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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5호] 용의 승천: 신파와 모성의 이름으로

서강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졸업생 고 재 혁

 

한국인에게 신파란 무엇일까? 한국의 콘텐츠 소비자들에게 신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저급 연출 방식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부정적으로 익숙한 신파는 관객의 감정을 억누르다가 특정 순간에 관객의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방식으로 인식된다. 이 중 눈물을 억지로 짜낸다는 것이 신파를 부정적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그런데 신파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억지로 짜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억누르는 행위가 있는 이상 억지로 짜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넘칠 정도로 꽉 찬다면 짜내는 것이 아니라 물꼬만 트면 된다. 그렇다면 신파는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짜내는 연출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절정인 순간에 관객이 억눌러졌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도록 계산적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굉장한 기술을 요하는 연출 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굉장한 기술이 들어간다고 해서 신파가 좋은 연출 방식이라는 것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고 나쁨이 없는, 저급도 고급도 아닌 연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잘 쓰면 좋고, 못 쓰면 안 좋은.

 

하지만 신파를 단순한 연출 방식으로만 볼 수도 없을 듯하다. 신파를 소재로 논문을 쓰면서 알게 된 지식으로 보나, 이를 기반으로 최근에 본 몇몇 영화와 드라마에서 느낀 신파의 정서로 보나 신파는 서구의 멜로드라마와 애매하지만 분리되어 한국만의 독특한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에 본 <라이스보이 슬립스>(2023)와 <동백꽃 필 무렵>(2019)은 이러한 개인적인 생각을 확고하게 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다음으로 미루고 <동백꽃 필 무렵>을 가지 고만 얘기해 보자. <동백꽃 필 무렵>에서 신파는 한국의 정(情)과 한(恨) 문화와 연동해 꼬인 팔자를 타고난 용 동백이의 인생을 느리지만 꾸준히 펴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단순히 한 인물의 서사에 대한 원동력인 것만이 아니라 동백이와 용식이의 로맨스, 까불이 (이규성 분)를 쫓는 추리 스릴러가 결합된 <동백꽃 필 무렵>의 서사에서 신파는 서사의 완성도까지 강화한다. 특히 신파하면 떠오르는 모성을 활용해 로맨스를 이리저리 드리블 치는 모습은 감탄만 나온다.

 

1. 모성과 신파의 정한 :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

 

<동백꽃 필 무렵>의 서사는 현실의 한국 사회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신파의 특성인 억압과 분출이 드러나기에 적합하다. 특히 한국의 전통 공동체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쟁점인 모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신파는 더더욱 힘을 얻는다. 드라마의 배경인 가상의 충청도 지역인 옹산의 게장 골목을 살펴보자. 게장 식당들로 가득한 옹산의 게장 골목은 한 다리 건너면 친구거나 사돈이요, 두 다리 건너면 사돈의 팔촌이다. 한 지역 안에 혈연, 지연, 학연 등 모든 연이란 연이 모인 공동체. 전날 누구네 몇째 아들이 누구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더라. 누구에게 돈을 빌린 누구네 집 누구가 돈을 갚지 못해 어제 맞았다더라. 집집을 가르고 있는 담과 문이 무색하게 별의별 이웃의 사정이 입과 귀를 넘나든다. 옹산의 공동체는 현대의 한국 사회보다 전통 한국 사회에 가까운 것이다.

 

모성은 옹산의 전통 공동체적 특성을 더욱 강화한다. 옹산 공동체의 주도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있다.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은 억척스럽게 집안을 이끌고 온 여성들에게 있으며 남성들은 등짝을 안 맞은 하루면 다행으로 넘어가는 어촌이다. 드라마의 1화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의 눈을 피해 놀 것인지를 궁리한다. '저렇게까지 놀아야 하는 건가?' 하며 한심하다 싶으면서도 눈칫밥 먹으면 사는 것이 웃프기도 하다. 얼핏 보면 옹산의 공동체는 가모장제 공동체인가 싶다. 하지만 실상 이 골목의 여성들은 모두 억척스럽게 한 집안을 건사하는 어머니로서 자신이 자리 잡은 곳을 떠나지 않는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집이기도 한 식당에 꼿꼿하게 박힌 채 식당 바깥에서 생활하고 오는 남편과 자식들, 특히 주로 아들들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 골목은 가모장에 의해 통솔되는 곳이 아니라 여성의 탈을 쓴 가부장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골목인 것이다.

