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 2. 14. 14:21

 

KBS <유머1번지>, 변방의 북소리, 회장님 우리 회장님, 영구야 영구야, 탱자 가라사대, KBS <개그콘서트> 그리고 tvN <코미디빅리그>까지. 여기 한 시대의 정치풍자웃음을 책임져왔던 이가 있다. 직접 만나보니 그의 직업만큼이나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웃음은 물과 공기다.” 돌아보니 그는, 그의 웃음 철학처럼, 우리 삶에 물과 공기를 선물하고 있었다. ‘웃을 일이 없는 세상에서 웃을 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퍽퍽한 국민들 삶에 한 평생 웃음을 선물해 온 장덕균 코미디 작가를 만나, 그가 전하는 웃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 및 편집 신윤희

 

 

. 웃음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콘텐츠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습니다. (게다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중 웃음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선생님께서 웃음에 매료되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장덕균(이하 장)> 제가 어렸을 때, 70년대 우리나라의 기본적 삶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때는 사실 풍족하지 않은 시대였고. 모든 면에서 여유 있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에 제가 행복했던 건, 코미디 프로를 보는 것이었어요. 코미디를 볼 때만큼은 저녁 반찬이 무엇이었든,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이었든 상관없었고. 단칸방에 네 식구가 다 같이 살아도 상관이 없었어요. ‘웃음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삶에 유일한, 절대적인 행복감을 주는 존재였던 것 같아요. 그 어린 나이에 TV속 배삼룡 선배님이라든가, 코미디언들의 웃음을 보면서 저기서 일을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80년대 <유머1번지>라는 프로그램에서, 그 시절 국민을 가장 재밌게 해주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웃음이라는 것이 제 삶의 직업적인 것이 됐죠.

서강> 코미디 혹은 웃음이 가지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아마 코미디를 안했으면 삶에 의미가 없었을 것 같아요. 저는 원래 상고를 진학했었어요. 우리 때는 실업계 학교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급이 되는 상고들은 졸업할 때 담임선생님 싸인 하나로 은행이나, 무역회사 같은 곳에 취업이 되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 소원이 상고 가서 은행 취직하면 얼마나 좋니?’ 그래서 일단 진학을 했어요. 그랬는데 갑자기 이게 내 길이 맞는 길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판단으로 고등학교 등록을 안 한 거예요. 제가 스스로 인생을 바꾼 사람인거죠. 상고 갔으면 은행권에 취직이 되어서 어떤 삶을 살았겠지만, 전혀 다른 길을 온 거잖아요. 바꾸고 나서 앞으로 너 뭐할 거야?’ 고민을 하다 코미디 작가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코미디 원고를 써서, 아무 신분도 없이 MBC라는 방송국을 찾아가서 당시 피디한테 원고를 보여주고, 작가로 데뷔했어요. (그런 일이) 전무한 일인데. 아무튼 제겐 절대적인 힘을 보여 준거죠. 코미디가. 그때 이쪽으로 길을 바꾸면서 생각한 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 유명해지고 싶다근데 지금 두 가지 다 이뤘어요. (웃음)

 

 

 

사진2 | <코미디빅리그> 포스터. (tvN 제공)

장덕균 작가가 현재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작품은 <코미디빅리그>이다. 그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는다. 17살이었던 장덕균 작가는 (그의 표현대로) 무모하리만치 직접 쓴 원고를 들고 MBC로 찾아갔다가 <청춘만세>라는 프로그램으로 데뷔한다. 후에 KBS <유머1번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으로 우리나라 최초로정치풍자 코미디를 시작한다. 정치풍자집 <YS는 못말려> 또한 최초의정치풍자 책이었다. 편집자주.

 

서강> 코미디/예능은 가장 트렌디하고 창의적인 분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야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일하셨다는 건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나름대로 유머감각(?)이나 아이디어를 얻으시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시다면?

> 공부해야죠. 개그에 대한 아이디어, 새로운 표현들을 쉬지 않고 계속 창출하려 노력했어요. 코미디를 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정해진 시간에만 일하는 게 아니고, 일과 후에 친구랑 술을 먹든, 잠자다가 꿈을 꾸든 항상 웃음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 저기에 아이디어가 없을까. 저는 볼펜하고 메모지가 제 주머니에 꼭 있었어요. 영화를 보러 가서도. 영화관 실내가 어둡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글씨가 안 써져도, 영화 보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메모를 하는 거예요. 그런 작은 메모지를 모아놓은 것들이 나중에 보면 포대자루로 2,3포대 있고 그랬어요. 그 메모에서 <YS는 못말려> 책이, 또 수많은 코미디 아이디어들이 나왔던 것 같아요.

서강> 작가로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이신가요?

> 웃음이라는 게 어느 정도 절제된 선을 잘 지켜가면서 시청자들을 웃겨야 된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담아야 된다.’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을 때 희열이 있죠. 우리가 공개방송 녹화를 하지만, 그 현장에서 그분들이 많이 웃어줬을 때, 그건 뭐 진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거든요. 그리고 또 방송이 나간 후에, 버스를 타고 출근할 때 사람들이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요. (웃음) 지금도 언론매체에 실리는 거보다는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학생들이 이야기할 때, 따라하고 그러는 걸 봤을 때는, 정말 아 정말 이 맛에 하는 구나이런 생각을 (하죠).

서강> 작가로서 겪었던 슬럼프도 있으셨나요? 현재 하고 계시는 웃음에 대한 고민이 있으시다면?

> 이런 표현을 가끔 쓰는데 입맛이 없어서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어요. 다 즐겁게 먹으면 되는 거고. 제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좋아해요. 삶에 대해 누구나 고통이 있겠죠. 우리가 표면으로만 보면 저 사람은 아무 고민이 없다그렇더라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나보다 더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내재적으로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장덕균씨는 얼마나 유복한 가정에서 살아서 맨날 재밌는 일만 하고 살아왔느냐고.” 사실 제가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놀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말 저만 어렵게 산 건 아니겠지만, 네 식구가 단칸방에서 대학 초년생까지 살았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셨어요. 술만 마시면 집 다 때려 부수고. 어머니는 애들 교육시키려고 남의 집 가서 일도 하고 공장 다니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거기서 만약에 제가 내 환경은 왜 이럴까?’ 그랬으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못 줬겠죠.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태어난 것은 네 잘못이 아닌데, 이렇게 사는 건 네 잘못일 수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죠. 누구나 일을 하다 보면 자기 일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 때가 있겠죠. 그런데 거기에 빠져 있으면 결국엔 자기 손해가 아닌가. 더군다나 제가 우리 개그맨들한테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즐겁게 일을 해야 된다. (괴로워하면서) 시청자에게 우리 것 보고 웃으세요.’ 하는 건 옳지 않다고 하면서, 최대한 저 자신뿐만 아니라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즐겁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서강> 요즘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면, 전통 코미디보다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더 많은 추세인 것 같습니다. 코미디의 위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코미디의 위기라는 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저는 몇 년 전부터 이걸 전혀 다른 시각으로 봤어요. (코미디) 편수가 줄었을 뿐이지, (리얼 버라이어티가) 던져놓은 상황에서 출연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 ‘저들은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것이다라는 것을 구성상에 넣는 게 리얼인데, 어떻게 보면 코미디라는 장르는 좀 줄었지만, 사실 코미디라는 원천소스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고 봐야죠. 어떻게 보면 버라이어티가 다 코미디화 되어서 그 숫자는 줄었을 수 있지만, 사실은 내제되어 있는 그 장르적 특성은 엄청 확대된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 코미디에서 활동하던 개그맨들이 리얼 버라이어티로 다 진출했잖아요. <12>김준호라든지, <무한도전>에 아직 정식 멤버는 아니더라도 오리지널 멤버로 활동하는 양세형이라든가 많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위기라 볼 필요는 없고. 맨날 위기라고만 보면, 숨통이 막히는 건데. 어떻게 보면 오히려 활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서강> 코미디나, 예능과 같은 웃음을 소재로 다루는 콘텐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또 이들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 우리가 어떤 조직에 있든 맡은 파트가 있잖습니까? 그걸 잘해줬을 때 그 조직이 융성해지고 발전할 수 있듯이 웃음이라는 부분도, 방송에 교양도 있고 다큐도 있고 다 있지만 코미디는 웃음을 주는, 즐거움을 주는 부분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서양 속담인데 얼굴이 안주다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마찬가지로 예능에 나오는 사람들은, 술을 먹으며 친구와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듯이 시청자들에게 안주가 되는, 술 맛나게 하는 그런 의미로 존재해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웃을 일이 없는 세상

 

서강> 요즘 20,30대가 가장 많이 듣고, 또 하는 말이 헬조선이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삶이 고단할수록 웃을 일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작금의 현실에서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저는 직업이 코미디 작가라 웃음을 매개로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제 자신도 웃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많이 따릅니다. 물론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일 이외에도,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적인 일을 볼 때, 또 사람들과 교류를 할 때도 역시 제가 쫓는 것은 웃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웃음이라는 것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서 얻어지는 웃음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웃는 웃음, 결국 물과 공기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에 웃음이 없다면 건조한 사막 같은 환경에서만 살아가야겠죠. 폭소를 터트리며 크게 웃는 것도 웃음이지만, 마음속의 어떤 조금의 기쁨이 일어나서 엷은 미소를 짓는 것도 웃음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힘들어, 큰 폭소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삶에서 미소라도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의 여유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한 없이 건조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갇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서강> 웃음에 대한 형태가 다양하겠지만, 웃을 일이 없다고 할 때 흔히 정치를 많이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정치가 국민에게 어려움을 준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풍자가 특히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최초로, 그리고 꽤 다양한 정치 풍자 유머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정치 패러디(풍자 패러디)의 의미와 역할, 미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물론 이런 생각을 국민들이 다 하겠죠. ‘경제라든가 이런 부분이 어려워졌을 때, 팍팍한 삶의 숨통을 좀 트이게 하려면 위정자라든가,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쟁(政爭)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켜야 (되는 것이 아닌가).’ 말로만 일자리 창출이고 어쩌고 그러는 거는. 그냥 말에 그치고 있잖아요. 실제로 젊은 사람들이라든가, 또 나이 드신 분들의 재취업이라든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정치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제가 <YS는 못말려> 책을 쓴 게 벌써 23년 전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 바람은 있었어요. 정치인들도 여유 있는 조크도 좀 하면서. 여야가 대치하고 싸우더라도. 좀 더 유머러스한 표현,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하면 좋지 않을까). 23년이 지난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아직도 여·야는 시대가 어느 시댄데, 세상이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도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은 그런 대치와 막말을 서로 주고받고 있고. 사실 이런 모습들이 삶이 힘든 국민들을 더 짜증나게 할 수 있죠. 제가 이런 책들을 내면서 바람이 있었던 것은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으면하는 바람이었죠. 항상 이야기하지만, 꼭 폭소만이 아니라. 그런데 지금 정치는 오히려 폭소를 주잖아요. 어이없는 웃음. ‘저 사람들이 정말 투표로 뽑힌 국회의원들인가?’ 생각이 드는, 수준 이하의 그런 것들을 하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국민들의 삶을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이겠죠. 우리도 경제가 컸다고는 하는데. 정치적인, 혹은 어떤 정치인들의 행태는 아직도 국민들 눈에 미흡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3 | <YS는 못말려> 표지. (미래미디어 제공)

이 책의 서문에서 장덕균 작가는 다수 대중의 삶에 대한 욕망과 (정치권력에 의한) 사회·정치적 욕망이 위배될 때, 하나의 욕구불만으로서 정치 패러디가 생산된다.”고 했다. 편집자주.

 

서강> 정치풍자 유머집을 으로 발간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하고 술을 한 잔 먹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최고 권력층인 대통령을 가지고 정치풍자집을 내면 왠지 느낌이, 대박이 터질 것 같다.’ 생각하며 저 혼자 메모를 했어요. ‘나중에 써야지.’ 그런데 다음 날 술이 깨니까 그때가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집권 시절인데, ‘지금 내가 제목을 재미있게 지어서 가령 두환이는 골 때려이런 제목으로 책을 내면, 어디 끌려갔다가 두드려 맞고, 경부선 철로에 변사체로 발견되지 않았을까.’ 그때는 그런 의문의 죽음들이 많은 때였잖아요.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 연설을 하시더라고요. “위대한 문민시대에~” 저는 그 위대한 문민시대라는 말에 이제 됐다. 적어도 이런 책을 내도 누가 잡아가고 그러진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책을 출간하겠다니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말리더라고요. ‘, 말이 그렇지 너 큰일 난다.’ 그래도 문민시대, 국민을 믿고. ‘국민들이 나를 보호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출간을 했죠. 그런데 기대했던 것에 10만 배 이상의 반향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책이 나온 게 모든 일간지 1면 톱 기사였고, KBS 9시 뉴스에도, 외신에도 보도됐어요. 아마 당시에 국민들은 그 책을 보면서, ‘이야, 진짜 민주화가 됐구나! 말로만 민주화가 아니라. 이제는 이런 책을 쓴 작가가 안 잡혀가는구나.’ 그런 실증을 제가 보여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강> 혹시 정치풍자를 하는 과정에서 외압같은 것을 겪기도 하셨나요?

> 없을 수가 없겠죠. 사실 권력자들의 주변과 그 밑에는 그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항상 있을 거 아닙니까? 정치 풍자 내용이 나갔을 때, ‘권력자들이 얼마나 안 좋아할까그런 눈치를 보겠죠. 권력 당사자께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내가 정치 풍자 대상이 되어도 좋다.’ 그렇게 말해도. 그 밑에 사람들은 아이고 또 그분 마음이 불편하시면 안 되는데하는 거죠. 가령 제가 많은 TV매체에서 그 시대의 정치 풍자를 할 때, TV 관리 책임자들이 넌지시 자기들 이야기는 안 다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우나. 사실은 거론되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5공화국때는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TV프로그램인데, 저희가 그 시대를 대놓고는 못 표현하니까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 때 이야기를 빗대서, 그 시대 설정을 해놓고 요즘 정치를 풍자하려고 했었죠. 녹화 전날 리허설 리딩까지 다 하고, 녹화 당일 날 스튜디오로 갔더니 그 세트를 없애버렸더라고요. (웃음) 우리가 세트 뜯었다고 하는데, 밤새 세워놓은 세트를요. 결국은 마지막 단계에서 방송사 고위층이 이거 좀 안 했으면 좋겠다뭐 이런 것 때문에 (웃음) 세트가 없어졌더라고요. 녹화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그래서 방송을 아예 못 냈던 적도 있었고. YS 정권 때도 당시에 YS의 차남 되는 김현철씨 문제가 언론에 불거졌을 때에요. 그런 문제를 풍자하는 걸 했는데. 당시에 사극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치고 있어서. 고전 왕실을 무대로 옮겨서, 그곳을 무대로 현실 정치를 풍자해보자. 그래서 17분인가 녹화를 했는데, 방송은 고작 2분 나왔어요. (웃음) 위에 사람들이 편집 전에 녹화된 테이프를 보고 야 이거 빼라, 저거 빼라하고 나니까 2분 남더라 이거죠. (웃음) 그래서 제 친구는 야 너 새 코너 한다고 해서 내가 보려고 했는데,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끝났더라.” (웃음) 2분밖에 안 나갔으니까 화장실 갔다 오니 끝난 거죠. 그러다 결국에는 그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런 어려움들이 많았죠.

서강> 정치 풍자 패러디 코미디를 만드실 때, ‘풍자 유머(양보할 수 없는) 선생님만의 원칙이나 비결이 있으셨나요?

> 어떤 장르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정치를 풍자한다는 것은 내가 어느 한 쪽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런 것은 아니에요. 철저하게 국민적 시각에서. 국민이라는 게 생각이 다 다를 순 있겠죠. 그런데 중요한 건. 대다수의 국민이 가진 보편적 정서, 국민들이 정치를, 정치인들의 행태를 바라보는 바람, 그런 기준에서 씁니다. 그러니까 양쪽을 다 알아야죠. 한쪽에 편향되지 않게. , 풍자라는 게 장황하게 앉혀놓고 설명하면, 그건 풍자적 요소가 결여된 거잖아요. 풍자는 임팩트 있는 포인트를 잘 잡아서 던졌을 때 시청자들이 , 이거는 뭘 이야기하려는 거구나그리고 나도 이런 것에 대한 문제점을 생각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잘 집었다.’ (생각하게끔 하는 거죠). 누구나 사실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답답함에서 풍자를 접근하는 거거든요. 작가도 그렇고. 그것을 보고 공감하는 독자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런 포인트를 제대로 집어서 압축성 있게 전달해주는 것. 제가 하는 일은 코미디니까. 거기에 거칠고 상스럽지 않으면서 피식혹은 큰 웃음 터트리면, ‘이야 이거 제대로 집었다.’ 이런 걸 작가로서 창출해냈을 때 혹은 독자나 시청자들의 반응이 왔을 때, 희열을 느끼며 정치풍자를 하는 것이거든요. 물론 그 문제 저변에는 우리 정치가 조금 더 나아져야겠다. 국민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아야겠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있죠.

서강> 요즘 정치 패러디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치 풍자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 TV라든가 어떤 매체로만 보면 옛날보다 사라진 게 사실인데, 사실은 요즘에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겼잖아요. 인터넷 포탈이라든가, SNS라든가 이런 것들이. 그래서 사실은 패러디가 많이 사라진 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봐야 해요. 하나로 집약되지 않은 것뿐이지. 지금은 풍자 전문 작가뿐만이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대단한 풍자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재야의 많은 분들이 있어요. 옛날에는 사실 그들이 표출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묻혀만 있었잖아요. 지금은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전문작가가 아니어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기존 단일 매체 ‘TV’라든지 이런 곳에서 정치드라마라든가, 코미디들이 없어진 상황이 됐는데. 이건 뭐 결국은 정책 당국자의 의지죠. 그 사람이 이런 게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느 시절엔 방송국 사장이 풍자를 왜 안 하냐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던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풍자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설사 대통령이 나를 풍자삼아서 해라고 말했어도 다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실제로 표출할 수 있는, 매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장해주지 않으면 사실은 어렵죠. 현실이 그래요.

 

. ‘웃음이라는 이름의 가능성, 혹은 대안

 

서강> 웃을 일이 없는 심각한 사회현실에서, 웃음이라는 이름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웃음이 가능성이나 대안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형태일까요?

> 사실 저는 웃을 일이 없어이건 결국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이 없다고 생각해요. 무슨 이야기냐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웃으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그 웃음 속에서 행복감이라는 걸 (느껴야 되죠). 폭소는 아니어도 옅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은 남을 통해서, 재미있는 친구를 통해서, 저 코믹한 웹툰을 통해서라든가. 그리고 내 자신도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거든요. 내가 남을 도와주면, 그 사람이 좋아서 미소 지으면, 내가 그 사람에게 웃음을 준 것이고. 사실은 그런 운동을 범사회적으로는 못하더라도 개인적인 노력은 하면서 살아가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에요.

서강> 이렇게 웃을 일이 없다는힘든 시기일수록 웃음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특히 더 무겁고 커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웃음을 생산하는 이들의 사회적 역할이나 의무는 무엇인가요?

