하기 전,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기고자 했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예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고 교훈을 얻기도 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을 그린 고갱은 단 한 번도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직장인이었지만 당시 프랑스의 금융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고 35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는데 사실 그가 그림 쪽에는 재능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전시회에서 작품을 출품하거나 살롱에서 입선되는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고갱은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하여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늘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다 이상적인 화가 집단을 꿈꾼 고흐와의 만남을 통해 고갱은 고흐의 아를 작업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고 같이 작업하고 다양한 토론을 함께 나누면서도 둘 사이의 의견 차이로 인해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흐가 자신 귀를 자른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귀를 자른 사건보다도 필자가 고갱의 작품을 인용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당시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갱이 작품의 제목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 질문(‘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이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며 사실 이러한 질문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나’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관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도 많은 삶을 살아본 경험이 풍족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내가 선뜻 한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얼마 전, 교정을 산책하면서였다. 다른 대학원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잠깐의 사회생활을 하던 도중에 대학원 진학을 두고 많이 고민 했었던 기억이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때 내렸던 선택으로 인하여 아트&테크놀로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현재 마지막 학기에 이르렀다. 과거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때가 졸업을 앞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은 상황은 조금 다를지라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졸업과 함께 박사과정으로의 진학이나 취업에 관한 고민들 때로는 석사과정을 선택하려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일상에서 늘 시작과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더 많은 고민과 신중한 결정 사이에서 늘 그렇듯이 고민할 것이고 결국은 매 순간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이며,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질 질문들이라 나는 생각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나는 내가 지각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렇게 늦다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 적은 두되 그저 몸 성히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는데,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뒤늦게 한 국제 민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다 늦게 무엇하는 짓인가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 두시까지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하지만 그 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아있는 석사 학위가 아니었다.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찔끔 흘렸던 눈물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이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반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한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세이 “지각인생”, 손석희 아나운서

 

 

마지막으로 공유하고 싶은 내용은 “지각인생”이란 손석희 아나운서의 에세이이다. 약 10년 전에 공유되었던 내용이지만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와 인상 깊은 내용은 비록 그가 남보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나보다는 한참 늦게 시작한 유학과 석사과정에서의 굉장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종이 한 장으로 남을 석사학위보다도 차가운 연구실에서 남몰래 흘렸던 눈물과 절실함에 대한 기억과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 이러한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는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결국은 그가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해 절실함을 갖고 있고 겸허하게 책임을 수용하는 태도 때문인데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수 없는 질문의 끝에서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지금 이때를 다시 돌아봤을 때 그 선택이 후회가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꿈과 열정을 잃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과 가능성을 믿는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잘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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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3:40

무한한 열정을 발산한 두 사람의 이야기

 

일반대학원 심리학과 석사과정 _ 최중휘

 

 

이번 글을 통해, 두 개의 소설책을 추천하고 싶다. ‘달과 6펜스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두 책의 장르는 매우 다르지만 헌신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젊을 때 뭔가에 몰입해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만 가는 것은 나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한 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래서 독자에게 짜릿함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뤘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만만치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뭔가에 미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각 이야기의 세부 감상은 아래와 같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빚어낸 비극 - <용의자 X의 헌신 / 히가시고 게이고 >

뭔가 하나에 몰두해서 산다는 것은 꼭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학이라는 세계에 몰두했고, 그것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건 그의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공 남자는 그에게 수학만 남은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할 뻔 했지만, 그 순간 옆집 사람에게 사랑에 빠져서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 후 그는 그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해서 그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아름답게 사라지고 싶었지만 모든 것엔 변수가 있었다. 수학이라는 완벽한 세상이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예상을 벗어나는지, 이 책에서 보여준다.

