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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8호] 차별이 곧 악이다 — 영화 ‘어스(Us)’_하태현

차별이 곧 악이다

영화 ‘어스’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하태현

 

 

 

어스’가 재미없다고?

 

영화 ‘어스’(이하 ‘어스’)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겐 플롯 구성이 단순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은 애들레이드 가족의 생존을 응원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재미없다는 평이 적잖게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누가 어떻게 살아남고 누가 어떻게 죽느냐는 감독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생존은 비교적 예상할 수 있게 그려졌다. 물론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사이에서 누가 진짜인간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한몫한다. 한편 진짜를 가려내는 추리 과정에 할애된 분량은 적고, 단조롭다. 진짜를 가려내는 것은 감독의 주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스’는 주인공의 생존기를 통해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우리(us)’는 누구이며 우리 밖에는 누가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1968년 미국 산타크루즈 해변에서 어린 애들레이드는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가 두더지 잡기 게임에 한눈이 팔린 사이, 애들레이드는 “영혼의 여행.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달린 거울의 방에 들어간다. 거울에 둘러싸인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만난다. 거울에 비친 상인 줄 알았는데 그가 움직인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실어증에 걸렸다. 그날 이후, 애들레이드는 평생을 도망치듯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애들레이드는 가족(남편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과 떠나는 휴가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산타크루즈로 향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긴장과 두려움이 역력하다. 휴가 첫날 밤, 애들레이드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집 앞에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서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어떤 가족은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애들레이드 가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에 애들레이드는 경찰을 불러보지만, 경찰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가족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이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보며 놀란다. 복제인간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려 하지만, 여러 번의 위기 끝에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는다.

 

나의 모습을 한 미스터리한 외부인

 

1986년 미국에선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s across America)’이라는 캠페인을 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기아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15분 동안 손에 손을 잡는 퍼포먼스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캠페인 규모와 비교하면 자선단체에 직접 전달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남은 것은 대상화된 연민뿐이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 캠페인은 세계 반대편 어딘가에선 굶주림에 고통받는 자가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고자 했다. 그러나 낙관주의적 태도는 현실적인 변화에 도움이 못 됐다. 약자를 향한 캠페인은 지식인과 부유층의 기만에 불과했다.

 

1986년은 역사적으로 기아 퇴치를 위해 미국인이 손을 잡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애들레이드와 레드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미국 내부의 약자들, 우리 안의 우리들을 대변한다. 극 중 애들레이드의 아들 제이슨이 섬뜩한 침입자들을 보고 “우리들이잖아(“it’s us”)”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타인의 얼굴을 띈 외부자가 아니었다. 미스터리한 침입자는 나의 얼굴을 한 외부인이었다.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이질적인 그들은 ‘우리’와 쏙 빼닮았다.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제인간 ‘레드’는 “우리는 미국인이야”라고 답한다. 여기서 복제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유사한 외모를 지닌 도플갱어가 아니라 미국(U.S: United State)의 일반 시민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영화는 ‘미국인으로서의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다. 감독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뻔하게 묻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미국 사회에 속한 ‘우리’는 타인과의 경계선을 어디에 긋고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인 감수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성찰이 되어야만 한다.

 

네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

  

‘어스’의 시작과 끝의 내용은 중심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감독은 미국에 정체 모를 지하 터널들이 무수히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것들 대다수는 누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흔한 음모론의 일종이다. 그곳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던 필 감독은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지하터널에 의미를 부여한다. 지하터널은 생체 실험이 진행되었던 곳이며, 현재는 지하 인간(복제인간)이 사는 곳으로 명명했다. 지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은 오랫동안 지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지하의 복제인간들이 터널에서 나와 손에 손을 맞잡는 캠페인을 다시 재현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부터 첩첩산중에 이르기까지 흡사 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이 퍼포먼스는 1986년의 캠페인과는 결이 다르다. 앞선 캠페인이 굶주린 기아를 향한 연민에 불과했다면, 마지막 장면은 복제인간들의 체제전복적 투쟁이다. 이 영화는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통해 홉스적 사회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미국 사회에 만연하다고 비집는다. 국가와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그들(복제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복제인간들의 분노는 지상의 인간에게 향한다. 그들은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조던 필 감독은 인간의 죽음에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사회의 불안과 분열은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감독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차별의 문제에 관한 경고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