> 제가 외국에 나가보니까 현지에 있는 유학생들한테 저를 소개하면 코미디빅리그 너무 좋아합니다라면서 실시간 인터넷 채널을 연결해서 다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코미디빅리그> 출연자들이 지방 공연만 가도 전석이 다 매진되는데. ‘이민 가서 사시는 분들을 우리가 한번 찾아가보자.’ 그러려면 많은 경비들이 필요할 거잖아요. 그런 제 꿈을 이야기했더니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들이 도움의 길을 만들 테니 한번 추진해보자(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계획을 실제로 외국에 가서 하려고 하는데 보러 오실 거예요?’하면 다들 표가 매진되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사실 상업적인 공연을 하려면 여러 번 공연을 하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 의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웃음을 만드는 이들의 의무라고 생각을 하고, 역할이라 생각해요. 저희도 순도 높은좋은 웃음을 드리려고 끊임없이 일주일을 고민하고 하니까. 이것을 더 적극적으로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뭔가 찾아가는 서비스를, 웃음을 가지고 해보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서강> 순도 높은좋은 웃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 웃음에 욕심을 내다보면 조금 과한 표현이 들어갈 때도 있어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이 있단 말이에요. 열이면 열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겠죠. 그러나 그 중 지양해야 될 것은 줄어야 된다는 말이죠. 불편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처음에 두 명이 불편했다고 하면, 다음에는 한 명 정도만. 이런 식으로 줄여나가는 거죠. 물론 이상점은 어느 한명도 코미디 프로를 보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하는 그런 웃음을 만들고자 하는 게 저희 지향점이에요.

서강>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 우선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코미디빅리그>가 시청자 여러분들의 사랑, 관심으로 뿌리를 내렸잖아요. 진짜로 감사한 일이고. 앞으로도 <코미디빅리그>라는 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찬란한 코미디 프로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려는 목표가 있어요. 또 아까 말씀드렸던 해외 공연. 전 세계에 우리 국민들이 다 있잖아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그분들 피부 가까이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실제 눈앞에서 (코미디를) 펼쳐줘서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다음 목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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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 6. 8. 12:19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비장애인’인 선생님께서 어떠한 계기로 장애문제에 관심을 갖고 장애인운동에 연대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책을 통해 1996년 발생했던‘에바다복지회 비리사태’를 접하게 되어서, 선생님께서 장애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셨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계기에 대한 선생님의 구체적인 단상이 궁금합니다.

 


김도현 활동가(이하 김)> 에바다복지회 비리사태1)가 벌어졌을 당시 저는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실 저도 그때까지 장애인운동 현장을 직접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장애문제를 운동적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는 특별한 각성이 없었어요. 선배들과의 소규모 세미나를 통해서 당시 한국 전체 장애인의 절반 이상이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이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건 말이 안 되는 건데 왜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까라는 정도의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96년도 말에 에바다복지회 비리사태가 벌어졌고, 시설 내부에서 벌어진 비리나 폭행, 의문사가 드러나면서 원장이 구속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희도 점차 잊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97년도에도 에바다 투쟁을 시작했던 선생님과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해아래집’이라는 공동체를 꾸리고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걸 알게 되었어요. 끝나지 않은 에바다복지회 문제를 보면서 장애문제가 단순한 것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조직된 힘이 없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학교 다니는 내내 에바다 투쟁과 관련한 활동을 계속 하게 되었죠. 그 시기에는 어떤 면에서 제대로 된 장애인운동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물론 장애인단체는 많았지만 장애인단체가 다 장애인‘운동’을 하는 단체는 아니거든요. 사실은 장애단체 중 다수는 자조단
체나 이익단체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에바다 투쟁을 할 때도 지속적으로 결합한 장애인단체가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시민단체나 인권단체, 지역의 노동단체와 연대해서 투쟁을 했거든요. 지속적으로 투쟁에 결합했던 유일한 장애인 단위가 노들장애인야학2)(이하 노들야학)이었죠. 그러다 보니 저도 인연이 닿아서 노들야학 교사들과 식구들, 박경석 교장 선생님과친해졌죠. 학교 졸업 이후 진로를 고민하던 와중에 경석 형님이‘너 어차피 임용고시도 안 칠 것 같고, 뭐 할래? 여기서 같이 무언가를 도모해보자’고
제안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에바다 투쟁에서 만났던 노들야학을 통해서 장애인운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진거죠.

서강> 사회운동의 주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주체가 반드시 사회문제 당사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장애인 운동을 하시면서 느꼈던 어려운 점들이 있었나요?


김> 소수자 운동이나 정체성의 정치라고 표현될 수 있는 영역에서 그러한 정체성을 지닌 대중들이 운동의 일차적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저는 장애인운동의 주체이기는 하지만‘내부적 연대자’로서의 주체이죠. 차이는 분명히 있죠. 노동자운동이든, 여성운동이든, 빈민운동이든 어떤 운동에서도 저는 당사자 중심이라고 하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기본이기 때문에 운동의 목표는 아닌 거죠. 그 원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목표인 것이지 그게 목표가 되는 순간 왜곡이 일어난다 는 거죠. 당사자 중심성을 가지고 무엇을 이룰지를 내세워야 하는데, 목표가 당사자주의가 된다면 왜곡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거죠. 비장애인인 제가 장애인운동을 할 때 겪는 어려움이라… 글쎄요.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는데 어떤 조직이든 뭔가 활동을 하는 거잖아요. 그럴 때 나타날 수 있는 갈등적 요소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소수자 운동과 비교해 보았을 때, 사실 장애인운동 내부에는 내부적 연대자들이, 그러니까 비장애인들이
많이 결합되어 있는 편이죠. 그건 두 가지 맥락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전통적으로 장애라고 하는 영역 자체가 운동을 통해 구성된 생태계였다기보다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형태의 단체가 많이 만들어졌던 측면이 있지요.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이건 굉장히 잘 들여다봐야 하는 데, 운동이라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당연히 여러 자원들이 필요하잖아요. 사회적 경험일 수도 있고, 학습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역량일수도 있고.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장애인들은 굉장히 많이 배제되어 왔다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그런 측면에서 또 비장애인의 연대가 필요한 영역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비장애인 활동가가, 누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활동에 있어서 실무적인 면이나 정보력, 활동력에서 장애인보다 더 많은 걸 갖게 되는 경우가 있죠. 장애인 입장에서 보면 저 사람이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은 사회적 경험을 갖고 있고 더 많은 실무를 하기에, 운동이나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비장애인 중심으로 될 때 발생하는 갈등이 있을 수 있고요. 반면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실무자로서 일할 때 부담을 더 떠안게 되는, 약간의 미묘함이 사실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 민주적으로 어떻게 잘 풀 수 있느냐가 그 단체가 건강하게 갈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인 것 같고요. 그런 지점 말고 원천적인 지점에서 제가 비장애인으로서 가지는 한계는 딱 그거에요. 내가 장애인으로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같이 공감하면서 발언을 했을 때 그때 발생하는 원천적인 한계 지점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저 같은 경우도 그런 점에 있어서 완벽히 자유롭지 않지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까 그게 제 고민의 화두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것보다 오히려 운동의 열악함으로 겪는 어려움이 훨씬 컸죠.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 드리자면요, 제가 2000년부터 노들야학을 시작했고, 예상도 못했는데 2001년부터 장애인 이동권 투쟁3) 이 시작되었어요. 1990년대 말에 거의 와해되었던 장애인운동이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복원되기 시작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현장 투쟁의 조직, 동력이 다 와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동권 투쟁을 할때 중심이 될 만한 조직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장애인이동권연대라는 연대 조직이 꾸려졌을 때 전문적인 운동조직도 아닌 노들야학이 연대체의 간사단체 역할을했었어요. 상근자라고는 딸랑 한 명뿐인 조직이 말이죠. 그리고 2003년쯤 발산역에서 장애인 한 분이 지하철 리프트를 타고 이동하시다가 추락해서 사망한 사고가 있어서, 제가 장애인 한분과 함께 광화문에서 선로 점거 투쟁을 했는데, 에바다 투쟁으로 집행유예가 걸려 있던 상태에다 괘씸죄가 플러스 되면서 그때 구속이 되었어요. 구속이 된다는 걸 알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경석이 형이‘야 너 내일 구속되지? 성명서 쓸 사람이 없다. 네가 규탄 성명서 하나 쓰고 들어가라.’이러는 거죠. 이게 재미있는 에피소드인데, 그래서 김도현 구속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제가 스스로 쓰고 들어간 거죠.(웃음) 초기에는 장애인운동이 잘 구축되어 있던 상태가 전혀 아니었기 때
문에 뭐 하나하나가 다 정신이 없었어요. 재정적으로도 그렇고, 활동가라는 면에서도 그랬고요. 사실 장애인운동을 이야기하면서‘세상이 장애인의 속도에 맞춰야한다. 변해야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의 속도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역으로 우리 내부의 속도가 너무 정신이 없었던 거죠. 그러면서 생겼던 어려움, 소통의 문제가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서강> 장애문제나 장애인운동에 있어서의 어려움들을 사회에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은데, 오히려 기존의 주류 매체나 언론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보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매스컴이나 주류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는 장애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BeMinor4)(이하 비마이너)를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이 많은데요. 발행인으로서 비마이너를 발행하게 된 계기와 비마이너의 취재방식과 운영방식이 궁금합니다.


김> 사실 운동을 할 때 사회 구성원이 특정 사회문제에 대해 어떤 이해와 인식을 갖고 있는지는 굉장히 중요하죠. 이동권 투쟁을 처음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투쟁의 방식에 대해 고민을 좀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이동권 투쟁을 할 때는 선로를 점거한다든지, 버스를 점거한다든지, 도로를 막거나 행사장을 점거하는 등의 점거 투쟁들이 많다보니까, 이동권 투쟁과 관련하여 여러 인권단체들, 사회단체들과 연대를 할 때 일부에서는 이 측면을 우려했었어요. 긍정적인 여론을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투쟁 방식 때문에 부정적인 여론이 만들어지면서 역효과가 나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때 노들야학의 교장인 경석 형님이‘나는 오히려 욕을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 욕을 한 바가지가 아니라 한 트럭이라도 먹어서 그런 식으로라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되어서 텔레비전 토론회라도 한 번 나왔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만큼 장애문제는 논의나 토론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담론 공간이나 언론에 대해서 굉장히 갑갑함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경석 형님이 그때 얘기했던게 자기 소원은 MBC 백분토론에서 장애문제로 토론이라도 한 번 해보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지난 15년 동안 지상파 방송에서 매주 하나씩 의제를 선정해서 토론을 했지만, 그동안 장애문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직접 비마이너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비마이너 창간초기에는 솔직히 장애인운동의 투쟁들을 알리는 것만으로 벅찼는데, 6년째 되어가니깐 어느 시점부터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하는 독자는 누구일까?’한편으로는 비마이너 매체가 장애인운동의 활동을 기록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장애문제
를 잘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는 대중에게 더욱 초점을 맞춰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사실을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통해서 어떤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최근에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확실히 독자들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요.

서강> 장애라는 개념이 규정되는 방식과 관련하여‘장애’의 주류적인 정의는 사회적인 담론을 구성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진 비장애인들에 의해서 뭉뚱그려서 정의되곤 하는데요. 그로 인해 육체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장애인’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라고 규정되어 묶인 다양한 사람들이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주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김> 이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네요. 일단 정체성이라고 하는 게 어떤 역할과 연결되기도 하고, 내 몸의 차이와 연결되기도 하는 등 사람은 다양한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고, 그 중에는 강하게 느끼지 않는 것들도 많이 있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중에 어떤 것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있고, 중심적인 정체성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르거나 부각되는 것도 있고. 여기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 소수자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체성이 왜 중심적인 정체성으로 나타나는가를 생각해 봤을 때, 아마도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겠죠. 어떤 정체성이 부각되고 중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회적 억압이나 차별과 맞물려 있다면, 사실 이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형식의 정체성 표출은 어떤 식으로든 저항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체화를 의미하는 단어‘identification’에서‘identify’는‘확인하다’, ‘발견하다’는 뜻이 있거든요. 결국은 내 삶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에서 어떠한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정체성이 구성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장애인으로 살면서 차별과 억압이라는 걸 발견하고 확인했을 때 드러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표현은 저항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단순히 거리 투쟁과 같은 저항뿐만이 아니라, 연극 등의 예술적인 방식일 수도 있고, 글쓰기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일 수 있겠죠.

서강>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등장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배제와 낙인으로 작용하게 된 이유는 노동을 통한 생산의 극대화를 위해 표준적인 육체를 필요로 하는 산업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보시는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는데요. 그나마 은폐된 공간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된다고 하더라도 생산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당하는 장애인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 보건복지부가 3년마다 한 번씩 장애인실태조사라는 걸 전국 단위로 해요. 이때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혹은 오해할 만한 통계 수치가 있어요. 노동과 관련된 걸 보면 장애인 실업률이 비장애인의 2배, 임금 수준은 절반으로 나와요.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실업률이 일반적으로 3~4%정도이고, 장애인 실업률은 이에 두 배라고 해서 7~8%로 표현되거든요. 100명 중에 7명 정도가 실업자라고 표현되는 건데, 문제는 장애인 같은 경우 2/3정도가 비경제활동인구예요. 이미 2/3, 60%이상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배제된 거죠. 그 나머지 부분에서 실업률을 잡으니까 7~8%정도의 실업률, 그러니까 92~93%의 취업률이 나오는 거죠. 사실 실업률, 취업률이라는 것이 장애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비경제활동인구를 빼지 않고 전체 노동 가능 연령 인구 중 취업한 사람의 비율을 따지는 고용률(employment to population ratio)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결국 장애인의 고용률은 35%정도가 되는 건데, 사실 이것도 허수가 많이 있죠. 어쨌든 문제는 장애인 중 2/3정도가 구조적으로 노동 자체에서 배제가 되어 있는 상황인데, 이에 대해
현 자본주의 사회가 적극적인 대책이나 방안을 제시하고 있느냐? 역사적으로 장애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요. 그래서 장애인 노동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접근은 상당히 근본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일단 한국의 경우 장애인 노동 문제를 다루는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라는 게 있고, 이 법의 핵심은 장애인의무고용제도5)에요. 장애인들이 워낙 구조적으로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어 있으니까 할당제를 두는 거죠. 현재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3%, 민간 기업은 2.7% 정도의 의무 고용률을 부과하고 있어요. 이게 잘 지켜지지 않는 게 사실 하나의 문제이긴 하죠. 그리고 의무고용제도 잘 안 지켜지는 것은 강제성이 약하기 때문이에요. 의무고용률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고용부담금을 내도록 하는데, 매년 변동이 되긴 하지만 이 고용부담금이 최저 임금의 60% 수준이에요. 그러다보니 대기업 일수록 그냥 법을 지키지 않고 부담금을 내고 말아요. 한국에서 고용부담금을 제일 많이 내는 기업이 어디냐하면 바로 삼성이에요.(웃음) 반면 프랑스
같은 경우 한국과 비슷한 의무고용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의무고용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부담금을 최저임금보다 높게 책정을 해요. 중소기업은 최저 임금의 2배예요. 그들 입장에서는 의무고용제를 안 지키고 부담금을 내는 것보다 장애인을 고용해서 최저임금 이상을 주는 게 더 나은 거죠. 대기업은 최저 임금의 3배가 되요. 이런 방식으로 의무고용제가 강제성을 갖도록 하는것이 일단 1차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에요.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은 노동을 점점 덜 필요로 하게 되고, 노동을 축출해나가
는 양태가 벌어지는데,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시장에만 맡겨지는 게 맞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상식이 되는 최소 규범을 담는 것이 법이잖아요. 최상위의 법인 헌법이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라고 규정하는 것이 있어요. 교육과 노동. 저는 교육은 권리이면서 의무인 그 위상에 나름대로 걸맞게 굴러간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국가가 의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그것을 공적인 영역에서 다룬다는 거죠. 교육은 공교육 시스템이 있고 플러스 알파로 사교육 시장이 있는 거예요. 그런
데 노동은 전부라고 할 만큼 그 대부분이 민간시장에 맡겨지죠. 그러니까 노동할 권리는 노동시장에서 각자 알아서 쟁취해야 하고, 공공근로나 사회적 일자리 같은 공공영역은 쥐꼬리만큼 플러스 알파로 덧붙여져 있고요. 그런데 노동 역시 헌법이 규정하는 권리이자 의무라면 교육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영역에서 보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공적인 노동의 구축이 함께 가지 않으면 장애인 노동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동권 문제를 이야기할 때 교통약자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이때 장애인, 노
인, 임산부, 어린이 등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노동문제도 노동약자라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지금의 노동약자는 장애인을 포함해서 청년이고 여성이고 이주민이고 청소년일 수 있죠. 즉 모든 이들의 노동이 보장되는 일종의‘노동사회의 유니버설 디자인’이 필요하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노동이 공적인 영역에서 보장되는 일종의 공공시민노동 체제를 만드는 것이 장기적인 어떠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서강> 언젠간 지하철을 타다가 어느 부부의 옆에 서게 되었는데, 그 두 분이 수화로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보고 되게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왜 나는 수화를 교육받아본 적이 없을까’하고 자문해본 기억이 납니다. 장애계에서는 점자나 수화와 같이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다양할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김> 방금 농인의 언어를 얘기해주셨는데, ‘언어권’이라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언어권이라는 개념은 다민족사회에서 소수민족이 자기의 언어를 지키는 과정, 나의 모국어를 가지고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걸 말하거든요. 그런데 언어권이라는 게 사실은 우리가 갖는 권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는 자유권으로 인식이 되지요. 저의 경우라면 제 모국어인 한국어로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으면 되는 건데, 공권력이 나타나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저에게 영어만 사용해서 사회생활을 하라고 강제하지 않는 한 제가 제 언어권을 침해받을 일은 없죠. 그런데 동일한 어떤 권리가 다수자에겐 자유권인데 소수자에겐 사회권일 수 있어요. 이동권을 생각해 봐도 그렇죠. 이동권은 비장애인들에게는 자유권이죠. 그런데 어떤 장애인들에게는 이동권은 사회권이에요. 이미 대중교통 체계 자체가 비장애인의 관점에 맞춰져 있다 보니 어떤 유형의 장애인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해요. 이때 사회권이 되는 거죠. 언어권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에는 농인들이 자신의 모국어인 수화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억압이 있었어요. 농인들에게 수화가 아닌 구화(口話)를 통해서 교육을 시키고 구화를 사용하도록 강요했거든요. 그래서 그 시기에 교육을 받은 농인 분들 중에는 상대방의 입술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독순(讀脣)을 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렇지만 이게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굉장히 어렵거든요. 또 자신의 모국어인 수화를 배울 기회는 잃어버리고 억지로 구화를 통해 소통을 하다 보니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지금은 그러한 억압적 정책이 철회가 되었지만, 농인들의 언어권에서 중요한 지점은 그것을 사회권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거죠. 즉, 단지 이제는 구화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니까 된 것이 아니라, 농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사회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적극적 정책이 필요하죠. 그렇기에 수화를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사회 서비스가 필요해요. 수화 통역이죠. 한국에 서의 활동보조서비스6)는 신체장애인들 위주예요. 활동보조 서비스가 영어로‘personal assistant service’, 즉 각 개인의 필요에 맞춘 개인별 지원
서비스거든요. 그럼 농인에게 필요한 활동보조서비스는 뭐냐 하면 자신의 언어권을 실현하기 위한 서비스죠. 우리나라 높으신 양반들이 외국 나가서 돌아다니면 그분들은 의사소통의 장애를 경험하지 않는데, 그게 그분들이다 영어를 잘해서는 아니잖아요. 그분들에게는 통역서비스가 적절하게 제공이 되니까 장애를 경험하지 않죠. 그런 식의 조치가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예요. 또 다른 측면으로 우리가 의사소통이라고 했을 때 잘 떠올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게 지적장애인이나 자폐성장애와 같은 발달장애예요. 그러니까 발달장애인이 지니고 있는 의사소통 체계나 방식이 또 다른거죠. 저는 어떤 면에서 보면 발달장애인의 의사소통 문제는 농인의 문제와 같진 않지만, 유사하게 볼 수 있는 지점도 많다고 생각해요. 법무부가 2013년 말부터 시행한 제도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진술조력인 제도라는 거예요. 발달장애인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형사절차상에서 불이익을 당할 확률이 높잖아요. 경찰 및 검찰조사 과정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또 형사와 검사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거죠. 이러한 상황에 처한 발달장애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진술조력인이에요. 쉽게 말해서 한편에 발달장애인이 있고 다른 한편에 비장애인인 형사와 검사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이들의 소통을 매개해 주는 사람이 지원되는 거죠. 비장애인의 말을 발달장애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고, 또 발달장애인의 얘기를 파악해서 형사와 검사에게 전달하고. 진술조력인제도가 굉장히 괜찮은 제도인데,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건, 발달장애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형태의 매개자가 단지 형사절차상에서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거죠.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필요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장애라고 하는 건 어떤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위치해 있는 거죠. 신체적 장애인이 버스를 못 타는 장벽은 그 사람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버스와 나의 몸 사이의 관계에 있는 거죠. 그 관계를 바꿔주면 장애가 없어지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지체장애인은 몸에 손상이 있어서, 장애가 있어서 버스를 못 탄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사실 의사소통의 장애도 그 사람의 몸에 있는 게 아니라 관계 안에 있는 거죠. 그 관계 안에 존재하는 장벽, 그게 사실 장애(disability)예요. 사회적 장애가 있고 신체적 장애가 있는데, 사회적 장애는 신체적 장애에 의해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사회적 장애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제도일 수 있고, 물리적 변화나 서비스일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구조를 바꾸거나 제도를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와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유권이 아
닌 사회권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죠.

