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4. 20:52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이들의 사유를 통해 자연 상태를 먼 과거나 밀림의 오지로 내쫒아 현재의 법-권리-국가를 투명하고 완결한 것으로 상상하려한 근대의 인간학을 뒤집어보는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뒤집기에는 국적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 선보이는 글들이 씨름하고 있는 사건이나 텍스트는 물론 특정한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거기서 추출된 것은 '인간'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구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국민'인 한에서 '인간'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근대적으로 분식된 정치사상은 여기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우선 선생님께서 책을 쓰시게 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일본 유학 중에 독특한 경험을 했어요. 독일이나 프랑스에 유학을 가면 그곳 말을 통해서 그곳의 철학을 하잖아요. 반면 아시다시피 일본에서의 공부는,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이론이 수입 되서 한 번 번역과정을 거친 것들에 대한 공부들이죠. 말은 일본말로 하는데 텍스트는 외국어인. 근데 저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이런 식의 경험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생긴 문제의식이 비서구지역에서 서양이론을 공부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뭘까, 이것의 역사적 계보 같은 것은 뭘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서구화의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인문학 분야의 서구화 혹은 서구 이론의 수용, 다른 언어체계들 사이의 만남, 이런 것들을 경험했던 거죠.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나 벤야민 같은 사람들을 읽고 이것을 현재의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구나. 어디까지나 동시대적으로 호흡하고 번역해야 하는 문제이지, 이론이 있고 그 이론에 따라서 현실을 재단하는 방식은 아니겠구나. 말하자면 그 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말씀하신 다른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2,30년대 일본에서 독일사상이 읽혔던 맥락을 보면, 일본은 당시 근대초극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근대초극은 쉽게 말해서 서구적인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질서를 구축 혹은 구상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어떻게 보면 앵글로색슨적인 보편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하고 있던 나치즘, 소비에트 등 변형하는 형태의 새로운 지역질서에 대한 구상이었던 거죠. 그렇게 봤을 때 과연 이들이 독일 철학을 단순히 수용했던 것일까. 애매하다는 거예요. 제 생각엔 마루야마 마사오가 칼 슈미트를 읽으면서,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촘스키를 읽는 것과 똑같은 감각으로 읽었을 거 같아요. 우리가 촘스키를 읽을 때 서양이론이라고 읽진 않잖아요. 촘스키의 미국 비판이나 911에 대한 글은 한 지성이 세계의 정세를 바라보는 글에 가깝거든요. 마루야마 마사오가 칼 슈미트의 책을 그런 식으로 읽었다는 거죠. 마루야마 마사오가 갖고 있던 감각은 굉장히 동시대적이었던 거예요. 마루야마 마사오의 칼 슈미트 뿐만 아니라 미키 기요시의 하이데거, 쿄토 학파의 헤겔철학도 말하자면 서양 이론과 대결하고 이 철학을 넘어서는 뭔가를 구축하기 위한 대상으로 읽어낸 결과들이라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은 일본이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사상사라는 것,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서양이론 수용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서문에서도 썼듯이 이론의 수입, 수용 등 이런 말들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유에 국적이 없다는 건 우리의 존재 자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질서 지워지고 분란이 일어나고 해소되는 이 전체의 상황을 정치라고 부른다면, 이를 사유하는 데에는 국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거죠. 물론 역사적 맥락을 다 부정하자는 의미는 아니고요.


