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4:28

웃기지도 않는 세상, 그러나 함께 울고 웃으며...

 

 

 

하승우 _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인재(人災)와 기민(棄民)

땅이 흔들리고 컵이 떨어져서 깨지고 도로가 갈라지기도 했다. 책에서나 봤음직한 지진이다. 지진이야 옆 나라 일본의 일이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자연재난까지 두려워해야 한다. 더 우울한 건 지진의 진원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원자력발전소가 밀집된 지역이다. 한 번의 사고로도 영남권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변할 수 있다. 더구나 자연재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름에는 뙤약볕에 일하러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놀리듯 매일 폭염경보 문자가 날아왔는데, 정작 지진 때는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2012년에 울산·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이라는 연구보고서가 나왔는데도 대처는커녕 신고리 5, 6호기 신규원전을 짓겠다며 나서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옆의 주민들은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있을까’, 라는 심정으로 살고 있고, 실제로 30년의 수명을 다한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재가동되고 있는 경주시 나아리의 주민들은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2년 동안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데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공포에 질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한국은 전 세계 1위의 유전자변형농산물(GMO) 수입국이다. CJ제일제당과 대상, 사조해표, 삼양사, 인그리디언코리아 다섯 개 회사가 지난 5년 동안 수입한 GMO농산물의 양이 1천만 톤이고 주된 품목은 대두, 옥수수, 유채이다. 이 많은 양의 콩과 옥수수, 유채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GMO의 안전성이 논란이면 정부가 나서서 이런 부분을 밝혀야 하는데, 이 자료는 경실련이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통해 어렵게 구한 자료이고 세부내용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왜 정부는 시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까? 누가 뒤에서 웃고 있을까?

한 농민이 대통령의 쌀값 공약 이행을 요구하다 물대포를 직사로 맞았고 317일간 병원에서 투병하다 지난 925일 타계하셨다. 사전 경고와 곡사, 짧은 직사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고인을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달려온 앰뷸런스에도 강력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관련 동영상과 자료들이 쏟아지는데, 지금도 경찰과 정부는 사과조차 않고 있다. 외려 경찰과 검찰은 정확한 사인을 밝혀야 한다며, 병원에 쌓인 317일간의 의료기록을 무시하고 부검을 하겠다며 유족들의 마음을 짓밟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칼날이 파고들어야 할 곳은 한 농민이 아니라 권력형 비리가 쏟아지고 있는 청와대인데, 애꿎은 사람들만 괴롭히고 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시킨다고 나 몰라라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그것이 사람인가? 이런 세상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유가족을 뒤로 하고 미소를 지으며 청문회장을 나서는 경찰청장처럼.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기민(棄民)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버림받은 시민들, 시민이지만 시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사람들, 시민이지만 자기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는 시민일까? ‘헬조선이라는 봉건왕국에서 시민은 무슨 시민인가? 얼마 전 교육부 공무원의 말처럼 우리는 기득권층이 보기에 개·돼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닐까?

 

 

기득권의 나라와 민중의 나라

기득권층도 우리처럼 살고 있다면, 우리와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면, 우리와 같은 감각으로 같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가 이럴 수 있을까? 이미 기득권층과 우리의 삶은 다르다. 청년들의 주식인 라면과 떡볶이, 그렇지만 삼성가의 사위였던 임우재씨에 따르면 그 아들은 라면이나 떡볶이, 오뎅, 순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금수저/흙수저논란처럼 한국에서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는지에 따라 그 삶의 궤적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수성가는 옛말이고 이제는 물려받아야만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다.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금융자산을 10억 원 이상 가진 부자는 200884000명에서 2013167000명으로 2배나 불어났다(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2010년을 기준으로 상위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약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10대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2006277천억 원에서 20141485천억 원으로 5.4배나 증가했다.

반면에 2013년 말 기준으로 가계부채는 총 1,089조원으로 전년대비 67조원이 늘었는데, 그 증가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경제성장률의 2배에 달한다. 그리고 국민 1인당 약 2,100만원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고, 비정규직/일용직 일자리만 계속 늘어나니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민소득 2만 불, 3만 불을 외치는 구호가 의미 없는 것은 그렇게 부풀려진 경제가 우리의 실제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이 구호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또 삶은 쉽게 바뀌기 어렵다.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매년 오르는 집값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치이다. 아니, 그런 세상이기에 우리는 타자에게는 열심히 웃음을, ‘감정노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왜 웃으면서 돈을 받지 않느냐고, 왜 웃으면서 고객을 응대하지 않느냐며 따지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헬조선에서 웃음은 지불에 대한 대가이고, 사람들은 억지로 웃으며 지친 일상을 이어간다. 옛날 같으면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누가 외치고 일어서면 맞장구라도 쳐줬지만, 헬조선에서는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사람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훌륭한 처세술이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런 세계이기에 우리는 냉소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란 단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비웃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냉소주의는 그래봤자 별 수 없다는 기득권층의 조롱이자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나만 피해를 입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은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기득권의 나라는 더욱더 강해지고 민중의 나라는 더욱더 갈라지고 약해진다. 그리고 문제는 이 냉소가 현실을 바꾸기는커녕 더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할까? 70여 년 전 영국의 철학자 러셀(B. Russell)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에서 왜 서양의 청년들이 냉소적인가?”라고 물으며 종교, 국가, 진보, 아름다움, 진리와 같은 과거의 이상들이 청년들의 가슴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러셀은 단순히 목사나 선생들이 낡아빠진 미신의 녹슨 병기고에서 낚아 올린 이상들보다 좀 더 나은 이상을 설교하거나 젊은이들 앞에 제시하는 것만으론 현대의 냉소주의를 치유할 수 없다고 봤다. 그렇지만 러셀은 우리의 스승들을 교육시켜라는 다소 진부한 처방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진부한 처방이 한국사회에 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무의미해진 시민의 권리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웃픈 현실에서 서로 웃어주는 세상으로

노력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의 근원은 자기 자신의 힘이 매우 약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내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뭐라도 해보려 할 텐데 내가 약하다고 여기니 누구도 나서지 않으려 한다. 내가 약하니 저 더럽고 부패한 인간들에게 지배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헬조선에서는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긍심이 짓밟히고 너덜너덜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정치는 무기력해질 뿐 아니라 위험해진다.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냉소가 냉소로만 끝나지 않고 주변의 약자들에 대한 혐오나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폭력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 Fromm)희망의 혁명에서 희망은 역설적이다. 희망은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비현실적인 태도도 아니다. 희망은 움츠린 호랑이 같은 것으로 덤벼들 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덤벼드는 것이다. 지쳐버린 개량주의도 사이비 급진적 모험주의도 희망의 표현은 아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위하여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설령 일생동안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절망적으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비록 웃픈현실이지만 우리 자신이 희망의 근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우리 각자가 다른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면, 희망은 냉소를 이길 수도 있다.

그런 비빌 언덕이 꼭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내는 웃음도 그런 비빌 언덕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촛불들이 모여 수천, 수만의 촛불바다를 만들듯이 한번 터진 웃음은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어 어떤 권위도 그것을 쉽게 막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웃음은 입을 타고 퍼지며 복제될 수 있기에 언제든지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다. 소수의 웃음이 아니라 대중의 웃음으로 폭발한 그 웃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사람이 힘에 눌리거나 설득을 당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을 받아들일 때에만 권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권위의 상실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이를 때리는 순간 부모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아이와 논쟁하는 것은 아이와 부모가 동등하다는 점을 뜻하기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 즉 권위는 자신을 존경하는 곳에서만 확립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경멸이고 상대를 경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U.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듯, 권위는 웃음을 철저하게 금지한다. 마찬가지로 웃음이 터졌다는 것은 이미 그 권위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 금지되고 불온한 웃음은 냉소를 밀어내며 완강한 세상에 균열을 만든다.

단지 바라보는 수동적인 웃음이 아니라 직접 참여해서 땅을 치며 배꼽을 잡는 웃음은 세상을 뒤흔들 수도 있다. 더구나 억압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 억압에 굴복했던 자기 자신마저 조소하는 양면적인 웃음은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그런 웃음은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신감이자 그 세계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자기에 대한 조롱을 동시에 뜻한다. 그 웃음은 사람들을 가르고 배제하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끌어들일 수 있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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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4:27

웃음 그리고 코미디: 저항의 텍스트 전략, 한계와 가능성

 

 

 

박근서 _ 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웃음: 계약의 파기

 

그는 위대한 과학자다. 남다른 통찰력과 오랫동안 쌓아온 노력의 결과로 그는 우주의 질서와 그 탄생의 비밀에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지구라는 행성은 단지 그가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수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구가 특별한 만큼 다른 모든 행성들도 유일하고 특별하다. 해가 갈수록 그의 지력은 더욱 그 힘을 더해간다. 그에게 과학은 세상을 보는 눈이며 세상의 비밀에 다가가는 유일한 열쇠다. 늘 연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는 자신이 한 가족의 일원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의 아내는 그런 그가 마땅치 않았다. 머릿속에 우주를 가두어 두어도 가슴으로 가족을 품지 못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삭막하고 살풍경한 것인가. 어느 날 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들이 터지듯 말이 되어 쏟아져 나온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한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울음에 그는 말한다. “도대체 왜 우는 거요? 다량의 물에 미량의 염화나트륨이 용해되어 있을 뿐인 그 액체로 나를 어떻게 해볼 생각일랑 아예 접으시오.”

 

이러한 과학자의 말과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이 우스꽝스러운 것은 상황과 맥락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경직성이 웃음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삶이란 에너지의 부단한 흐름이다. 그것은 어떤 정형화된 틀이나 방식대로 정해진 길을 고집하는 기계적인 운동이 아니다. 무정형의 걷잡을 수 없는 돌발과 우연의 연속, 그것이 생명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어떤 말과 행동도 그 흐름 안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정해진 뜻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그것이 자리 잡은 상황과 맥락에 비추어 이해한다. 상황과 맥락이란 우선 특정한 말과 행동을 감싸는 다른 말과 행동들이며,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그것이 행해지고 말해지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이다. 바르트가 말한 대로 텍스트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계약에 따라 성립한다. 명시적이거나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텍스트는 이러한 계약에 따라 쓰고 읽어야 한다. 저자와 독자의 계약은 내러티브-담화와 같은 텍스트의 수준에서 그리고 장르 등과 같은 관습의 유형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계약을 체득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혹은 그럴 능력이 없다면), 황당해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를 짓게 되거나 공부가 모자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언급한 과학자는 상황이 요구하는 의미의 계약, 암묵적으로 약속된 말의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가 계약을 어긴 것은 그가 일반적인 계약에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현실적 사용에 충분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텍스트의 계약이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포함한다. 물리적 법칙이 아닌 인간세계의 규칙들이란 무릇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은 규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텍스트의 계약은 파란 불에 길을 건너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규칙이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구사의 기술을 요구한다. 어떠한 면에서 베르그송의 과학자는 특정한 규칙에 집착해서 전체 계약을 어그러트린 경직됨 혹은 융통성 없음의 한 사례일 것이다. 경직됨 혹은 규칙과 기술의 능란한 구사에서 실패함으로써 텍스트 계약이 파기된 지점에서 베르그송은 우습다는 말을 한다. 웃음, 우스운 것은 무엇보다 순조로운 텍스트 계약의 전제 조건인 계약을 파기한 결과다.

 

 

웃음의 규칙

웃음의 규칙은 계약을 파기하는 것즉 규칙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웃음은 역설적이다. 물론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웃음을 설명할 수 없다. 규칙을 어기는 것만으로는 웃길 수 없다. 어려서 한창 말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의 실수가 웃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실수는 당연한 것으로 이미 염두에 두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실수는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웃음이 유발되는 경우, 규칙으로부터의 이탈 혹은 규칙을 깨트림은 일종의 긴장을 유발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규칙에 어긋나는 어떤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은 사건이 된다. 합리적이고 사리에 맞는 어떤 일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보가 충분하지 못할 때 상황은 문제가 된다. 이 경우 문제는 크게 두 가지 결말을 갖는다. 첫째,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어 현재로서는 그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둘째, 실수나 고의로 규칙에서 벗어난 것이 틀림없다. 첫째의 경우 대개는 웃음이 유발되지 않는다. 둘째의 경우가 웃음이 유발되는 상황이다.