서강> 사회적 차별과 억압, 배제를 당하는 장애인,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깊은 공감과 그것을 위한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장애 문제 해결을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 근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답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는 제도와 개인의 감각, 감수성, 인식이 분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맞물려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경석 형님이 장애인 인식 개선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비장애인들도 종종 그런 것처럼) 장애인도 불금이나 주말에 지하철 막차에서 오바이트하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 말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장애인의 일상이 비장애인의 일상과 섞여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 교통에서부터 공부하는 교실, 직장 등의 공간에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일상을 함께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식 개선이 된다는 거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일상의 공간으로 나올 수 있는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죠. 두 번째로는 장애인 문제를 타자화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문제로,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가 중요하겠죠. 요즘 보험 광고를 굉장히 많이 하는데, 예전에는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위해서 보험을 들라고 광고를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유병장수(有病長壽) 시대라고 이야기하면서 광고를 하거든요. 어차피 우리는 생의 어느 시기에는 일정한 장애를 경험하며 살다가 죽는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고령화 사회가 되다보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장애인과 같은 몸을 갖게 되고, 교통약자가 되는 거죠. 실제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어권에서는 ‘탭’(TAB, the Temporarily Able-Bodied)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요. 누구나‘일시적 비장애인’, 곧‘예비 장애인’이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이 지니는 한계도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그걸 평소에 생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는 않잖아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그걸 생각하고 싶어 하지는 않거든요. 또 성차별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여성문제는 남성에게 무관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죠.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이 될 리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여성문제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의 문제라고 인식해야 하는 거죠. 우리가 보통 여성문제가 해결이 되려면 남성이 바뀌어야 한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이건 남성이 여성문제와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잘 드러내주지요. 그러니까 여성문제에 여성이 한 일방이라면 다른 한 일방은 남성이라는 거지요. 이 두 가지 지점을 같이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결국 장애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비장애인 혹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 비장애인 남성인데 제가 장애문제와도, 여성문제와도 무관한 존재가 아닌 거죠. 이 양자를 같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1) 최성창을 비롯한 최씨 일가가 사유화한 경기도 평택시의 에바다복지회가 운영하는 에바다학교와 에바다농아원, 에바다장애인복지회에서 벌어졌던 비리와 인권유린 사태.(출처:한겨레21,박래군의 인권 이야기)(편집자주)
2) 교육의 기회를 놓친 장애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확대하기 위한 취지 아래 1993년 개교. 노들장애인야(野)학은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차별받아온 척박한 장애성인의 삶을 비틀어 보고 억압된 현실에 맞서, 이를 변화시켜 낼 수 있는 당사자 스스로의 생각
과 실천의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사업 및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출처: http://nodl.or.kr/)(편집자주)
3) 이동권(Rights of Mobility)이란“어떠한 목적으로 이동을 할 때,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그 수단 및 동선을 확보함에 있어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2001년 1월 말, 수도권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발생한 수직형 리프트 추락사고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본격화됨. 2004년 말 이동권이 하나의 권리로서 명시되고, 저상버스 도입의 의무화가 규정된‘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됨. (출처:<당신은 장애를 아는가>,김도현 지음, 메이데이, p.90~98)(편집자주)
4)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장애인이 처한 현실과 어려움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2010년 1월 창간된 인터넷 매체.(출처:http://www.beminor.com/)(편집자주)

5) 비장애인에 비해 취업에 어려움이 많은 장애인의 고용촉진을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주에게 일정 비율 이상의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의무
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에는 부담금을 납부하게 하는 제도.(출처: 고용노동부 홈페이지)(편집자주)
6) 활동보조서비스란 식사, 옷 갈아입기, 용변 보기, 씻기, 휠체어 오르내리기, 외출, 컴퓨터 작업, 전화나 대화 등 의사소통, 사무 등 다양한 일상 활동에서 어려움
을 겪는 중증장애인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급받는 유급의 인력이 활동 보조를 수행하는 것. 활동보조인에게 지급되는 급여의 재원은 국가와 지방자치단
체가 마련.(출처: 위의 책, 김도현 지음, 메이데이, p. 145)(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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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 4. 21. 13:24



인터뷰 및 편집 황민아, 양계영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감독님께서 작년에 기획하셨던 제17 회 서울 변방연극제1)의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니 굉장히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국가 폭력으로 발생한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 한종선 선생님 이야기, 성노동자들의 연극, 기업화된 대학에서 억압받은 학생들의 이야기, 쪽방촌 사람들의 삶, 이중적 국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꼬마 화교인 이야기, 고정된 성적 정체성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퀴어의 이야기 등 공연 프로그램 구성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임인자 예술감독(이하 임)> 변방연극제를 오랫동안 해왔어요. 제가 11년 간 변방연극제를 맡고 이제는 새로운 예술감독이 선임되었는데요. 변방 연극제가 처음엔 실험연극제의 정체성으로 시작했었기 때문에 어떤 주를 이루는 연극적인 문법과는 다른 것들을 추구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연극의 형식적인 실험들이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있었어요. 연극이라는 게 사회에서 어떤 진공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탐색하는 작업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놓여있는 위치나 그런 것들을 연극으로 담아내는 것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본격적으로 예술 감독은 2010년부터 맡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사회와 연극의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도시’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많이 했어요.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도시가 가지고 있는 장소의 기억들과 현재의 동시대성을 생각해보는 작업을 했었고요. 그러다가 2012년도에 연극 없는 연극, 정치 없는 정치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를 들면 88년도에 초연한 광주 5.18을 다룬 < 일어서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광화문 광장에 초청해서 공연을 했었죠. 그리고 사카구치 교헤의 <움직이는 집>이라는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거주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워크샵 프로그램도 했어요. 2013년도에는 <숙자 이야기>라는 평택 기지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개막작으로 올리게 되었고요. 또 형제복지원 한종선씨의 이야기를 다룬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을 변방연극제에 올리게 되었어요. 특히 이 두 작품을 올리면서‘그동안 내가 경계라는 설정을 안과 밖을 가르는 것으로만 여기고 변방 연극제를 진행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변방을 안과 밖의 개념에서 최전방을 외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변방이란 안과 밖의 문제가 아니라, 안과 밖 그 밑에 깔린 압사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형제복지원 사건 같은 경우는 특히 감금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그래서 변방의 의미라는 것이‘그 안에 깔려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변방 연극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있어서 경계의 모습을 단순히 이슈를 통해 찾는 것보다는 지속적으로 변방의 의미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도 예술가들의 작업들을 폭넓게 수용해나 가고, 누군가에게는 금기시되는 이야기를 비출 수 있는 통로로 변방 연극제를 기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서강> 제 17 회 서울변방연극제는 특별히 정부나 정책적 지원금에서 벗어나 순수후원과 모금을 통해 운영되었는데 이와 같은 운영방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임> 사실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문제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경계의 안과 밖을 오가면서 자유롭게 예술적인 주장을 해나가는 것에 있어서 정부의 후원이라는 게 바람직한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 요. 지원을 받는건 물론 좋은 일이에요. 사실상 예술의 공공성을 인정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지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굉장히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저항으로서의 목소리나 혹은 다른 목소리들을 낼 때, 정부의 지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게 바람직한가에 대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도 정부의 지원을 완전히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걸 바로 실행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올해 개막작으로 준비했던 성소수자분이 직접 제작하는 연극을 올리는데 있어서 공연을 올리지 못했던 일이 있었어요. 이런 경우 지금의 사회적 인식들, 특히 혐오 문제를 공연으로 담을 때 만약 예술가들에게 어떤 상황이 생겼을 경우 기획자로서 누군가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술가들에게 제약을 가하는 것보다 예술가들과 함께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정책적 지원금으로부터 벗어나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어요.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상당히 어렵잖아요. 그래서 작년 3월 달부터 모금학교를 다녔어요. 왜냐하면 그 전에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전에는‘변방연극제라는 이름으로 모금을 하면 그래도 누군가는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모금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짜고,“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적 제작”을 표면하면서, 다른 방식의 운영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서강> 예를 들어 17회 변방연극제 프로그램 중에서 성소수자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공연이 있잖아요. 이와 같이 타인의 작품을 빌려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연극과 달리 직접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공연, 연극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 가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임> 사실 연극이 전문 영역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러나 연극의 무대가 연극배우들만의 영역이라는 생각은 굉장히 근대적인 생각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일상의 문제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전달이 될 때, 형식적인 것들이 예술사조를 타고 흐름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지금 현대의 흐름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자유롭게 무대 위에 올라올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의 주체로 사건의 당사자들이 충분히 무대로 올라올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와 같은 작품이 그런 화두를 던졌다고 생각해요. 또한 <숙자이야기>의 양공주 서사 같은 것이 결국 우리 사회에 어떻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인 것 같아요. 단 한 번의 무대로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건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드러나지 않은 서사에 관한 무대가 좀 더 연극의 전문가들과 만나 형식화되고 다양화 되면서 하나의 목소리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예술 사조로서의 흐름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무대로 올라올 수 있고, 연극을 할 수 있죠.



서강> 개인적으로 함민복 시인의‘모든 경계는 꽃이 핀다’라는 시 구절을 좋아하는데요. 저는 애매모호한 경계의 속성을 통해 새로운 것에 대한 가능성을 볼 수 있어서 경계 혹은 주변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감독님께서는 변방이나 주변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통해 바라는 점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임>예전에는 경계를 정서적인 개념이나 지정학적인 개념으로 많이 판단했던 것 같아요. 사실 경계도 인식의 문제인데, 경계가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중심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한편으로는 존재하고 있지만 감각되고 인식되어지지 않은 것들이 경계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중국 단동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도시 자체가 중국과 북한을 잇는 일 때문에 발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중국 단동에서 무언가가 개입되면서 그 경계에서의 일이 중단이 되는 특수성을 보면서 경계라는 것이 앎이나 지식으로써는 지정학적인 부분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행위나 그것 자체로써의 인식은 긴장감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래서 건강한 경계의 역할이 중요하기도 하고요. 모든 중심도 계속 흘러가야 되는 게 틀림없고, 경계 역시도 마찬가지이고요. 연극도 일반 드라마로 구성된 연극의 서사보다는 숨겨진 서사들, 인물들을 찾아내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것이죠.


서강> 근래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선임 과정에서 나타난 불투명성, 부산국제영화제에 외압을 가하고 있는 부산시, 지난해 문화예술위원회 제작 지원 작품으로 선정되었지만 외압을 받았던 연극‘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와 같이 각 예술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예술에 대한 외압과 검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현정부의 문제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인지, 비단 정부가 바뀐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덜해질 것인가와 같은 복잡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임> 사회는 굉장히 안전한 테두리를 원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한 치라도 그 경계를 벗어나게 되면 거기서부터는 문제라고 지정을 해버리는거죠. 그래서 누가 정의할 수도 없는 정의를 가지고 지금도 사회 에서 어떠한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여겨지고, 어떠한 생각은 삭제되고 밖으로 내쳐지는 거죠. 그래서 테두리 안에서 행복하고 편안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저 사람들이 왜 저러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욕심을 부리는 걸로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인간은 안전한 테두리 안의 질서 속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감각하는 존재로서 경계를 넘어서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자유롭게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안전한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이와 비슷한 독재와 검열을 그래서 저는 반대하는 거죠. 독재와 검열의 주체에 국가만 있느냐? 저는 공모자도 있다고 생각해요.‘저 사람들은 지저분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이 사실상 이런 검열을 일으키는 것이죠.‘왜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려고 하지? 논란은 안 돼’와 같이 사회적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검열을 행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런 태도는 사회를 아주 공고히하고 하나의 중심적인 질서를 추구하기 때문에 예술은 그것에 대해서 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가장 자유로운 사유들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오늘과 내일로 이끌어가는 게 예술의 역할이잖아요. 예술적 상상을 통해서 사회의 중심 질서를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감각을 체현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하거든요. 이게 어떤 이념의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원초적이고 중요한‘자유’라든지, 이런 것들이 가능하도록 같이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죠. 하나의 질서에 동조하는 공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죠. 그래서 예술이 되게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 보이지 않는 흐름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법이나 제도나 정치라는 것들이 참여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문화나 생각들이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봐야 되거든요. 그런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은 예술을 향유하는 행위로서 다른 것들을 감각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요하고요.



서강> 얼마 전 한국에서 예술인이라고 지정된 사람들의 평균 월급이 무척이나 적다고 보도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예술인을 위한 복지 정책의 필요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로‘쟤네는 딴따라이고,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는데 왜 지원을 해주냐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사회적 인식과 정책적 뒷받침의 필요성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에 대해서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임> 공연예술 같은 경우에는 문화 경제학에서는‘비용질병’이라고 해요.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물을 생산할 때 생산물에 필요한 돈을 지불하고 노력을 하면 이익이 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공연예술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잖아요. 매일 연습이 필요한 공연 분야는 제조업과 같이 어느 정도 투자를 하고 나면 이익이 생겨나는 구조가 아니고, 계속적으로 투자를 해야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에요. 그러다보니 그 규모가 산업화된 구조가 아니라서, 가격과 산출물들을 생각했을 때 공연 때문에 연습하고 일한 비용이 티켓 가격으로는 나오지 않는 결과가 발생하는데 이게‘비용질병’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예술을 지원해야하는 이유가 발생하게 된 거에요. 특히 기초예술 분야에서는 산업적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비용질병이 발생하기 때문에 경제의 논리로만 봤을 때 기초예술 분야가 자연 도태되는 것이죠. 이러 한 문제 때문에 정부가 후원을 통해 지원하는 거거든요. 공연예술자체가 그런 경제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우 및 여러 창작들이 자신이 일한 만큼의 수입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 논리들이 예술복지법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고 있어요. 잘은 모르지만 프랑스 같은 경우는 사회 보장제로써 창작행위를 하다가 휴식을 할 경우에도 그것에 대한 실업급여가 나온다고 알고 있어요. 왜냐 하면 예술행위를 하게 되면 배우들은, 특히 누군가로부터 선택을 받아야만 일을할 수 있는데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요. 이처럼 예술분야가 실상은 불안정한 직업군이기 때문에 그 비는 시간을 국가가 지원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라 그것에 따른 세금의 납부라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고, 공동체 역시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같이 해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시급한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인 복지도 열악한 상태에요. 그리고 예술분야는 특히‘누군가는 굉장히 돈을 잘 벌고 있는데, 왜 예술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하지?’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복지 정책과 같은 원리들이 승자독식이 아닌 고립된 사람들한테 주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승자독식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지원제도로 운영이 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태이죠. 하나의 무슨주의로 얘기할 수 없는 사회의 복잡한 면모가 예술의 구조적인 불균형 문제에도 그대로 녹아나 있어요. 예를 들면 비정규 문제나, 여러가지 문제가 얽혀있는 판국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서 어떠한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가 중요하죠. 또한 편으로는 예술분야에는 도제식으로 운영되었던 전통이 있으니까, 사실 저 같은 경우에도 고백하건데, 축제를 운영하면서 인턴 분들한테 합당한 지급을 제대로 못한 적이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그 문제를 인식하 고 나서부터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그런 실수가 저한테도 역시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예술의 지원 문제들이 단순히 무엇인가를 진행하기 위 한 정책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에 얽힌 복합적인 문제들을 안고 함께 논의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 정부는 한류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적인 문화 산업들을 너무 강조하면서 그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초 예술들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데, 기초예술이 없으면 예술의 내일은 없거든요. 지금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는 것들도 누군가가 고독하게 고뇌했던 시간들이 농축되어 하나의 무대로 만들어지는 거고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쌓인 시간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일은 없는 거죠.


서강> 예술계가 외부적인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불공정 관행, 열정페이, 착취구조 등 문화예술계 내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모순 혹은 불합리에 대해서도 민감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 다. 혹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내부적인 노력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임> 내부적인 움직임은 있어요. 예술인소셜유니온(Artists Social Union)이라는 단체가 있고요. 청년 예술가분들은 청년 예술가네트워크를 만들었어요. 특히 요즘에는 예술대학을 다니는 학생들 같은 경우 무 분별하게 학과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는 하는데, 사회의 수요를 어떠한 정책에 대입해서 실행하는 경우이죠. 내일을 끌어다가 오늘을 사는 정책이 계속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오늘을 내일로 끌어가나가는 정책이 아니고. 계속 학생들을 오늘이라는 규격 안에 가두게 되면 학생들이 내일을 향해 나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느끼는 학생들이 같이 모여서 네트워크를 만들었어요. 사실 예술은 자기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으면 사실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 나오긴 어렵다고 봐요. 그게 있어야 진정한 딴따라도 되고. 그 수련은 보이는 수련도 있고, 보이지 않은 것도 있을 수가 있겠죠. 그런데 지금의 청년들은 수련을 할 수 있는 장의 제공으로부터 박탈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예술적 수련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을 어떻게 지원해줄 수 있냐고 하겠지만, 무르익지 않은 것들에 지원이 닿아야만 그 다음에는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거든요. 예술감독이라고 하면 남들이 보기엔 잘 살거



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 역시도 축제를 하면 늘 빚을 지거든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계속 해야 되고. 예술을 해야만 하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예술가들의 흐름이 좋은 목소리를 만들 어내는 걸 기대해봐야죠. 단일한 주장으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저는 좀 더 다각적으로 지원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어요. 연극인 분들도 연극인재단이 있어요. 물론 정부와 가깝긴 하지만, 민간인들이 만든 이후에는 자유롭게 긴급한 상황에도 지원할 수 있는 형태들에 대해서 고민을 해 나가고 있고요. 여러분들도 그런 자율적인 움직임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월급을 받으면 후원도 하시고(웃음). 그런 것들이 맞물려서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서강> 앞으로 진행하실 계획이 있는 프로젝트나 하고 싶으신 공연이 있나요?