 

지하 터널에서 숨죽인 채 사는 복제인간의 삶은 2019년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유사하다. 복제인간은 생체 실험연구에 의해 육체적으로는 완벽히 복제된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개별적 사유는 불허됐다. 지하의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설정은 특히 상징적이다. 자신의 언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근거와 논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지식인이 지닌 힘의 원천은 언어에 있다.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겐 자신만의 언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소통되지 않는 그들은 통제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한다. 어엿한 사회 구성원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지워질 경우가 많고, 언어화되지 않은 요구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인들을 죄악시한다. 주된 논거는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했고, 미국의 백인들은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같이 정치 권력을 쥔 강자가 내뱉는 언어는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미국의 정서와 담론으로 구체화된다. 복제인간에겐 언어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인종이 다른 것이 흠이 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인의 신분을 지닌 소수인종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와 흑인, 아시아인들은 그의 타깃이 되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발언할 수 있는 마이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들에 눈에 띄는 것 자체가 불쾌함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조용히 살기를 종용받는다. 영화에서 복제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들은 2등 시민이 되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지상의 인간과 묶인(Teathered) 존재다. 그림자와 같이 육체적으로는 지상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환경적 차이로 인해 정서적, 정신적으로는 차이가 벌어진다. 한 소녀는 행복하고 사랑받는 생활을 했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불행하고 처절한 삶을 살았다. 한 소녀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놀았다. 영화에서 양극화된 삶을 사는 두 부류의 기원은 환경적 구조에 있다. 타파하기 위해선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15분 남짓의 게으른 퍼포먼스만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잊히고 그림자로 냉대받고 이들은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가위는 날카로운 양날이 서로 맞물려 물건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도구다. 가위가 인간의 몸을 찌르는 것은 지상 위의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지만, 복제인간에겐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혁명적 몸부림이다.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

 

‘어스’는 ‘우리’와 ‘너희’ 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해야만 하는 사회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가? 성서 말씀인 예레미야 11장 11절은 여러 번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감독은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네 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탁상시계로 11시 11분을 가리킨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노인의 팻말에 적힌 말씀(렘 11:11)은 모두 동일한 숫자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말씀의 본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렘 11:11). 이는 하느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방인에게 침입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국의 파멸과 멸망이 이방인(‘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자)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인터뷰에서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서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악은, 우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를 비판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아야 하는 홉스적 사회는 감독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간 미국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였다. 이제는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고 이로써 자신을 지키려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제노포비아 정치를 소환하고 있다. 정작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외부의 악마는 아무런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은 괴물로 타자화되고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며,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복제인간과 다를 게 없다. 현실 사회에서는 그 복제인간들은 영화에서보다 더 비참한 투명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별이 곧 악이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더는 안전한 땅이 아니다. 애들레이드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도망가기를 선택한다. 애들레이드는 다시는 보조석에 앉지 않는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가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어스’는 지배적 위계질서인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어스’에서 아버지들은 두더지 게임을 하느라 딸을 방치했고, 도플갱어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힘을 과시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애들레이드는 데이브에게 “이제 당신에게 결정권은 없다”고 말하며 가부장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악으로 규정한 그 나라로 떠난다. 진짜 괴물은 멕시코인들이나 이방인이 아닌 차별적 시선을 지닌 미국인들 그 자체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공격하는 사회에선 그 누구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게 한다. 미국 사회는 현재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을 적으로 규정하기 바빠 보인다. 미국 사회는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방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날카로운 언어로 가공되어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에 상처 입히고 있다. 가위로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미국에선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범주 안에 누가 들어가 있는가? 감독은 전작인 ‘겟아웃’과는 달리 ‘우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특정 인종을 앞장세우지 않는다. 흑인 배우가 다수를 이루지만, 그 메시지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명백하지만, 멕시코인에 대한 차별은 비교적 흐릿하다. 차별로 명백해진 것에는 조심스러워지지만, 흐릿한 것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에서 멕시코인 혐오는 대중적이지만,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은밀하고 지속해서 이어진다.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선이 분명해질수록 차별도 분명해진다. 인종에 근거한,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멈춰져야 한다. ‘어스’는 차별적 인식이 어떤 악의 얼굴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차별이 곧 악이다. 조던 필은 ‘어스’를 통해 어쩌면 악은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성찰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