실수나 고의로 규칙에서 벗어난 경우, 웃음이 유발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우선 실수나 고의가 긴장을 고조시켜서는 안 된다. 즉 규칙에서 벗어난 상황의 원인이 밝혀짐으로써 상황이 종료되고 긴장이 해소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웃음은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이를테면 친구를 놀리는 것은 규범적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긴장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웃음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그 벗어남이 어떠한 적의도 없이 단지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웃음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발생한 긴장 혹은 그 원인이 사소한 것이었음을 주장하고 인정받음으로써 면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소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벗어나든가, 그 사소함에 대한 해명이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지고 상황은 심각한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만다.

농담이었다는 말이 지니는 힘이 여기에 있다. 지금을 진지하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 만약 화를 내거나 성을 부린다면 옹졸한 벽창호로 여기겠다는 협박을 섞어 규칙과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초래할지도 모를 뒷감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이 이 말에 담겨 있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이 말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상당한 효과를 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웃음이란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주모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포함한다. 쓰는 입장에서 웃음의 텍스트란 계약 위반을 소명하는 일이지만, 읽는 입장에서 그것은 위반을 허용하고 이를 사소한 것으로 넘겨 마음에 두지 않는 자세인 것이다. ‘웃음의 텍스트는 이 두 방향의 노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성된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을 소명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웃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웃음은 쓰는 쪽의 문제이며 동시에 읽는 쪽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농담이었다는 말은 충분히 농담으로 들리게 말하고 난 뒤에 해야 하지만, 동시에 관용을 베풀어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요청을 피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미디: 텍스트적 저항의 무기

코미디는 웃음의 텍스트이다. 웃음을 통해 의미를 전하는 모든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관습적으로 특정한 웃음의 텍스트를 좁은 의미의 코미디로 지칭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동시대적인 문화적 조건에서 볼 때 좁은 의미의 코미디를 고집하고 이를 전형적인 웃음의 텍스트로 규정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이를테면 흔히 코믹하다는 텍스트들은 장르로서의 코미디는 아니지만 상당부분을 웃음을 위해 할애하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현실적으로 장르적 코미디는 퇴조하고 있으나 그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텍스트들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코미디라는 이름을 장르적 전통에 국한하는 것은 오히려 논의를 위축시키고 현실의 문화적 상황을 외면하는 일이다. ‘코미디는 이제 장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봐야할지도 모른다.

코미디는 지어진 웃음의 텍스트, 즉 웃음을 주요한 표현 수단으로 생산된 콘텐츠 혹은 그러한 텍스트 전략이다. 텍스트의 패러다임 혹은 전략으로서 코미디는 무엇보다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활용한다.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일탈의 텍스트이다. 규범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아니듯이 일탈 자체가 코미디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대개의 대중문화 텍스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통상의 규범과 규칙으로부터 벗어나기 일쑤다. SF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는 외계인으로 설정된다거나 시간을 초월하여 소통하고 통신하는 무전기를 매개로 서사를 끌어간다가거나 하는 드라마는 최근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또한 계급적 지배에 저항하듯 우리사회 엘리트그룹의 잔인한 음모를 고발함으로써 규칙에서 벗어나는 듯 보이는 텍스트들도 드물지 않다. 영화 <베테랑>이나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은 모두 재벌2세의 비인간적인 성격과 그의 범죄를 비호하고 은폐하는 권력의 음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들은 코미디의 특징이 되는 일탈이 아니다. 텍스트의 일탈적 요소들은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극대화하여 결국 폭발하고 터트려서 끝을 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심각하며 모든 텍스트 요소들이 그러한 결말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주제를 보전한다. 심각한 일탈은 웃음보다는 분노, 걱정, 고민의 대상이다. 하지만 코미디에서 일탈은 그 자체가 사소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변명을 달고 나타난다.

하나의 텍스트 전략으로서 코미디는 종종 작은 웃음들 뒤에 심각한 이야기를 숨긴다. 이를테면 <파견의 품격> 혹은 이를 리메이크한 <직장의 신>은 과장된 설정과 그럴듯하지 않은 농담들 뒤로 나날이 비인간화되고 있는 우리의 고용상황을 언급한다. 마찬가지로 <질투의 화신>은 한편 흔하디흔한 러브코미디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성적 차별과 편견, 자본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는 노동의 상황 등을 웃음의 코드를 앞세워 이야기한다. 채플린의 <모던타임즈>가 과장된 행동과 우스꽝스러운 몸짓 뒤로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데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이들 텍스트들 또한 어떤 부분에서 그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현실의 주어진 규범, 권력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있으나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은 결코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다. 코미디는 그런 것이다. 웃기는 것이 코미디지만, 코미디라고 하면 얼마간은 웃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코미디는 작은 웃음으로 커다란 심각함을 가려 덮는 위장의 전략이 되기도 한다. 사소한 일탈과 이로부터 웃음을 자아내 코미디라는 승인을 얻어 가려 덮으면 커다란 심각함이 허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농담이 용서를 전제로 하는 공격이 되듯 코미디 또한 용인을 전제로 한 저항이 될 수 있다.

 

 

한계: 대안의 부재

코미디는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좋은 방법이다. 텍스트의 전략으로서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쉽게 언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현실은 부조리의 집합체지만 언급되지 않는다면 논의될 수 없고 논의될 수 없다면 고쳐질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코미디는 어려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농담에 성질을 부리는 것만큼 민망하고 제 얼굴 깎는 일도 흔하지 않다. 가끔 그 민망함을 마다치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대가는 다른 경우에서보다 크고 무겁다. 코미디와 웃음에 대한 관용이 문화적 유연함을 과시하는 징표가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비용과 위험이 큰 만큼 반대급부도 있는 것이다.

코미디는 저항의 텍스트이며, 근본적으로 기존의 규범과 질서를 해체 혹은 전복한다. 그 자체가 규범과 질서를 벗어남으로부터 시작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며, 이를 용인하고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미디의 길항하는 두 힘이 여기서 맞부딪혀 하나의 긴장을 만든다. 진지하고 심각하면 웃을 수 없기 때문에 코미디는 그저 그러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줄 뿐 그 이상의 진전된 논의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전복과 위반은 코미디라는 말에서 번복되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말하기 위해 발설언급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그것에 대한 주목과 수용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코미디가 갖는 가능성의 측면이자 한계인 것이다. <렛 잇 비>의 용감한 한마디가 술주정이나 이내 꼬리를 내리는 비겁함으로 연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관용의 범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코미디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을 감수한다.

 

 

사진1 | KBS <개그콘서트 - 렛 잇 비> 화면 캡쳐. (KBS제공)

20146월부터 20156월까지 KBS <개그콘서트>에서 방영된 개그 코너 중 하나. 직장인들의 애환을 개그와 노래로 풍자하여 웃음을 주는 코너다. 편집자주. (편집자주)

 

세상에 오직 코미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코미디에 모든 걸 바랄 수는 없다. 웃음은 텍스트의 한 효과이며 한 전략일 뿐이다. 코미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한 단초를 마련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의 변화를 완결할 수는 없다. 권력이라는 단단한 벽에 균열을 내고 그로부터 새로운 관계의 비전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코미디는 힘과 가능성을 가진 텍스트-전략이지만, 그 자체가 대안은 아니다. 코미디는 기존의 규칙을 벗어남으로써 시작하는데, 이는 기존 질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또 다른 한계를 초래한다. 코미디는 대체로 기생적인 텍스트다.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언급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미디의 텍스트적 저항은 부정적이며 해체적인 것이지 긍정적이거나 건설적인 것이 아니다.

코미디가 규범으로부터의 이탈하면서 그리는 궤적이 반드시 탈주의 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일탈이 진보적인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코미디의 저항 또한 필연적으로 진보의 노선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코미디도 보수적일 수 있다. 오히려 어떠한 면에서 근본적인 보수성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대안에 접속해 새로운 삶의 비전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해체와 부정은 단지 그런 채로의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단순한 긍정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다혹은 아니면 말고의 무책임의 여지가 코미디의 또 다른 얼굴을 만든다. 그러므로 코미디와 코미디언이 특별히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코미디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닌 가능성 때문이다.

코미디는 규칙을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시작되기에 규칙의 습득과 통달 혹은 초월이 그 전제이다. 코미디는 규칙을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초극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코미디의 신은 아폴론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이다. 문제는 그 뛰어 넘음의 위치에서 무엇을 보느냐, 이제 돌아와 무엇을 행하느냐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코미디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후로는 다시 진지해지고 심각해져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문제를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대신할 어떤 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어떤 수레바퀴의 한 지점이며, 그것의 굴림은 수레를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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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4:25

신경생리학과 웃음의 '추상기계'

 

 

 

_김효(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 학부 교수)

 

 

 

1. 웃음 담론의 화두: 웃음의 발생 동인은 무엇인가?
서구에서 웃음에 관한 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으로부터 로마의 키케로와 호라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칸트와 쇼펜하우어, 바흐틴, 베르그송, 프로이트, 니체와 최근 들어 들뢰즈 등 그 이름을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사상가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전개되어 왔다. 요컨대 웃음을 다루는 담론의 핵심 논제는 웃음의 본질과 원리를 밝히는 것일진대, 그것은‘웃음을 일으키는 동인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로 수렴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자, 소설가, 시인, 극작가, 평론가, 유머작가, 정신분석가 등 수많은 석학들이 앞 다투어 담론을 내놓았지만 그 누구도 웃음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포착하지는 못하며 다양한 논자들의 담론들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유효할 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다. 보편적인 유효성을 갖는 웃음 이론의 출현이 어려운 까닭은 무엇보다도웃음의 현상이 어느 하나의 동인으로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양상을 취하기 때문일 터이다. 통쾌한 웃음, 수줍은 웃음, 비웃음, 헛웃음, 쓴웃음, 냉소적 웃음, 어처구니없는 웃음 등 웃음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기쁠 때도 웃지만 어이가 없을 때도 웃는다. 만족스런 웃음이 있는가 하면 공격적인 웃음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연발생적인 웃음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웃음도 있다. 뿐만이 아니다. 심리적인 반응과 무관한 간지럼은 순전히 물리적인 반응에 의한 신체적인 자극의 속성을 갖는다. 이처럼 그 동인을 어느 하나로 통일시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웃음이다 보니 다양한 웃음의 담론들이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드적인 사유 방식을 참고한다면 다양한 웃음의 현상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접근이 가능해진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 방식이 노마드적 성격을 띠는 것은‘기관 없는 신체’와 같은 원형질적인 것을사유의 출발점으로 포착하여 그것의 무한한 변화와 변용을 추적해 나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마드적 사고는질료적 차원의 것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대상과 현상의 원리와 본질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보다근본적인 통찰을 유도하는 이점이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할때,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제시한‘추상기계’의 개념을참조하여 웃음의 문제를 다루어 본다면, 웃음의 원리와 본질의 문제에 대해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다.