임> 올해는 8월 달에 혜화동 1번지에서 8명의 연출가들과 함께 세월호 사건을 다룬 연극 시리즈를 할 생각이에요. 두 번째는 검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쓰고 하는 일을 작년에 했는데, 예술가의 본업은 작품으로 말 하는 것이니까 6월 달부터 10월 달까지 <권리장전 2016-검열각하>라는 시리즈로 약 20편의 작품이 검열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 발표가 이루어 질 예정이에요. 그래서 거기에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연극인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게 제 꿈이지만 지금은 작은 지역을 연구를 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작은 책방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1) 서울변방연극제는‘연극’이라는 공동체에서, 삶의‘무대’에서,‘온몸’으로, 이쪽, 저쪽이라는 경계 짓기를 너머, 배제되고 억압된 다양한 주체들의 존재가치 회복, 살아가기와 실천으로서의 예술, 우애와 환대로서의 만남과 토론을 통해 상실해버린 감각의 회복과 전환, 공동체에서의 새로운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2015년에 열린 제17회 서울변방연극제는‘변방은 최전방’이라는 시각에서, 최전방의 순수예술플랫을 통해“십오원오십전”이라는 주제어로 현재 한국사회에 제기되는 소수자와 혐오, 차별과 배제, 소외된 노동과 자본의 문제, 경계에선 주체들, 기업이 된 대학, 대감금의 역사 등 나와 다른 것에 대 해 혐오와 배제의 감정으로 넘쳐나는 한국사회 동시대의 구조와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출처:http://mtfestival.org/2015/intro03/)(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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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 12. 8. 01:31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콘텐츠를 만들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전달할 수 있는 영역은 무척이나 다양한데 그 중 방송사 예능 PD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권성민 PD(이하 권)> 어렸을 때부터 콘텐츠 만드는 일을 버릇처럼 해왔다. 만화 같은 것도 계속 그렸고, 소설 같은 것도 쓰고 연극도 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그러다가 사실은‘피디가 꼭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마침 대학교 졸업할 시기 즈음에 MBC 예능 PD 공채가 떴고, 한 번 써봐야지 해서 써본 것이 입사로 이어졌다. 콘텐츠 만드는 일은 학생 때부터 늘 계속 해서 그런지 막상 예능국에 들어가 보니 엄청 새롭지는 않았다. 그리고 처음 입사한 날이 2012년에 MBC노조가 170일 파업을 시작한 날이어서 예능국에서 이런저런 걸 느끼기에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나도 얼마 안돼서 바로 파업에 참여하였다.

서강> 개인적으로 예능 프로그램 중에서 <무한도전>을 즐겨본다. 얼마 전 <무한도전> ‘우토로 마을’ 특집을 보면서 예능 프로그램이 재미와 사회적인 이슈를 동시에 다루는 게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능프로그램이 재미와 사회적 이슈를 조화롭게 담아내어 시청자들에게 긍정적인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권> 어렵다. 일단은 김태호 선배가 <무한도전>에서 사회적인 아이템을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사람들에게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아이템을 한다고 해서 <무한도전>의 헤게모니가 무너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한도전>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하는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자기 위로가 되는 것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메시지는 ‘이게 문제다. 이게 잘못됐다. 이게 개선되어야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특히 예능으로 풀기에는 어렵다. 사실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영역에 있어서는 약자에 속하지만, 또 그 밖의 굉장히 많은 영역에 있어서는 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빈곤한 남성은 경제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약자지만, 젠더의 측면에 있어서는 어쨌든 남성의 영역(주류의 영역)에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빈곤의 문제를 다룬 콘텐츠에는 와 닿겠지만, 젠더의 문제에 있어서는 불편할 수 있는 거다. 기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송곳> 같은 드라마보다 <그녀는 예뻤다>, <응답하라 1988>를 더 보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희’를 위해서 콘텐츠를 소비한다. 사실 예능은 시청자를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능의 본연은 어쨌든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거니까 그 본 기능에 충실 하는 게 맞고, 예능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화하겠다는 태도는 굉장히 바람직하지 못 하다고 생각한다. 나영석 PD가 “한 번씩 쿡 찔러주는 역할을 하는 게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 또한 동의를 한다. 예를 들면 전혀 사회적인 예능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빠! 어디가?>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빠! 어디가?>라는 예능이 할 수 있는 일은 ‘자. 아빠가 애들이랑 이렇게 놀고 있는 모습을 봐. 귀엽지? 사랑스럽지? 재밌지?’라고 보여주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사회에서는 이게 안 될까?’라는 질문이 따라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저렇게 못 하지?’라는 질문의 대답을 예능이 해줄 필요는 없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위정자들이 해야 한다고 본다. 학자들이, 지식인들이 해야 되는 거다. 그게 예능이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서강> 어떻게 보면 예능이라는 역할이 되게 쉽고, 얄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능이 문제제기를 해놓고, 해결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게 예능의 한계라고 생각하는가.

권> 한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예능은 재미를 잃기 시작하면 그 모든 권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게 예능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능한테 그걸 요구할 필요는 없다. ‘예능이 이렇게 재미있게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데, 좀 더 그러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이야기할 수 있도록 뒤로 빠지지 말고 얄밉게 하지 않으면 안 되냐’ 물을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예능PD들한테는 그런 의무가 없다. 물론 언론인이긴 하지만 언론인이라는 타이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능PD이기도 하다. 그건 대부분의 예능 PD들의 자의식인데 스스로를 ‘딴따라’라고 부르면서 조금은 자조하는 분위기도 있다. 예능PD는 국민들을 즐겁게 해주라는 임무를 받고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대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충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능 같은 포맷에서는 ‘어 쟤가 나를 가르치려고 드네?’라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 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거부감이 훅-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예능이) 조금 얄미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서강> 현재 타파스2)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제작하시는 웹드라마 <치안전문주식회사 저스티스>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웹드라마에서 염력을 쓰는 주인공 정규가 치안 유지를 위해 초능력을 쓴다는 설정만 놓고 보면 한국형 코믹 액션 히어로물 같다. 하지만 주인공이 놓인 사회적 상황은 다소 심각하다. 국가가 치안을 사유화한 상황,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상황 등 드라마의 사회적 상황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는가?

권> 일단은 그 드라마가 생각보다 반응이 없어서 (웃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 기획은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실태 고발을 위한 콘텐츠이다. 사람들한테‘이런 노사정 합의안이 적용됐을 경우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이 처하게 될 현실은 어떠할까’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기획의도였다. 그런데 그냥 노동이슈를 이야기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일단 사람들이 보게 만들려면 어떤 요소를 넣어야 할까 하다가 ‘히어로물’같은 장르는 웬만하면 사람들이 보니깐. 별 재미가 없어도 특수효과가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어~~”하면서 본다. 그래. 그러면 그런 요소. 대중들이 크게 지루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포맷에다가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이슈를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히어로 액션물로 설정하여 제작했다. 드라마에서 히어로 노동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짧게 총 4화로 기획을 하고 거기서 다룰 수 있는 메인은 실제로 임금 피크제가 시행이 됐을 때 어떤 방식으로 기업이 저성과자들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몰아붙여서 해고할 수 있는지를 히어로물을 통해 풀어보려고 했다.

 


서강> 방송사 시스템을 벗어나서 독립된 환경에서 콘텐츠를 제작할 때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오히려 더 재미있었던 부분이 있었는지.

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일단 방송사 예능 쪽만 하더라도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 중 비정규직이 반 이상인 것 같다. 대부분 비정규직, 계약직, 프리랜서이다. 방송국은 어쨌든 콘텐츠 제작을 굉장히 오래 해 온 곳이니까 PD는 정말 딱 연출만 하면 된다. 연출하기 위한 모든 제반 조건들은 말만 하면 다 해주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연출 외적인 행정 요소들도 다 처리해주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PD들 중에서 자기 통장에 다달이 월급이 얼마 들어오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에 방송국 밖에 나가서 혼자 제작하려면 섭외부터 촬영, 효과, CG, 미술 등을 다 직접 해야 한다. 로케이션도 내가 직접 찾아가서 “선생님. 안녕하세요.”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고. 또 방송사는 ‘음반저작권협의회’랑 저작권 계약이 되어있어서, 아무 음악이나 그냥 가져다가 쓸 수 있다. 그런데 방송사 울타리를 나오면 음원 하나 쓰는 것도 굉장히 큰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SBS, KBS, MBC처럼 시작부터 방송사였던 회사들은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곳이다. 그게 방송사 시스템의 장점이고, 반대로 단점은 방송사도 사실은 대기업의 조직 구성이라서 개개인이 지켜야 하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또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정말 해볼 수 있는 기회는 PD 정년 중에서 많아봐야 2, 3번이다. 나머지 기간은 기존에 있는 프로그램에 로테이션 들어가는 거고. 어쩌다 내가 하고 싶은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도 프로그램이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여기저기서 간섭과 조직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엄격한 심의와 제작에 돈이 많이 들어가니깐 광고, PPL도 어쩔 수 없이 제작비 때문에 넣어야 한다. 나는 솔직히 제작비가 없으면 없는 대로 찍을 마음이 있는데 그게 회사 매출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내가 원치도 않는 광고를 얻어준다. 그러면 그걸 또 지켜야 한다.

서강> 방송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지금, 자유롭게 만들고 있는 콘텐츠는 무엇인가.

권> 사실은 MBC에 입사하기 전부터 늘 콘텐츠를 만들어왔기에 방송국을 벗어나서 콘텐츠를 만드는 경험이 엄청 새롭지는 않다. 옛날에 하던 것을 다시 하고 있는 기분이다. <치안전문주식회사 저스티스>를 만들기 직전에는 <트루맛 쇼>랑 <쿼바디스> 등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하신 김재환 감독님이 지원해주신 제작비로 신촌에 있는 오래된 장소들, 그 공간에 있는 주인공을 통해 신촌 다양한 공간성을 드러내는 기획을 해보고 싶어서 <신촌 기억전>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을 했다. 현재 첫 편까지 만들었다.‘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술집이 있는데 그곳의 공간성이 조금 독특해서, ‘아름다운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한 편을 만들었다. ‘신촌 독다방’이라든지 이런 곳들을 하려고 섭외를 하고 있던 차에 <치안전문주식회사 저스티스>를 시작하게 돼서, 잠시 중단한 상태이다. <신촌 기억전> 프로젝트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그래서 제작할 때 재미있다. 시간이 잘 간다. 일단 만드는 게 즐겁기도 하고. 사실 대본도 금방 써서 하루 만에 찍어서 이틀 만에 만들어서 냈는데, 그게 <치안전문주식회사 저스티스>보다 반응이 훨씬 좋다. <치안전문주식회사 저스티스>는 사람들이 많이 보게끔 하기 위해서 생각한 요소를 일부로 맞춰서 기획을 한 작품이고 <신촌 기억전>은 그 반대였다. 사람들 반응을 신경 쓰고 만든 <치안전문주식회사 저스티스>보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만든 <신촌 기억전>의 반응이 훨씬 더 좋더라. 기획의도라는 게 어떻게 전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서강> <신촌 기억전>처럼 추억 어린 공간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재밌는 것만 하면서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화가 나는 일들이 많은 세상인 것 같다. PD님께서는 2014년 인터넷 사이트‘오늘의 유머’에 MBC 세월호 보도 형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서 정직 6개월 조치를 받으셨다. 세월호 사건은 PD님께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였는가.

권> 이 일에서 사람들이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도 비슷한 것을 느꼈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굉장히 좋지 못한 보도를 했던 방송사에 소속된 직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왜 그런 보도가 나갔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해고가 되고 나서도 어차피 영상을 만들 수 있으니까 하고 싶었던 말을 영상으로 계속 만든 거고. 세월호를 위해서 릴레이 단식 같은 것도 할 수 있으니까 같이 했던 거고. 사는 대로 살되, ‘야 진짜 이건 아니지.’싶은 것만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어느 정도 가치관을 정립한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이상한 건지 내 생각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한국 사회 안에서‘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나?’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졌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사건에 대해서 의혹이 있는 부분들은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세월호 유가족들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고..... ‘..이건 진짜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MBC를 비롯한 언론사들의 보도들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났고 나 역시 MBC 직원으로서 MBC에서 그런 보도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내부적인 상황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고 생각한다.


서강>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연대’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영상들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개인적으로 세월호 사건 해결을 위한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가 클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작 다르더라.


권> 연대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해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여기저기 고공농성을 하고 계신 노동자 분들 되게 많다. 언론에서 하나도 안 다뤄줘서 문제인 거지. 고공농성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 관심도 없고. 그런데 수학여행 때문에 아이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침몰해서 죽었고, 여기에 좀 미심쩍은 게 있으니 설명 좀 해달라고 해도 사람들이 저렇게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세상인데 기업이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한 일에는 과연 누가 공감을 해줄까? 고공농성, 단식 투쟁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측은지심조차 없는 사회인 것 같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람들을 억압하는 방법들도 바뀌었다. 옛날에는 곤봉을 휘둘러서 때려잡고, 고문실에 데려가서 물고문을 했지만 지금은 그냥 밥줄을 끊고 있다. 여기에 맞서는 방법들을 아직 사람들이 찾지 못한 것 같다. 밥줄을 끊어 놓고 ‘네가 무능한 거야’ 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도 ‘그래 맞아. 네가 무능한 거야’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거다. 오로지 자기 계발서가 베스트셀러인 시대인 사회에서 저마다 자수성가의 꿈을 꾼다. 개인의 상황에서 봤을 땐, 굉장히 아름다운 상황일 수 있다. 먹고 자는 거 줄여가면서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본인이 열심히 해서 대가를 얻겠다는데. 그런데 오로지 나만 보는 게 문제이다. ‘그래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있지만, 나중에 이 시간들을 아름답게 그리워하면서 바라볼 수 있는 나날이 올 거야. 보상받는 시대가 올 거야.’ 그런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대가를 받지 못 하는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네 탓’으로 돌려버리는 거다. 즉 사람들은 ‘나도 언젠가 이 고통과 노력을 보상 받을 거야. 그런데 쟤는 지금 비정규직이야. 그럼 그만큼 노력을 안 한 거야. 그래서 보상을 못 받은 거야.’라고 생각을 하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구조를 개선해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임승차가 되어버린다. ‘나도 비정규직이 되기 싫어서, 이렇게 굶고 2-3평 밖에 안 되는 고시원에서 잠 줄여가며 개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너는 왜 비정규직이면서 그 정도 노력도 안 한애가 정규직 시켜달라고 떼를 쓰냐. 너는 나만큼 노력했니?’ 이런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거다. ‘세월호는 교통사고야. 배가 그냥 침몰해서 죽은 거야. 왜 떼를 써? 정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다. 한국 사회는 지금 그런 사회인 것 같다. ‘연대’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타인의 일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내가 세월호 사건에 분노하지만, 나는 감히 세월호 사건에서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말로. ‘네 일이라고 생각해봐.’ 라는 말만큼 힘이 없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 일이 아닌데? 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내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나는 내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할 수 있을 만큼만 해도 세상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자기 계발서 시대에 사람들이 개인의 탓으로 모든 원인을 돌리는 이유는 구조가 잘못됐다고 느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바꿀 수 있고,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개인에게 집중하기 시작하고 구조를 안 보기 시작하는 거다. 그래서 무력감이나 좌절감이 굉장히 무서운 거다. 무력감이나 좌절감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돌려버리느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어차피 세상에 영웅은 필요 없다. 사실은 영웅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내가 MBC문제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뛰어들 수 있는 건, 이게 내 일이 됐기 때문이다. MBC 노조파업에 170일 참여하게 된 것도, 이게 내 회사의 내 일이기 때문이다.

 

서강> 2014년 MBC의 정직 6개월 조치에 이어서 2015년에는 예능국에 대한 웹툰을 SNS에 게시했다는 이유로 MBC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으셨다. 언론 자유를 통해 사회 비판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방송사에서 제작자에게 내린 일방적인 해고 통보는 부당한 것 같다.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권> 해고 사유가 전혀 될 수 없는 일로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대법원까지는 사실상 이긴다고 본다. 사실은 그 부분에 있어서 내 개인적인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MBC 방송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떤 공적인 역할이 나한테 주어진 부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따라서 내가 감당을 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어쨌든 언론인으로서 내가 감당해야할 영역이 생긴 것이니깐. 해고 무효 판결이 난다면 일단 복직을 해야 한다. 복직을 해야 하는 게 맞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MBC 현 경영진들이 얼마만큼 법을 무시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최종적인 확인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MBC로 돌아가서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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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성민 PD는 2012년 MBC에 입사했다. 2014년 5월 17일 권성민 PD는 인터넷 공간에 올린 글을 통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MBC 보도를 비판했다. 그러자 MBC는 회사 명예 실추 등의 이유로 정직 6개월을 내렸다. 정직 종료 후 예능1국에서 경인지사로 전보 조치된 권성민 PD가 예능국 이야기를 다룬 '예능국 이야기' 웹툰을 페이스북에 연재하자 MBC는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권성민 PD에게 해고 조치를 내린 상태이다. (편집자주)


2) 한국탐사저널리즘 센터‘뉴스타파’에서 쉽고 재미있는 뉴스를 전달하고, 공감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페이스북 페이지이다. 현재 타파스에서 권성민 PD는 연출 및 제작을 맡고 있다. 타파스 유투브 링크 https://youtu.be/8vhnn0pTgF8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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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 10. 11. 22:06



Ⅰ. <월간잉여>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우선 <월간잉여>에 관해 묻겠다. <월간잉여>를 만들게 된 계기, 왜‘잉여’인지 등.. <월간잉여>에 대해 모르는 본지 독자(잉여)들을 위해 설명해 달라.

최서윤 잉집장(이하 잉집장). <월간잉여>를 창간한 2011년 말 경에 지금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것처럼‘잉여’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저 역시 그 용어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그 단어가 어쩌면 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당시 언론사 입사준비를 한 지 2년 차가 되던 해였는데 계속 낙방하니까‘정말 잉여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제가 당시 미디어 환경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2030세대의‘필자’라고 발굴된 사람들 외에 직접 목소리를 내는 통로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2011년 말에‘일베’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잉여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내 또래의 청년세대 일부가 극단적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논의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월간잉여>를 만들게 되었다.


서강. ‘잉여’를 위한 출판물이라고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청년세대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주로 실려 있는 것 같다. 청년세대가 즐겨 사용하는 인터넷 용어를 사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 많이 실려 있었다. 필진을 섭외할 때나 출판물을 기획할 때 읽기 쉽고 재미난 글을 모집하는 것이 잉집장님의 기획에서 중요한 부분인가?

잉집장. 저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은‘노잼’이기 쉬우니까. 1인칭으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서술한 글을 요새 말로‘썰’이라고 하는데, 썰을 푸는 것처럼 진솔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더 주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일기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다른 사람은 이렇겠구나하는 헤아림과 사회 구조에 대한 깨달음까지 담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서강. 요즘‘설명충’, ‘진지충’처럼‘노잼’인 사람들을 놀리는(혹은 조롱하는) 인터넷 용어가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재미없게 살다보니 재미없는 것을 피하고, 재미있고 편안한 것만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잉집장. 재미는 여러 측면과 여러 부분이 있는데, 요즘 공격적이고 즉각적인 것만 재미라고 생각하는 점이 안타깝다. 각자가 재미를 느끼는 영역이 다르다. 저는 개인적으로 외모 비하나 여성 비하를 이용해서 웃기려고 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노잼이다. 어떤 때는 그것이 폭력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월간잉여>를 통해 어떻게 유머를 구사해야 효과적일까라는 고민을 한다. 잡지에서 위트가 느껴지기 바랐는데, 재미있었다고 말씀해주시니 그 점이 전달된 것 같아 좋다.


서강. 원고 모집 등 운영 방식은 어떠한가?

