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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6호] 존재의 증명 - 경계를 넘어서

출처: BBC 런던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박 소 연

 

“혐오가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면, 나는 A 씨 – 그 알파벳 한 글자 정도로 단순화된 사람을 떠올린다. 2020년, 법적 성별 정정을 허가받은 트랜스젠더 여성 A 씨의 서울 소재 모 여자대학 입학 허가와 관련하여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녀는 결국 대학 입학을 포기하였고, 다음의 글을 남겼다.

 

내게도 일상은 있다.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특별하지 않은 삶을 견뎌낸다. 꿈이 있고, 삶의 목표가 있으며, 희망이 있다. 그러니 내 삶은 남들에게 확인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가고자 하는 당연한 목표, 그 속의 꿈조차 누군가에게는 의심의 대상이고, 조사의 대상에 불과하다. 또한, 내 삶은 다른 사람의 일상속에서 끊임없이 무시되고, ‘반대’를 당한다. 그렇게 나는 일상을 영위할 당연함마저 빼앗겼다. (중략) 나는 그래서 이 사회가, 모든 사람의 일상을 보호해 주기를, 다양한 가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그런 길 만이 우리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나의 바람에 공감해 주시고 지지를 보내주신 여러 개인, 단체에 감사를 표한다. 

 

인간의 몸은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몸은 타인과의 원활한 만남과 사회적인 역할 수행에, 그리고 개인이 상호작용 질서의 완전한 성원으로 인정받는데 중요하다(Shilling, 1993). 그러한 점에서, 소위 ‘정상적’인 신체 범주 바깥에 있는 개인은 혐오와 차별에 노출되기 쉽다. 레슬리 파인버그(Leslie Feinberg)에 의하면, 트랜스젠더 (transgender)는 “사회가 규정한 지배적인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거나, 저항하는 존재”를 말한다. 그의 정의는 트랜스젠더 집단에서도 ftm(female to male),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만을 과잉 대표하여 사고하는 주류사회 인지적 측면에 의문을 제기하며, 젠더라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 대부분은 ‘남성’ 혹은, ‘여성’의 라벨(label)을 달고 태어난다. 신체적 특징에 기반하여 부여된 성별이라는 것은 ‘자연적’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 규범 바깥을 사고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젠더이분법은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젠더만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때, 각 젠더에는 서로 반대되는 특성 등이 부여되는데, 이성애 정상성(heteronormativity)을 기반으로 한 성역할이나, 외형적 특징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한 개인이 본인의 (지정) 성별에 기대되는 젠더 표현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 당황하거나, 그것이 일종의 혐오적인 감정으로 발현되는 광경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젠더이분법은 정말 본질적이며, 공고한 것일까? 성별 분류의 체계는 역사적인 변화의 과정을 경험하였으며, 남성과 여성의 분류 또한 그 역사 속에 위치한다. 간성(intersex)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이분법적 젠더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두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기존의 젠더 규범에 균열을 가하는 ‘문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앞서 언급한 ftm, mtf 트랜스젠더는 젠더이분법의 체계에 편입 가능한 존재라고 바라볼 수 있지만, 논바이너리(non-binary), 또는 안드로진(androgyne), 바이젠더(bigender) 등의 젠더퀴어(gender queer)는 명백하게 기존의 분류 체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젠더는 이분법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스펙트럼’ 처럼 인식해야 한다.

 

퀴어 이론의 창시자이자 후기 구조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적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젠더화된 존재로 판단하는 바로 그 기준, 일관된 젠더를 인간성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는 기준은 정당하거나 부당하게 인간의 인정 가능성을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감정과 욕망과 몸의 층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라고 주장하였다. 즉 주류 사회 규범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트랜스젠더 개인의 내면, 즉 정신 건강과 심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는 전체 인구보다 더 높은 수준의 불안 및 우울을 경험하고 있으며, 트랜스젠더 개인은 스스로 젠더 디스 포리아(gender dysphoria; 성별 불쾌감) 및 바디 디스포리아(body dysphoria)를 경험하기도 한다는 최근 연구 또한 존재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의 권리 보호를 외치는 것은 시스젠더(cisgender) 남성과 여성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그 경계의 바깥에 다른 존재도 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매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로, 혐오와 차별 속에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를 기억하고, 그들의 권리를 상기시키는 날이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군가의 불편함 때문에, 혹은 혐오할 자유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삶이 부정당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끊게 되는 현실이 정당한 것인가?, 그 불편함과 그들이 바라는 자유가 다른 누군가의 삶, 그 전체보다 무게 있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차별은 부당한 것이며, 사회는 변화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트랜스젠더가 차별받는 사회적 소수자임은 명백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이 그들을 구성하는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트랜스젠더는 사회적으로 ‘문제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존재 자체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내가 연구를 진행하며 만난 한 50대 ftm 트랜스젠더의 허락을 받고,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를 공유한다. 그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 혐오에 지친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같 다. “그러니까, 그 자부심이라는 걸 남들 중 어느 누구도 나에게 주지 않는 것 같아요. 나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가 사회에서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만약, 내가 존중받는 사회라고 한다면, 그건 굉장히 발전된 사회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회 속에서 힘들게 살면서 그런 걸 바라고 있으니까….”

 

초, 중, 고, 대학교를 거쳐 대학원까지. 나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사회”라고 부르는 그러한 의미의 사회에는 나가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학교라는 버블안에 내가 갇혀있기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세상은 녹록지 않다”거나, “그러한 변화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을 나를 위한 조언처럼 건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도 인간인지라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생각한다. 당장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나 목표더라도,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자유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어디서든 각자 소유하고 있는 특별하고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표출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있음이 – 여기에 자유가 있다 –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는 그 표출된 본성이 다른 사람의 본성과 구분될 때이다. 우리 각자가 다른 어느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이야 말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Simmel)

 

우리의 존재는 우리를 증명한다. 경계의 너머에는 생각보다 더 큰 자유와 다양함이, 그리고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상, 그보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만약 혐오가 현실이라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글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지만, 나는 계속 공부하고, 또 고민할 것이다. 남성, 여성과 같은 라벨은 우리 대부분을 식별 가능하게, 따라서 분류에 용이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입체적인 개인 모두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가 서로를 라벨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온전히 존중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나를 ‘지표’로서 증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사회를 나는 염원한다.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 삶은 내가 항상 바라왔던 것이기도 하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