2. 들뢰즈/가타리의 추상기계
추상이란, 공통성의 추출이다.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추상은 형식적 공통성으로 정의된다. 즉, 형식적인 유사성을 기준으로 추출된 공통성이 추상이다. 그러한 추상은 형식에 의거한, 형식규정적인 추상이다. 형식은 일종의 고정된 틀이다. 고정된 틀은 마치‘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현상을 재단한다. 따라서 형식이라는 추상을 통해 우리의 의식 속에 포획되는 현상은 불구적으로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형식규정적인 추상은 현상을 온전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영역과 장르, 분야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도 없어 적용의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새롭게 제시하는 추상은 형식규정적인 추상이 갖고 있는 한계를 초극한다. 즉 들뢰즈/가타리가 제시하는 추상은 다양한 현상들을 온전한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공통성이며 적용의영역과 관련해서도 노마드적인 성격을 띠는 공통성이다. 그러한 공통성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추상기계라 부른다. 즉 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는 추상이라는 것이다. 기계가
기계인 까닭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추상-기계는 형식이 아니라 기능을 근거로 추출되는 추상이다. 기능은 형식 외적인 차원에 속한다. 즉 기능은 비형식의 심급에 속한다. 요컨대, 기계로서의 추상은 형식적 공통성이 아니라 비형식적 차원에서의 공통성을 가리킨다. 들뢰즈/가타리는 추상기계를“비형식적으로 작동하는 내재적인 공통 원인”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은“힘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이라고 덧붙인다. 힘은 분명히 존재하는 실재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힘을 느끼거나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시각화 되거나 청각화 될 때, 혹은 (권력으로 나타난다면) 언표화될 때이다. 즉 우리
가 힘을 지각하는 것은 시각화, 청각화, 언표화 등과 같은 형식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뿐이다. 바꿔 말해서, 시각화, 청각화 혹은 언표화 되지 않은 힘은 느낄 수도 인식할 수도 없다. 하지만 힘 자체는 시각화 혹은 청각화 되거나 언표화 되기 이전의 그 무엇이다. 그런 점에서 힘 자체는 질료이되 형식을 입지 않은 순수 질료인 것이다. 바꿔 말해서 힘 자체는 형식을 초월해 있다. 따라서 힘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인 추상기계는 형식적 공통성이 아니라 비형식적 차원에서의 공통성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웃음을 발생시키는 공통성으로서‘힘의 관계도’로 표현되는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웃음의 추상기계가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웃음의 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신경생리학과 웃음의 추상기계
추상기계는 힘의 관계도이다. 웃음이 작동할 때 어떤 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계도를 그려 낼 수 있다면 그것을 웃음의 추상기계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웃음의 문제를 접근하는 논자들은‘신경 에너지’를 매개로 웃음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자 한다. 에너지는‘힘’을 이르는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웃음의 담론 중 특히 스펜서와 프로이트, 모롱으로 이어지는 신경생리학 적 담론은 웃음을 신경-에너지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웃음의 추상기계를 파악하고자 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스펜서Herbert Spencer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정이 신경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 에너지는 특정한 근육운동에
의해 해소된다는 입론에 토대하여, 웃음을 신경에너지의 방출로 본다. 말하자면 감정이 발생할 때는 신경에너지가 발생하는데 그것이 (비극의 경우처럼) 상당한 긴장과 관련된 것일 경우, 거대한 양의 신경에너지가 발생된다. 그런데 그것이 곧바로 유사한 정도의 긴장도를 갖는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만드는 데 사용되지 못할 경우 외부로 방출되는데 그것이 웃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웃음의 발생 원리와 메커니즘을 신경(생리)학적 에너지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잉여와 방출로 파악하는 입장은 특히 프로이트와 모롱Charles Mauron에 이르러 심리에너 지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보강되면서 보다 정교한 설명의 틀을 갖추게 된다.

어떤 움직임에 감정이입 한다는 것은 그 움직임을 나의 신경 세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경세포들의 반응인 표상작용을 위해서는 일정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즉‘에너지-비용’이 든다. 프로이트는 지각작용에서 일어나는 표상작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모방적 표상작용’과‘기대적 표상작용’이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인물의 움직임에 직면할 때 우리의 신경세포 속에서는 우선, 그 움직임의 외연을 시뮬레이션 하는 모방적 표상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2의 표상 작용이 진행되는데, 나의 신경세포는 나의 관찰 대상이 되는 인물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내 스스로 알고 있는 지각의 정보를 이용해 관찰 대상의 인물이 목표로 하고 있는 행동을 나름대로 표상하는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것이‘기대적 표상작용’이다. 헌데 이 두 가지 표상작용이 일어날 때 소요되는 (신경)에너지에 편차가 생긴다면, 특히 기대적 표상작용에 동원되는 신경에너지가 모방적 표상작용의 그것에 크게 못 미칠 경우 에너지의‘절약’이 일어나며, 쓸모없는 절약된 여분의 에너지가 온몸으로 방출될 때 웃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모롱Charles Mauron은 프로이트의 후예로서, 프로이트로부터 표상작용과 그에 따른 신경자극에너지의 발생, 그리고 에너지-비용의 차이로부터 웃음이 발생한다는 기본 틀은 그대로 계승한다. 하지만 모롱은 표상작용에서 발생되는 신경 에너지의 실체를 파악하는 지점에서 편차를
보인다. 프로이트는 표상작용의 종류를 모방적 표상작용과 기대적 표상작용, 두 가지로 나누고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경에너지-비용의 편차가 웃음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표상작용 자체가 신경자극에너지-비용을 발생시키고 웃음 발생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롱이 파악한 웃음의 발생 근거는 표상작용 자체가 아니라 표상작용에 결부된 심리에너지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직면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 상상 혹은 예측을 하게 된다. 헌데 우리가 대상과 만나면서 하게 되는 예측 속에는 장차 도래하여 현실을 구성하는 대상에‘적응’하기 위한 심리적 차원에서의‘노력’이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의 노력으로서‘경계심’이나‘관심’과 같은 심리작용이다. 말하자면 모방적 표상작용이든 기대적 표상작용이든 모든 표상작용에는 적응을 위한 심리적 노력이 결부되며 그 심리적 노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에너지-비용이 웃음을 일으키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모롱은 웃음을 발생시키는 에너지의 흐름을 전기 에너지에 빗대어 설명한다. 전기에서는 전기에너지의 흐름을 형성하는 두 개의 극점을‘양극’과‘음극’으로 칭한다. 그것을 참고하여 모롱은 서로 다른 표상작용이 발생하는 두개의 국면을“제1극”과“제2극”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각각의 국면에서 형성되는 신경에너지를“제1포텐셜”과“제
2포텐셜”이라 칭한다. 각각의 포텐셜은 표상작용이 일어날 때 적응을 위한 심리적 노력의 소산으로 발생하는 신경에너지를 가리킨다. 제1차로 형성된 포텐셜이 2차 포텐셜 형성에 모두‘소비’되지 못하게 되면‘잉여 에너지’가 발생한다. 일단 발생된 에너지는 어딘가 소비되어야 하는데, 소비될 용처를 찾지 못한 잉여에너지는 온 몸을 통해 배출된다. 모롱이 펼치는 담론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포텐셜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응을 위한 심리적 노력이란, 심리적 방어와 다르지 않으며, 심리적 방어가 일어난다는 것은 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모롱이 말하는 포텐셜이란, 바로 긴장감의 에너지, 보다 정확히 말해서 긴장이 일어날 때 조성되는 신경에너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1차포텐셜과 2차포텐셜은 각각의 표상작용이 일어날 때 우리의 신경세포에 조성되는 긴장과 거기에 수반되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컨대 모롱의 웃음 담론은 긴장이 이완될 때 잉여의 신경에너지가 발생하고 그것의 배출이 웃음을 일으킨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처럼, 모롱은 웃음을 일으키는 신경에너지의 실체가 단순히 표상작용에 드는 신경에너지-비용이 아니라 표상작용에 수반되는 긴장이라는 심리적 반응의 에너지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모롱의 담론은 그 밖에도 잉여에너지의 방출 문제와 관련하여 분산의 속도를 문제 삼음으로써 돌발성을 웃음의 필수 요건으로 제시하며, 에너지가 방출될 때의 정동을 승리감으로 지목하는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모롱에 따르면 (잉여의) 에너지가 배출될 때는 근육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잉여에너지가 방출될 때 그 속도가 너무 빠르게 되면 분산과정에 어려움이 발생하여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것이 웃음 현상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아무리 두 가지 포텐셜의 격차가 크다 하더라도 잉여에너지가 서서히 방출된다면 웃음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도란 시간과 양(􃐎)의 함수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에너지가 흐름을 형성할 때 그 에너지의 흐름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잉여에너지의 방출 속도는 잉여에너지의 양과 그것이 생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에 의해 좌우된다. 제1포텐셜이 형성된 이후 제2포텐셜이 형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의 간격이 짧을수록 그리고 잉여에너지의 양이 많을수록 에너지의 흐름은 빨라질 것이다. 잉여에너지의 방출 속도의 계수가 높을 때 홍소가 일어날 것이며, 낮을 때 미소가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모롱의 담론은 웃음의 양상이 속도의 문제로 수렴된다는 점을시사한다.
한 마디로 웃음의 핵심 동인은 급격한 긴장완화 즉 이완작용이다. 헌데 모롱에 따르면 이완작용의 정동은 승리감이다. 웃음이 주는 쾌감의 본질이 승리감이라는 것인데
그 근거를 모롱은 어린아이의 웃음에서 찾는다. 예를 들
어, 어머니가 금지시킨 행동을 하게 된 아이가 그에 따른
처벌이 면제되었음을 확인할 때 아이는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이 경우, 아이는 금지된 행동을 할 때 그에 대한 처
벌을 예상하며“불안에 대한 방어”로써 그에 상응하는 에
너지를 저축하게 된다. 이후 처벌이 면제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저축되었던 에너지가 소모되지 못하여‘절
약’되고 곧바로 그것은 방출된다.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
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모롱은, 불안의 국면에
빠져 있던 어린이가 그 상황을 극복하게 될 때 자기 자신
에 대해 과대평가를 내리게 되고 그 우월감에의 도취가
웃음으로 현상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때의 우월감을
‘승리의 판타지’라고 명명한다. 그때의 승리는 객관적인
차원에서의 승리라기보다는‘주관적인 상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웃음이 정서적인 차
원에서는 - 객관적인 현실 인식의 결과이든 주관적 판타
지에서 비롯된 것이든 - 불안을 이긴 승리감의 소산인 것
이다. 그런 까닭에, 모롱은“웃음은 불안의 가장자리에 위
치한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언급된 모롱의 웃음 담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다이어그램을 그릴 수 있다. <아래 다이어그램 참조>
이 다이어그램은 웃음을 발생시키는 힘의 관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웃음의 추상기계’라 할 만하다. 이 힘의
관계도가 웃음의 추상기계라면 모든 웃음의 현상은 이
다이어그램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즉, 이 다이어그램은
다양한 웃음의 메커니즘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
어야 한다. 헌데, 개개의 웃음 현상을 일일이 적용시켜보
는 것보다 기존의 웃음이론 중에서 이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 과연 있는지 검토해 보는 것이 이 다이어
그램의 보편적 유효성을 검증하는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웃음 담론은‘우월이론(격하이
론)’과‘불일치론(대비이론)’이 양대 산맥을 형성한다.
불일치론은 칸트의 유명한 명제, “웃음은 하나의 긴장된
기대감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는 갑작스러
운 변화의 느낌이다”라는 입장에 기초해 있다. 불일치는
두 가지 상황의 대조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불일치론
은‘대조이론’이라고도 불린다. 불일치론은 위의 다이어
그램에서 포텐셜의 격차와 잉여에너지의 속도와 관련된
측면을 포착하고 그것을 언어화 시킨 명제라는 점이 드
러난다. 한편, 우월이론의 요지는 우월한 감정이 웃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웃는 사람의 우월함은 웃음거리가
된 사람의 입장을 비하하거나 격하시키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우월이론은‘격하이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홉스
를 비롯하여 보들레르와 같은 논자들의 담론이 우월이론
의 계보에 속하는데, 이는 위의 다이어그램에서 긴장이
이완될 때의 정동, 즉 웃음을 발생시키는 에너지의 결을
지목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펼치는 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경에너지에 기초하여 도출된 웃음 발생의 다
이어그램은 적어도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두 가
지의 웃음이론을 모두 포괄하면서 동시에 웃음의 동인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드러내 보여준다. 즉 그것은 우리
가‘왜 웃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 설명을 제공하고, ‘우리가 그래서 웃었구나!’우리가
웃어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비형식
적인 차원에서 포괄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이
다이어그램은 웃음의 추상기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다
만, 이 다이어그램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웃음 현상
에 한해 적용 가능한 웃음의 발생 도식이다. 인위적인 웃
음과 간지럼처럼 신체적 자극으로 인해 일어나는 웃음은
논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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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6.08 12:19

'즉각적 대안'의 위험성, 여정으로서의 대안찾기

 

 