잉집장. 원래 <월간잉여>는 무가지였다. 광고를 통해서 계속 제작비를 담보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꿨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광고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유가지로 전환했는데, 그 당시(2012년)에 최저 임금이 4860원이어서, 한 부의 가격을 4800원으로 정했다.1) 그런데 판매 수익은 제작비를 충당하는 정도이다. 이윤을 낸다거나, 잡지를 만드는 데 제가 투자하는 시간에 대한 비용적 보상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원고료를 지급할 수 있는 수준의 수익이 안 됐다. 사실 예전에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잡지가 많지 않았고, 출판된 잡지라는 물리적인 결과 그 자체로 만족하는 분들이 계셔서 원고료를 안 드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덜 했다. 그러나 최근 매체도 많이 생기고, ‘열정페이’문제가 대두되기도 하면서 원고료를 못 드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마음이 무겁다. 특히 글을 반려할 때 너무 죄송하다. 원고료도 안 받는 걸 알고도 글을 주신 건데... 그래서 뭐라도 지급해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요즘 개인적으로 돈을 모으고 있다. 원고는‘이런 주제, 이런 키워드로 언제까지 글을 받겠다.’라고 홈페이지, SNS 등에 공고를 한다. 지금까지는 여러 주제를 포괄할 수 있도록 주로 키워드로 공고를 냈다. 거짓말, 전쟁, 봄, 호구 이런 식으로 말이다. 호구 같은 경우는‘9월호’여서 호9라고 했다(웃음). 그런데 아까 말한 것처럼 일기에 머무르는 글이나 이미 타 매체에 실린 내용의 반복이라고 여겨지는 글은 죄송하지만 반려하기도 한다. 가끔 주변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그럼그것에 대해서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마감일을 알려주고 손가락을 걸어서 필진 섭외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지키지 않으면 손가락을 자르러 가겠다.”고 협박을 하면서 말이다(웃음)2).


서강. 기다리는 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매달 오프라인으로 만나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이며, 혹시 다음 호(18호)는 계획하고 있나?

잉집장. 우선 18호는 올해 11, 12월 즈음에 내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간 원고료에 대한 부담과 걱정, 방향 등에 대한 생각 때문에 못 냈는데, 내년에 총선 등이 있고 해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에 있을 일에 대한 여론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강. 서점에서 <월간잉여>를 사려고하니, 입고되는 곳이 소수일뿐더러 지정된 판매 장소를 제외하고는 구하기가 힘들다. 지방의 경우는 더욱 구하기가 힘들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유통이 되어 잉여들(소비자)과 만나게 되는가?

잉집장. 배본사와 계약을 하고 납품을 하면 편리하지만, 재고 공간과 자본 등이 필요하다. 그래서 <월간잉여>는 배본사와 계약을 하지 않고 소규모 독립출판사 몇 개와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만 보낸다. 요새는 기술이 좋아져서 디지털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면 인쇄를 해서 저희 집으로 보내준다. 그때그때 다르지만 보통 1천 부 이하로 찍는데 그러면 저는 그것을 일일이 가내수공업으로 포장해서 서점이나 독자에게 개별적으로 보낸다. 어떻게 보면 귀찮다. 그래도 저 같은 경우는 사업자등록과 정기간행물 등록을 해서 온라인 서점에도 입점을 할 수 있었는데, 소규모 출판물 같은 경우는 ISBN 코드가 없어서 소규모 서점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Ⅱ. 출판 문화


서강. 최근 독립 출판 혹은 소규모 출판, 대안 출판 등 새로운 형태의 출판물이나 출판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접하게 된다. ‘독립 출판’이 뭔가?

잉집장.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세미나와 전시회를 했었는데, 거기서의 정의는‘독립출판물 서점에 유통이 되면 독립 출판물이다.’라고 독립출판을 정의하더라. 독립출판 서점이라 함은‘유어마인드’같은 곳을 일컫는데, 소규모 출판물 제작자는 독립 출판물 취급점에 자신의 출판물을 판매한다. 이때 서점 주인은 또 다른 편집자가 된다. 자신이 셀렉팅을 한 것으로 서점을 꾸려놓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저는 각 독립서점의 의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독립출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작자의 의도다. ‘이 책이 시장에서 얼마큼 팔릴 테니까 우리는 이 정도 예산을 써서 누구를 섭외하고 마케팅해서 책을 내자.’는 것이 기존 출판사의 상업적 기획 방식이라면, 독립출판은 그에 비해 상업적인 고려가 훨씬 적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에 더 충실하다.


서강. <월간잉여> 같은 경우에는 독립출판 가운데 부수를 많이 찍는 편인가?

잉집장. 그렇다. 아주 조금씩, 예를 들어 10~20부 정도만 찍어서 유통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보통은 300부 정도를 찍으시는 것 같다.


서강. 최근 독립 출판에 대한 대중의 주목과 관심, 많은 사람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독립 출판문화에 대한 잉집장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잉집장. <월간잉여>의 존재에서 동기를 얻고 용기를 내는 것은 아닐까?(웃음) 원래 사람들은‘누가 그런 걸 한다더라, 재미있다’는 말을 들으면 확 지를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이 생기는 것 같다. 최근 몇몇 사람들이 참여하고 재미있어 보이니까, 덩달아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 같다. 종이를 통해 물리적으로 잡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사람도 많아진 것 같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디지털 파일만 인쇄소에 넘기면 되니까 이전에 비해 제작 절차가 간편하다. 그렇지만 결과물을 받으면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자기 존재 증명을 스스로 하는 것이 자존감을 찾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끼고 노력을 증명하는 결과물은 맞는 것 같다. 저는 자존감이 낮은 편은 아니었는데, 2년 간 언론사에 입사하지 못하면서 자존감이 꽤 낮아졌던 것 같다. 그래서 저 스스로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욕구로 잡지를 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강. 독립 출판이 기성 출판문화와 다른 점은 무엇이며, 안타깝게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단점은 어떤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잉집장. 결국 선택을 받아야 하는 곳 입장에서는‘갑질’이라고 느낄 요소가 있지 않겠는가? 새로 만드는 출판물의 경우에는 서점에서 입고를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월간잉여>는 잘 팔리는 편이고, 서점에서 환영하는 매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산이 느리다. 일이 많고 바쁜 것은 이해하지만 두 달에 한 번도 정산을 안 해주는 것은 좀 섭섭하다.


서강. 정산을 몇 달에 한 번 받고 있나?

잉집장. 어떤 경우 6개월에 한 번 해준 적도 있다. 잘 안 팔려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경우는 정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에게 다 팔렸으니 추가로 출판물을 더 달라고 요청을 할 때이다. 언젠가 독립출판물의 정산과 관련한 글을 모 매체에 기고한 적이 있는

데, 글을 써서 그런지 몰라도 왠지 그 이후로 정산을 잘해주는 느낌이 들긴 했다(웃음).


서강. 그렇다면 독립 출판 시장의 시스템에서 개선되어야 하는 점과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점은 무엇인가?

잉집장.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 중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정산과 관련한 것이다. 독립 출판물이 워낙 다품종 소량 상품들이니까 매입, 판매는 물론 정산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안 팔리는 책이라면 팔릴 때마다 정산을 하고, 잘 팔리는 책이라면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정산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규모 출판물 전문점 같은 경우 예산 문제나 시장성을 가늠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선매입을 해서파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소규모 독립 출판물의 경우, 제작자가 잘 되면 출판사도 잘 되는 얽힌 관계인만큼 서로를 생각했으면 한다. 기존에 있는 출판문화에 반대하거나 아니면 소규모로 이런 출판물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면 좋지 않을까? 서로 함께 잘 될 수 있는 방향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재미있는 시도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소규모 출판물 전문점 사장님들은 자신의 공간을 독자와 만나는 장이나, 워크숍 장 혹은 직거래 장터로 활용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신다. 대표적으로‘유어마인드’는 독립 출판물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언리미티드 에디션3)을 최초, 최대로 도입한 곳이다. 좋은 도전들을 하시는 것 같다. 이런 점은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서강. 종종 문학계의 권력, 출판 권력의 문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독립 출판 혹은 출판물은 이와 정반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잉집장께서는 독립 출판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잉집장. 그런데 요즘은 '문학 권력' 같은 그런 권력들이 많이 해체되지 않았나? 사람들도 그런 데에 비판적이니까 점점 더 도태될 것 같다. 저는 이미 그런 권력들이 많이 해체됐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독립 출판이 등장한 것은 권력의 해체 과정을 드러낸 사례라고 생각한다. 기성출판물들도 독립 출판화되는 부분도 늘어나지 않겠는가? 실제로 요새 1000부, 2000부씩 기획해서 내는 책들도 많다고 들었다. 작은 시장들을 노리는 기성출판물들이 많아진다면 독립출판과 의도는 다르겠지만 다양한 결과물이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강. 그러면 기존 문학, 출판업계가 가지고 있던 권력이 해체되고 있던 시점에 독립출판의 등장이 긍정적인 효과 혹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보시는 것인가?

잉집장. 그렇다. 앞으로도 클리셰가 되고 관습화되는 부분을 많이 깰 수 있는 기획이 독립출판에서 지속적으로 나올 것 같다. 기성출판의 문법이나 형식에서 독립출판물은 퀄리티가 낮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다르다고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도 책이 나올 수 있구나, 재미있다."고 여기게 되면 기성 출판물에 영감에서 주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여태껏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등단 과정을 거쳐‘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고, 책을 내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쳤다면, 이제는 작가가 되고 싶으면 자신이 원하는 책을 만들어서 출판하면 스스로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이것도 기존 관습을 해체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결국 글로 승부를 볼 수 있고, 그것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선순환 될 것 같다. <읽어보시집>이라는 책이 최근에 많이 팔렸다. 저자인 최대호씨는 등단 과정을 거치진 않았지만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시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Ⅲ. 잉여 이야기


서강. <월간잉여> 외의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잉집장님의 글을 만나볼 수 있다. 언젠가는 기성 매체를 통해서만 잉집장님의 글을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러니까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잉집장님의 ‘기성 매체로의 진출’로 인해 <월간잉여>가 폐간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궁금증(혹은 우려)이 생기기도 한다.

잉집장. 월간으로는 아니라도 독자 분들이 계속 <월간잉여>를 원하신다면 계속 업로드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저는 이 잡지를 내는 것이 저의 단일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를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는‘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의 지점들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고, 그 욕망의 지점을 환기하거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활동들을 계속 할 것이다. 그 매체는 <월간잉여>나

‘페북 잉여짓’일 수도 있고, 어떤 문화 행사가 될 수도 있다. 저는 다양한 통로를 열어놓은 상태이다. 그때그때 제가 발견한 문제의 지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게 되면 그것을 할 것 같다. 어쨌든 원하신다면 드물게 내더라도 폐간은 안 하겠습니다(웃음).


서강. 우리 모두는 꿈꾸는 가치가 있다. 잉집장님께서 <월간 잉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잉집장. 세계 평화?(웃음) 그냥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자존감을 낮추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고 혐오하고, 편견을 갖는 것을 문제라고 느끼고 바꿀 수 있도록 논의를 거치면서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싶다. 또한 시스템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작업도 계속 할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시스템은 돈이 원래 많게 태어난 사람들은 계속 많아지고, 적게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적은 돈으로 노예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이 부정의한 것 같다. 기술 발전이나 기계의 발달로 얻어지는 이윤을 비롯해서 많은 가치가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총선과 대선 등 선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도록 새로운 구조,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의로운 것 아니겠는가?


서강. 본지의 독자들은 대부분 대학원생이다. 즉, 대부분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를 ‘학문’을 통해 이루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근래의 대학원에서 가치를 논하는 것은 진부하며 ‘노잼’이라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통해 본인이 꿈꾸는 인생의 가치를 이루고자 하는‘대학원생 잉여’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

잉집장. 최근 대학 내에서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신분을 공통점으로 하여 대학 외에서도 뭉쳐지는 조직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예를 들면 <인문학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들이 있다. 여러분 내부의 공동체만이 유일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지 않나? 사람들이 제일 비겁해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이거 아니면 나는 갈 데가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이 아니어도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위로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저는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웃음).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겠지만 소속 대학원 내부의 조직원하고만 교류하지 말고, 타 학교 대학원생들 간의 커뮤니티도 가입하고, 외부 조직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보시는 것은 어떤가? 위로도 되고, 학문적 자극도 얻을 수 있고, 고민이 있을 때‘외부인’이니까 해줄 수 있는 정확한 통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관계에서 해답이나 위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한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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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년 당시 4580원이었다. 2013년 최저임금이 4860원. (편집자 주)

2) 본지 편집장도 인터뷰 말미에 잉집장과 손가락을 걸었다. (편집자 주)

3)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은 2009년 1회를 시작으로 매년 진

행되어 온 아트북페어, 독립출판의 시장이다. (출처: http://unlimitededi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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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 6. 22. 16:07


함께 만드는 도시


인터뷰 및 편집_채다희, 황민아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건축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비전문가로서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하면 미술이나 영상 등은 떠오르지만 건축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건축가이며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두 분야를 어떻게 아우르며 활동하고 있는지 소개해달라. 


하태석(이하 하)> 아시는 대로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고 짓는 사람이다. 하지만 건축은 도시 안에서 건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가의 아이디어는 그림, 드로잉, 모형 등으로만 남기도 하고 전시를 통해 공개되기도 한다.   

2010년에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전시를 할 때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누군가에 의해 탑-다운 방식으로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건축물로 구현하면 그곳에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것이 우리가 도시를 점유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좋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반대로 바텀-업 방식으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며 도시를 만든다면 개개인에게 맞춤화된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다이어그램으로 그리거나 모형으로 만드는 대신 실제로 스마트폰 어플에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입력하면 집이 나오고, 그것이 화면 안의 도시에 바로 반영되어 업데이트되도록 만들었다. 즉, 도면이나 그림이 아니라 관객이 참여하면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시스템이다. 어플과 디지털 프로젝션 미디어 룸, 변화하는 영상과 음악을 이용해 전시를 했는데, 이것을 예술계에서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라고 칭했다. 그 이후로 미디어 아트 전시회에 초대를 받으면서 미디어 아티스트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서강> 작품을 하면서 도시 계획이나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을 활용한 점이 재미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관객이 입력한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도시가 구현되고 영상과 음악도 변한다면 고정된 전시가 아니라 관객에 따라 변화하는 전시가 될 것 같다.


> 그렇다. 참여를 기반으로 해서 형식적으로 인터렉티브한 미디어 영상을 만든 것이다.  그 이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당시 의뢰를 받아서 미디어 작업을 하기도 했다.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의뢰를 받은 케이스인데, 그때 했던 작업도 예술적 형식으로 표현했지만 내용은 건축이다. 

 


 <떠도는 기하: 콜렉티브뮤지움> 

2013년 11월 12일부터 2014년 3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프로덕션 SCALe의 인터랙티브 미디어작품. 완성된 건축은 형태를 위한 결정들이 축적되면서 드러나는데 <떠도는 기하: 콜렉티브 뮤지움>은 이 결정들에 사용자를 참여시켜 건축적 결과물들을 공유한다. (편집자주) 사진 제공_ SCALe


서강> 보통 건축이나 도시를 생각하면 누군가 설계를 하고, 여러 사람이 지은 후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터렉티브한 작업이 실제 생활에 적용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 인터렉티브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지어진 대상과 대상을 사용하는 사용자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축과 사람의 관계를 연결하는 중간단계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작업들을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건물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 사무실도 가운데가 육각형인데, 벽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이것을 어플로 조정하는데 여섯 면이 다 올라가면 큰 회의실이 되고, 다시 벽을 내리면 집중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사무실> 

건축사무소 SCALe의 내부 모습. 어플을 통해 제어되는 사무실 벽은 목적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사무실 내부 벽이 모두 제거되면 육각형 모양의 회의실 공간이 만들어진다. (편집자주) 사진 제공_ SCALe

서강> ‘젊은 건축가 포럼 코리아’의 위원장을 맡고 계시는데, ‘젊은 건축가’라는 표기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나? 혹은 젋은 건축가로서 ‘기성 건축가’와 달리 추구하는 점은 무엇인가? 


> 보통 ‘젊은 건축가’는 주로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건축가를 말한다. ‘젊다’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으로는 20대 혹은 30대 초반까지이지만, 건축가로서 건물 하나를 지으려고 하면 마흔 전후가 되어야 의뢰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50-60년대생 선배들은 우리나라 개발 붐 등을 겪은 세대이기에 혜택과 기회가 많았다. 젊었을 때 사무실을 차려서 30대 초반에 설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건축가들은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미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살고, 작은 집을 짓지도 않아서 큰 설계 사무소만 살아남는 시대에 건축계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최근 조그만 집들을 짓기도 하면서 젊은 건축가들이 많아졌다. 

또한 기성 건축가들이 논했던 건축 담론들은 거시적이고 크다. 그들이 모더니즘, 한국 사회, 건축의 본질처럼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것을 강조했다면 최근 젊은 건축가들은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 스펙타클하고 철학적 깊이가 있지는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면 동네 커뮤니티가 활성화 될지,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지 등과 관련한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실제로 그런 의뢰가 제법 들어오기도 하고 본인들도 그런 일을 즐겨 한다. 젊은 건축가들이 건축에 접근하는 방식도 기성 건축가와 다르고, 개개인의 스타일이나 관심사가 다양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것 같다.



서강> 기성 건축가들은 국가가 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큰 범위의 도시를 지어야만 했다면, 최근 젊은 건축가들은 이미 세워진 도시 안에서 어떻게 다양한 건물을 구현하느냐 이렇게 다르다고 볼 수 있겠다. 


> 그렇다. 얼마 전에 <어반 메니페스토>라는 전시를 하면서 젊은 건축가들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일상성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최근 젊은 건축가들이 건축 외적인 일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건축은 ‘건물을 짓는 거야’라고 했다면 요즘에는 건물 안에 둘 가구도 디자인하기도 하고 제품이나 미디어를 디자인하기도 한다. 사실 디자인의 프로페션의 원조가 건축가이다. 공간, 건물이 큰 디자인이고 그것이 모인 도시가 가장 큰 디자인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처럼 보여도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서강> 아카이브와 포럼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건축물 전시나 역사를 구현하는 형식의 전시 등 건축을 새롭게 풀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건축가라고 하면 설계 현장에 있거나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건축가님께서 전시회 현장 등에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시는 이유나 그 활동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소개해달라. 


> 그동안 건축가들이 자기 영역 안에서만 갇혀 다른 크리에이터들, 예술가, 디자이너들과의 소통이 없었다. 이것은 건축 분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적용된다.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분야와 연결하는 시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2007년부터인가 이러한 기획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런 기획자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훌륭한 기획자들이 많이 생겼다. 여러 분야가 함께 소통하며 자극을 주고받고, 콜라보레이션도 해서 더 좋은 작업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그런 기획들을 주로 했다. ‘젊은 건축가 포럼 코리아’도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다. 3년 전에 ‘젊은 건축가 포럼 코리아’을 결성할 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젊은 건축가들의 역할이 미미했지만 우리 사회에 훌륭하고 젊은 건축가들이 많고, 그들의 작업을 같이 공유하고 알리자하는 취지로 컨퍼런스 파티 등을 시작했다. 형식에 구애받기보다는 기획의도가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전시뿐만 아니라 컨퍼런스, 토크나 파티 등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도록 진행하고 있다.


서강> 미디어 아트 <시간여행: 정동 1900(이하 ‘시간여행’)>의 경우 외국인 선교사의 구한말 생활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국내에서 이러한 미디어 아트 작업은 매우 생소한 작업일 것 같다. 시간적인 것을 공간에 푸는 작업, 역사적인 내용을 공간에 옮기는 작업이 어려운 작업일 것 같다.  이 작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 


> 건축가나 작가로서 제 작품을 전시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시 디자인을 의뢰 받아서 한 것은 ‘시간여행’이 처음이었다. 건축가는 공간을 다루는 사람인데, 뉴미디어에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있다. 그래서 공간을 어떻게 시간적으로 풀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공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시간여행’을 작업했다. 백 년 전의 공간을 컨셉슈얼하게 구현하여 사람들이 도시를 거닐면 그에 따라 공간이 반응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바닥에 지도가 있는데 지도 위에서 다른 위치에 갈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화면을 보여준다. 내가 서 있는 위치의 100년 전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여행: 정동 1900>

<시간여행: 정동1900>은 1890년~1910년 당시 정동의 모습을 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시각으로 재현한다. 전시장내의 축소된 정동을 거닐면 당시의 거리 모습이 전면에 펼쳐진다. (편집자주) 사진 제공_ SCALe


서강> 위 전시가 일반적인 건축물 전시하고 어떻게 다른 것인가? 