일이 삶의 수단이라면 삶의 목적은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사랑에 완벽함이라는 게 있을까? 흔히 아무런 조건 없이 존재만으로도 사랑하는 것을 완전한 사랑이라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까지 허락할 위험이 있다. 영화 '마더'에서 엄마는 아들의 범죄에 대한 목격자를 발견하자 본능적으로 그를 해치고 만다. 그렇게 보면 이상적인 사랑은 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존재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그 수학자는,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이런 헌신적인 희생이 나온다. 비록 그녀의 선택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끝까지 헌신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다. 헌신적인 사랑이라,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이 소설에서 수학 선생은 삶을 살아갈 이유도, 그만둘 이유도 없어서 자살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옆집 여자는 그 이후부터 그가 살아갈 목적이 된 것이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충성의 맹세.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결국 감정적이고 약한 모습으로 무너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욕망보다는, 순간순간 행복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더 현명한 태도인 것 같다. 하루하루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모르는 인생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이런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 -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하루아침에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왔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림만을 향해 달려가는 스트릭랜드(주인공). 그 과정 중에 한 치의 흔들림과 오차도 없이 올곧은 그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강렬한 열정이 오히려 그를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 사람, 죽음 등 세속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로부터 해탈하고 그의 온 정신은 오직 하나, 그림뿐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스트릭랜드와 같은 삶을 꿈꾸곤 한다.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만 열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면 좀 더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뭔가를 직업으로써 고를 때 그 직업 자체에 대한 선호뿐만 아니라 그 직업의 수입, 전망, 사회적 위치, 그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 등을 고려한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따져보면 결국 다 비슷비슷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선 이런 현실적인 조건이 모두 동일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된다.

스트릭랜드는 그런 우리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누구나 스트릭랜드처럼 잃어버린 꿈을 향해 달려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꿈은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접어야만 하는 수많은 젊은이를 비웃듯 스트릭랜드는 그런 현실을 빗겨나간다. 현실은 이미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그의 사후에나 인정받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가 직접 밝힌다. “나는 그려야 해요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102p(책속에서).

우리의 열정에 위와 같은 조력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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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3:39

21세기에서 맞이한다, <꾿빠이, 이상>

 

일반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_ 신도현

 

 

 

나는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수많은 가 있는 거요?

-가무극 <꾿빠이, 이상> -

 

혼란의 기대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극, 서울예술단 <꾿빠이, 이상>(9.21-9.30/CKL스테이지)은 김연수 작가의 소설 <꾿빠이, 이상>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 가무극이다.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에서 이상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진실과 거짓 간의 불분명한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면, 가무극 <꾿빠이, 이상>진실과 거짓 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통하여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연수 작가는 인터뷰에서 둘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은 언어로 표현한다. 나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글을 썼고, 오세혁 작가는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글을 썼다.” 비록 두 작품의 제재는 다르지만, 공통된 메시지는 존재하는 듯하다. 불분명한 경계.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정체성. 이 메시지는 가무극 <꾿빠이, 이상>을 관통한다.

<꾿빠이, 이상>의 메시지가 신선하고 기분 좋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받쳐주는 연출에 근거한다. 오루피나 연출은 인터뷰에서 김승희 시인의 언어를 빌린다.

“(이상은) ‘하이브리드 예술가이자 언제나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지적 노마드였다.

그는 소설을 시처럼, 수필을 시처럼, 시를 의료 진단서처럼 썼고, 시에 그림을, 기하학적 도형을, 숫자판을, 인쇄기호 등을 도입해 타이포그래피 등을 실험했다.”

오 연출은 이상의 하이브리드 예술가적 측면 혹은 이상의 콜라주성에 주목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꾿빠이, 이상>의 주제와 표현방식을 잇는다. 다양한 시선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시인 이상, 가무극이라는 총체적 장르, 그리고 극과 관객을 이어주는 이머시브 씨어터. 이 표현 형식들이 A도 아니고 B도 아닌 <꾿빠이, 이상>, 그리고 그 의미를 창조한다.