강남순 _ 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대안찾기’의 선행조건


인간은‘지금’보다 나은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무엇이 지금보다 나은 세계인가는 개인들이 지닌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물론 각기 다르다.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보다 나은 세계’의 표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개인의 삶에서든 사회적 삶에서든 기존의 세계는 늘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완전한 세계’는 언제나‘아직-아닌-세계’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지금보다 나은, ‘아직-아닌-세계’를 꿈꾼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는 그의『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에서,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인간의 꿈을‘낮꿈(daydreams)’이라고 명명한다. ‘낮꿈’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은 무수한 변화와 변
혁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는‘낮꿈’을 꾸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막연히 꿈만 꾼다고 해서 그것이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막연한 꿈꾸기는 몽상에 머물면서 구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낮꿈’이란 그 꿈을 통해서 지금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혁적 실천이 동반되는 꿈이다. 많은 이들이 찾고자 하는‘대안들’은 바로 이러한 변혁적인‘낮꿈’의 결과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지금보다 나은 미래 세계를 위하여 지금의 문제구조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가.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지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 비판적 성찰은 기존의 현실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고, 무엇이 변화되어야 할 문제들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사안들에 대하여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모든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비판적 문제제기가 결여된‘대안’이란 대부분 권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득확장을 위한 현상유지적인 장치일 경우가 많다. 차별과 배제를 은밀하게 가리는 현실구조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층적인 비판적 분석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정의, 평등, 권리의 원을 확장하기 위한, 변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모든 이들의 정의, 평등, 권리의 확장’이라는 관점을 가진 비판적 성찰과 문제제기를 통해서, 다양한 근거에서 사회의 주변부로 살아온 사람들이 정의와 평등의 적용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특정한 정황에 대하여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할 때, 그러한 비
판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묻는 것은,‘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타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그 내용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냉소적으로 작동되는 이유는, ‘대안 찾기’ 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려는 진지성이나 적극적 개입의 의지가 결여된 채 던져지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오히려 스스로를 향해 진지하게 묻는 것일 때, 질문의 중요한 의미가 살아난다.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우선 현실의 복합적인 구조에서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분석해 내는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비판적 문제제기는 새로운 대안찾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대안’은 없다


개인적인 삶이든 사회정치적 삶에서든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 누구도 모든 정황에 맞는 보편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삶에서조차 자신이 아닌 타자가 제시하는 대안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소위 유명인사들이 쓴 자기계발서나 힐링서들이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 항목에 들어가곤 한다. 물론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책들의 저자들이‘나’를 대신해서 나의 삶을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저자들이 나의 이 삶에서의 갈망, 희망, 이루고 싶어 하는 것들 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또는 모든 정황에서 작동하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대안’이나 해답은 없다. 이러한 보편적 대안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적 사유의 결정적 한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지점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들어 맞는 보편적 대안이나 절대적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러한 대안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이다. 그 보편적 대안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거대 서사 (grand narratives)’이다. 보편적 대안으로서의 거대서사는 많은 경우 이미 이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강화시키고,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에 기여해왔다. 아이,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경제적 빈곤층들이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오게 된 이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인간의 자유와평등에 대한 비전이 이러한 거대 이론들이나 보편 대안 담론들에 의하여 진정한 의미의 자유나 평등을 실현하는데에 스스로 근원적인 오류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유럽이 만든 이 세계를 위한 보편 대안으로서의 거대 담론들은 결국 유럽, 남성, 중상층, 기독교인들을 세계의 중심에 서게 했다. 더 나아가서 비서구 세계를 자신들이 만든 기준으로 ‘개발’시키고, 기독교로‘개종’시켜야 할‘미개인들’로 간주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 모더니즘은 서구 식민주의와 분리할 수도, 분리해서도 안 된다. 모더니즘은 거대이론들로 구성된 소위‘보편 대안’들에 의하여,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이상을 스스로 배반하는 모순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거대서사로서의‘보편 대안’들이 약자 들에 대한 식민화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와 같은 보편 대안에 목마른 사람들은 자신 밖의 외부세력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용한다. 현대세계에서 발생하는 나에 대한 타자의 식민화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쉽게 인식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스스로 사유하는‘고독의 시간과 공간’가지기를 회피한다면, 외부세력이 (그것이 사람이든, 대중 매체이든, 사회나 국가든) 나를 대신하여 내 삶의 방향과 대안을 결정하게 하는‘식민화’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스스로 사유하고, 읽고,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고 씨름하는 과정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황과 연계된 대안의 실마리를 조금씩 찾아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출처: 아이클릭아트)

 


대안의 세 가지 요소
정치, 사회, 종교, 또는 우리의 윤리적 책임 등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많은 경우‘거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거시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각자는 자신이 관여하고 개입되어 있는 구체적인 정황들에서 그 대안들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가야 한다. 대안 찾기란 매우 치열한 분석, 고민, 그리고 씨름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이론은 연장 상자’와 같으며, ‘이론은 실천(theory is practice)’이라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통찰은 새로운 변화된 세계를 갈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이 늘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모토가 된다. 이는 이론과 실천을 이분
법적으로 보는 전통적인 이론이해를 근원적으로 뒤집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을 분석하는‘연장’으로서의 이론들을 통해서 현실세계에 대한 다층적 문제제기와 비판적 저항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한 비판적 저항은 복합적 이론들을 통해서 가능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는 집단에서 종종 보게 되는‘반(反)이론주의’는 오히려 그 변혁운동을 폭넓게 확산시키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은 저절로 가능하지 않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분석적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해서 저절로 다층적 성차별이나 가부장제적 가치구조를 아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 거부감을 느끼고 오히려 반대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 중에는 여성들이 많다. 그러한 여성들은 가부장제적 가치를 내면화함과 동시에 그 구조에게 살아남기 위한‘생존의 테크닉’을 체현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는, 식민지하에서 억압의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
두가 그 억압적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착취구조의 문제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급한 대안요구 이전에 비판적 문제제기들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게 되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비판적 저항이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문제를 문제로 보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대안 찾기의 첫 발걸음이 시작된다. 비판적 저항과 문제제기 이후에 발견되는 대안은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닌다.
첫째, 대안은 언제나‘정황 특정적 (context specific)’이다. 여타의 대안들은 구체적인 자신의 정황 속에서 구상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특정한 정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크고 작은 대안들과 장기적 또는 중단기적 대안들을 끈기있게 모색하고 찾아 나가야 한다. 대안이 특정한 구체적 정황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삶만이 아니라, 개별인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유명 인사가‘인생의 해답’이라고 제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모색하는 길과 맞는 것이 아니다. 자신 스스로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찾고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사유란‘내가 나와 대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비판적 사유는 고독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자신과 진정한 대화를 하면서 그 속에서 비로소 현재를 넘어서는‘대안’의 갈래들을 조금씩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개입하고 있는 집단의 특정한 정황 속에서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가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발걸음을 한걸음씩 떼는 것이다. 둘째, 대안은‘잠정적’이다. 그 어느 위대한 대안도 평생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오늘 찾은 대안이라고 해도 그 대안이 내일도 작동되는 유효한 것이 아닐 경우들이 많다. 왜냐하면 모든 대안은 특정한 정황 속에서 모색되는 것이며, 정황이란 고정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 대안의 잠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화된 오늘의대안은 새로운 가능성의 등장을 오히려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수 있다. 또한, 한 기구나 운동집단에서 오늘 작동되는 하나의 대안을 영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될 때, 다른
가능성과 대안들을 억누르는 또 다른 권력 장치로 변질될 수 있다.
셋째, 대안은‘부분적’이다. 인간의 인식론적 또는 경험적 한계성 때문에 우리의 모든 대안은 언제나 부분적일 뿐이다.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는 인식론적 겸허성은 한때 자신이 찾았던 대안에 자신을 매어 놓는‘대안의 감옥’으로부터 갇히지 않게 만든다. 어떠한 대안이라도 그것은 ‘완벽한 대안’이 아니라 언제나‘부분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자기 절대화의 위험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나의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나의 성공이나 행복의 기준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준 규격 속에 넣는다.그리고 그 규격화된 기준에 자신이 들어맞지 않을 때 열등감 속에 시달리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그런데 이러한 규격화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의 문제점은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볼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낮꿈’을 꾸면서 다양한 양태의 사회변혁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유사한 문제와 딜레마를 마주하곤 한다. 바로 그 운동의‘성공’또는‘실패’를 외부에서 규정한 기준에 맞추는 경우이다. 개인들이 서로 각기 다른 것처럼, 다양한 운동단체들은 각기 다른 정황 속에서 자신들의 성공이나 실패의 기준을 스스로 논의하고 규정해야 한다. 한 집단의 커다란 목적이 다른 단체와 유사하다고 해도, 각 단체는 그 단체만이 지닌 고유한 정황이 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운동 단체들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 그리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스스로 고민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사회에만 회자되고 있는 특이한 신조어들이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를 의미한다는 3포 세대로부터 시작하여, 5포 세대, 7포 세대,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N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신조어들은 한국 사회의 소위 청년층이 지닌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신조어가‘청년층’일반을 대변한다고 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우선‘청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 생각, 열정, 기대들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동일한 생물학적 나이 또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매뉴얼에 따라서 작동되는 기계가 아니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간다. ‘N포 세대’와 같은 신조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신조어는‘냉소주의’를 확산시키며, 책임적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현실 세계의 구체적 데이터들이 암흑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도, 인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틈새 공간들에서 대안들을 찾으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한국사회에 무차별적으로 만들어지는 신조어들의 등장에 대하여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신조어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은 냉소주의의 확산을 도울 뿐, 유일한 존재로서의 개별인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다층적인 대안 모색의 시도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외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행복과 성공의 기준을 만들어 가야 한다. 또한‘현재의 나’만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나 (becoming-I) 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가능성에 대해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성급하게 즉각적 대안을 찾으려 하지 말고, 끈기 있고 치열한 비판적 성찰을 통한 문제분석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자기의 삶에서 필요한 대안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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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6.08 12:19

놀이로 생각해보는 대안적 삷과 교육

 

 

한기철1) _ 청소년과 놀이문화연구소 간사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행복한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더불어 행복한 삶과 세상을 꿈꾸는가?”스스로 이와 같이 물어보곤 해요. 이 질문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난 이 문제를‘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삶’의 부재에서 찾습니다. 동시에 이에 대한 대안이 될 열쇠 하나를‘놀이’에서 발견해요. 네덜란드 문화사학자인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인간의 존재적 특성을‘놀이하는 인간’으로 보고‘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지칭했어요. 그리고 언어∙정치∙법률∙경제∙스포츠∙예술∙과학 등 삶의 전 영역에서 놀이정신과 놀이의 요소가 발견이 되며 동시에 놀이의 요소들이 삶을 형성한다고 밝히기도 했지요. 놀이는 교육이나 문화를 뛰어 넘어‘삶’이라는 관점을 던져준 것이지요. 난‘온전한 인간, 건강한 공동체, 더불어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대안이 놀이라는 신념으로 현장에서 놀이를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는 내가 오랜 시간 담당하고 있는‘메아리학교’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해요.

 


메아리학교


메아리학교는 1992년 설립된 청소년과 놀이문화연구소에서 놀토 제도가 시행되기 전인 2003년도에 세워진 놀이로 하는 주말 자연학교입니다. 메아리학교는‘온전한 인간, 행복한 삶, 건강한 공동체’교육을 위해‘사람과 자연, 공동체’가 있는 놀이를 돌려주는 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격주 토요일마다 아침 9시에 만나 오후 5시까지 하루 종일 노는 학교에요. 메아리학교에는 다음 다섯 가지가 있어요.

 


첫째, 놀이하는 사람:‘ 나’


놀이는 특정 규칙을 따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강요당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놀이도 아니고 즐거움도 사라지지요. 요즘 놀 줄 아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드물어요. 놀아본 경험도 없거니와 내가 나로서 살아보질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 내가 있는 삶을 꿈꾸기도 어려운 법이에요. 메아리학교에서는 시간이 갈수록“선생님, 놀아줘요.” 하는 어린이들이 없어요. 점점“이거 하자.”,“ 저거 하자.” 며 서로 놀이를 초대하는 주체가 되지요. 놀이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가 노는 것이에요. 대신 누가 놀아줄 수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우리는 어린이들 대신 놀려주려고 하지 않아요. 지도자들도 억지로 놀려주지 않고 지도자 스스로 놀지요. 독립된 인격체로 한 사람을 존중하고 세우는 길은 내가 노는 길밖에 없어요. 우리가 어린이들을 기다리면서‘놀이하는 사람’으로 초대하고 세우는 이유예요.