> 보통 건축 전시는 도면, 렌더링, CG, 컨셉을 설명한 다이어그램, 모형 등을 전시한다. 건축은 삼차원이고 크기 때문에 복잡하다. 한 눈에 볼 수 있으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텐데, 가뜩이나 복잡한 것을 도면 등으로 전시하니 더욱 복잡해진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도면을 읽을 수 있으니까 도면을 보면 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비전문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비전문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모형을 만드는 데, 아시다시피 모형은 작다. 300분의 1, 500분의 1, 1000분의 1로 축소하고 위에서 모형을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건축은 공간감이 중요하다. 공간 안에 있어야 건축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지 위에서 본다고 해서 그 건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상상을 돕기 위해 그 공간에 들어 있는 것처럼 CG로 투시도를 그린다. 하지만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데, 분절되어있고 투시도간의 관계가 설정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그것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악보만 전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건축가들은 평면을 보면 공간을 이해하지만, 건축에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관객이 컨셉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전달하기 위해서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는 것이다.   


서강> 그렇다면 건축물 전시는 비전문가에게 공개가 안 되는가? 


> 공개는 되는데 이해와 소통이 잘 안되니까 비전문가들의 호응이 별로 없다. 건축가들만 모여 전시를 하는 경우가 많다.


서강> <자연과 미디어 에뉴알레> 전시가 대표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와 협업을 하신 작업인 것 같다. ‘사랑당: 푸른 빛의 전설’ 작업을 통해 이 전시에 참여한 것인가? 


> 그렇다. 제가 총 감독을 맡았고, 전시 중에 ‘사랑당: 푸른 빛의 전설’에 작가로도 참여했다. 이 전시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끼리 협업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취지였다. 그래서 각각의 팀에 건축가, 예술가, 과학자가 한 명씩 포함되어 팀을 이루었다. 재미있었다. 저희 팀에는 해양 바이오 과학자가 계셨는데, 그 분이 연구하시는 발광성질을 가진 미세조류를 건축 작업에 도입을 했다. 밤에 흔들면 빛을 발하는 생물 발광 미세조류를 이용하여 지역의 풍습을 담은 구조물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서강> 마을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실 이 전설은 제가 쓴 것이다. (웃음) 이 작업이 재미있었던 것이 팀원들과 ‘전설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전설을 만들고 그것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아마 마을 사람들이 ‘어? 우리 마을에 이런 전설이 있어?’ 라고 했을 것이다. 당이라는 것은 제주도 민속 신앙인데, 작은 돌담을 쌓고 바다 앞에서 구복을 한다. 하나의 당에는 하나의 구복을 한다고 하더라. 이 당에서는 아이를 낳게 해주는 구복만 할 수 있고 저 당에서는 피부병을 고쳐주는 당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당을 만들자‘고 해서 ’사랑당‘을 만들게 되었다. 




 <사랑당: 푸른빛의 전설>

2013년 건축가, 예술가, 과학자가 팀을 이루고 협업을 통해 자연과 미디어를 주제로 하는 공공예술 작품을 제주도 마을에 설치하고 공유하는 융복합 공공예술 프로젝트 <자연과 미디어 에뉴알레>에서 하태석, 권병준, 김대희가 제작한 지속가능한 조명장치. 바람이 불면 사랑당 건축물에 달린 캡슐을 흔들리고, 그 안의 미세조류들이 빛을 발한다. (편집자주) 사진 제공_ SCALe


서강> 건축 작업은 협동 작업이다. 건축가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전문과들과 협업을 많이 하시는데  진정한 의미의 협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건축은 전통적으로 혼자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예술가는 생각하는 사람, 그리는 사람, 물감 사는 사람이 다 같은데 건축 분야에서는 생각하는 사람(건축가), 벽돌 사는 사람(건축주), 짓는 사람(시공자)이 다 다르다. 건축가가 전체적으로 컨셉이나 공간을 생각을 하면 구조는 구조 기술사가, 전기 설비는 전기 설비 회사가 하고 기계 설비는 기계 설계회사가 하고 조경 디자인은 조경 설계사가 하고 심지어 인테리어를 별도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은 기본적으로는 다양한 사람들과 같이 협업하는 구도이다. 건축은 다른 분야보다 더 협업을 하기 때문에 협업을 잘하는 직종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업은 단순히 같이 일을 한다고 해서 협업의 질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진정으로 협업을 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영역이 만나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 공간 안에 있더라도 하나의 공간으로 융합되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협업이 아니다. 따라서 초학제적인 접근을 통해 적극적으로 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협업을 할 때 시너지 효과도 발생하고 더 좋은 결과가 난다고 생각한다. 


서강> 협동 작업을 할 때 의견 충돌이나 윤리적인 문제 등을 마주하는 일이 많을 것 같다.  어떤 분야에서건 협업을 할 때 가져야 할 소양과 자세를 조언해 달라. 


> 협동 작업을 할 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상대방과 상대방의 분야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건축가가 말하는 ‘커뮤니티’와 사회학자가 말하는 그 뜻은 다르다. 같은 단어라도 분야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그러므로 다른 분야간에 협동, 협업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하다. 제가 음악가와 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음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분들의 깊이만큼은 모르지만, 기본적인 것은 알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분야를 이해하는 것이 협업을 할 수 있는 자격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면 가장 좋고, 한 사람이라도 이해해서 함께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서로 다른 말만 하다가 부딪히게 될 것이다. 또한 협업을 할 때에는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 역할이 중복되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 역할, 규칙 등에 대해 서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합의를 해야 한다.


서강> 건축가로서 도시의 미래에 관심이 많으실 것 같다. 개인적으로 꿈꾸는 미래의 도시나 건축은 어떠한 것인가? 


> 저는 사람, 사용자, 거주자가 주체가 되는 건축 혹은 도시를 꿈꾼다. 건축이나 도시가 먼저가 되서 사람이 들어가서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맞춰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려면 건축이 적응 가능성, 유연성, 상호작용 등을 갖추어야 한다. 나만의 자동차를 갖는 것이 상류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건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도 본인에게 맞춤화된 집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건축이면 좋겠다. 사람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고 거주자가 중심이 되는 건축,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도시가 제가 꿈꾸는 건축과 도시이다. 


서강> 마지막으로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 건축은 우리한테 사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하루의 90% 정도를 건축 안에서 살고 있고 알게 모르게 건축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데 본인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건축이 달라지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 처칠은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다시 건축에 의해서 형성된다. 학교 건물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짓느냐에 따라 학생들이 성적이 더 올라갈 수도 있고, 수업시간에 덜 졸수도 있다. 업무시설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생산성이 올라갈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주거와 건축을 디자인해야 한다. 저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데에는 주거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서마저 답답함과 소외감을 느끼고, 사회와의 단절을 경험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양재동에서 7년 정도 일하다가 이태원으로 사무실로 옮겼다. 양재동에서 일할 때는 외부에 비가 오는지 해가 떴는지 몰랐다. 그런데 사무실을 옮긴 이후 해가 지는 것도 보고 석양의 아름다움도 느끼고, 해가 좋을 때는 옥상에 올라와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그것이 굉장히 즐겁다. 그게 건축의 힘이다. 누구나 건축물 안에 사는 만큼 거주자가 스스로 “우리 집은 왜 더 좋을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건축가와 공유하면 더 좋고 행복한 공간에서 살 수 있다. 사람들은 건축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지금 사는 바로 여기가 건축이다. 계속해서 보다 나은 공간을 꿈꾸면 언젠가는 자신이 그 공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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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 4. 17. 16:01


각기 다른 을(乙)의 목소리를 듣는 청년 노동조합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청년유니온이 출범한 지 5주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 청년유니온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해달라. 


청년유니온 김민수 위원장(이하 김)> 청년유니온은 2010년 3월에 출범했고 노동조합(이하 노조)이다.  서울, 경기, 인천, 대구, 경남, 부산 등 7-8개 지역에 약 1,000명 정도의 조합원으로 이루어진 전국 단위 조직이다. 

어떤 문제를 평가하고 진단하고 평론하는 것,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진단하는 것을 넘어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 유닛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청년유니온은 기존 노조가 청년 문제를 포괄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고 생각한 당사자들이 직접 유닛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서강> 청년유니온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또한 지난 5년간의 활동 중 활동 초기 목표로 한 것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 저는 창립하기 직전에 가입했고, 이 조직을 1년 동안 준비했던 팀이 있다. 제가 보기에는 이 팀이 어떤 한(限)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이 청년유니온을 만들 당시에 30대 초반이었고 지금은 30대 중후반이다. 당시 그들에게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하다가는 망한다.’ 라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보시는 것처럼 밝고 유쾌한 느낌을 더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이 절박함에서 표현이 다양하게 빠져나오는 것 같다. 이것이 없으면 표현이 나이브하게 된다.  

활동 초기 목표라고 한다면 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시키는 것. 이것이 가장 주요 활동의 목표였다. 그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과 모델들을 만드는 것이 지난 5년의 가장 큰 목표였는데, 다 한 것 같다.


서강> 왜 ‘청년’이고, 절박함을 해결하는 수단이 ‘노조’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 경제위기라는 과정에서 경제위기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만 청년세대에게 미치는 특수성이 있다. ‘청년세대들이 다른 세대들보다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노동 시장을 보면, 이미 노동 시장 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세대가 경제 위기의 타격을 입는 것과 아직 진입을 하지도 못한 세대가 타격을 입는 것은 완전 다른 문제다. 이미 시장에 진입을 한 세대와 달리 경제 위기의 타격이 청년세대에게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동안 공기업에서 대기업에서 대졸 초임을 깎는 문제에 대해서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없었다. 노동조합 입장에서도 자기 얘기는 아니지 않나. 저는 이런 문제를 청년이라는 키워드로 말하고 싶었다. 

청년세대의 삶의 문제는 낮은 소득의 문제, 주거비, 교육비, 등록금으로 대표되는 높은 삶의 비용과 그것을 메우는 빚이었다. 위와 같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문화적으로 박탈되고 이름이 삭제당하는 것을 보며 일단 소득과 고용안정에서 시작하자고 정했다. 

청년 세대의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고민을 하다가 일본에 ‘수도권 청년유니온’이라고 저희보다 10년 정도 먼저 유사한 활동을 한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활동을 보고 ‘괜찮네, 가져와보자’라고 하면서 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강> 청년유니온의 사업 내용이 대부분 규약에서 언급하는 여러 가지 권리(문화권, 인권 등) 중 노동권, 생활권 확보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다. 

> 권리라는 것이 다 맞물려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자.”라는 것보다 그 시기마다 부각되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에 집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표현상 드러나는 것이 이 두 가지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게 해석할 수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해석의 영역이고, 이것만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서강> 당연한 질문이지만 궁금하다. 청년유니온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규직인가? 그리고 ‘알바’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최저임금이나 4대 보험, 휴무수당 등을 보장하고 있는가?

> 참 어려운 문제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는 분은 정규직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저희가 노동조합이다 보니깐 2년 동안 임기가 작동된다. 임기가 작동되는 기간 동안 집행부가 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딱 정규직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1기, 2기 만들었던 사람들도 지금은 각자 다른 데서 일을 하고 있다. 각자의 현장에서. 그래서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임금 책정이라든지 최저 임금, 4대 보험은 다 적용되게끔 하고 있다. 기본은 하자는 것이다. 물적 토대가 취약해도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기본을 보장해야 일을 하며 힘들어도 스스로 의미와 보람을 찾아나갈 수 있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해야 하는 일에 비해서 물적 토대가 너무 취약하다. 청년이 특히 그렇지 않나. 어르신들은 돈 금방 모으시지만 젊은 사람들은 네트워크가 없다보니 돈 모으기가 매우 힘들다. 


서강> 위 질문을 한 이유는 청년유니온에 속한 조합원들이 대부분 청년이기 때문이다. 편견인지 몰라도 펀딩의 지속성이 약할 것 같고, 규모도 다른 조합에 비해 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인 운영이라든가 재정 운영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 재정 상황을 먼저 말씀드리면, 지금 조합원이 1,000명 정도 있고 후원회원이 있다. 후원회원은 나이는 좀 찼지만 지지하고 싶다는 사람들인데, 약 450명 정도 있다. 그래서 회비 수입을 내면서 노조에 재정을 지원하는 사람이 약 1,400여 명 정도 된다. 

전체 수익을 놓고 봤을 때, 회비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90% 정도다. 전체 나머지 10-20퍼센트는 사업비로 충당하거나 지원 사업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예산 총액 대비 재정으로서는 건전성, 안정성의 비율은 생각보다 높다. 총 실링 자체가 작은 것이 문제다. 조직 전임자는 6명인데, 사실 전임자가 10명, 20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 저는 저희 사무실에서 ‘사장놈’이라고 불리는데 사장된 입장에서 이 자원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 총 실링을 어떻게 늘릴까가 늘 고민이다. 그래도 예산 총액을 놓고 봤을 때 재정 안정성의 비율은 나쁘지 않다. 청년유니온에 많이 가입해주셨으면 좋겠다.


서강> 다른 노조에 비해 조합원들이 지니는 특징이 있다면?

> 일단 저희는 의사결정체계가 빠르다. 물론 기본 총회도 있고 여러 가지 의사 결정 기구가 있지만 의사 결정 속도나 사업을 집행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다. 다른 청년 단체들도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청년’의 특징이다. 길고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피로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조직이 사이즈가 작은 것도 있을 것이다. 

청년문제는 어제 이슈가 오늘 이슈일 수 없다. 아침 신문을 보다가 이슈가 되기도 하고, 누구 얘기를 듣다가 화가 나서 일인 시위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작년 10월 달에 2년 계약직을 하시다가 정식 전환 안 되시고 돌아가신 분이 있다. 저희가 보도된 당일에 그 보도를 확인하고 그날 밤에 텔레그램을 작동시켜서 그 다음날 오전에 일인 시위에 나섰다. 사실 이 사안에 담당 노조가 있다. 그런데 이곳은 나중에 의사결정 갖춘 후 팀을 꾸려서 대응하기 시작하셨다. 대응을 시작하시면서 어떤 분이 저희한테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나서줘서 고맙다고. 자기 사업장의 문제지만 어쩔 수 없이 의사결정 구조 등의 시간차가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저희는 속도감이 있다.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대전제에 기초하여 토론이 폭넓기도 하다. 어떤 절차를 거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을 가동시킬 때 현실적인 감각을 통해 빠르게 작동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점이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서강> 경제적인 측면 이외에 ‘청년’ 비영리단체로서, ‘청년’노조로서 활동하는 데 느끼는 어려움이나 한계가 궁금하다. 

> 엄청 많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누구나 말로는 청년을 말하니까. 저희가 제기한 가치나 내용이 있고 다른 단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내용이 있다고 했을 때, 자신의 해석 틀만 가지고 다 설명하시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저희가 한참 설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으신 것 같다. 시민사회나 노동조합이 많이 노쇠화하고 있다. 20년 전에 일했던 사람이 지금도 실무자다. 이런 것에 대한 위기감은 있는데 이 문제가 왜 안 풀릴까에 대한 고민을 잘 안하신다. 그런데 청년 유닛이 잘 뜨다보니 과도하게 의존하시는 경향이 있다. 지원은 없고 요구는 크다. 

첨언하면 저는 사회에서 청년을 부르짖는 현 상황이 사회가 청년들을 소모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지금 사회가 청년이라는 단어를 작동하는 방식이 이렇다. ‘장그래 살려야 된다.’고 비정규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내놓은 방안이 ‘노동시장이 이중구조화 되어 있고 정규직이 과보호되어 있으니 정규직을 과보호하면 비정규직 못 살린다.’는 워딩을 사용한다. 청년을 전형적으로 파는 것이다. 사실 비정규직을 살리려면 비정규직에 집중하면 된다. 여기에만 집중해도 할 일이 많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안하고 정규직의 과보호를 중심에 두고, 정규직을 덜 보호해야 비정규직이 산다고 말한다. 분명 청년으로 대표되는 나를 살려주겠다는 것인데 나를 살려주겠다는 내용은 없고 남을 때려주겠다고만 한다. 저희는 우리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되묻고 싶다. 


서강> 그래서 청년 세대 스스로 늘 이슈가 되고 있지만, 뭐가 나아지는지 실감을 못하는 것인가? 

> 저는 이게 매우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슈가 뜨는데도 아무것도 안 되어있네.’라고 청년들이 느껴버리는 그 순간 말이다.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자기 삶을 쇄신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노력하고 사회적 조건이 받쳐준다면 내 삶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을 갖게 될 텐데, 최근 그러한 믿음이 다 삭제 당하고 있다.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회적 희망에 대한 믿음 자체를 상실해 버리면 사회는 작동하지 않는다. 


 

서강> 최근 청년 세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늘었다. ‘열정페이’라는 단어나 드라마 ‘미생’ 등이 크게 이슈가 되었다. 이처럼 사회적 분위기 조성으로 인해 청년유니온의 활동이 탄력을 받았거나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청년유니온의 활동이 단체의 노력이나 활동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으로 인한 반사효과를 얻게 되리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어떤 주체 활동과 사회적 메시지는 상호작용한다고 본다. 청년유니온이 그동안 활동을 통해서 청년 일자리 문제가 지난 5년 동안 드러난 것이다. 예를 들어 저희가 보도자료 하나를 내면 그 다음날 되면 라디오 작가들이 전화가 온다. 저희가 제기한 것이 이슈가 되고 그 과정에서 각 주체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늘어난다. 그러다보면 라디오 작가들이 인터뷰 이후에 스스로 다른 아이템을 찾는다. 청년 관련 아이템 찾아서 회의한 후 저희에게 전화가 온다. 코멘트 달아달라고. 이런 것을 저는 이건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5년 전에 청년유니온이 없었더라면, 청년 문제가 터졌을 때 청년의 입장을 물어볼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 없었을 것이다. 저는 그래서 두 가지가 상호작용한다고 본다. 물론 사회적 관심이 많아지면 활동을 할 때 탄력을 받는다. ‘장그래’ 봤냐. ‘열정페이’ 봤냐는 식으로 말하면 되니까. 그런데 반대로 저희의 사회적 책임도 같이 늘어난다. 






 ‘2014 패션업계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한 청년유니온과 패션노조. 디자이너 이상봉이 청년착취대상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출처: 시사IN, 2015년 1월 12일, 벌써부터 치열하다 ‘2015 청년착취대상’)


서강> 청년 세대를 위한 노조의 설립은 청년 세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순기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청년 세대와 비청년세대를 구분 지어 다른 세대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세대 갈등이라는 얘기가 말은 하기가 되게 쉽다. 직관적이니까. 앞에서 말한 예를 다시 이용하여 정규직 과보호와 비정규직의 상관관계를 세대 갈등을 들어서 설명하면 쉽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실제로 이 안에서 작동하는 디테일이 사라진다. 청년 노동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정말 많다.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 자원을 투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세대 갈등을 들이대면 소모적인 방식으로 가게 된다. 세대 갈등에 대응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저희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청년유니온이라는 청년 노조가 생김으로 인해서 사실 40-50대 중년 이상의 양대 노총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양대 노총이 정부, 기업과의 힘의 균형 축이 안 맞는 부분에서 저희는 청년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내는 주체로 기능한다. 다른 노조에게 파트너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노조와 함께 노동계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메시지를 만들어 협력할 수 있다. 싸우는 데 에너지를 쓰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서강> 최근 ‘갑을관계’, ‘을의 반란’과 같은 키워드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청년유니온의 활동도 ‘을의 반란’ 혹은 ‘을의 권리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갑처럼 보이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을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결국 ‘을과 또 다른 을의 싸움’이 되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청년유니온의 활동 중 ‘갑과 을의 연대’ 혹은 ‘을과 갑으로 오해 받는 을의 화해’를 위한 활동은 없나? 