서울예술단의 브랜드 가무극은 음악()과 춤()와 극()을 혼합한 총체극이다. 서울예술단의 표현을 빌리자면 또한 가무극은 서구의 극문법 뮤지컬과 한국의 전통적인 극 표현 및 제재와 정서를 결합한 브랜드이다. <꾿빠이, 이상>에서 이상을 하나의 얼굴로 정의할 수 없듯,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역시 하나의 장르적 정의로 설명하기 어렵다. 뮤지컬의 문법을 기대하고 온 이에게는 현대 무용의 장을, 무용공연의 문법을 기대하고 온 이에게는 뮤지컬의 극적 서사를 제시한다. 혼합적 장르 특성 탓에 혼란스러워 하는 후기도 종종 인터넷에 게재된다. 이는 서울예술단이 수 년 간 단체의 극 정체성에 대해 질문 받는 이유이자 단체 스스로도 고심하는 지점이다. 허나 이 혼합성은 <꾿빠이, 이상>과 만나 되레 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그야말로 서울예술단이 할 수 있는 극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이다.

콜라주 같은 장르 가무극이 이머시브 형식를 만난다. 이머시브 (immersive), 말 그대로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극 형식이다. 극장과 로비의 경계가 없는 그 혼돈의 장소에서 극은 바로 시작된다. 관객들은 가면을 쓰고 극의 일부가 된다. 가면을 쓴 채 이상에 대해 그는 누구였을지 웅성이며 소리 내어 이야기한다. 이상의 단일한 얼굴을 쓴다. 그리고 무대 내부로 들어가 이상의 집합적 정체성 혹은 얼굴의 일부가 된다. 관객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이상의 일부이기에 그들은 집합적 정체성을 만들며, 동시에 그 속에 존재하게 된다. 삼면 무대 자유석에 앉아 그들은 어느 방향, 어느 시선을 정하지 않은 채 자유로이 이상의 얼굴 찾는 여정을 목격하고 증명한다. 하나가 아닌 모두 다른 맛의 양갱을 받아먹고 소화하며 이상의 얼굴 찾기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오감도난장장면에서 모두 가면을 벗으며 이상의 정해진 얼굴은 없다, 모든 얼굴이 이상이다라는 극중 이상의 깨달음을 함께 맛본다. 극이 끝나서도, 극장과 로비에서 나누는 극의 후기와 즉각적 반응들은 극 후의 또 다른 극을 이어간다. 각자 다른 감상이 모여 하나의 <꾿빠이, 이상>이 되기에 극은 끝났어도 살아간다.

이상의 얼굴 찾기. 이 극에서 이상은 진정 누구였을까하는 고민은 이제 어느 정도 지난 고민이 되어버렸다. 이상이 19세기에서 20세기를 좇았듯, <꾿빠이, 이상>20세기의 이상에서 21세기의 메시지를 좇는다. 20세기서 21세기까지 달려온 포스트모더니즘. 단일한 구조가 있다는 환상을 깨부수는 후기구조주의. 이상의 유일한 얼굴은 누구도 찾을 수 없다. 혹은 모든 얼굴이 그의 얼굴이다. 모든 얼굴이 콜라주 되어 그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치 여러 시선의 얼굴을 평면으로 그려내는 이상의 시는 알 길 없고 복잡하고 모호하며 그로테스크하다. 그리고 <꾿빠이, 이상> 역시 복잡하고 모호하며 어느 한 관객이 말하듯 과도해보일지 모른다. 여러 장르의 표현법을 섞어놓아, 이것저것 작품을 걸어놓은 전시회처럼 보일지 모른다.

허나 <꾿빠이, 이상>은 단지 이상에게 외치는 복잡하고 모호한 꾿빠이로 끝나지 않는다. 극에 참여한 얼굴들이, 관객들이 있는 한 극은 이어진다. 그들의 이야기로 극은 이어진다. 극중 오감도 난장에서 표현한 이상의 펄떡이는 심장처럼 잦아들다 또 뛰고, 또 뛸 것이다. 웅성거리는 관객의 감상 속에서 <꾿빠이, 이상>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이상이라는 거대한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그렇기에, 그야말로 고은 시인의 말대로, 혹은 <꾿빠이, 이상>의 대사대로 이상은 시인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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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3

 

어떤 위안

 