이 책에서 어떤 정치적인 구체성은 언급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 즉 냉전 종식 이후에 미국적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궁극적으로 승리했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역사철학적 비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정하고 있는 보편적 인류라는 개념 이상으로 인간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인간이 자신을 더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인 비전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얘기한 거예요. 그런데 이 얘기나 나왔을 때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좌파들은 통속적인 이데올로그라고 야유를 했어요. 근데 저는 이 얘기를 좌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정말 그렇거든요. 좌파가 보편적 인류라는 개념에 기반한 자유, 평등을 넘어서는 인간 실현의 이념, 목적, 의미라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냐는 거예요. 예를 들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하버마스하고 데리다가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기고를 합니다. 유럽적 보편주의에 기초해서 대테러전쟁에 대한 비판을 하거든요.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손을 잡았다거나 결국은 둘 다 유럽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좌파들도 결국에는 보편적 인류의 행복이라는 것에 기대서 미국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도 세계 평화와 보편적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대테러전쟁을 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하는 쪽이나 전쟁을 비판하는 쪽이나 모두 보편적 인류라는 것에 기대지 않으면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후쿠야마가 얘기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이야기였던 거예요. 후쿠야마는 미국이 승리한 후 역사적 투쟁이 끝날 거라고 얘기했던 게 아니에요. 다만 지금까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뒤에 존재하는 다른 목적(goal)이라고 생각되어왔는데, 후쿠야마는 이제 자유민주주의 이상의 목적이 없다고 선언을 한 거지요. 마라톤으로 비유하면 선두주자가 들어오고, 4-50명이 더 들어오잖아요. 역사를 방송 중계로 비유한다면 방송은 1등이 들어오는 순간 끝나지만 2등부터 50등 까지는 방송 후에도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92년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최종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4-50등들의 경주가 계속된다는 거예요.

사회중의 붕괴 이후의 좌파 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91년도 이후의 이론이 스탈린주의만큼의 실제적 정치 조직체를 구성하는 역할을 못했다고 생각해요. 즉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원적 모순을 지적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하나의 원리를 정립하려 할 때, 91년도 이후에 등장한 이론들은 아무런 힘을 못 가졌다는 거예요. 스탈린주의는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고 이 구성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지침들을 줬다면, 그 이후의 이론들은 명확하지가 않고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역사를 다시 구성해야 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 국가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되기 때문이에요. 푸코를 보면서 권력에 대한 개념들을 바꾸고, 데리다를 통해서 서구의 보편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고, 라깡을 통해서 인간 주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흔히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정치철학이라고 얘기되는 사람들의 논의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와 닿는가. 왜냐하면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읽었던 감성으로 읽기 때문이에요. 뭔가 지침을 주지 않을까. 흔히 말하잖아요. 대안이 뭐냐. 대안이 있을 리가 없죠. 대안이라는 게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없는 거죠. 이 이론들이 그런 얘기들을 안 한다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로 흡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법의 공정성을 완성해야 되는 건가요?

용산참사를 예로 들면, 검찰은 경찰의 공권력이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에 농성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진압과정에서 기동대원이 죽은 것은 공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행위기 때문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하잖아요. 근데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허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실제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현실적으로 이에 대해서 어떻게 항의를 하고 어떤 식으로 시정을 요구할 것인가라고 할 때, 몇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 번째는 법 집행의 정의가 없었다는 걸 밝히는 거예요. 법이 담보해 내야할 정의가 완전히 상실됐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자료들을 선별적으로 취하거나 은폐했음을 폭로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은 법집행의 공정성과 정의를 회복해라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정부는 뭐라고 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합법적 절차와 적법성을 가지고 집행되었다고 하잖아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항들을 전부 사법부에서 처리해야 될 문제라고 말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는 거리에서 아무리 시위를 해도 아무런 정치적 힘을 못 갖는 거예요.

법을 넘어서는 정의를 구축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합법의 이름으로 모든 권력들이 행사되는 한 그것이 아무리 정의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이 80년대와 다른 이유는, 당시에는 법 자체가 부당하다는 전제가 있었다는 거죠. 즉 80년대에는 법을 넘어서는 정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87년 이후의 민주화체제는 법치의 정당성, 즉 대한민국의 실정적인 통치체제가 합법성과 정당성을 합치해서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골 때리고 답답한 거죠. 시쳇말로 얘기하면 MB를 우리 손으로 뽑았으니 할 말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가 물어야 하는 건 공권력의 과도한 행사에 대해서 정의 혹은 보편적인 가치설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 정의는 무엇을 담보해야 하느냐라는 거죠. 지금의 체제를 전(全)부정할 수 있는 정의의 이름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고요. 지금 그럴 수 있는 정의의 이념이 등장할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대정치철학자들의 논의가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요?