> 최근 최저 임금 논의가 많다. 최저 임금 올리면 영세 자영업자 다 죽는다고 하는 것이그 논리다. 그 과정에서 알바생들이랑 영세 자영업자들이랑 싸운다. 여기에 디테일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최저 임금은 사실 올라야 한다. 그러면 영세업자는 어떻게 하느냐. 최저임금을 올린다는 입장을 세워 놓고 영세업자의 문제를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 영세업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말이다. 저희가 영세 자영업자 하시는 분들이랑 같이 해서 최저임금에 관한 공동 선언을 하려고 한다. 청년 자영업자, 영세 자영업자 포함해서. 실제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 최조 임금이 오르면 영세 자영업자 다 죽는다는 것은 이상한 소리라고 누군가가 말해야 한다. 프랜차이즈 본사 문제도 있으니까 갑질 문제도 같이 얘기해도 될 것이다. 

을간의 화해라고 하셨는데 을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균질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 해주고 듣고 싶은 얘기를 듣게 해줘야 한다는 점에서 디테일이 필요한 것이다. 저는 그동안 99:1의 논리로 ‘을은 하나다’는 논리나 균질하지 않은 집단에 똑같이 추상적인 얘기들만 해왔다는 것이 지금의 시민사회가 무기력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균질하지 않은 얘기가 있으면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게 토론하면 된다. 

저는 영세업자들 만나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당신이 힘든 것에서 인건비 총액이 얼마를 차지하냐고, 건물 임대료 문제가 가장 큰 문제 아니냐고 말이다. 사실 임대료가 정말 비싸다. 그래서 실질 임금은 안 오르는데 건물 값은 계속 오른다. 그래서 오죽하면 건물주가 조물주보다 낫다는 표현을 하겠나. 전체 비용에서 임대료 문제가 크다면 임대료랑 싸워야 한다. 물론 이분들도 우리한테 하는 말씀이 있다. 알바생들은 왜 이렇게 자주 그만두냐고 하시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같이’ 하면 된다. 못할 것 없지 않나. 큰 틀에서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만 서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다. 그런데 하면 된다. 


서강> 대학원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대학원생은 사회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원생도 평범한 청년의 한 부류다. 대학원생도 다른 청년들처럼 똑같이 자신의 미래가 불안정하다고 여긴다. ‘대학원생’이라는 아무도 관심 없는 집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최근 2-3년 사이 대학원생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기 시작하는 흐름이 기본적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말씀드린 것처럼 을의 디테일이 균질하지 않다는 것을 기준으로 봤을 때, 대학원생들이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모여서 하나의 유닛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개인적으로 청년유니온 활동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보내는 신호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 점이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말해도 좋다.”는 신호 말이다. 그것이 저희한테 가장 큰 자부심이다. 청년유니온이 2010년에 시작한 이래로 청년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에 저희의 기여도가 있다면 말해도 좋다는 신호를 전달했다는 점일 것이다. 

저희는 대학원생들이 박탈감과 억울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후반에 10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었던 메시지는 “네가 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 밟고 올라서서라도 좋은 학교에 가야되고 높은 학력을 가져야 한다.”, “대학원까지 가든지 대기업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3,4년간 청년들이 눈이 높고 수동적이라고 한다. 심지어 한국 노동 시장에 핵심적인 문제가 고학력층이 많은 것이라고까지 한다. 고학력은 실제로 많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쏟아져 나오는 고학력층을 받아들일만한 산업구조,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책임도 분명 있다. 그런데 이런 책임은 묻지도 않고 무조건 ‘고학력이 문제다’라고 한다. 누가 대학, 대학원에 가라고 했냐고 말을 듣는 것에 대학원생은 이런 억울함을 느끼지 않나. ‘고학력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산업구조의 재편이라든지 노동시장의 질서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삭제한다. 지금 이런 식으로 청년 세대를 삭제하고 소모하는 방식으로 언어체계가 작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생들은 대학원생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살아갈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논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자칫하면 저학력과의 갈등이 되어 “너희는 그래도 고학력이잖아.”라는 답이 없는 논쟁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는 정말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서강> 앞으로 청년유니온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 저희가 궁극적으로 뭘 하면 좋겠는가? 청년들이 부모세대에 비해서는 물질적 가치의 총량 자체가, 물적 토대의 총량 자체가 적지는 않다. 밥은 먹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청년 세대의 문제는 내일과 미래가 삭제되어 있다. 지금 청년들은 계약이 끝나면 잘릴 수도 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청년세대의 일상적 상태이다. 

부모세대는 처음 20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라고 할지라도 직장에 들어가서 경력이 쌓이며 고용 안정성이 보장되고 소득이 오른다. 그러니까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이런 부분이 삭제되고 있다. 열심히 일해도 어떤 노력을 보상받을 가능성이 없어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노력이 보상받는다는 명제가 삭제 당하고 있는 이러한 상태를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상태를 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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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 12. 31. 19:31

 

 

서강_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의 등장 배경과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해 달라.

김_ 제조문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를 제외한 미국이나 일본에는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자신의 차고에서 무언가를 스스로 만드는 문화가 쌓여 오래전부터 가라지(garage) 문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공방에서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공방 문화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만 유독 사회적인 영향 또는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서인지, 공간적이나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인지 그런 것들을 수행 하지 못했던 것이죠. 해외에서는 이미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가리지(garage) 문화나 공방 문화로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것을 촉진시킨 것이 바로 디지털 제조(digital fabrication)의 등장입니다. 예전 같은 경우에는 장인이 망치를 다루면서 자신의 기술을 함축해서 제품을 제조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누구나 디지털 제조를 통해서 전문적인 기술을 대체하는 것이죠. 이렇게 누구나 제조할 수 있다는 데에서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발현되고 촉진되는 것입니다.

 

서강_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는 제조업의 민주화, 네트워크화를 예견하는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김_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제조업의 민주화를 이룬다는 것은 소위 장인이나 전문가만 독점하고 있던 기술을 누구나 디지털 기술과 메이커 스페이스를 이용해 필요한 물건을 만고 유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3D 캐드 모델링이나 2D 캐드 모델링을 간단히 배우고 3D 프린터나 레이저 절삭기, CNC와 같은 디지털 제작 장비를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조업의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같은 경우는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물류의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을 구매하려고 하면 그 쪽의 시차에 맞춰서 새벽에 일어나 전화를 해서 재고가 있는지 확인하고 제품을 패키징해서 공항이나 항구를 통해서 한국에 들어오겠죠. 그러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기름 낭비, co2 배출로 환경도 나빠집니다. 이렇게 소모되는 모든 것들이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되면 파일만 값싸게 사면 됩니다. 파일은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해서 국경 없이 단 1초 만에 전송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손쉽게 해외에 있는 제품들도 바로 옆에 있는 팹랩과 같은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에서 쉽게 제조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와 네트워크가 관련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강_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적재산권이나 정보독점 같은 배타적 경제 영역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김_ 일단 해외에서는 오픈 소스(open source)라는 문화가 굉장히 활발해요. 어떤 제품을 만들었을 때 이것을 어디서 어떻게, 얼마의 시간과 돈을 들여 만들었는지 제반 소스를 다 공개를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활발하게 이러한 문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있거나 제품을 만들면 “특허 등록해야지.”, “내거야.”, 나만 돈 벌거야.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오픈 소스의 가치는 아두이노(Arduino)라는 소형 보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피지컬 컴퓨팅을 하기 위한 기기인데, 작은 컴퓨터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런데 아두이노를 만든 회사가 이 컴퓨터를 오픈 소스화 했어요. 그렇다면 이 회사는 어떻게 돈을 버느냐? 이 회사는 메이커(maker)들을 대상으로 아두이노를 판매하고 우선 그 메이커(maker)들만의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메이커들이 만든 제품이 다른 사람들에게 팔리기 시작하면 결국 아두이노 시장 자체가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파이를 키우는 것이죠.

팹랩이 지니는 첫 번째 가치도 바로 이 오픈 소스입니다. 누구나 나의 가치를 공유하고 더 나은 상품 더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팹랩의 가치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기술이 융합이 되는 것이죠. 우리나라도 팹랩과 같은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가 늘어나면서 제작 문화와 오픈 소스가 같는 가치가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자리 잡는 것이라고 봅니다.

 

서강_ 팹랩(Fab lab)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달라.

(팹랩-Fab lab은 제작 실험실-Fabrication laboratory의 준말이다-편집자 주)

김_ 팹랩은 미국 MIT 원자비트연구소의 닐 거센필드 교수가 대학 커리큘럼의 일환인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방법(how make an almost anything)’을 맡아 가르치면서 10년 전 도입한 개념입니다. 3D 프린터나 이런 디지털 제작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에서도 교수님들이 이미 10년 전부터 RP라는 이름의 3D 프린터를 쓰고 계셨습니다. 'RP가 뭐냐'하면 Rapid prototype이예요. 이것을 일반 학생들이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가격이 비쌌기 때문입니다. 그런 랩을 구성해야 하는데 초기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많은 학생들에게 전파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값싸게 랩을 구성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팹랩이 처음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저가형 3D 프린터, 저가형 레이저 커터, 저가형 CNC와 핸드툴이 들어간 팹랩이라는 공간을 구성하게 됐고, 이것을 한곳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 내에서 확장을 시키고 전 세계로 뻗어나간 것이죠. 지금은 현재 전 세계 600여개 소에 팹랩이 있습니다.

 

서강_ 팹랩 서울(Fab lab Seoul)은 세운 상가 안에 위치해 있다. 이 곳, 세운 상가 외에도 창신동 봉제 노동자, 구로공단 제조업 노동자 등 전통적으로 기술 노동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기술 제작에 참여하고 숙련공이지만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기술 노동의 민주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같이 소외된 기술 노동의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김_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창조 경제라는 이름하에 창업을 지원하기 시작했지만 창업의 대부분이 해외에 있는 사례를 많이 들여와서 성공시킨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소셜 커머스 쿠팡과 같은 것이나 IT 쪽, 어플리케이션이 대박 나서 창업을 한다든가 하는 식이죠. 하지만 정작 한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기술은 제조 산업이거든요. 고산 대표님(팹랩은 고산 대표가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타이드 인스티튜-TIDE institute가 운영 중인 곳이다, 편집자 주)은 이런 제조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조업을 한 번 키워보자는 생각에서 이곳 팹랩을 기획하고 제조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인 이 세운 상가에 팹랩을 만든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청계천 일대가 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주선도 만들고 미사일, 탱크도 다 만들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이쪽에 자리를 잡게 되신 것이죠.

세운 상가를 살리고자 서울시랑 얘기를 해서 서울을 제조문화가 활발한 도시로 만들고자 계속 미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심천에 가면 전자부품 백화점이 있어요. 그곳에 가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전자부품들을 다 살 수 있습니다. 요즘 IOT(Internet of things), IOE(Internet of everything), 웨어러블 장치(Wearable device) 등 이런 것들이 첨단 기술이 집약된 칩들이 들어가는데 우리 나라는 여기서 그런 칩들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기계부품들이나 옛날 기술들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중국에 빼앗기는 것들이 아쉬워서 세운상가 일대에도 첨단 부품을 파는 백화점같이 재탄생을 시키고자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서강_ 팹랩 서울이 정부 의존도가 높고 친기업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정부 기금 및 하향식 스페이스 형태로 운영되는 메이커 스페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_ 사실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를 운영하는 사람은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민간기업과의 협업 또는 정부 자금으로 운영하는 것이 타협이기도 하지만 가장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만드는 사람들은 이러한 바탕이나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순수하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죠. 이 두 가지는 분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를 운영하는 사람은 민간과 정부의 자금을 활용해서 제작자(maker)들이 이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작자들은 순수하게 만드는 행위에 집중해서 공간과 장비를 이용할 수 있죠. 정부 의존도가 높고 친기업적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하는데, 결국 자립을 내세우던 해커스페이스는 없어졌어요. 해커스페이스는 회원들의 등록비를 가지고 임대료를 내면서 운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충당이 안 되다 보니까 이런 일들을 계속 벌려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임대도 임대이지만 장비도 계속 새로운 것이 들어와야 하고 유지, 보수, 관리가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데 언제까지 쌈짓돈을 가지고 운영할 수가 없는 것이죠.

사회적 기업도 더 큰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돈을 아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재투자가 이루어져야 가치를 더 넓은 곳에 효과를 전파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커스페이스는 소수를 위한 곳이에요. 자금이 들어오고 펀딩을 받아서 자금도 늘어나면 베풀 수 있고 가치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죠. 정부의존도가 높고 친기업적이라는 비판은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돈을 너무 쫓는 것 아니냐, 우리끼리 해서 하면 되지. 이것은 정말 현실적인 대답이 아니에요. 운영을 해보게 되면 맞지 않아요. 어찌됐든 이용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용료를 내고 자유롭게 이용하면 되고,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만큼 열심히 펀딩을 많이 받아야죠. 그래야 가치를 다시 환원할 수 있는 거구요. 이런 비판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고민이 많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치를 더 많이 전파하기 위해 이게 맞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강_ 지속 가능성이라는 부분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인가?

김_ 맞습니다. 저도 처음에 회의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부 자금이 들어오면 정부의 입맛에 맞춰야 하는 것이 싫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고 사람들과 모여 창의적인 것만 만들고, 사회에 이슈를 던질 수 있는 일만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지속 가능성의 문제가 생겨서 팹랩도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해외에 있는 팹랩처럼 잘 이루어지려면 전체적으로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전 국민에게 퍼져야 해요. 오픈 소스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런 문화가 견고히 자리 잡으면 그 때는 그들 스스로 마땅히 돈을 지불하면서 운영하면서 문화를 확산 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그 문화가 퍼지기 전까지는 정부나 민간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그 문화를 더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초기 우리나라 실정에는 이게 맞고요. 그 비판도 맞아요. 최종적으로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 자립해서 하는 것이 맞죠. 지금 현재의 방향성대로 자립성을 가진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강_ 현재의 제작문화가 가지는 한계점은 무엇이고, 이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달라.

김_ 궁극적으로는 메이커 무브먼트(maker movement)가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융합해서 사회에 이슈를 만들 수 있는 창조적인 물건이 나와야 합니다.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요. 그런데 아직 성숙한 제작 문화가 자리 잡지 않다 보니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는 이유가 개인의 사업 아이템을 만들거나 졸업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어떻게 보면 PC방 오는 거예요. 돈 내고 PC를 이용하고 나가는 거예요. 3D 프린터 뽑고 나가고. 그래서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억지로 메이커톤(makerthon)이라는 워크숍 행사나 사회적 아이디어 대회를 만들어야 사람들이 모이고 결과물을 내는 상황이에요. 현 제작문화는 사실 한 줄로 정리하자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융합해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개인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문화라는 것이죠.

 

서강_ 산업형 제작 문화와 개인 제작 문화 사이의 대립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대립의 결과를 예측해본다면?

김_ 대립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트렌드가 변할 것 같아요. 기존의 제조는 획일적으로 기업과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물건을, 생산자가 찍어내는 것을 소비자가 소비하는 형태였잖아요. 엘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보면 프로슈머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소비자가 소비자와 생산자의 벽을 허물고 생산 활동까지 한다는 의미죠. 앞으로 그 3차 산업 혁명이 시작될 것이고 이것을 대변하는 것이 3D 프린터, 디지털 제작이거든요. 당연히 소비자들은 너무나 관심사가 다양해서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다 다르죠. 자기 취향에 맞게 제작(customize)하고 싶어 하고요. 개인 제작 문화는 이런 것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제조 기술의 발전과 어우러져서 산업 자체가 그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립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조 문화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쪽이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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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 10. 24. 14:34

 

민중미술 잔혹사, 1세대에게 묻다

 

인터뷰 및 편집 박경룡, 채다희

 

 

올해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참여 작가였던 홍성담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 때문에 사전 검열과 수정 압박을 받았다. 광주의 역사와 세월호 사건을 잇는 세월오월그림은 수정 요구의 논란 끝에 전시 기회를 상실했지만, 씨엔엔, 월스트리트저널, 르몽드 등 해외 언론의 취재와 미국, 캐나다 교포들의 세월호 특별법 시위 현장에서 등장하면서 전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시민미술학교, 민중미술운동을 하며 현실과의 간극을 좁혀온 민중미술 1세대 작가 홍성담에게 미술계와 일상에 만연해지는 표현의 자유의 실종에 대해 물었다.

 

 

작가 홍성담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79'광주 자유 미술인회' 조직에 참여했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선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1983년에 '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미술대중화운동에 힘써왔다. 1988년에 독일 행체 화랑 초대전을 출발로 수차례의 해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평양축전에 '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 이 공동 제작한 민족해방운동사사진을 북한에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구속 이후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판화전이 있었으며, 1990년 국제 엠네스티본부에서는 예술가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 그는 젊은 의식전, 삶의 미술전, 우리시대 30대의 기수전, 오월미술전, 민중미술 15년 전, 동학 100주년 기념전 등 각종 단체전과 선전전에 수 십여 차례 참가하였다. (출처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지난 2주간(9.18~10.3) 대만에 위치한 청궁대학교에서 동아시아 민중문화: 희망의 연대라는 전시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시 과정과 배경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

홍성담(이하 홍). 10여 년 전부터 대만,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식민지 잔재 청산(안티 야스쿠니)을 위해 일을 해왔다. 현재 대만의 정치적인 갈등구조(독립파, 통일파)와 더불어 한국의 분단구조, 지역갈등구조 등이 일본 식민지부터 시작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대만 역시 식민지의 잔재가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해결되지 않으니 분단 문제의 기본적 원인도, 책임자도 없다. 어마어마한 학살의 역사에서 학살자가 누구인지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가려지지 않은 채, 전두환(전 대통령)과 노태우(전 대통령)가 감옥에 갔지만 학살의 이유가 아니라 부정 축재의 이유로 감옥에 갔다. 책임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대만이나 우리 사회나 무책임 중독증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들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게 되는 것이 국민적 정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정을 준수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가 되어 버리고 있다. 이러한 무책임 중독증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 나는 식민지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단지 대한민국의 일이 아닌 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무책임 중독증을 되돌아보게 하고,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논의의 출발점을 만들고자 전시에 내 그림이 초청되었다.

참고로, 대만에서는 이런 그림을 보기가 힘들다. 대만은 1950년 전에 백색테러나 2.28사건으로 인해 지식인, 예술가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그들이 감히 정부에 대해 반항하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장개석의 군대가 대만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노신과 판화운동을 함께 했던 화가 들이 문예운동을 하거나 전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백색테러 등으로 인해 처벌되면서 암흑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대만의 문화가 세계화로 흘러가기 시작해 잘못된 모더니즘을 받아들이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갈등 구조를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회피하는데, 이는 갈등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자유로움은 자신을 직면하지 못하고 아나키스트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홍성담, <야스쿠니 夜想曲>, 2008

 

서강. 세월오월의 광주 비엔날레 전시 논란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울관 개관을 하면서 임옥상 작가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제외되었다. 이렇게 미술계에서 사전검열이나 정치적 표현을 제한하고자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전시회 기획자나 미술관 책임자가 미리 최고 권력의 심기 경호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심기경호가 기획자의 능력, 미술관장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최고 정치권력이 그림을 얼마나 알며, 그림까지 신경을 쓰겠는가? 그런데 주변에서 미리 알고 심기 경호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잘 하는 것을 능력으로 취급 하는 사회 풍조가 만연해있다.

(덧붙여, 축소되고 있는 예술가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 영역은 예술가가 담고 있는 사회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시민은 예술가 절반 정도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그러한 자유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의 역할은 그 사회가 관행적, 관습적, 제도적으로 금기시하는 영역을 끊임없이 깨부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금기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금기는 불평등한 것이다. 최고 권력, 최고 자본부터 시작해서 일용 노동자까지 금기사항이 똑같다면 평등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평등한 것이다. 예술가는 시민 사회의 평등 구조를 위해 최고 자본가와 최고 권력이 금기시하는 것들을 자유로운 예술의 확장을 통해 까발리는 것이 주어진 권리이며 의무이다. 이를 등한시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 예술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술 관장, 기획자들은 이를 다 알면서 그러고 있다.