상수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20179, ‘대단한단편영화제에 다녀왔다. 영화 <연애담>의 감독 이현주의 단편 네 작품을 특별전으로 상영한다는 소식에 얼른 예매를 서둘렀다. 두 여자의 사랑을 담담한 색채로 그려낸 퀴어영화 <연애담>, 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의 대상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개봉 후에도 팬덤(‘팀 연애담’)을 형성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현주 감독 개인이 품었던 지난 짝사랑의 기록이라는 네 편의 영화, <과외>, <우리 결혼해요>, <Distance>, <바캉스>. 영화 안에 그의 삶이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연애담>을 비롯한 네 편의 단편 모두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서사가 실감나게 등장한다. 결혼을 종용하는 엄마 덕에 하는 수 없이 게이 지인과의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레즈비언, 유학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벽장 안의 레즈비언,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홧김에 애인에게 키스해버리는 레즈비언한 사람의 감독이 어떤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보는 것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는데, 한 사람의 또렷한 성장을 체감하는 동시에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서사나 변치 않는 그만의 화법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랬다.

이 글의 제목이 어떤 위안인 까닭은 여기서 내가 영화의 만듦새나 미학에 대한 시시콜콜한 분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전공한 적이 없고 그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러온, 그 날 그 극장에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연애담>을 보고 이현주 감독에게 이성애자들이 로맨스 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편지를 보냈다던 어느 동성애자 관객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날의 극장도 그랬다.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된 <과외><우리 결혼해요> 같은 작품은 화질이나 촬영기법, 등장인물들의 외형이나 미감, 서사의 진행방식 모두 지금과 같지 않아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졌다. 디지털 촬영의 세련됨에 익숙한 나는 민망해져 얼른 다음 작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객석에서 하나 둘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의 반대와 세상의 눈이 무서워 억지로 결혼을 하는 동성애자와 그 연인의 이야기는, 어쩌면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 익숙한 것이 아니었나. 수많은 비평들과 영화이론들이 명징한 언어들로 날을 세워 영화의 의미와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파헤치더라도, 결국 한 축에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부리는 날것의 감정들이 있다는 게 새삼 다가왔다. 그것을 위안, 위로, 공감 따위의 말로 겨우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와 정체성이 맺는 관계에 대해 건조한 언어들로 굳이 풀어내지 않아도, 우리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다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안다.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여 말해보자면 나일 법한’ ‘나와 비슷한모습을 발견할 때 즐거워한다. 불규칙하게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그림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디어에서 재현된 인물들을 구심점 삼아 저마다의 정체성을 구성해낸다.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동력은 아마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은바로 그것이 아닐까? 신부대기실에서 연인의 손을 맞잡는 하은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바람난 엄마의 애인더러 이 아저씨가 엄마 친구야? 영미는 내 친구야!”라고 외치며 키스하는 윤주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그린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은 따가운 비평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소수자를 재현할 때의 정치함은 물론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얼마나 많은 동성 간의 로맨스들이 결국에는 이성애 규범적인 로맨스 공식에 복무하고야 마는가. 그렇지만 많은 이론가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인 허다한 허물들을 명징한 언어로 폭로하기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사랑이라는 그 이름을 가장 살갗에 닿는 언어로 파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 영화 <연애담>이 가지는 미덕도 그것이었다. 분명 보편성이 특별함을 지워내는 순간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 순간에 극장 안 모두를 묶어내는 감정이 분명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이 모두를 휘감는 날것의 감정들을 이론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하게 배치될 수 있을까? 이를 포착해낼 수 있는 더 많은 영화 언어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한 힘겨운 커밍아웃,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결말, 눈물 흘리고 상처받는 퀴어들의 서사에서 벗어나 퀴어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퀴어임이 부각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사에 섞여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억압받는 이야기 또한 그 사회상을 고발한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현주 감독은 누군가에게는 잘 알고도 익숙한 이야기면서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재미있게, 그렇지만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을 절묘하게 탈 줄 아는 이야기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극장에 앉아서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결의 웃음과 울음을 운다는 사실이 가끔은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같은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는 누군가를 확인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그렇게 막연하게 나를 위로한다. 영화관에 온 이유도, 그래서 집중을 하는 정도도, 울고 웃는 순간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던 그 날의 극장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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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1

 

<효리네 민박>과 여성주의 예능의 미래

 

연혜원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

 