 

둘째, 놀동무: ‘사람과 공동체’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입니다. 마르틴 부버는‘나는 너를 통해 진정한 나에 이른다.’ 고 했어요.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만남과 사귐이 있는 관계를 통해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청소년 세대는‘만남은 있으나 사귐은 없는 세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나기는 하지만 의미있는 인격적인 사귐이 없기 때문이에요. 당연해요. 여전히 무한경쟁과 입시 위주, 지식중심의 교육에 내몰린 현실 속에서 어떻게‘진정한 동무’,‘ 참된 관계’,‘ 건강한 공동체’ 를 기대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곁에 있는 너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반응하고, 무책임하게 되는 비인간화를 부추기
고 있어요. 이에 메아리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놀 동무’를 돌려주려고 하고 있어요. 사람은 혼자 클 수 없거든요. 그리고 다른 이로부터 수용과 지지, 신뢰와 사랑을 받는 공동체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를 기르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메아리학교에서는 안 하는 게 있어요. 놀이를 하면서 절대로 1등과 꼴등을 나누며 경쟁시키지 않아요. 그리고 비교평가를 통해 보상을 주지 않아요. 얼마 전에 메아
리학교에서 재밌는 일을 목격했어요. 그날은 공교롭게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3(3학년), 4(4학년), 5(5, 6학년)모둠 어린이들이 각 모둠별로 자기들만의 비밀 세계인‘요새 짓기’를 했어요. 등수를 나누지 않고, 비교평가를 하지 않았을 뿐인데 일반 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졌어요. 정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샘플도 없이 자유롭게 자기들만의 요새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누구를 탓하는 법도 없어요. 자기들만의 생각과 표현이 담긴 창의적인 자기다움을 찾아가요. 너를 이겨야 할 이유가 없으니 서로 잘 만나요. 무거운 돌을 나르는 동생 곁으로 가서 도와주기도 하고, 톱질하는 법도 알려주기도 해요. 누가 시키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나
누고 섬기며 협력해요.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고 인정하고, 편안해하며 신뢰가 쌓여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비교와 평가, 등수를 나누는 경쟁이 없는 놀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지혜를 키우고 서로 행복한 세계로 초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셋째, 놀터:‘ 자연’


메아리학교에는‘어린이들 손에 흙과 생명을’이라는 표어가 있습니다. 놀 터인 자연을 돌려주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흙을 만져보며 놀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동네 놀이터며 학교 운동장 곳곳을 인공물들이 흙을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잖아요.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생명을 만나는 자리이자 우리가 소중한 생명임을 일깨우는 터입니다. 메아리학교 어린이들은 일 년 동안 계절을 따라 변하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비밀의 숲이며 계곡, 꿈틀 밭, 마당 등 곳곳을 누비며 마음껏 놀지요. 메아리학교에서는 0.5 평도 되지 않는 자기 밭에서 농작물을 기르는 노작 활동을 합니다. 우리는‘꼬마농사꾼 활동’이라고 부르지요. 한 번은 한 학기를 마칠 즈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다른 어린이들은 꾸준히 자기 밭을 열심히 돌봐서 기쁨으로 수확물을 거두었지요. 그런데 집안에 사정이 있어 씨앗만 뿌리고 중간에 결
석을 한 친구가 있었어요. 저는 그 친구가 자신의 빈 마른 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땅아, 미안해. 잘 돌봐주지 못해서.”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는 또 다른 생명을 만나고 그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어요. 만약 지도자가 그 친구를 대신하여 밭을 돌봐주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일이기도 했지요. 어린이들에게서 놀 터인 자연을 빼앗는 것은 생명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거예요. 마땅히 놀 터인 자연을 돌려주어야 할 일이지요.

 

 

 

넷째, 놀틈:‘ 누림 그리고 여유와 쉼’

삶은 배우기 이전에 는 것이듯, 놀이는 배우는 게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배우는 데 익숙하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누리는 법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유행은‘교육’이라는 데 동의하실 거예요. 문화나 예술, 놀이를 보세요. 사실 이것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누리도록 하는 윤활유입니다. 하지만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메아리학교에서는 하루 온종일을 실컷 놀고 또 놀아요. 스스로 놀이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요즘 어린이들은 놀 틈이 없어요. 숙제하랴, 학원에 가랴 때론 부모님보다 늦게 집에 돌아올 만큼 바쁜 일상을 살아갑니다. 어떤 친구들은 메아리학교에 숨을 쉬러 온다고 말하곤 합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선생님, 전 메아리학교 덕분에 2주를 살아가요.”라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바쁜 일상에 놀이는 살아가는‘숨’이 되어주고 재충전을 돕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 뭐하고 놀아야 할지 망설이고 당황하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사실을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시간을 경영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메아리학교가 긴 쉬는 시간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예요. 메아리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며 다른 사람과 함께 즐겨요. 주저함이 없어요. 스스로 선택했으니 그 시간에 대한 책임 또한 스스로 지지요.

 

다섯 째, 놀 거리


메아리학교에는 핸드폰, 전자기기가 없어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어린이들이“선생님, 핸드폰이랑 게임기가 없어도 재밌어요.”라며 온 몸으로 노는 놀이의 즐거움을 깨닫거든요. 메아리학교는 어린이들에게 놀이주머니를 선물해주고 싶어요. 어릴 적 우리들은 언제라도 놀이를 꺼내 쓸 수 있는 놀이주머니가 하나씩은 있었잖아요. 덕분에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었고, 언제라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었어요. 실컷 놀면서 몸과 마음에 튼튼한 근육을 키워요. 가끔“앞으로 다음 세대를 만나게 될 지도자는 어떤 놀이의 경험을 갖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엄습해 오기도 해요. 20-30년 전 나의 어린 시절 골목에서, 산과 들, 계곡에서 온 몸을 쓰며 놀았던 경험과 달리 앞으로 지도자가 될 세대들은 놀이라고 할 때 인터넷, 스마트 폰, VR과 같은 기기를 통한 게임을 떠올리는 게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게임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병에 듭니다. 그리고 가상공간화된 놀 거리들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또한 돈이 없으면 놀 수조차 없게 상품화된 놀이들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놀이라 고 할 수 없지요. 점점 놀이가 아닌 것들이 놀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놀 거리를 돌려주어야 해요.

 


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삶으로


어린이들의 놀이세계를 함께 일구어 가면서‘온전한 인간, 건강한 공동체, 더불어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열쇠가‘놀이’에 있으며 이를 위해‘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확인해 갑니다. 동시에 진정한 놀이가 무엇인지, ‘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묻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일상에 놀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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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6.08 12:18

행복의 그림자: 자유와 폭력의 경계에서

 

 

박구용 _ 전남대 철학과 교수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서

과잉의 시대, 초과의 시대다. 너무 많이 생산하고 소비할 뿐만 아니라 너무 과하게 모든 일이 벌어진다. 어둠을 경험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많은 빛을 발산하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점 빛도 없이 삭막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황제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만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과잉억압에 노출되어 있다. 마르쿠제(H.Marcuse)가 진단한 것처럼 과잉억압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장으로 파고든다.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생각하는 이유다. 더 나아지는 만큼 더 힘들어지는 삶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대안적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다. 대안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가에 있을 더 푸른 초원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이 아니다. 대안은 다른 곳(장소, 공간)에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안은 같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다. 노름판과 싸움판을 놀이판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판을
바꾸려면 과잉과 초과를 부추기는 핵심 담론을 흔들어야 한다. 이 글이 행복 담론을 물고 늘어지는 까닭이다. 폭력을 키우거나 혹은 은폐하는 수단만이 발전하는 세계에서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폭력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의 말처럼 안정, 화목, 평정, 평화가 없는 곳에 는 쾌락도 행복도 없는 것일까? 나아가 절제, 용기, 도덕, 정의, 지혜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폭력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대부분 거짓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무자비한 폭력이 은폐된 곳에서 자행되고, 모든 것을 파괴 할 수 있는 폭력수단이 세계 곳곳에 은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체계를 바로 인식한 사람에게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가 인식한 세계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춰진 폭력과 폭력 수단을 제대로 의식할 만큼의 지혜가 없는 사람, 알아도 체념과 무기력에 빠져 저항할 용기조차 없는 사람, 나아가 도덕과 정의에 대한 감각 자체가 무뎌진 사람은 작위적으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 해도 이는 불감증 환자의 사이비 감정에 불과하다. 많은 현대인들은 이상화된 쾌락과 행복을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실현하려고 든다. 이상과 현실의 간격이 커질수록 그만큼 가상 세계는 매력적인 화해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헤겔(G. W. F. Hegel)에 따르면 아무런 매개 없이 허구적으로 이상과 현실을 통일시킴으로써 불감증으로 도피하는 것은 불행한 의식을 키울 뿐이다. 가상 세계에서의 행복은 현실 세계에서의 불행이다. 현실적 분열과 가상
적 통일이 이쪽저쪽을 들락거리며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왕좌왕은 멈추지 않는다. 몸은 이편에 마음은 저편에 두고 왔다갔다 헤매는 불행한 의식은 행복을 느끼려고 몸부림치지만 현실의 배반 앞에서 매번 좌절하고 만다. 불행한 의식의 출구는 어쩌면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는 곳에 있다.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은 수없이 제안될 수 있지만 기준이 많아지는 만큼 행복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측정되고 평가될 뿐이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은 다른 모든 이분법처럼 자유가 아니라 폭력을 키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양자택일 을 요구하는 이분법 앞에서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할 사람은 없다. 진위, 선악, 미추의 이분법처럼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에는 한쪽의 독단론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이분법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선택하지 않고 사유해야한다. 이분법의 강요에 못 이겨 행복을 선택하면 곧바로 불행한 의식이 몰려올 뿐이다. 결과로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행복을 사유할 때 의식은 비로소‘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는 실존적 개인의 고독한 사색이나 반지성적 통념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유는 이분법을 통해 독단적 동일성을 강요하는 현실의 지배 체계에 저항하는 과정이다. 불행속에 깃든 빛을 찾아내고 행복이 강요하는 그림자에 대해 소통하는 사유만이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자유로운 사유가 만들어가는 행복은 개인의 의식과 무관한 객관적 사실도 아니지만 사회적 현실에서 독립된 주관적 관념도 아니다. 행복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만남과 소통, 그리고 연대를 통해 형성되는 담론이다.

 

 

수단에 의한 목적의 전복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 행복은 좋은 삶의 문제이면서 삶의 목적과 관계한다. 그에게 행복을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될 수 없는 목적, 곧 삶의 최종 목적이다. 행복은 자기 목적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행동과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만큼 자족적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에게 행복은 순간순간 느끼는 즐거움이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에게 행복은 삶의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목적인 까닭에 인간의 순간적인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야 할 객관적 지향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행복이 객관적이라면 그만큼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행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친구나 재산만이 아니라 출신성분, 가족환경, 외모나 용모에서 좋은 조건들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최소 수혜자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반대로 최대 수혜자들에게는 비교적 어렵잖게 도달 가능한 복, 곧 행운에 의존한다. 이처럼 행운을 최소 수혜자들이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의 이상적 조건으로 제시하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주의도 불행한 의식에 사로잡힐 위험이 커진다. 물론 행운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서 불운한 사람이 반드시 불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운한 사람에게 행복의 조건을 구비해주는 것이 정치의 몫으로 자리 잡는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의 조건은 개인에게 불운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덕을 요구하는 이유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정치에 고통과 비참을 안겨주는 폭력적이고 불운한 상황을 극복하도록 요구하는 비판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객관주의적 행복론이 행운론으로 빠지거나 불행한 의식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 정치 비판의 기준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도 행복이 가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할 때, 그 조건을 기준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행운론이 아니라 행복권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행복이 좋은 삶을 위한 최종 목적이라면 이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권으로서 보장되어 야 한다. 이 경우에만 행복은 역할 중심의 윤리학을 벗어나정의와 연대의 긴장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행복을 보편적 권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행복을 좋은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 목적으로서 좋은 삶과 행복은 역할 중심의 목적론적 윤리 안에서 자신이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사는 그 자체로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곡되고 부조리한 폭력적 사회에서 맡은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나쁜 사회를 인준하는 나쁜 삶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에 따른 요구와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요구와 명령을 거부할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생사를 걸고 거부해야만 한다. 이를 위한 힘은 덕의 윤리보다는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에서 가져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없는 불행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면서 어떤 목적도 정해지지 않은 삶을 살아가 야 하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의 목적을 다른 사람이 정해준다면 나는 목적을 정한 사람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의 목적을 정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을 수단이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최소한의 도덕
으로 강조했던 칸트(I. Kant)의 말처럼, 타인의 목적을 지정하려는 사람은 그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의 도덕도 없는 사람이 된다. 내 삶의 목적은 오로지 나 스스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어떤 것도 자명한 것이 없는 사회에서 스스로 목적을 정해야만 한다면 누구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고, 동일화될 수 없는, 따라서 물건처럼 교환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정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일반화시켜 말할 수 없다. 다만 목적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이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구체적이고 명시적이지 않은 경우 수단은 언제나 목적을 전복하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대부분의 말이나 행동에서 목적을 설정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적은 다시 다른 것의 수단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삶 자체가 어떤 내용도 없이 텅 빈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고 만다. 삶이 행복이라는 목적에 합목적적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면 인간은 사회 체계의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목적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이 이미 설정된 행복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전복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행복론