여기서 현대정치철학자라고 하는 랑시에르나 아감벤 등은 자유 평등이라는 이념 자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즉 역사적 목적이라고 했던 것들, 정의에 기초에 세워졌다는 이념들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게 과연 좌파들이 할 일인가라고 묻는 거죠. 다시 말해, 지금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다른 실정적인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비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하는 물음인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용사참사의 경우 국가권력이 행사되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이는 법이 정의를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집행 상의 오류가 아닙니다. 아감벰이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법의 행사라는 것은 원래 저런 거라는 겁니다. 혹은 저런 행사의 양식이야말로 법 행사의 최소단위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가장 원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고요. 정당성 없이, 목적성 없이 행사되는 것이야말로 법의 가장 원초적 형태라는 거죠. 벤야민이 폭력비판론에서 얘기했던 신화적 폭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국가, 주권, 인민, 권리 등 은 근대 정치의 전개과정에서 항상 획득되어야 할 것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되어 왔는데,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선언된 순간 과연 이 언어들이 어떤 내실을 가질 수 있냐는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아감벤은 이를 환상과 변명이라고 불러요. 말하자면 근대적 정치 이념을 통해서 구축되어온 실정적인 정치체제가 계속 이 운동의 방향대로 나갈 것이냐, 후쿠야마는 더 나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아감벤은 이 체제를 인정하고 이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과연 후쿠야마와 소비에트체제 를 포함해서 과연 근대적인 정치체제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라는 이념이 실행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왔느냐하는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아감벤은 법과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거예요.

법과 폭력, 그리고 정치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말씀이신데요.

용산참사 얘기로 돌아가서, 과연 그렇다면 이런 정치 이론들이 현실 속 사건들과 직면했을 때 어떤 이야기들을 던져줄까. 저는 오히려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용사참사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사례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있는데요.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탄핵이 의회에서 발의되면 헌재로 가게 되죠.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선출된 권력이잖아요. 그런데 선출된 권력을 비선출된 권력이 궁극적인 최종 심급으로서 결정한다. 이 말은 재판관의 개인적인 판단에 맡기겠다는 겁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재판관이 사람인 이상, 범박한 이야기이지만,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신영철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어느 정파를 막론하고 헌재가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는 건데,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선출한 최고의 권력을 사법부가 판단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법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정치의 공간을 말살하고 있다는 겁니다. 헌재에 판단을 위임하는 형태가 반복된다면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것이 거리의 정치이든 의회의 정치이든, 쉽게 말해 정치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감벤이나 랑시에르 등이 얘기하는 것은, 법치라는 것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메시지라고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법이라는 것이 항상 잠재적인 규칙의 체계이지 사람들의 삶을 질서지우는 지고의 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법에 우선하는 정치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요?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겠죠. 정당 정치와 거리의 정치 중 어떤 게 더 필요하냐. 의회가 힘이 없어서 거리로 나오든 의회와 거리가 연합하든 어떤 정치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법이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시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법이 정치적으로 인권, 평등, 자유 같은 것들을 성취해나가는 수단이었다면, 지금의 법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거꾸로 통치해나간다는 거죠. 자유, 인권, 국가 등의 근대적인 정치이념이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정의로운 것인가, 이 말은  그것과 정의가 불변하는 형태로 결합되어 있을 수 있냐는 것을 묻자는 것이죠. 이러한 물음의 메시지는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명확합니다. 결국 법치라는 것을 얼마나 상대화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공권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 법이 정당하게 집행되지 않았다 혹은 이 법이 정의를 담보하지 못했다는 논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보다 철저하고 더 근본적인 정치적 원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법에 대한 정치의 우위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건 국가에 대한 사람의 우위라고 말해도 되고요. 행정력에 대한 의회의 우위라고도 볼 수도 있고요. 좌파이론이 지금의 법이 기초해 있는 이념이 아닌 다른 이념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법이 기초해 있는 이념과 표리부동하게 결합해서 그 어떤 실질적인 정치의 공간도 만들어 주지 않는, 오히려 정치의 공간을 옭죄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가 지금의 문제라는 것이죠. 이것을 위해서 거리가 필요하냐 의회가 필요하냐는 전술이나 전략의 문제인 것 같고요. 촛불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그런 거에 있었던 거죠. 굉장히 원리적인 문제였던 것이고요. 법은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고, 그런 이념조차도 거부할 수 있다는 거죠. 다르게 얘기하면 법이나 이념들은 잠정적인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이것이 아마 지금 새로운 정치철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정치는 법이 당연시 하고 있는 전제들의 영역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거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아감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이 정치의 가장 최소단위이다. 동물이 어떻게 인간이 되느냐, 이 과정이 뭐냐는 거예요. 인간은 동물이기도 한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물이 아닌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혹은 동물의 상태와 인간의 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이 상태가 어떻게 인간이라는 형태로 삶을 구성하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지금까지는 계속 인간이라고만 얘기해 왔다는 거죠. 인간이기 때문에 동물적인 행태를 해서는 안 된다고만 얘기해 왔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아감벤이 볼 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에서 끊임없이 인간으로 되는 과정이라는 거고, 바로 이게 정치라고 말합니다. 이를 제 책에서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라고 얘기 했던 거고요. 아렌트 같은 경우에는 이를 오이코스하고 폴리스라고 얘기할 테고, 홉스 같은 경우엔 자연상태와 국가라고 얘기하겠죠. 아까 식으로 얘기하자면 법과 정치의 공간이 되겠죠. 결국 한 짝의 대당들이 딱 결정되어 있는 이 상태를 벗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동물임과 동시에 인간이다. 즉 잠정적이라는 거예요. 이 잠재성, 포텐셜이 없으면 아무런 가능태가 안 생긴다는 거예요. 이미 인간인데 더 할게 뭐 있어. 후쿠야마를 비판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죠. 넌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인데 더 추구해야할 게 뭐 있니.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안해야 되는 건가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법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입니다. 아까 새로운 정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전혀 새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감벤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나 구좌파들이 얘기했던 것들을 환상과 변명이라고 부르고요. 오히려 가장 원리적인 정치적 행위, 형태는 사회주의나 아니면 여러가지 이념들이 환상과 변명이 되어서 분식해오고 망각해왔던 것들이에요. 따라서 근원적인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감벤의 논의에요. 