 

가모장을 가장한 가부장 사회인 옹산에서 모성은 그 억척스러움 때문에 공동체를 더욱 단결시킨다. 모성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돌아올 이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이 위치한 곳을 가꾸고 보존하는 보수성이다. 그렇기에 옹산 공동체는 게장식당, 쌀가게, 떡집 등을 운영하는 여성들에 의해 가꿔지고 보존된다. 이런 가운데 옹산 공동체 각자의 사정은 골목에 박혀 남편과 자식을 기다 리는 여성들의 눈과 귀로 흘러 들어간다.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다 같이 모여 상대방 뒷담화를 하기도 하고 일부러 앞에서 쪽을 준다. 보수적인 모성은 자정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헤치는 요 소를 배제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한다. 하지만 모성은 보수적이기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상호작용한다. 상대의 사정을 알게 된 이상 여성들은 그것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이미 알게 된 이상 찝찝하고 그동안 쌓인 고운 정과 미운 정 때문에라도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자 한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워한다고 그렇게 축 처져 있으면 더 보기 싫으니 일부러라도 더 부대끼라고, 필구(김강훈 분)를 자신에게 맡겨야 자신도 준기(김건 분)를 맡길 것 아니냐고 말하는 찬숙(김선영 분)의 말은 억척스러운 모성으로 단결 한 옹산 공동체를 대변한다. 

 

결과적으로 모성은 이웃 간의 정과 한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전통 공동체인 옹산을 유지하면서 확장하는 원동력이다. 옹산에서 어제는 보고만 있어도 좋은 이웃이 오늘은 보는 순간 답답해지는 원수가 되기도 하는 이유는 모성에 있다. 모성의 보수성은 자기 식구 챙기기라 할 수 있다. 모성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식구가 되어야 한다. 한 식구가 되어 이리저리 부대끼며 동전의 양면인 정과 한을 쌓아야 한다. 한없이 아낄 수도, 한없이 미워할 수도 없는 식구. 옹산 공동체의 모성은 공동체를 헤치는 이들을 배제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상호작용하며, 헤치는 이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가족과 자식에 대한 사랑, 즉 자기 식구에 대한 사랑인 모성은 곧 같은 공동체의 일원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정반합을 주장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성은 바로 그 정반합의 원리와 같은 신파의 정한을 통해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새로운 공동체로 도약한다. 

 

2. 토끼와 용의 로맨스는 신파를 타고

 

이처럼 모성에 기반한 전통 공동체인 옹산 공동체에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공효진 분)과 용식(강하늘 분)의 낭만적인 로맨스를 덧붙여 신파를 더욱 강화한다. 로맨스의 상극인 모성은 가장 큰 장애물로서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와 맞부딪히며 서사의 긴장도, 즉 억압의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와 같은 억압의 에너지는 동백과 그의 터전인 까멜리아가 옹산 공동체의 경계에 위치했기에 발생한다. 눈치 보지 않고 놀기 위해서 자신들의 공동체와 연이 없는 이가 운영하는 장소가 필요한 옹산의 남인들. 그들에게 동백의 까멜리아는 음식도 음식이지만 옹산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외부인인 동백이 운영하는 곳이다. 어디서 헛짓거리하지 않을까 감시해야 하는 느작 없는 남인들 덕분에 속 터지는 옹산의 여인들. 그들에게 동백은 미혼모이기에 공동체의 물을 흐릴지도 모를 비정상적인 어미이자 남성들의 헛짓거리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즉, 동백은 옹산 공동체의 경계에 위치한 인물이다. 돌아올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자신이 위치한 곳을 억 척스럽게 지키는 보수적인 모성이 보기에 경계에 위치한 동백과 까멜리아는 단결된 공동체를 헤치는 인물이자 공간이다.