 

 홍성담, <세월오월>, 2014, 논란이 된 박근혜 대통령 풍자 부분은 닭으로 수정되어 있다.

 

서강. 민중미술처럼 메시지가 두드러지는 것을 두고 미학적으로 옛날 것이고, 낮은 수준의 미술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민중미술의 양식과 형식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것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이다. 지금으로부터 2~30년 밖에 안 된 것이다. 그것이 옛날 것인가? (더 오래된) 1960~70년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좋다고 하고, 서구에서 유행한 라캉,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후기 모더니스트나 맑시스트는 좋아하고 추구한다. 나는 민중화가 중 해외 전시를 많이 하는 편인데, 해외에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은 서구의 현대 미술을 그대로 베끼는 수준에 지나지 않다. 한국 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서구에서 유행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그대로 가져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엄이나 문명비판의 문제는 빼놓고 형식, 패션, 모양만 가져온다. 세계 어느 나라 미술평론가든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는 문화평론가라면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이 한국 최초의 주체적인 미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한다.

현대 미술을 하고자 하더라도 진정한 우리의 현대 미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얘기하면 글로벌 시대에 우리 것을 만들자는 것은 내셔널리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세계에 우리 것을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그림이 세계적이어서가 아니지 않은가? 서구적 입장의 미학적 틀로 분석이 된 그런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학적 틀로 분석한 예술이 나와야 한다. 서양의 미학적 틀로 분석하고 정리한 것을 답습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틀로 미술사를 분석하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의 올곧은 현대 미술을 인류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홍성담, <도시 농부 가족>, 2011

 

서강. 세월오월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1980년대 한국 민중 미술의 가장 중요한 양식이라고 한다면 걸개그림과 판화운동이다. 판화와 걸개그림은 내가 최초 세대이고, 이끌어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술관이라고 하는 화이트큐브에 유리관 속의 쇼 케이스에 걸릴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했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5월 정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작을 거절한 이유가 두 가지 더 있었다. 1980년대부터 같이 활동한 시각매체연구소 회원들이 공동 작업을 위해 그들의 하는 일을 접어놓고 1~2달의 합숙 훈련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돼 거절했고, 또 한 가지 그 당시에 걸개그림을 그릴 만한 동력이 없었다. 그림 의뢰를 받은 것은 올해 1월이었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없어서 광주의 5월 정신(‘5월 정신은 올해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의 주제다-편집자 주)이라는 시각적 틀에서 그 이슈를 내다볼 만한 이슈가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다른 작가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책임 큐레이터가 직접 해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 415일에 전시회 관련해서 일본에 갔다가 귀국 했다. 그러다 16일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다 구조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으나 밤이 되니 구조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안산에 있는 내 화실에 작년부터 단원고등학교 학생 두 명이 알바를 했었다.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이었는데 단원고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서 아르바이트를 시키면서 그림도 가르쳤다. 여학생은 형편이 어려운데 미술 학원에 다닐 돈이 없어서 1주일에 한 번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림도 가르쳤다. 남학생은 약간 지적 장애가 있는 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이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해서 두 명이 여기 왔었다. 그런데 올 봄 여학생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바비와 용돈을 줘서 보냈다. 그 여학생이 그 배에 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417,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나는 원전 폭발이든, 쓰나미 현장 같은 곳에는 간다. 인간이 만든 지옥에 찾아가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팽목항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여학생의 엄마를 만났다. 웬일이냐고 묻자 우리 애가 저 배 안에 있다더라. 정말 아차 싶었다. 팽목항과 진도 실내 체육관을 5일 정도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 과정을 지켜봤다. 광주가 34년 전, 군부에 의해 국가폭력을 당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한 세대 전 아닌가? 세월호도 권력과 자본, 무능한 관료제의 삼자 카르텔로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고 있는 이 가운데 300여 명을 학살한 국가폭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안산으로 올라오면서 걸개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그 후 6월 말에 광주에 내려가 임시 작업장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강. 1980년대부터 활동했던 시각매체연구소의 소속된 작가와 시민과 함께 참여해 세월오월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한 공동작업을 택한 이유는?

. 걸개그림은 공동 작업을 해야만 한다. 걸개그림이 가로 10.5m, 세로 2.5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걸개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도 하고 시민들과 토론을 하는 등 이벤트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벤트는 하얀 캠퍼스를 두고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주제, 내용을 두고 토론을 했다. 그래서 그 때 나온 의견을 바탕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비엔날레에서 지원 받은 돈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부산의 젊은 작가들을 불러 함께 작업했다. 서울의 성미산 공동체에 있는 룰루랄라예술협동조합, 파견미술팀, 낸시 랭이 속한 팝아티스트협동조합 등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 걸개그림의 의미가 산다고 생각했다.

 

서강.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인지?

. 한국의 다양한 젊은 작가들과 함께 그렸다는 의미를 말한다. 장르, 지역을 불문한 작가들이 참여했다. 일본에서 국가폭력에 대해 노래하는 언더 가수 까지 초청을 했다. 그에게 공연료를 줄 수는 없었지만. (웃음). 그가 공연도 하고 그림도 같이 그렸다. 그렇게 함께 했다는 의미가 컸다. (공동 작업이 활발한) 1980년대와 달리 지금 다시 공동 작업을 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참여한 작가들도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서강. 이야기를 들으니 미술 작업이라기보다 마을 잔치같은 느낌이 든다.

. 그렇다. 이 그림에는 광주 민주화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얼굴도 많이 있다. 명노근 교수, 김남주 시인, 윤영규 초대 전교조 위원장, 광주의 어머니들 등 기타 10여 명의 여러 실제 인물들을 그렸다. 그 분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진을 요청하니 그 분들의 가족들이 많이 와주셨다. 그림 그려줘서 고맙다고 먹을 것도 많이 가져다주시고 기념촬영도 하는 등, 그래서 정말 잔치 같았다. 공동 작업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작업 기간 동안 술도 항상 쌓여 있었다. 사실 작업을 하는 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는데, 화가들이 술을 잘 마시는 줄 알고 방문하시는 분들이 늘 가져다 주셨다. 정말 신나게 작업을 했다.

 

서강. 역설적으로 비엔날레에서는 전시가 무산되었지만 오히려 관심을 더 받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처음에 그냥 그림을 걸었다면 몇 번 회자되다가 말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검열 하느라고 그런 것이다. 이 정도 정치 풍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나 그릴 것을 그랬다. (웃음) ‘세월오월작업을 시작하러 광주에 내려가기 전에 광주 비엔날레에서 내 걸개그림이 아무 말 없이 걸리면 실패한 것이고 문제가 되다 걸리면 더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제가 너무 커져서 아예 걸지를 못했지만 나는 시원하다. ‘내가 민중미술 1세대로서, 걸개그림 양식을 발전시켜온 사람으로서 미술관이라고 하는 지하 묘지로 집어넣는 골동품 그림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살아 숨 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니고 촉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앞으로 민중미술가로서 내 삶을 더 유지하게 만들 것이다.

 

서강. 비엔날레가 정상화되기 위해서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

. 비엔날레라는 것은 단순한 미술 엑스포나 올림픽이 아니다. 비엔날레는 당대의 모든 현실적 담론들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해서 모아서 한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 시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비엔날레는 시각적 용광로나 다름없다. 각 나라의 작가들은 자국/사회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을 본다. 그래서 뜨거운 용광로이다. 그래서 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난장판이 되어야 한다.

비엔날레라고 영어로 쓰면 정제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자신의 지역 문제를 그림 언어로 표현하여 가져다 놓고 우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담론을 만들어내자고 만든 것이 비엔날레이다. 비엔날레는 그림을 파는 곳도 아니다.

예술에서 1,2등이 어디에 있는가? 미술 세계에서 화가 한 사람, 한 사람은 거버먼트(government)이다. 그런 자존심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비엔날레에 출품된 그림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하는 행위들 중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표현이니까. 그래서 비엔날레는 뜨거운 것이고 거기에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터전을 불태워라였다. 내가 정말 터전을 불태우기는 했지만. (웃음) 세계의 모든 문제를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이런 것들이 가득해야 비엔날레이다. 이렇지 않으면 비엔날레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서강.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얘기해달라.

.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은 눈에 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들 모두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뜻이다. 정말 해야 할 일은 자기도 남도 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고, 그 일을 하나 둘씩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더욱 더 즐거워지고 행복해 지는 일을 해야 한다. 공부하는 과정이 추악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준비했으면 한다. 추악해지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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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 6. 18. 22:02



가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에게 비결을 물으면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라는 허무한 말로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윤기호 PD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쓰레기’라고 칭할 만큼 유흥을 즐긴다는 그가 타인을 위한 일에 용기를 내 실천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인터뷰 및 편집 김하늘 기자



윤기호 프로듀서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제작사의 공동대표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던 스무 살 딸을 가슴에 묻은 속초의 평범한 택시운전 기사가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건 재판을 벌인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여긴 재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직업병 승소판정을 받아 전세계가 먼저 주목한 기적의 실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30여년간 속초에서 택시운전 밖에 몰랐던 소박한 아버지가 인생을 건 재판에 뛰어든 지 6년 만에 2011년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 14부에서는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황유미씨의 산업재해를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판결로서 평범한 아버지가 이뤄낸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IBM에도 직업성 암,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있었고 당시 IBM은 노동자 수백 명에게 개인적으로 합의서를 써주고 보상했다. 다만, 합의 내용을 비밀에 부쳐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산재법이 갖춰진 나라가 많지 않았기에 법원을 통해 직업병이 인정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고(故) 황유미의 판결은 국내에서도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판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약속>은 다큐멘터리나 사회고발영화가 아니다. 평범한 가족이 슬픔을 겪고 거대 기업과 맞서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약속>이 감동적인 이유는 세상을 떠난 딸과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각종 유혹과 협박에 굴하지 않는 아버지의 뜨거운 진심 때문이다.

고(故) 황유미의 산재인정 판결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로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2014년 1월 현재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자는 151명에 이르며, 그 중 58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Q. 최근에 좋은 소식이 들리더군요. 7년 넘게 계속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산업재해 보상을 요구했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삼성전자 측에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보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대표단을 구성해 ‘반올림’ 측과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이런 변화의 움직임을 더욱 가속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게 바로 언론도 해낼 수 없는 영화만의 힘이 아닐까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A. 5월 15일에 황상기 아버님 1차 공판이 있었어요. 저도 황상기 아버님, ‘반올림’ 여러분들, 김태윤 감독과 함께 서울고등법원에 다녀왔는데요. ‘반올림’ 측 변호사와 이야기를 해봐도 이번 삼성전자의 사과문에는 사과문의 전형적인 형식들이 존재하고, 이렇게 정식으로 나서서 사과한 사실은 분명 환영할만하다더군요. 아마 반올림 측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존재하지만, 삼성의 변화에 대해서는 환영한다는 공식입장을 내보냈을 겁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영화가 이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를 생각해보면, 사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황상기 아버님과 반올림, 노무사님들이 그 자리를 계속 지켜왔기 때문이잖아요. 그 모습을 보고 저희 같은 일반 영화인들이 그 이야기에 감화되어 동참했던 것처럼, 관객들이 이 영화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으로 함께 같은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삼성 측에서도 이 부분을 고려하게 만들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상기 아버님도, 저희 ‘제작두레’ 회원들도 관객분들이 관심 가져주신 점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작은 기적, 조그만 성취감을 함께 했던 1만여 명의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다면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영화 제목이 <또 하나의 약속>인 이유가 있나요? ‘약속’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김태윤 감독이 처음 대본을 썼을 때 제목은 <꿈의 공장>이었어요. 영화 시작하는 장면을 보면 직원들이 모두 회사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버스가 바로 ‘꿈의 공장’인 거죠. 공장에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겠다는 꿈을 가진, 사회에 처음 진출한 친구들이 바로 그 공장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꿈의 공장>이라는 제목이 역설적으로 참 잘 어울린다 싶었어요. 그런데 제작단계에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기에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또 하나의 가족>이었어요. 그런데 결국 이 제목도 바꾸게 되었죠. 그 이유는 극장 개봉 할 때 ‘가족’이라는 어감이 극장매니저에게 부담이 된다는 거였죠.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하면 상부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요. 외압이 아니라 내압이 작용하는 거죠. 안 그래도 어려움이 많을 텐데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생각한 제목이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가족’에서 바뀌더라도 그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목이 뭘까를 상당히 오랜 시간 고민해서 나온 제목이에요. 또 저희가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황상기 아버님과의 약속 때문이거든요. 아버님이 제게 부탁하신 단 한 가지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거 하나였어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거니까 ‘약속’이라는 단어가 의미 있게 느껴졌어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의 확장성에 대한 거였죠.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들 때 아는 사람들끼리만 본다면 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하는 고민이요. 이 이야기는 작업장에서 피해를 받은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국 이것은 정규직, 비정규직 할 거 없이 모든 노동자들의 이야기잖아요.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fms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영화를 통해 정답이 없을지라도 함께 고민해보는 과정에 의미를 두자는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가족’이라는 단어가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종적으로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거죠.


Q. 윤기호 PD만의 영화 철학이랄까요?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세요?

A. 영화쟁이로서의 고민과, 창작자로서의 고민을 따로 분리해 말씀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일단 영화쟁이로서 말씀드리면 전 대중을 상대로 한 영화라면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에 어떤 메시지가 있더라도 그것을 주입이나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들은 일단 영화를 즐기고 그 안의 메시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이 하는거죠. 그저 저희들은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결론은 맺지 않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재미를 느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영화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 안에 드라마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켄 론치인데요. 그 감독의 영화는 그 안에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영화적 재미가 뛰어나요. 예를 들어 <빵과 장미>나 <랜드 앤 프리덤> 같은 영화를 보면 메시지도 훌륭하지만 일단 재밌는 영화라는 거죠. 그것이 영화쟁이로서 상업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거 같아요.

영화인으로서는 메시지가 좋은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액션의 끝을 보여 주겠다는 마음도 제게는 이유가 돼요. 내가 하고 싶은, 내가 끌리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페이스메이커> 같은 영화가 그런 경우예요. 세상에서 1%의 승자들, 위너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페이스를 맞춰주는 내 친구들의 이야기. 그것이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영화로 만든 것이거든요. 사실 프로듀서라는 직업은 영화의 흥행을 계산해 흥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역할이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직업이라는 사람도 흥행여부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럼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자, 그게 제 가장 큰 기준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Q. 세상의 1% 위너들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작년에 콘텐츠진흥원에서 하는 창의인재 멘토링 사업에 참여했던 적이 있어요. 그 때 한 작가가 제게 PD님이 관여하신 영화는 다 그런(주변사람들의 이야기) 스타일이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제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나와 같은 주변인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요. 사실 1% 사람들의 이야기는 좀 비현실적이잖아요. 사실 우리는 98%에 속하는 페이스메이커들인데. 그래도 삶의 주인공은 그런 우리들 자신 아닌가요? 그러다보니 98%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게 더 와닿고 잘 그려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요. 현실적인 문제도 있어요. 예를 들면 영화 <혈의 누>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어떤 작품을 쓰는데 상류층의 파티를 구현해야하는 신(scene)이 필요했대요. 후에 그 친구가 쓴 글을 읽어봤는데 그 장면이 리얼리티도 전혀 없고 부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이 신은 왜 이러냐고 했더니 “몰라서.”라고 답하더라고요. 제가 만약 아주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면 또 그때 내가 아는 세상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겠죠.


Q. 사실 이 영화는 제작방식에서도 큰 화제가 됐었어요. ‘제작두레’가 무엇인가요?

A. 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많은 사람들과 같이 보고싶다’는 이유였는데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자본이 필요할까를 우선 고민했어요. 최소한의 퀄리티, 재미,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영화에 참여하는 스텝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정도의 자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최소 예산을 잡으니 8, 9억원 정도더라고요. 이 영화를 처음 제작하려 했을 때 충무로 자본의 투자를 받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했어요. 물론 시도는 해봤고, 결국 실패했죠. 그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독지가가 거액을 투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거예요. 자본의 통로가 막혔으니 이제 어쩔 것인가를 고민하다 크라우드펀딩을 생각했죠. 선례로 <26년>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되었는데, 당시 이 방식이 제작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런데 크라우드펀딩은 투자가 아니거든요. 원래 미국의 ‘퀵스타터’가 모델인데 미국에서는 금액이 얼마든 거기에 대한 수익률을 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금융다단계의 위험이 있어서 아직까지는 불법이에요. 그렇다면 크라우드펀딩으로 투자를 받으면 투자자에게 무조건 이익을 돌려줘야 하는거죠. 그래서 지금 크라우드펀딩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다 상품선구매의 방식이에요. 이 영화에 대한 투자 역시 2만원을 투자하면 시사회표 2장, 5만원을 내면 DVD를 드리는 방식으로 3억을 모았어요. 나머지 12억 정도를 더 모으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위한 ‘제작두레’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입소문의 창구로 만들었죠. 또 팟캐스트에 출연을 하거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한 홍보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영화제작이 가능하게 되었어요.


Q. 많은 난관을 겪고 영화를 만드셨는데 상영관 문제로도 또 어려움을 겪으셨다고요.

A. 사실 제작과정은 차라리 편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의 스텝들은 사실 모두 A급 스텝들이 참여했어요. 그런데 그게 억지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그들에게 대본을 줬을 때 모두들 하고 싶어 했어요. 배우도 마찬가지고요. 이 대본을 보고 오래 고민을 했던 사람은 오히려 아무도 안했어요. 처음 보자마자 하고 싶은 생각이 든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촬영과정은 힘들어도 웃으면서 견딜 수 있었죠.

그러다 2라운드에 와서는 시스템의 문제인거예요. 만드는 것 까지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용기내서 왔는데 시스템 내부로 들어온 순간 문제가 발생한 거죠. 삼성 측이 외압을 걸어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영화 전에도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 1985>같은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던 사례가 있기에 우리 영화를 못 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자본의 논리를 믿어 봤어요. 극장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니까 흥행할 수 있는 영화라면 우리 영화를 선택할 거라고요. 그런데 우리 영화보다 훨씬 더 관객이 적은 영화를 배정하면서 우리 영화는 선택하지 않는 겁니다. 자본의 논리마저 깨진 거죠. 극장 관계자 스스로가 혹시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내압으로 인해 상영관을 배정해주지 않는 거예요. 외압보다 무서운 것이 내압이더군요.


Q. 언제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난관이 불 보듯 뻔한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결심하는 데는 사회적 문제에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 오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A. 저는 사회운동가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영화인일 뿐이에요. 저희 같이 창작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싶기 때문에 누군가는 소설가가 되고, 누군가는 영화인이 되겠죠.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가장 끌리는 주제였던 거죠. ‘이 영화를 통해 반올림의 활동에 보탬이 되겠어!’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 영화를 통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게 궁극적인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서울에 와서 막노동도 해보고, 갖가지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학생회장도 하고, 게다가 마지막 화염병 세대이다 보니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은 생기더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항상 직접 나서서 행동하기보다는 관찰자로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학생회장을 할 때도 가장 힘든 것이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하다고 여기는 건 있죠. 저는 약자에 대한 ‘합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의 약속>도 결국 불합리한 부분을 합리로 맞춰 나가는 이야기인 것 처럼요. 이런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인내하고 고민하신 황상기 아버님이나 노무사님들의 경우는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Q. 인생선배로서 대학원생들에게 실천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A.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하는 것도요. 사회인으로 살다보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뀔 때가 있어요. 생활을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 사회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만났을 때 이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도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 속에서 결심을 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 당장은 실천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을 믿으면서 생각과 고민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분명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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