“더도 말고 딱 한 가지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이 이름들이 어떤 전망을 보여주고 어떤 실천적 지침을 마련해주는지가 아니라, 누구나가 뛰어들어 본 전망이나 실천적 지침의 일면성과 한계 영역을 어떻게 지적해주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주의’, ‘탈주’, ‘다중’ 등의 의장(의장)들을 걷어내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고가 마주해야 할 최소단위를 추출해보고자 했던 셈이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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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 2. 4. 18:37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을 만나다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을 만나 현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길 위에서 함께 배움을 청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탈주에 대한 구체적 실천 지점을 함께 사유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나요? 제목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사실 이 제목은 2006년 가을쯤에 결정된 제목이니까 책으로는 2년 반 만에 나오게 되었네요. 원고는 매번 필요할 때마다 쓴 것이라서 사실 2년 반 동안 연구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요.(웃음) 책 앞에 썼지만 2006년 초반에 우리사회에 있었던 새만금 문제, 대출이 미군기지 건설, 노대통령의 한미 FTA선언 등을 보고 뭔가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래서 그냥 걷자는 제안을 했는데,기왕 걸을 거면 좀 멀리 걷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걸어보자는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뉘앙스가 있었냐하면 한편에서는 참을 수 없으니까 뛰쳐나가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자신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건가에 대한 생각이 들어서기도 해요. 한 2주 정도 걸으면서 지역 사람들과 매일토론회나 세미나를 열고 다시 걷고, 동네에 도착하면 세미나하고 걷고 하면서 매일 세미나를 열었어요. 그 와중에 이 책에 있는 첫 번째 원고, 국가의 추방하고 대중의 탈주를 떠올린 거예요. 2006년 4월에.

안산에서 만났던 이주 노동자들, 개화도에서 만난 어민들, 산에서 만난 농민들, 미군기지가 들어설 대추리에서 만난 주민들, 미군폭격지가 있는 매향리에서 만난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어요. 정치라는 것이 일종의 언어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물로서의 목소리(음향)가 언어(로고스)로 변해가는 것이 폴리스인데, 이 사람들은 정말 목소리로 존재하는구나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른바 여론을 매개하거나 정치적 의사를 매개하거나 운동을 매개하는 모든 기구들이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이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었던 거죠. 자기목소리를 전달할 통로가 없을 때, 초대 받지도 않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말하려고 끼어드는 게 난입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첫 번째 글엔 그런 뉘앙스로‘탈주’를 썼는데, 솔직히 이때 탈주의 의미는 뭔가 약간 좀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요. 매개가 작동하지 않을 때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불가피하게 강제되는 부분인 거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느낌도 들었거든요.‘탈주’라는 것의 다른 가능성이랄까? 우리의 삶이 돈이나 권리로 환원되기 이전의, 일종의 백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로 다시 구축될 수 있을까.


