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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3호]문화기고. 천팔백구십이년 숨 막히던 여름날_오유민

출처: 쇼노트

 

서강대학교 국제인문학부 미국문화학과 오유민

 

 

0. 폴 리버로 가는 길

얼마 전,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리지>를 관람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극들이 조기 폐막, 혹은 개막 취소가 되고 있어 우울하던 중 오랜만에 도착한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낯선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보러 가는 공연이 무대 위 4명의 배우가 모두 여자인 록 뮤지컬이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문진표를 제출하고 마스크를 코에 꾹 눌러쓴 채 들어간 극장에는 쇠창살들로 이루어진 숨막히는 2층 무대가 서늘한 파랑 빛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그 어느 미친 더위의 여름날로 관객들을 데려가기 위해 두 팔 벌려 기다리는 것처럼. 

 

1. 보든 가의 집

1892 8 4,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 리버에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부유한 사업가 앤드류 보든과 아내 애비 보든이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는데,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이 바로 그들의 둘째 딸 리지 보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어 그녀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아직까지도 미제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연극, TV 시리즈,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뮤지컬<리지>는 이 미궁 속 이야기를 리지, 리지의 언니 엠마, 옆집 친구 앨리스, 그리고 보든 가의 하녀 브리짓이 네 명의 인물로 풀어나간다. 

 

2. 마흔 번의 도끼질 

오랜 시간 동안 텍스트 속, 특히 공연 예술에 있어서의 여성 캐릭터들은 소비적이었다. 성녀와 창녀(악녀)의 이분법적 개념 하에 존재했던 그들의 서사는 오직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존재했고, 욕망을 가진 여성들은 악한 존재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흐름은 점점 바뀌고 있고, <리지> 또한 극 중 네 여성들의 욕망과 선택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해방의 상징, 록 음악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욕망과 선택을 소유하기 위해서 존재했어야만 하는 상황들에서 드러났다. 리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며, 언니 엠마와 함께 거의 집 안에 갇혀 살다시피 지내왔다.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키우는 비둘기들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앨리스와의 만남은 금지된다. 이렇게 자신을 옥죄어 오던 모든 것들에 대한 리지의 강렬한 저항은 통쾌했지만 동시에 씁쓸하다. 폭력과 빼앗김 속에서만 욕망과 저항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남성 스태프가 무대 위에 등장해 쇼파, 혹은 침대로 사용되는 가구를 인(in) 시키고 리지의 옷을 헝클어트리는 연출은 주인공의 참담한 현실과 고통을 극대화시켜야만 관객들이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이 사건이 120년 전 미국에서 자극적 가십거리로만 소모된 것처럼, 오늘 날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소비할만한 가치가 있어야지만 들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날 불편하게 했다.

 

3. 섀터케인과 벨벳 그래스

뮤지컬 <리지>의 네 여성들은 그들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연대라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특히 2막의 의상 변화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성을 잃고 아버지와 계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리지는 2막 시작부터 이전까지 입고 있던 19세기의 드레스를 대신 검정색 가죽의 록커 의상과 헤어 브릿지를 한 상태로 등장한다. 취조와 재판이 진행되며 엠마, 브리짓, 그리고 마지막 앨리스까지 스스로를 억압하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도 꽤 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승리와 자유를 얻기 위한 연합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여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바로 록 음악이라는 점은 더더욱 눈여겨볼만하다. 지금까지의 뮤지컬 역사 속 록 음악의 활용은 수없이 시도되어왔지만, 19세기 말의 극도로 가부장적인 사회의 여성들의 서사를그것도 남성 위주의 표출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록 음악으로 노래함은 이례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는 요소는 바로 공연의 넘버(노래)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록 뮤지컬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마리아에게 허락된 음악이 오직 부드러운 기타 멜로디였음을 되짚으며 나는 <리지>의 음악이 가지는 의의를 체감했다. 쇠창살 뒤로 보이는 6인조 밴드와 호흡하며 무대 위 네 배우들의 벨팅이 겹겹이 쌓아 올려지는 모습을 되짚자면 아직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4. 톤튼에서의 13        

앞서 말했듯이, <리지>는 캐릭터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여성들끼리 힘을 합쳐 권력 혹은 악에 저항하는 모습은 연극. 뮤지컬뿐만 아니라 TV와 영화 등 미디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벤져스와 같은 히어로 무비에서 빠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을 맞대고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은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리지>라는 작품에서 연대를 통한 저항이 가장 적합한 주제의식이었을까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극은 리지와 엠마에 비해 브리짓과 앨리스의 선택의 동기를 제대로 제시해 주지 않는다. 브리짓은 오직 돈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앨리스는? 각 인물들은 자신만의 동기와 욕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이루는 과정에서 서로를 돕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라는 결정 속 암묵적인 서포트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캐릭터성을 연대라는 비교적으로 간단한 키워드로 뭉뚱그려놓은 작품은, 약자로서 뭉쳐야지만 억압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훨씬 더 욕심 부려도, 대담해도,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5. 뉴 베드퍼드의 재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라는 공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의는 매우 유효하다. <리지>라는 공연이 올라가기 전, 제작자들은 여자 배우들만 나와서 표가 잘 안 팔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과 엄청난 호평으로 한국 공연계의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 이은 <리지>, 그리고 많은 젠더프리 캐스팅 공연들의 성공은 이를 단숨에 반증한다. 이제 우리는 올 여성 극,’ ‘여자 배우 원탑 극의 마케팅,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여성 배우의 수()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텍스트와 캐릭터의 필요성과 수요를.

관객들은 답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는 공연이 다시 대답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