도처에서 행복론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여전히 삶에 대한 만족과 긍정, 그리고 주관적 안녕의 지평에서 행복을 논의하고 평가하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삶의 기초로서 사회적 질(social quality)이나 사회적 웰빙(social wellbeing)을 기준으로 객관적이고 공적인 지평에서 행복 지표를 재구성하려는 웰빙 지향 행복론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수량화하려는 대부분의 시도는 사회적 지평을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할 위험이 크다. 현대사회에서 참된 삶과 옳은 삶의 문제로 특화된 공적 담론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문제로 전환된 사적담론 모두 경제 논리, 즉 도구적 이성의 논리에 의해 식민
화되는 순간 급진적 저항의 성격을 상실한다. 이런 상황에 서 사회적 지평을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하는 웰빙 지향 행복론은 경제 논리에 의한 획일화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획일화를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문화산업에 의해서 전도되는 웰빙 지향 행복론은 생각 없는 개인들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유혹의 메시지다. 웰빙 지향 행복론은 행복을 사회적 지평에서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웰빙으로 기호화된 성공 신화의 내면화를 요구하며, 내면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방인, 즉‘우리 안의 타자’가 될 것이라고 끝없이 위협한다. 따라서 웰빙 지향 행복론은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없는 사
람들을 지배하는 성공 이데올로기의 변주곡이라는 비판을 극복해야만 한다. 행복의 사회적 지평을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불행의 원인 중에 개인의 심리 부분을 사회 제도의 문제로 단순화시켜서도 안 된다. ‘평균연봉’, ‘평균석차’와 같이 개량화가 판치는 사회에서 개인적인 것은 항상 사회적으로 평가된다. 이 경우 평균화되지 않는 만족은 단순히 무의미하거나 무용한 것이 아니라 유해한 것이다. 이
런 방식으로 사회는 부정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을 개인으로부터 탈취한다.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행복과 불행의 개인적 지평 역시 독자적인 논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러셀(B. Russell)은 자신의 행복론(The Conquest of Happiness)에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불행한 군중들을 “자기에 대한 침잠과 전념이 너무 심한 사람들”로 진단하고 있다. 이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sinner),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narssist), 과대망상에 걸린 사람(megalomani) 으로, 그릇된 세계관, 비뚤어진 윤리, 옳지 않은 습관 등으
로 인해 행복의 근본요소인 온갖 사업에 대한 열정과 욕망이 파괴되어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다. 러셀은 자기침잠과 전념, 자기연민이 너무나 강해 다른 방법으로는 고칠 길이 없는 불행한 사람에게는 자아 속에 갇혀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오는 외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기만을 긍정하는 나르시스와 자기조차 부정하는 에코의 비극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는 한편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불안해하거나 다른 한편에서 바깥세계에 맞서 완강하게 자기의식을 고집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 헤겔의 말처럼 정신의 힘이란 오히려 바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주체, 곧 내적인 자기와 외적인 자기를 모두 떠안는 데 있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주체만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형성하는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자유를 최대로 키울 수 있는 길은 자기침잠이나 연민에서 빠져나와 타자성을 가진 타자와의 만남과 소통, 연대뿐이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연습만이 외부적 환경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고독과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유일한 길은 바깥으로 나아가 접속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접속하기보다는 소유하려 든다. 소유하면 접속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을 잊고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깥을 소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폭력을 키울 뿐이다. 폭력을 최소화하려면 바깥으로 나아가 만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경험을 축적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경험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다. 경험의 상실은 대체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삶의 구성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바깥으로 나아가 나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구성할 수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경험을 되찾아야 한다. 거기서 행복 담론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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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22:08

세계화 시대와 소외된 노동



임경석1) _ 한양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 



들어가는 말

인간은 생존과 관련된 결핍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을 변화시키는 일체의 행동인 노동(Arbeit)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노동이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행동을 의미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노동은 거미나 꿀벌의 뛰어난 건축행위가 지니는 맹목적인 생존본능의 차원을 넘어 맑스의 지적처럼 그 자체안에 노동과정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 자아실현의 과정이자 공 동체적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그 무엇이어야 할까?

고대의 노동은 적어도 여러 부족의 공동체 의식이나 집단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례활동으로서 신화적이며 생존 에 절박한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군사, 예술, 법률, 도덕 등의 여러 분야들과 혼융되어 개인과 집단의 연대를 제공 하는 총체적 활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노동은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생산, 유통, 분배, 소비 및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순환의 토대이자 무한욕구를 충족시키는 재화 와 용역의 공급을 통해 창출되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능하는 모든 것만을 포함한다. 더구나 언제부턴가 현대인에게 노동하면 유급 노동만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노동의 의미를 지나치게 협소화시켰고 인간적인 욕구의 증대와 여가와 놀이의 즐거움을 배제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타적 노동관을 극복하려는 포괄적 노동은 임금이나 봉급의 형태로 지불되는 유급노동이건, 가사 노동이나 그 밖의 돌봄 노동의 경우처럼 무급노동이건 간에 정신적∙육체적인 노동력의 제공 일체를 포함할 수 있는 보다 확장된 행위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현대인에게 노동은 생필품을 제공하는 생계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케 하는 다양한 생활과 유희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나아가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연대의식의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은 새로운 대인관계나 문화교류의 접촉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 자신으로 하여금 수행하는 업무에 대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긍심과 다층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노동 개념의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이 어떤 노동의 수행과정을 통해 바람직한‘자아실현’을 성취하고‘자기소외’의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비교적 간소한 물음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현재 인류는 첨예하게 대조되는 낙관론과 비관론의 두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가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긍정적인‘낙수효과’를 통해 제품 원가를 저렴하게 하고 소비자의 수요증대를 촉진하는 선순환의 구조속에서 세계화된 시장이 블루오션을 만들어 냄으로써 모두를 위한 보다 많은 일자리의 창출과 안락한 삶을 제공할 것이란 장빛의 청사진을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노동하는 절반 이상의 지구인이 이제까지 체험해 온 삶의 현주소는 불안정, 저임 금, 빈곤, 실업, 절망감, 일방적 성과사회가 야기한‘피로사 회 ’이. 금와 흙저 의 갈등 은 물론 해당 사가 도달한 수준에 따라서 노동 수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하는 다수는 노동력을 꾸준히 제공함에도 불구하고‘제로섬 게임’으로 인해 식량, 주거, 교육, 의료, 문화 등 기본적 필수재화와 용역들의 혜택조차 배제되며 그 접근권의 간극도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가당면한 과제는 어떠한 합당한 노동정책을 제안하고 실현 가능한 치유책을 제시하느냐의 여부이며, 이에 따라서 향후 인간의 조건인 노동의 의미는 축복 혹은 저주로 다가올 것이다.


맑스의‘소외된 노동’

칼 맑스(Karl Marx, 1818-1883)에 따르면, 노동이란“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Stoffwechsel)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과정”으로 지적 활동과 제작된 도구를 가지고 인간적인 욕구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총체적 행위이자 자기 실현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적인 욕구가 바람직한 노동의 의미에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맑스의 사후에 출간된 청년기 대표작인『경철수고(1844)』에서 노동의 4가지 소외국면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코뮌공동체의 윤곽을 만나 볼 수 있다.

첫째로‘노동 생산물에 대한 소외’의 측면을 살펴보자. 노동은 확실히 부자에게는 경이적인 궁전을 만들어 내지만, 노동자에게는 가난한 오두막집을 만들어낸다. 노동은 사치와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궁핍과 추한 모습을 생산한다.

노동은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인 노동판으로 내몰고, 또 다른 노동자는 기계로 대체한다. 노동자는 부자를 위해서 지성을 낳으나, 노동자 자신에게는 저능과 백치를 낳는다.

둘째로 노동자는 노동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결코 자기만족을 느끼지 못하고‘생산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 는 작업과정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로 인해“시련으로서의 활동, 무기력(Ohnmacht)으로서의 힘, 거세로서의 생식, 노동자의 고유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가 노동자 자신에게 반대되고, 독립적이고, (...) 본질의 소외”마저 느끼게 된다.그러므로 노동자는 그가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편안함을 느끼지만, 그가 일을 할때에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자유노동(freie Arbeit)이 아니라 강제노동(Zwangsarbeit)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은 외부적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노동을 통한 전인적인 인본성의 실현과 대비되는 노동행위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노동활동에서 자아실현을 희망하는 자율적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셋째로‘유적본질(Gattungswesen)로부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연대적 삶의 실현 가능성을 무한경쟁을 통한 이기적 삶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로“(...)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육체를 소외시켜, 그것을 인간 밖에 있는 자연처럼, 인간의 정신적 본질 즉, 인간의 인간적 본질인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하지만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아 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나와 너의 상호관계성을 토대로 동료 인간과 협력적으로 살아가는 유적 존재일 때 비로소 비유기적인 자연과의 교류 속에서 동물의 집단생활과 달리 창조적 활동과 의식적 생명활동을 영위하는 인류로 존재할 수 있다.

끝으로 인간이 자신의 노동생산물, 자신의 생산 활동, 자신의 유적본질로부터 소외되는 직접적 귀결은‘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이다.“인간이 자기 자신과 맞서게 된다면, 타인도 그와 대립하게 된다. 자신의 노동, 그 노동의 생산물,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타당한 것은 곧 타인의 노동과 노동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의 관점은 청년 맑스의 초기 자유 방임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낭만적인 비판적 관점으로만 평가되어선 안된다.그의 소외된 노동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문명사는 이른바 인간의 노동을 통한 인간의 생산물에 다름 아니다. 맑스는 인간 노동의 여러 단계를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처음 노동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속해있고 자연적 필요에 속한 상태이므로 아직 소외가 발생 할 수 없었던 원시공동체의 단계로부터 주인과 노예의 노동으로 분리된 고대사회를 거쳐 영주나 귀족과 분리되는 농노와 부역에 의존한 중세사회에서 본원적 축적을 통한 자본과 노동의 분리 단계인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이행과 관련된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의 모순을 주목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시장에서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이란 상품이 지니는 잉여노동의 가치 때문에 그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공정한 교환과정이 아닌 생산과정에서의 모순적 착취가 발생함을 맑스는『자본』의 곳곳에서 밝힌다.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망에서 개혁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 두 계급간에 점증하는 적대감인 계급의식을 통해 혁명의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소외된 노동의 네 국면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탈소외된 노동공동체를 실현하려는 해방된 세계건설의 완성과제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맑스는 소외된 노동의 제반 과정을 종식시키고 인간적인 해방을 실현하려면,“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인 그런 결사체(Assoziation)를 실현하기 위한 품위있는 노동세계로의 이행이 필요함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있어서 노동은 그러므로 필연성의 왕국에 속하는 수단적 삶의 요소가 아니라 자기실현, 주체의 대상화, 실질적 자유와 같은 목적의 왕국을 건설하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소외가 종식된 사회에서 노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분명한 한 가지 점은 노예노동, 부역, 임금 노동처럼 강제노동에 대비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무노동 (Nicht-Arbeit)이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코뮌공동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맑스는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무노동의 나타함과 결핍사회를 경고하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창조적 자유노동을 실현하는 코뮌주의 사회의 특징으로1) 노동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할 것과2) 과학적 성격을 띠는 노동을 통해 개인에게 자유 시간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의 충분한 자아발전과 자본주의를 능가할 수 있는 노동생산력이 유지되는 자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꼽았다.


