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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4호]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주체와 윤리 - 김초엽,「최후의 라이오니」를 중심으로

원양해

 

출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h4/event/pandemic/)

 

 

‘포스트’라는 접두사는 단순히 무엇의 이후라는 의미에서 나아가 무엇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함의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 처음 발발하여 전 세계로 확산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체의 곳곳에서 발견되던 ‘포스트-코로나’라는 단어에 의문이 들었던 것은 바로 이 ‘포스트’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 때문이었다. 패딩과 코트를 입어야 했던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 바이러스가 다시 패딩이나 코트를 입어야 할 계절이 돌아오고 있는 이 시점까지 지속되리라고 믿지 않았으며,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몇몇의 예측이 분명 과장된 괴담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싸운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없다는 당연하고도 씁쓸한 진리로 인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이후 코로나)는 분명 그 필연적인 일을 보다 더 가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데에 적절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간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가장 큰 단위인 국가 간의 불화까지, 코로나의 등장 이후 여러 사람들은 서로의 바운더리를 보다 공고하게 형성하고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서로 간의 경계가 보다 단단해지는 시대, 21세기는 너무나도 역설적인 길을 걷고 있다.

 

  21세기의 아이러니는 전 세계가 지구화와 탈경계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이전과는 구분되는 포스트-코로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구화와 개인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21세기 사회가 개인화에 가까운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타인과의 접촉이 가능한 장소에서 반지름 2m의 공간을 만드는 미시적인 개인화와 최대한 집에 머무르며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디지털네트워크를 통해 대체하는 거시적인 개인화를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경계를 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워지면서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던 움직임은 멈춰지게 되었다. 이는 모두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한 일들이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이러한 지침들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는 디지털 매체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가상 현실의 모습을 보면 어색하다고 느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우리는 변화한 사회적 규범에 물들여진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환경에 놓이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신체를 그 상황에 맞게 적응시켜 나가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변화한 사회와 때로는 마찰을 일으키고 때로는 변화한 것들을 수용하며 차차 익숙해졌지만,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8개월이 지난 현재, 이 사태의 순간성을 믿었던 사람들마저도 과연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조금씩은 품게 되었을 것이다. 코로나의 종식을 기원하며 일상생활을 유예하거나 중단했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지, 코로나와 공존하며 생활을 지속해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김초엽의 「최후의 라이오니」는 팬데믹으로 인해 멸망한 행성을 탐험하게 된 유품 정리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로몬’이라는 종족에 속하는 개체로, 로몬은 “보편의 인간 종보다 훨씬 담대하고 강인하며 용감”하다는 특성을 가지는 데에 반해 주인공은 다른 로몬들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연약한 개체이며 종족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로몬들은 멸망의 현장에 남겨진 유품과 자원을 정리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주인공은 일반적인 로몬들보다 약하고 모자란 존재이기에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3420ED라는 행성에 홀로 파견을 가게 되고, 자신의 결함에 대한 근원을 찾기 위해 그는 그곳으로 떠난다. 폐허가 된 행성에서 주인공은 그 곳에 남겨진 기계들에게 붙잡히고, 기계들의 대장인 셀은 주인공을 ‘라이오니’라는 사람으로 오인한다. 셀을 제외한 나머지의 기계들은 주인공이 라이오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기계들로부터 행성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듣게 된다.

 

  “행성계의 세 번째 궤도에 홀로 떠 있던” 행성이라는 점에서 3420ED는 태양계의 세 번째 궤도에 위치한 지구를 연상시킨다. 지 구와 닮은 구석이 있는 그곳은 불멸의 세계였다. 죽지 않는 인간이 되는 법 을 터득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로장생을 유지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다. 인접 문명들은 불멸을 위해 건강한 신체와 자의식, 기억을 복제하는 기술을 혐오하였고 복제된 개체의 진실성을 증명하라고 요구 했지만 3420ED의 사람들은 요구에 응하는 대신 자신들의 벽을 단단 하게 쌓아올렸다. 고립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그들은 행복했고, 그 것이 완전하다고 믿었지만 어느 날 전염병D가 발발하고 만 것이다. 불멸을 당연한 전제로 여기고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죽음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공포가 학습되었다. 속절없이 퍼져가는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해쳤고 결국 3420ED는 멸망하고 말았다.