추방됨과 탈주함의 복합적 작동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은 삶이 이루어지는 어떤 관계망이 붕괴되어 버렸어요. 개화도에서 바다를 막으면서 붕괴된 것은 사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거든요. 이젠 돈이랑 매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죠. 어떤 의미에서 관계망의 붕괴는 한 개인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불안을 조성하거든요. 모든 책임에 개인에게 귀속되고 개인은 극도로 고립화 되지요. 어부 한분이 저한테 지나가면서 슬쩍 말했어요. 왜 농사를 짓는지 물었더니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야한다고, 그때 얼핏하는 말이 농부가 돼서라도 어부가 돼야 한다고. 그 말이 저한텐 굉장히 세게 와 닿았어요. 삶을 계속 확장시키려는, 다시 구축해 나가려고 하는 노력이 있잖아요. 어부가 어부이려면 농부라도 돼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하니까 악착같이 버텨야한다고. 그런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삶의 구축이라고 그럴까요? 극히 어렵고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런 힘들을 봤거든요. 탈주가 갖는 굉장히 중요한 가능성이라는 느낌, 복원 돼야할 것이 뭐고 창조 돼야할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지요.

두 종류의 탈주가 있어요. 하나는 불가피한 형식. 작년인가? 홍세화 선생이 어떤 칼럼에서 우린 어떤 아노미를 강요받고 있다고 썼어요. 그런데 정말 맞아요. 어떤 적대적 실천으로써가 아니라 불가피한 실천으로써의 탈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긍정적 형식의 탈주가 있어요. 이렇게 내쳐진 김에 오히려 뭔가 새로운 실험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추방, 그것은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준다. 탈주,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이다. 길 위의 무수한 대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가' 에 대한 증언이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에 대한 예언이다. 아직은 웅성거림이고 아직은 머뭇거림이지만, 소삭임의 말들은 급속히 처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러 말들이 갑자기 하나의 언어로 짜이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그때 대중은 더이상 속삭이지 않고 명확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현재의 정치체제에서 어떤 방식의 탈주가 가능한가요?

저는 이제 최장집과 백낙청 선생의 문제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져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이제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인가에서 전 약간 후자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어떤 참된 민주주의 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80년대의민주주의가 있었고 이젠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한 게 아닌가하는 거죠. 기존 민주주의의 심화∙확장∙발전 이라는 틀이 아니라요. 가령 이주노동자에 대한 예를 봐도 알 수있어요. 최장집 선생은 민주주의를 정당이 다수의 이해에 호응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정책 경쟁을 하는 체제라고 정의하시는데, 그 속에서 배재되는 소수자들은요? 공론장이라는 영역은 상식과 통념이 지배하는 영역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배재를 경험하는 사람, 즉 대의 과정에서 대의라는 형식 자체가 배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령 여기서 삶을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는 이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수 없거든요. 시민권을 안 갖고 있어서요. 다시 말해 민주화 과정이 다른 한편으로 배재가 공고화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투표권주고 대표를 뽑으라고 하면 풀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선 회의적이에요. 이주노동자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전혀 상반되는 질문을 던지는 거지요. 기존의 민주주의를 확대 심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는가하는 문제 말이에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대표적인 두 분을 상정하고 말했지만 좀 더 넓게 보면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이제는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되어
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지점이 있나요?