경제적 세계화의 추세

지난 세기말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되었고 신자유주의는 현혹적인 구호로 다가올 삶의 목표에 대한 막연한 청사진만을 제공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불평등한 축적에서 발생한 빈부격차, 불경기, 공황 그리고 대량실업이나 사회불안정의 문제를 저지하기 위한 자본주의 그 자체의 탐욕을 해결할 묘책이 부재한 상황이다. 오히려 1997~98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월가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진 일인 점령시위는 1대 99로 상징되는 암울한 지구촌의 소외된 노동의 현실만을 상기시킬 뿐이다. 특히 경제적 세계화는 금융자본의 무한경쟁 속에서 기업의 인수와 합병, 통합, 구조조정, 효율성, 이윤의 확대만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전체 작업장에서도 평생직장의 의미보다는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과‘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무시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이중고용시스템(two-tier system of employment)의 한 가운데에서 세분화된 비정 규직(임시직, 계약직, 파트타임)의 양산만을 조장하는 승자 독식의 문화가 판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초국적 기업의 경계 파괴와 확산되는 이주 문제는 21세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측되며, 이 점은 향후보다 독립적인 상세한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현재 초국적 기업들은 엄청난 양의 재화와 용역을 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생산하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컬 차원에서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수십 억의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 국가의 차원에서 안정적 일자리가 창출되도록 노력하면서 점증하는 이주자의 물결과 외국인 혐오증을 막는 것이 향후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세계화가 주목해야할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에 산업화된 국가들이 지속가능한 공동번영의 과제를 주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확장된 입장의 견지가 요구된다. 첫 째로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통해 이룩한 생산성의 결실을 노동하는 인류 모두의 복지를 위해 함께 공유하고 (재)분배해야 한다. 둘째로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이나 국민국가의 충성심을 요구하는 협소한 애국심을 넘어서서 하나뿐인 지구를 보존하려는 세계 시민으로서 인류의 공동운명을 함께할 연대감의 확산에 정책적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가간의경제력의 차이나 투자능력, 저축수준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무역이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면서 개방 압력을 통한 국가 간의 예속, 금융자본의 만연, 생태 계의 파괴 등 승자독식의 폐해로 인한 반세계화의 투쟁을 불러오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적 세계화를 배경으로 본 한국사회의 소외된 노동의 국면들

우리 사회의 노동과 관련된 직업 추세는 지난 60년 동안 일차 산업이나 이차 산업이 급격히 쇠퇴하고 삼차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급변했다. 블루칼라가 차지하는 직업 비율보다 도소매, 부동산,보험, 금융, ICT분야 등 각종 서비스분야의 화이트칼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무역규모도 1조억 달러를 돌파한 산업국가로 변모했다. 이러한 고도성장의 결과 1953년 불과 69달러였던 1인당 국민 소득도 3만 달러에 다가섰고, 비투자나 초고속 무선인터넷, 모바일 보급률에서도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런 수치만으로 볼 때 60년 간 연평균 7.6%의 고도 성장률을 이뤄왔고 앞으로도 최소 성장을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기반으로 한 산업, 가정, 주거, 교육, 생명, 보건, 안보, 사회문제, 환경과 생태계 등과 관련된 평범한 한국인의 삶의 전망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가족노동은 맞벌이 부부가 증가했음에도 가계부채의 비율은 이미 170%에 다다르며 그 액수도 1,200조 원을 넘어섰고 물가상승률과 부동산, 전∙월세의 고공행진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공교육의 실종과 과도한 사교육비의 부담 및 대학학자금 대출로 인한 사회 초년생들의 빚 부담이나 신용위기는 다른 원인과 함께 늦은 결혼과 저출산의 문제로 연계되고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층의 복지안전망 부재, 인구의 빠른 고령화와 높은 자살률, 묻지마 범죄를 비롯한 생계형 범죄율의 증가, 후퇴하는 행복지수, 세계 최하위권의 성평등 지수 등 절박하고 어두운 시대의 국면들로 넘쳐나고 있다. 정치권의 동반 성장과 복지사회의 이념적 강조에도 불구하고 대기업과 중소 기업, 상업부문별, 고용구조 및 소득의 양극화 문제는 이미 고착되어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 자동화와 매우 복잡한 분업체계, 그리고 증대된 업무 간에 수행되는 촘촘한 상호의존성의 추세 강화와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 불안정, 전 방위적“실업”과 정규직 일자리의 감소 및“프레카리아트 (precariat)”의 증대와 같은 맑스적 의미의 소외된 노동의 특징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회 변동의 추세는 다양한 유형의 노동자와 예비노동자들에게 취업과 실업 및 해직과 관련된 심대한 압박감을 체험케하고 있으며 향후 인간적인 노동과 연대적인 작업장의 실현에 대해 암울한 전망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도 이제 비록 기준에 대한 명확한 합의는 없지만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 노동정책의 달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그 출발점은 모두의 노동, 욕구, 향유의 조화로운 협력을 보장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동시간의 단축과 더불어 기본소득(basic income)과 같은 생존권 보장정책의 도입 및 바람직한 양성평등을 촉진하고 연대적이고 지속가 능한 지구촌의 공존능력에 기여하기 위한 연대정책적인 대안들의 토론을 통해 찾아야 할 것이다. 





1) zxmoz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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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21:47

성 노동자들이 처한, 여전한 곤경



김경미 _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2015년 8월 성 노동자의 인 권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성매매의 비범죄화를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2016년 3월 헌법재판소는 자발적으로 성을 판 자도 처벌하는 성매매특별법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자발적으로 성을 파는 것, 즉 성적 서비스를 파는 것은 불법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성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성적 서비스를 파는 한범죄자가된다.자발적으로성적서비스를파는것이 왜 문제가 될까? 성적 서비스를 파는 이 일, 매춘은 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매춘’이라는 단어 정의

매춘은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일컫는다. 이 일은 몸을 통해 성적 서비스를 교환한다는 점에서 서비스 노동이며, 신체화된 노동이고, 성 노동이다. 그러나 매춘은 성적 서비스와 화폐를 교환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비하되고 경멸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사회악으로 여겨진다. 한국어사전은 매춘을 매음(賣淫)과 같은 말이며,“돈을 받고 몸을 팖”(네이버 국어사전) 이라 고 정의하거나,“돈이나 기타 대가를 받고 성적 대상이 되어 줌”(다음 한국어사전)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사회악을 설명하는 자 리에서는“사회가 지닌 모순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해악”이라고 정의하고 그 예로 빈곤이나 범죄, 도박, 매춘을 들고있어 매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다. 성적 서비스를 통해 생계를 유 지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계속 존재해 왔으나, 이들을 명명한 것을 보면 언어폭력에 가까운 언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언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예를 들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는 낙인을 통한 타자화, 억압의 형태를 보여준다. 또한 매춘은 흔히 남자가 사고 여자가 파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가부장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라고 설명된다. 물론 여성이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의 담론은 매춘인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별)전환인들을 비가시화한다.


타자로 재현되어 온 매춘

근대 이전에는 매춘 제도가 없었다. 유녀(遊女), 사당패 등의 매춘이 있었지만, 이는 제도화되지 않은 매춘이었다. 매춘이 제도화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들어오기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유곽을 설치했다. 1916년에는‘유곽업 창기 취체 규칙’을 만들어 매춘을 공식화하고 창기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었다. 이른바 공창제도의 시작이었다. 공창제도는 1947년 미 군정이 들어 서면서 폐지되었지만, 미군기지 주변에는‘기지촌’이라는 특수 공간이 형성되어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이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부터 전국에 104개‘특정 지역’을 설치, 운영하면서 동시에 윤락행위방지법을 만들어 매춘여성들을 처벌하였다. 한국의 이러한 역사적 특성은 국가, 군대와 매춘의 직접적 관계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국가는 매춘을 노동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도덕적 이유나 인신매매된 여성들의 보호라는 명목 하에 직접적으로 매 춘을 통제하고 범죄로 취급한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매춘을 범죄화하고 있으며, 매춘인에게 도덕적 낙인을 가하고 있다. 매춘인은 일탈적 존재로 격하되거나 피해자 로 환원되어왔다. 이러한 격하 뒤에는 매춘인을 타자로 재현해 온 역사가 존재한다. 유교적 도덕관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시대 의 문인들은 유녀나 사당패를 보호할 필요가 없는, 도덕적으로 추한 존재로 재현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옥(1760~1816)이 사당패를 묘사하면서 생명이 있는 유(類)들 가운데 가장 추하다고 한 것은 그 한 예이다. 성을 거래한다는 것만으로 매춘인들은 늘 공동체의 위협이 되는 타자, 혹은 애매모호한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현대도시 공간에서도 매춘인들은 도덕적으로 타자화되어 배제되거나 추방되어 왔다. 법뿐만 아니라 공간 배치를 통해서도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와 시민이 함께 매춘 공간을 도시에서 점점 주변화하고 소외시킴으로써 매춘을 공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집창촌 재개발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집창촌은 도시환경 개선을 위해 철거되거나 재개발 대상이다. 매춘은 시민 의성규범을 어지럽히고,시민의 공적영역을 침범하고그 경계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는 시민권이 특정한 성규범 즉 이성애 핵가족 중심의 성 규범과 결부되어 실현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매춘은 기본적으로 생계유지와 연관된 노동이었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저서『캘리번과 마녀』에 의하면, 유럽의 여성들은 14세기에는 동일노동에 대해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았으나, 16세기 중반에는 남성 임금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했다. 그 결과 농업에서건 공업에서건 임노동으로 먹고 살 수 없었는데, 이 시기에 매춘이 크게 확산했다고 한다. 마리아 달라 꼬스따에 의하면, 서구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시기에 와서 여성은 생존을 위해 결혼과 매춘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에 직면했으며 매춘은 집 밖에서 몇 가지 일을 발견했던 여성들에게도 낮은 가족수입이나 여성에게 지급되는 낮은 임금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근대 이전 한국사회에서도 다른 경제적 자원이 없는 여성들에게 매춘은 생계유지의 수단이었다. 오늘날 매춘은 여전히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의 하나지만 대규모 국제 성 산업과 연결되어 있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매춘이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이 아니었던 적은 없 었다. 포르뚜나띠 역시 매춘노동을 가사노동과 함께 여성 노동의 하나로, 생산적 노동의 주요 영역으로 보았다. 그런데도 매춘인에게는 역사적으로 도덕적인 낙인이 가해졌으며 생활공간 에서 배제당하고는 했다. 이러한 낙인과 타자화의 역사를 깨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노동의 하나로 존재해 온 매춘을 노동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매춘이 역사적으로 주로 여성의 노동이었음을 생각할 때, 매춘을 노동의 하나로 보고 그것이 생산한 가치를 따지는 일은 여성의 역사, 그중에서 가장 주변화된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매춘을 성 노동으로 재개념화하는 일은 현재 성 노동자의 삶을 위해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쓰는데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매춘을 신체를 사용하는 다른 노동이나 비물질 상품을 생산하는 서비스 노동과의 비교를 통해‘노동’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노동으로서의 매춘

매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 중의 하나는 가장 친밀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적인 것이 상품으로 교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춘이 몸이나 서비스를 상품화하는 유일한 경우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신체를 써서 돈을 벌고 있으며, 대학교수, 공장노동자, 변호사, 오페라 가수, 매춘인, 의사, 의원 등 누구나 신체 중의 일부를 사용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일은 사회적인 낙인이 있지만 어떤 일은 그렇지 않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결과가 계급 편견이나 인종이나 젠더의 고정관념에 기반해 있다고 본다. 성적인 혹은 생산적인 능력의 사용과 관련해 돈을 벌거나 계약을 맺는 것은 진정으로 나쁘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매춘이 다른 형태의 신체적인 서비스와 많은 특징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노동과 분리되고 비난받는 것은 낙인 때문이다.

또한 매춘은 신체화된 노동이면서 비물질적 서비스 상품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감정노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개인의 기분을 다스려 얼굴 표정이나 신체 표현을 통해 외부에 드러내 보이는 감정노동은 임금을 받고 판매된다. 따라서 교환 가치를 갖는다. 매춘을 포함한 성노동 역시 돌봄과 감정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감정노동과 연접해 있는 노동이라 할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의 서비스, 연기, 심리치료, 마사지, 어린이 돌봄과 같이 성 노동은 상업화되고 상품화된 노동인 것이다.