여성주의 예능이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예능이라는 극 자체가 여성예능을 어떻게 실패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의 돌무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예능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의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순결하고 신비스러운 성녀와 욕망을 드러내고 도발적인 창녀,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운 악녀의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 타자가 규정한 섹슈얼리티 속에서 하염없이 떠도는 사이 여성 출연자가 가진 고유한 이야기는 희미해지고 여성 출연자들은 도돌이표처럼 남성의 투사체에 갇혀 버리고 말 뿐이다. 한국 예능에서 아름다운 여성 게스트는 늘 남성 출연자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고, 못생긴 여성 코미디언은 언제나 좌절하길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여성 예능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KBS2<언니들의 슬램덩크>부터 EBS<까칠남녀>, On Style<뜨거운 사이다>, <바디 액츄얼리>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성 예능을 표방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까? 여성 예능이라는 포부를 밝힌 프로그램들의 가장 고전적인 오류는 출연자만 여성으로 채운 채 여성주의 예능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언니들의 슬램덩크>가 대표적이다.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여성 출연자로 출연진을 메우고 난 뒤 그들에게 남성적인 시선이 반영된 캐릭터를 덧입히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캐릭터는 아름다운 여성과 못생기고 웃긴 여성으로 양분되어 있다. 양분된 캐릭터들은 때때로 의외성을 보여주며 웃음과 감동을 주지만 일시적인 의외성은 캐릭터를 온전히 전복 시키지는 못한 채 사그라져 버린다.

 

여성을 응시하는 여성주의 예능

 

<까칠남녀><뜨거운 사이다>는 최근 한국사회에 불 지펴진 페미니즘 담론을 토크쇼 포맷으로 옮겨오면서 여성예능에서 여성주의 예능으로 도약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과거 방송에서 감춰져왔던 여성의 진짜 경험와 욕망을 여성의 목소리로 드러내고, 남녀관계와 일상생활에 대한 페미니즘적 시각을 보다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했다. 그럼에도 여성주의 토크쇼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범주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이다. 과도기라는 표현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결여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다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범주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범주 되어 있고, 왜 범주되었는지에 대한 집요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과도기를 거쳐낸 여성주의 예능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 예고편을 JTBC<효리네 민박>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효리네 민박>과 응시하지 않는 연습

 

<효리네 민박>이 가진 미덕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응시하지 않으면서 여성 주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지점에 있다. 이 같은 내러티브 방식은 역으로 여성 주체를 여성에서 벗어난 고유한 주체로 승격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와 아이유는 여자 연예인에게 뒤따라오는 흔한 수사들로 설명 당하지않는다. <효리네 민박>에서 편집과 자막은 이효리가 민낯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지 않으며, 나영석의 수많은 예능들이 여배우들의 배우스러움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이효리와 아이유를 가수스러움에 가두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효리네 민박>은 간편하게 가부장적인 규범에 기대어 극을 해석하지도 않는다. 이상순이 아무리 집안일을 잘 한다고 해서 이상순을 쉽사리 ○○주부라 부르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진보에는 제작진만큼이나 출연자들의 기여가 컸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결혼 생활과 여자 연예인에게 흔히 기대하는 역할극에서 탈피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이효리라는 개인의 수행적 역할은, <효리네 민박>에서 여성이라는 범주와 가부장적 상징틀을 해체하고, 출연자 각각의 고유한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예능이라는 장르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다소 경악스러운)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효리네 민박>은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사실 <효리네 민박> 이전까지 이효리 또한 여성 출연자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왔다. 그동안 이효리가 돋보였던 이유는 섹시한 여가수망가지는 여자라는 두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가 충돌하는 장면을 가장 매력적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는 이러한 전형성에서 탈피해 최초로 이효리라는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극의 성공이었다. <효리네 민박>은 예능 산업에서 남성의 섹슈얼리티 기준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의 가능성을 입증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효리네 민박>의 성공을 단순히 이효리 부부에 대한 대중들의 관음증과 이들 부부가 가진 예능감, 그리고 아이유의 스타성으로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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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47

베트남은 성장 중

 

이현지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

 