탈주를 정의하는 맥락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간에 낯설어 지는 것이 필요해요. 국가에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불안해하는 대중이 있고 그 대중을 불안해하는 권력이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굉장히 낯설어지고 있죠. 그런데 권력은 그 낯설음을 깨서 투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대낮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할까요? 환하게 봐야겠다. 복면 같은걸 벗겨서 어떤 놈인지 봐야겠다고 하는 욕망이 있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중은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어요. 추방되고 배재되니까 자기를 설명할 틀과 언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웅성거림 속으로 계속 밀려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약에 탈주의 어떤 실천적인 지점을 상상할 수 있다면 이러한 상황을 더 가속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익명성을 더 강화해야 된다는 겁니다. 서구철학에서는 익명성을 자꾸 어디 숨는 거나 감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중에 휩쓸리는 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개인의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대중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의 얼굴은 참 익명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익명성은 감춤의 양식이 아니라 드러남의 양식이거든요. 뭔가드러나는 거. 그래서 대중이 하나의 힘으로 작동할 때, 가령 미네르바가 대중의 얼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복면을 벗겨보니까 전문대 졸업생이니 뭐니 하면서 변변치 못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복면을 벗김으로써 밝혀낸 건 실체가 아니라 대중의 힘을 잃은 한 사람의 얼굴에 불과하거든요.


익명의 얼굴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나요?

저는 대중들이 더 노골적으로 복면을 써야하고 더 익명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국가나 기업에 확실히 파악되지 않는 말이나 삶의 여지가 더 있어야한다는 거죠. 은밀한 네트워크, 더 은밀해지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곧바로 간파되지 않는 것 말이죠.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왜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했을까. 베트남 사람들이 너무 은밀했다는 겁니다. 저 꼬마아이가 베트콩에 미군들 위치를 알려주러 가는지 그냥 어린애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실제로 아이들 중에 그런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노인네가 스파이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그런 경우에 권력은 굉장한 불안을 느끼는데 가장 두려워한 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하나의 정책밖에 없어요. 몰살. 그래서 미군들은 인민을 다 몰살해 버렸다는거예요. 모르겠으면 죽여 버리면 확실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결국 미군이 승리할 수 없었던 이유에요. 은밀하게된 대중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거지요. 힘이 없는 사람이 자기를 말해야할 때 전 얼굴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칸트의 예를 들면, 친구가 집에 숨었을 때 경찰이 친구가 집에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하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말하지 않을 권리,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감출 권리,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내가 내 신체 부위를 가릴 권리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요. 대중들은 더 은밀해져야하고 삶의 다른 여지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밀하다는 게 꼭 반체제적이라는 게 아니라 국가권력이나 자본에 투명하게 노출되지 않는것이거든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오히려 법은 익명성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제정되고 있잖아요.

최근에 한국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로 흡수되는 느낌이 있어요. 법 안 지키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마치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인 양. 그래서 지금 민주주의가 법과 제도의 형식인지 아니면 삶의 양식인지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문제가 법으로 제정되지 않았으면 막 싸울 수 있는데, 일단 국회에서 통과가 되면 백분토론 같은 데서도 법은 지켜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잖아요. 그럼 할 말이 없어요. 저는 우리가 이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대로 사는 것과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이 둘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법대로 사는 것은 다만 초월적인 명령, 규칙들을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삶을 구축하는 면에 있어서 조금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법대로 살기 이전에 사는 법이라는 차원에 대한 환기가 필요하고요. 가령 교사라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과 다른 방식의 소통을 할 필요가 있고, 주민이라면 등산모임을 만들거나 다른 지역주민들하고 다른 뭔가를 함께 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퍼져나가면 이 정도로 우리가 불안해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차원이에요. 만약에 탈주에 관한 긍정적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법이나 우리식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얘기를 책에 쓰면 좀 허망해질까봐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끝냈지만 속마음은 진짜 탈주라고 하는 것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자기가 좋은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국가에 살기 좋게 해달라고 빌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탈주'를 시작해야하나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작은 실험국가로 존재해야 돼요. 니체가 철학한다는 거에 재밌는 정의를 내린 적이 있어요. 얼음밖에 없는 산에 혼자 살고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픈 거예요. 그런데 저기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 쪼르르 기어가요.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요? 당장 잡아야죠. 징그럽다고 쳐다만 볼 수는 없잖아요. 만약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버섯이 있다면 그냥 지나가야할까요 먹어야할까요. 물론 그걸 한 번에 다 먹으면 죽을 거예요. 정말 모 아니면 도죠. 그럴 때 어떻게 하냐면 쪼금 떼어가지고 먹어보는거예요. 배가 아파서 미칠 것 같으면 그만둬야겠지만 바로 포기해야할까요? 아니요. 바로 포기하긴 너무 일러요. 한번 삶아 봐야죠. 그리고 또 조금 먹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하면 탈주하는 것은 없는 것에서 부터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도 국가는 중요해요. 국가가 담당하는 부분이 있고 시장이 작동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타도한다고 없어질까요? 필요가 존재하는데요? 저는 국가가 거추장스러워지면 그때 파괴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국가가 없어지는 건 불가능 하거든요. 탈주도 마찬가지인데, 탈주라고 하는 게 떠나게 되는 걸 전제하거든요. 하지만 그냥 신경질적으로 뛰쳐나가면 탈주가 아니라 자살이고 도피에요. 탈주는 도망칠 때조차도 뒤쪽에서 쫓아오는 적들과 싸우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나아가면서 길을 개척해야 하고요. 그래서 탈주를 한다는 것, 다른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해 뭔가를 실험하는 것이지 밑도 끝도 없는 신념에 기반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삶, 다른 민주주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게 뭘까 실험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여기서 조금이라도 그런 삶을 시도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여러 이유 때문에 탈주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거든요. 저는 그 말 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배후에 절망감을 둔 단호함도, 배후에 소심함을 둔 소박함도,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승패를 확정하려는 열망은, 우리가 지금‘과정’중에 있으며, 앞으로도‘과정 중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의 산물이다.”