 

  라이오니는 불멸인의 복제 과정에서 탄생한 결함 있는 개체였다. 선천적인 결함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이해하는 유일한 개체였던 라이오니는 집단으로 폐기처분될 위기에 놓인 기계들을 구해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인해 조성된 공포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멸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세계는 멸망을 향해 달려갔고 살아남은 불멸인들은 폐허가 된 고향을 버리고 우주로 떠났다. 라이오니는 셀을 포함한 기계들과 살아가고자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망가진 세상을 복구할 수 없었다. 행성은 더 이상 라이오니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결국 그는 돌아오겠다는 약 속을 한 뒤 3420ED를 떠났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셀은 라이오니를 기다리며 행성을 살 수 있는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라이 오니를 닮은 주인공은 이제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를 연기하며 행성의 완전한 멸망을 맞이한다. 주인공은 로몬들의 구조선 덕분에 무사히 귀환하지만 그는 눈을 감으면 여전히 라이오니와 셀이 서로의 손을 잡고 불행하지 않게 행성의 멸망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3420ED는 지구에서 착안한 가상의 행성일 것이지만, 지구와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람들이 불멸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불멸을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에 의문을 제기 하는 이들과의 교류를 차단한 것. 그러나 이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3420ED의 불멸인들에게 불멸이 지극히도 당연한 노멀이었다면, 지구의 우리에게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노멀들이 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믿음이나 세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이 세계에 완전한 절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이나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은 모두 그 시대의 당연한 노멀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비상식적인 것들로 판단된다. 불멸인들의 불멸이라는 노멀 또한 마찬가지이며, 21세기 우리의 상식적 기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를 당연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거나 그것을 불신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때로는 혐오한다.

 

  팬데믹의 힘이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절대적인 노멀들을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화, 세계화, 다문화사회와 같은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노멀은 코로나의 힘으로 인해 파편화의 길을 걷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사람들과 물리적인 접촉이 동반된 교류를 하는 지극히도 당연한 일상들이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까지 믿어왔던 세계에 대한 신뢰성을 잃도록 만든다. 절대성에 대한 신뢰가 약해질 때 우리는 공포를 경험하고, 감각 된 공포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급기야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등지게 하고 만다.

 

  소설은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 즉 주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한 소설이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체로서 가지고 있던 노멀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우리의 주체성은 흔들리고 만다. “어떤 죽음은 다른 삶을 지탱하는 것”인 만큼 살아있는 주체로서의 뚜렷한 감각은 타자의 생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주체성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다른 주체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타자의 자리로 아득바득 끌어내리려 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은 감염병 보다 빠르게 전파”되고,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는 혐오를 기반으로 한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코로나의 향방은 전문가들조차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형태를 띠고 있다. 최악을 가정하는 습관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생존을 위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롭게 도래할 지도 모르는 포스트-코로나의 시대에서 주체의 자리를 견지하기 위해,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또 다른 주체들과 공존하기 위해 새로운 노멀을 찾아야만 한다. 코로나가 21세기의 방향성을 개인화의 방향으로 트는 데에 기여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탈경계의 윤리를 곧바로 폐기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그로 인해 서로와 공생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 숙명을 안고 있는 현시대의 우리는 원치 않았던 감염병의 확산을 최소화해야 함과 동시에 그보다 발빠른 전파력을 가진 폭력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팬데믹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윤리와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인 것이다. 연결과 분리, 주체와 타자, 공존과 자립을 포괄할 수 있는 뉴노멀에 대해. 분명 한 가지의 작은 힌트는 자신의 결함을 받아들이고 다른 개체들과의 공존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최후의 라이오니’에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