하계학술문화탐방을 기회로 베트남을 가게 되었다. 이전부터 왜 베트남이 매력적인 투자지인 것인지 궁금하였기에 이를 해소하는 것이 이번 문화탐방의 목적이었다. 밤늦게 베트남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35일동안 베트남의 다낭, 호인안, 후에를 둘러보았다. 이 글은 35일동안 내가 생각하고 느낀 베트남에 대한 글이다. 주의할 사항은 이 보고서는 객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관광객으로써 좋은 점만 보려하고, 대표적인 것만 보려하였기에 상당히 주관적인 글이 될 것이다. 이를 주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란다.

 

베트남의 경제

KOTRA에서 발간한 “2017 베트남 진출전략에 따르면, 201512월 한국과 베트남간의 FTA 발효 이후 베트남과의 교역량과 투자 규모는 점점 증가하여 지난 2016년에 베트남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수입 점유율은 18.5%로 중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또한 한국의 누적 투자액은 521억 달러로 베트남 최대 투자국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와 같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베트남이 젊은 국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이후 경제 개방을 한 베트남은 경제 개발의 후발자이며, 매년 5~6%씩 경제성장률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구 또한 약 1억 명으로 생산가능인구 비중이 2015년 기준 70.8%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베트남 시장에 진출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현재도 제조업에 대한 투자규모가 가장 크게 나타나지만, 최근 투자규모가 증가하고 있는 산업은 부동산이다. 20157월 베트남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및 임대제한 정책을 완화하여, 베트남에 살고 있지 않아도 외국인이 베트남에 있는 부동산을 취득하여 임대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오피스 시장에 대한 투자가 주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경제성장률 상승과 함께 매년 신생 기업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오피스 수요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오피스와 상업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의 주요 도시 중 다낭후에를 베트남 중부지역의 경제거점이자 관광도시로 지정하였다. ‘다낭은 레저 여행 수요와 한국을 비롯한 중국인 등의 여행 수요가 현재 폭증하고 있는 지역이며, ‘후에는 베트남 역사문화의 모든 것이 있는 도시로 부동산 투자 전망이 밝은 곳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카페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오토바이와 카페이다. 특히 카페의 경우 한국보다 훨씬 그 수가 많고 색다른 모습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카페의 문은 모두 열려 있으며 탁자와 의자가 카페 앞 길가에도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카페 중 한국기업인 공차도 다낭에 있었다. 한류 영향 때문인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카페들이 있었지만, 그 중 공차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호이안의 경우 구시가지로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이 예쁘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과거에는 건물들의 용도가 어떤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다양한 상점과 카페 및 식당으로 변모해있었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예쁜 호이안은 상점들의 간판 또한 개성이 있었다. 카페의 내부는 생각보다 협소하였지만 직접 커피콩을 갈아서 내려주는 커피는 맛있었다.

흔히 동남아의 이미지는 위생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카페든 식당이든 어느 곳을 가도 화장실이 항상  청결했던 것 같다. 화장실이 깨끗하고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위생도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사소한 점이 베트남의 위상을 높여주는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베트남의 카페나 상가들은 모두 유니크하고, 그들의 문화가 적절히 묻어나와 매력적이었다. 특정 관광지나 도시에만 한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프랑스의 식민지화로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현재에도 꾸준히 찾아오는 외국인들의 수가 많아서 인지 몰라도 상점의 인테리어들은 한국보다도 아름다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베트남의 거리

베트남 중부지역의 경제거점이자 관광도시로 지정된다낭에서는 계속 도시화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거나, 아파트 및 호텔을 건설하는 모습은 어디에든 존재했다. 매일매일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낭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듯하였다. 심지어 한국어로 부동산이라고 적혀있는 간판도 보였다. 부동산이 있을만큼 한국인의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들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다낭에 한창 건설 중인 호텔, 아파트 및 상가를 소개하는 정보가 많이 있었다.