촛불에 대한 국면적 분석이 새로웠습니다. 특히 사제의 개입에 대한 지적은 굉장히 날카롭던데요.사제의 개입은 촛불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가서 사제들에게 호소했다는 것 그리고 사제들이 그 임무를 자처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구호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가 돌연 승리가 선언됐다는 것. 그건저한테는 좀 심하게 말하면 낡은 것이 돌아왔고 우리에게 너무 익숙했던 것 우리가 넘어서려고 했던 것들이 다시 돌아와 버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자리에서 필요했던 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말해, 우리를 보호해 줄 방패가 아니라 그 국면을 돌파해줄 창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을 했거든요. 촛불 집회 중에 한 대여섯 명쯤의 학생들이 전경들쪽으로 돌멩인가 뭔가를 던졌나 그랬어요. 뭘 던지니까 전경들이 그 대학생들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버린 거예요.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그때 교수들 몇 명이 전경들을 뚫었어요. 교수들이 학생들 몇 명 데리고 전경들 사이를 뚫었던 거예요. 전경들도 막 당황하더라고요.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애들을 내보내는 거예요.

저는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아 누가 뚤어줄 수 있는구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누구를 대편해주는게 아니라 아니라 뚫어줄 수도 있구나. 사제의 개입 지점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지켜주고 대신 말해줌으로써 상황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막힌 국면을 돌파함으로써 상황을 새롭게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비폭력 직접행동, 직접적인 폭력을쓴다는 게 아니라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입 할 수 있는 구체적 지점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연구자 대중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연구자가 대중이랑 다를 게 없다는 거예요. 농민 대중,노동자 대중처럼 연구자 대중이 있다는 거지요. 연구자가 뭘 가르치나요? 우린 서로가 서로를 배우게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농민의 어떤 삶이 노동자에게 생태적 배움을 줄 수도 있어요. 노동자의 생산 활동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고요. 예술가가 만든 어떤 영화나 작품이 연구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도해요. 가르친다는 말을 너무싫어해요. 계몽 개념에서 나온 거잖아요. 누구의 삶을 대신 살아보고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다만 우리의 어떤 활동이 다른 사람들을 배우게, 깨닫게 할 뿐이지요. 그래서 위대한 교사란 배우게 하는 자라고 생각해요. 가르치는자가 아니라 새로이 배우게 하는 자가 아닐까요?


이 책에는, 비록 내 짧은 지식과 둔감한 신체 탓에 제한되기는 했지만, 앎의 장소, 앎의 신체가 있다. 문장들 속에서 나는‘거기’와‘그들’을 떠올릴 수 있다. 문장들 속에서 나는‘여기’와‘우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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