 

드라마의 시작에서 용으로 지칭되는 동백은 용임에도 어린 시절 엄마 정숙(이정은 분)에게 버려진 고아이자 아들 필구를 둔 미혼모라는 자신의 처지와 팔자 때문에 이미 타인에게 억압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동백에게 모성에 기반한 전통 공동체인 동백에 게 타인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며 죄지은 듯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몸에 밴 습관과 다름없다. 외부에서 보기에 술 파는 곳인 까멜리아의 공간적 특성을 잘 알고 있기에 눈치 보기, 눈 내리깔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등은 더욱 심해진다. 옹산 서열 1위로서 토끼인 용식의 든든한 보호자인 덕순(고두심 분)은 동백의 베프인 동시에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젊어서 남편을 여읜 과부였기에 덕순은 누구보다 동백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동백이 자신의 삶을 살기를 응원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덕순도 한국의 엄마이기에 미혼모이자 까멜리아의 사장인 동백이 며느리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마음 한 편으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타들어 가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모진 말로 동백과 필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모성이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에 장애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모성은 공동체 내부에서 갈등하며 미운 정 을 쌓은 둘의 로맨스가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동백과 용식에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모성과 맞부딪히며 억압당하던 로맨스는 모성에 의해 분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덕순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가장 큰 지원군도 덕순이다.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팔자타령의 주전부리가 되는 과부와 미혼모이기에 덕순은 동백에게 동병상련을 느낀다. 하지만 단순한 동병상련이 아니라 동백은 자신과 비슷한 미혼모이면서 엄마에게 버려진 고아이기에 덕순에게 동백은 수양딸과 같은 위치에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단순히 동백을 향한 용식의 고집스러운 사랑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용식에 의해 조금이나마 행복한 삶을 꿈꾸며 용식과 연애를 하고자 하는 동백의 마음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정히 용식과 결혼한다면 아주 귀하게 맞이하겠다는 덕순의 모습은 동백의 새로운 엄마와 같다. 

 

덕순만이 아니라 찬숙을 비롯한 옹산의 여인들도 미운정을 느끼고 있는 동백이가 까불이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찝찝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동백이는 공동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정네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여우(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시각에서만 이다.)이다. 하지만 그런 여우 같은 동백이가 공동체의 경계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시야에 무려 6년 동안이나 보였다. 즉, 동백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만 텃세를 부릴 수 있는 미운 동생이다. 종렬(김 지석 분)과의 관계를 파려고 외지에서 온 기자들조차 한 따가리 해서 확 조사 불었는데 까불이 같은 어디 개놈의 잡놈이 감히 "나만 미워할 수 있는 예쁜 내 동생을?!" 옹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옹산의 오랜 골칫거리이자 미스터리인 까불이를 붙잡기 위해 이른바 옹산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용식을 보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던 모성은 공동체의 일원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덕순이 동백에게 새로운 엄마라면 찬숙을 비롯한 옹산의 여인들은 동백에게 새로운 자매와 같다. <동백꽃 필 무렵>의 로맨스와 모성의 갈등 속에서 필구를 제외하면 가족이라고는 없던 동백이 가족을 갖게 되는 과정은 더욱 가열차게 역동하며 억압에서 분출로 나아가는 비약의 에너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세상의 역경에 이리저리 괴로워하며 하늘을 날아오를 생각을 못 하던 용이 자신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토끼를 만나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게 된 이야기. 토끼 옆에 있는 여우들과 토끼 뒤에서 용을 노려보는 호랑이의 도움닫기를 통해 하늘로 비약하는 이야기.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계속해서 참고 참는 것 에서부터 시작해 끝끝내 속에 응어리진 그 인내를 슬픔과 기쁨이 가 득한 울음으로 승화해 분출하면서 가능하다. 물론 <동백꽃 필 무렵>에서 신파는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만이 아니라 극 전반에 내재되어 있다. 자신을 버린 엄마 정숙의 과거, 그런 정숙과 화해하는 동백, 동백의 곁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어진 향미(손담비 분), 옹산의 대표 소인배이자 꿈도 야무진 무식한 규태(오정세 분)의 성장기, 그런 규태의 곁에서 걸크러쉬를 선보이는 자영(염혜란 분)의 행보 등. 적재적소에서 수많은 인물의 개별 서사가 각자의 서사와 전체 서 사에 내재한 억압의 에너지와 분출의 에너지를 조절하며 서사의 신파를 강화한다. 만약 이 드라마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음미하길 바란다. 서사 속에 응집되고 잘 짜인 신파가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지. 그렇게 한다면 용과 함께 하늘을 오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