 베트남은다낭의 바다 근처에 한국의 강남처럼 계획도시를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파트를 건설 중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아파트를 매매하는 것은 외국인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이곳 아파트 분양가는 20평대가 5천만 원 정도이며, 제일 가격이 비싼 것은 1억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이지만 한 달 월급이 평균 30만 원대인 이곳 사람들은 지불할 수 없는 가격임에 틀림없다.

베트남의 국가 부는 전체 중 상위 10%가 대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수영장이 있는 주택과 외제차를 보고 예상은 하였지만 베트남의 소득 격차 또한 큰 것 같았다.

 

베트남의 사람들

베트남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말이 안통해 손짓발짓으로 말을 건내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주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봐 주었다. 게다가 어딜가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베트남 국민의 평균 연령대는 낮다고 한다. 이들의 노동력이 베트남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 학술문화탐방을 통해 처음 계획하였던 것을 모두 보고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베트남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아직 개발될 가능성이 뛰어나며, 생산가능인구가 많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 투자를 하는데 발목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투자지로는 매력적일 것이다. 한국이 베트남과 꾸준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사과하고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베트남의 대표적이고 좋은 점만 보고, 베트남을 자세하고 깊게 알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지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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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41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으로부터 본 문화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중심으로

 

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이소라

 

관람객과 소통하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은 그림이고, 마크 로스코는 이를 매우 잘 충족시키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여 마크 로스코전을 문화 체험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주로 추상주의 작품들인데 추상화라는 예술 작품을 매개체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그림 속에 담아냈을지, 관람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추상화는 외부세계를 나타내는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예술가의 내면세계만을 표현하기 위해 발전한 양식이기 때문에 화가의 감정을 매우 잘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는 그림에 자기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이를 관람객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표현성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크 로스코전시는 그의 작품 경향에 따라 초기 작품부터 순서대로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의 그림이 시작되는 입구 부분의 벽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마크 로스코의 말이 있었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이는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이다.

 

1. 신화제작자(Mythmaker) -신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정

그의 초기작은 주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 많아서 전시장의 초반에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과거 고대인의 신화를 이용한 것은 감정적인 부분을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 더 잘 표현해서 그림에 담긴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마크 로스코는 예술가는 아이와 같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는 아이들처럼 자유롭고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했다.

또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rnst Heinrich Haeckel)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유년시절은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를 반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술가가 아이와 같다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는 원시인이나 고대인이고 이는 곧 예술가가 이들을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1942년 로스코는 신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거기에 자신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표현했다. 이는 당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인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신화적 그림에는 당시 사람들이 처한 비극적인 사회상을 직시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2. 색채의 시대(Age of Colour)- Multiform

로스코 작품의 세계에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구역에 다다르면 색채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색채이다. 특정한 색을 자주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정서를 나타내며 색채는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내는 색채에 따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의 크기도 점점 커졌는데 커다란 캔버스 안에서 색채들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퍼지다가 다시 뭉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마다 색채가 배치된 방법도 다양하고 색채를 그려낸 기법도 다양해서 그가 전하려는 여러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진1] NO.2 (넘버2) 1947 캔버스에 오일

 

 그의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을 사람들은 멀티폼(Multiform)이라 칭하며 종종 살아있는 유기체로 비유한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큐레이터인 해리 쿠퍼(Harry Cooper)는 그의 에세이에서 멀티폼을 생명 기원 이론인 원시 수프(primordial soup)’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이 만나 소통이라는 스파크가 더해지면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감정이 살아서 전달된다.

 로스코는 그림에 비극을 표현하여 관람객에게 비극적 숙명에 처한 인간을 직시하게 했고 비극, 황홀과 같은 인간 고유의 감정을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비극적인 모습의 그림 이면에는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모습도 존재해서 사람들의 감정을 치유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감정의 소통을 이룬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는 관람객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며 자신이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또한 그는 색채를 통해 자신의 회화 작품에 내면세계의 감정을 표현하여 관람객의 내면과 소통하였다. 그리고 한 곡의 음악처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달하여 관람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에 자신의 그림을 내걸 때는 그림의 배치에서부터 조명의 밝기와 비추는 각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서 그가 그림에 담은 감정이 보는 이에게 잘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술에 있어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진정한 예술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빚어진 예술은 곧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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