매춘이 다른 노동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결정적인 부분은 신체화된 노동이자 성애화된 노동이라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 욕망, 쾌락 등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매춘은 인간의 욕망을 직접 충족시켜주는 서비스 노동이며, 쾌락을 생산하는 노동이라 할 수 있다. 고정갑희는 매춘을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노동, 쾌 감, 쾌락, 그것도 성적 쾌감이나 쾌락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쾌락을 생산하는 매춘노동은 임금을 받고 판매되기 때문에 교환가치를 가진다. 이때 교환되는 성적 서비스는 상품이다. 조립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과는 다른 비물질 상품이다. 따라서 매춘노동은 생산노동이라 할 수 있다. 성 노동을 성별/성애노동으 로 나누고 매춘노동을 성애노동에 포함시키는 성 노동 체계는 매춘을 다른 노동과 고립된 노동이 아니라 연관된 노동이며, 동일한 성 노동 체계 속에 놓인 노동으로 보게 해준다.


성 노동자로 인정될 그 날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성 노동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모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성 노동은 성적 서비스를 교환하고 쾌락을 생산하는 일이며, 이 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다. 이렇게 성적 서비스를 교환하는 일이 노동으로 인정될 때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노동 운동의 주체로서 노동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또 이에 관한 논쟁은 인권이나 여성의 권리, 노동권에 관한 주류적 논쟁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성노동자라는 이름은 성 산업현장에서 성서비스를 제공해서 소득을 창출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사회적, 계급적 위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생존권으로서의 노동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도 성 노동자라는 이름은 이 일을 하는 당사자들에게‘윤리적으로 타락한 일 ’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한다는 의식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다른 존재의의를 부여하게 해준다. 물론 노동이라는 명명만으로 성 노동자의 노동 조건이나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명명은 성 노동자 당 사자는 물론 당사자 외의 사람들이 매춘에 대해 다른 사유를 시작하게 해 주며, 신체를 사용하는 다른 노동과의 연속 선상에서 매춘을 보게 해줌으로써 매춘에 대한 편견을 해체한다. 성 산업의 착취구조가 존재한다면 그 구조와 싸우기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를 근절하고 범죄화하기보다는 성 노동으로 재개념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성 노동으로의 재개념화가 필요한 것이다.

매춘 현장의 비인권적 행위나 불법적 요소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매춘을 비범죄화하고, 성 노동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흔히 매춘을 이야기하면 인신매매, 성 착취를 이야기 한다. 전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주성노동의 현장에 이러한 요소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성 노동을 근절하는 전제가 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은 매춘을 성매매로 규정하고 성특법을 통해 성 노동을 범죄로 규정한다. 성노동을 범죄로 규정하는 한 성노동자의 인권, 노동권은 확보되기 어렵다. 그동안 단속이란 이름 아래에 얼마나 많은 성 노동자들이 피해를 겪었던가. 법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성 노동에 관한 관심과 이론화가 필요하며, 관심의 초점을 남성 구매자나 업주들이 아니라 성노동 당사자에게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명과 낙인이 덧씌워진 매춘을 재개념화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오랜 역사동안 매춘노동을 해온 여성들, 그리고 지금도 공격적인 세계화의 진행 한 켠에서 빈곤으로 인해 국가 경계를 넘어 매춘노동을 하는 성 노동자들을 그들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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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14:25

이주노동자로서 나는 외친다



우다야 라이 _ 이주노조 위원장 



고령화와 저출산 때문에 한국 산업 현장에서 노동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산업 현장에 투입되어 노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하루하루 부족한 상태입니다. 한국 기업들은 인력난에 시달렸습니다. 한국 정부는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부족한 노동력를 채우고자 이주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한국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데려올 수 있는 방안을 찾았지만, 이 주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데려올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현지 법인연수생1) 외 모든 이주노동자들은 법적으로 미등록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임금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로 장시간 동안 저임금 노동을 시키는 사장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다치는 이주 노동자들도 늘어났습니 다. 하지만 다쳐도 산재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보상까지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이주 노동자들도 자신의 권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몰아세웠고, 단속을 통해 강제 추방하는 형식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일할 권리를 박탈시켰습니다.

한국정부와 사장들의 착취와 탄압이 계속되자, 이주 노동자들은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우리를 노 동자로 인정하라, 단속 추방 중단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노동 허가제를 실시하라!”라고 목소리를 내며 투쟁을 시작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이주노동의 제도적 현실

결국 정부는 사업주들의 이익을 위해 1994년도에 산업연수생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이는 산업연수생제도를 실시하기 전에 한국에 들어온 이주 노동자들을 모두 강제추방하고, 새로 데리고 온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닌 학생신분으로 데리고 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제도는 노동자로 서의 아무런 권리도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제도는 말 그대로 노예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에 반대하는 이주노동자 들이 정부를 상대로 또 다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산업 연수생제도가 실시되었던 94년도에 최초로 명동성당에서 쇠사슬 농성을 시작했습니다.“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 를 때리지 말라! 산업재해를 인정하라!”와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제도를 개선하기 보다는 이주 노동자를 산업연수생 신분과 그렇지 않은 노동자로 분리하면서 미등록 노동자를 계속 추방했습니다. 산업연수생제도는 산업재해 불인정의 문제, 퇴직금 미지급의 문제, 사업장 이동금지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출발부터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단체와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은 노동허가제를 실시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업장 변경 문제

2004년도에 정부는 산업연수생제도 대신 고용허가제로 이주노동에 관한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였고, 겨우 최저 임금이 적용되었지만 그 밖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3번을 초과하여 직장을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이동할 때마다 사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3년 이상 일을 하려면 사장의 고용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이 제도 역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업장 변경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나라를 불문하고 사업 장 변경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사업주의 허락 하에만 사업장을 변경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저임금, 강제 노동의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사업주들은 임금이나 근로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사업장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임금 채불 문제, 폭행, 폭언, 산업재해, 성희롱, 성폭행 문제들 또 한 사업장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근로 기간 문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3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주가 원하면 1년 10개월의 기간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기간 연장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에 이주 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사업장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면 사업주가 노동 기간을 연장해주지 않는 문제도 발생합 니다.왜냐하면 사업주들은 그 기간을 연장해줘야 하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주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면서도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한 사업장에서 4년 10개월을 일한 후 사업주가 재고용을 원할 경우 3개월 이후에 다시 계약할 수 있는 성실근로자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서야 이주노동자들이 그 사업장에 돌아와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주들은 이주 노동자가 받아야할 퇴직금을 나중에 지급하기도 하며, 일부 사업주들은 재계약을 해놓고 계약을 해지해 버리기도 해서 이럴 때 이주 노동자가 퇴직금을 받지 못 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퇴직금 및 산재보험 문제

보통의 노동자들은 1년을 일하면 퇴직 후 14일 이내 퇴직금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2014년 8월 이후 한국을 떠나야만 퇴직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노동법으로 제시된 14일 이내에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뺏겼습니다.이것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명백한 차별입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제조업, 농업, 어업, 건설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농업에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 법인 형태인 주식회사 또는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일하는 고용농가의 상당수는 5일 미만 소규모 농장이며, 이런 농가에는 산업재해 보상보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주 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다치는 경우 산재보험 해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산재보험이 적용되어 이주 노동자들이 산재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다 다치면 산재 보험 신청을 해주지 않는 고용주들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이주 노동자들은 언어적인 장벽에 부딪치거나, 노동 기간 연장 문제로 인해 고용주에게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고 자비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의 미래

그동안 이주 노동자들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실현하면서 노동자답게 살기 위해서는 노조 활동과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한국 정부가 강행한 이주 노 동자 정책을 반대하면서 투쟁하던 이주 노동자들은 2005년도에‘이주 노동자 노동조합’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노조 활동을 하는 간부 조합원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도 있지만, 이주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영세 중소기업들은 이주 노동자들 없이 운영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뺏는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정부는 이주 노동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라고 칭하며 차별적인 제도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앞으로 한국 정부는 이주 노동자들이 평등하게 일을 할 수 있 는 여러 조건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1) 현지법인연수생제도는 국내 기업이 해외에 세운 법인의 외국인 노동자를 국내에 일정기간 연수 후 현지법인으로 돌려보냄으로써 현지법인의 기술력을 높인다는 취지하에 지난 199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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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14:20


장애 여성의 몸과 노동



김효진 _ 작가, 사단법인 활짝미래연대 대표 



일하는 장애 여성에게 화장실이란?

우리 단체의 회원중에 직업이 약사인 분이 있다. 그 분은 수십 년동안 약국을 경영해오다 의약분업 이후 이어진 경영 난때문에 약국을 그만두었다. 몇 년 정도 쉬다가 최근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면접을 보러가게되면 가장 먼저 화장실을 확인한다고 했다. 젊었을 때는 목발을 사용하다 나이가 들자 휠체어를 타게 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은 가까이에 있는지, 화장실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 휠체어가 움직일 수있을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은지, 지탱할 손잡이는 있는지를 고려할 상황인 것이다. 하루 8시간이라는 근무시간 동안 최소 서너 번 정도의 출입이 원활해야 마음놓고 신변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근무조건이나 직장 분위기를 먼저 보는데 화장실이라니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직장을 고르는 기준 조차도 보통사람들과 좀 다르다. 어디 화장실뿐이랴. 출퇴근 시 이동과 접근부터 시작해서 점심 식사는 물론이고 업무상에서 남들과 다른 조건으로인해 다른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일터라는 공간 자체가 장애 여성을 고려해서 설계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장애 여성에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는 근무시간은 전쟁일 수밖에 없고 일터는 전쟁터나 다름아니다. 그나마 이런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장애 여성은 혜택 받은 극히 일부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일터에서의 근무시간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장애를 가진 여성의 몸이 어떠한 소외를 경험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러한 경험의 공유가 오히려“그러길래 누가 힘들게 일하래? 집에서 편히 쉬지.”와 같은 노동시장에서 배제하려는 논리로 역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또한, 늘 그래 왔듯이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지 못한 개인들이 자기 계발 노력을 등한시 한 채 사회 탓하는 것으로 비치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입을 열어 발설(發說)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문제의 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직업에 사람을 맞춰야 하는 기이함

장애 여성 중에는‘약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수천,수만 가지의 직업중 하나이니 약사 장애 여성이 있는게 뭐그리 특별하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하지만 장애여성의 직업군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장애 여성중 직업을 가진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적절 할 것이다. 장애 여성 중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나 그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직업이 약사이다. 사회참여 기회가 제 한되어 있는 상태에서 장애 여성들의 선택지가 없었던 탓이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고 가족으로부터 최소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장애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문직업이 약사였다. 장애 여성의사를 본 적이 있는가? 손에 꼽을 정도가 있을 뿐이며, 의사 혹은 한의사를 하고 있는 장애 여성이 있다면 그녀들은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정도의 가벼운 장애를 가졌을 것이다. 대학교수는 이미 고인이 된 장영희 교수와 사회복지계의 오혜경 교수 정도이며 한의사, 변호사, 교사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최근 공무원으로 진출한 장애 여성들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왜일까? 원인을 찾아보기에 앞서 우리나라 장애 여성의 현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나라 재가장애인(2011)은 모두 2,611천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남성장애인은 1,514천명이고, 장애 여성은 1,096 천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1년에 조사된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장애인의 성별 교육수준별 분포를 살펴보면, 장애 여성 중 무학이 22.3%로 장애남성의 5배 수준에 달하고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장애 여성의 비율은 5.8% 로 장애남성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는 장애 여성은 얼마나 될까? 2011년 장애인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15세 이상 장애인 중 남성장애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9.14%이고, 장애 여성은 23.90%로서, 남성장애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경제활동 참가율이 낮은 이유는 장애 여성이 교육에서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교육 수준으로 인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탓에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 위주, 능력 우위의 시장 논리가 관철되는 노동시장의 장벽을 돌파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장애 여성 취업자의 경제활동분야를 보면, 전체의 45.8%가 단순노무직, 서비스종사자 12.1%, 판매종사자 11.1%, 농림어업종사자가 11.1%순으로 나타났다. 장애 여성 취업자의 종사상의 지위에서도 임금근로자가 전체의 70.8% 이고, 17.4%는 자영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근로자 중 상용근로자는 16.5%인데 비해 일용근로자는 상용근로자의 두 배에 가까운 33.3%에 달해 장애 여성 취업자의 고용 불 안정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장애 여성의 교육수준이 낮고 취업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며 고용상태도 불안정한 이유는 우리사회에서 장애 여성의 몸이 장애와 여성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몸, 불완전한몸, 생산성이 낮은몸, 경쟁력 없는 몸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장애 여성이 그나마 진출 할 수 있는 전문직 종중 하나가 약사였다. 장애가 그리 심하지 않거나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의 장애 여성이라면 누구나 약사가 될 것을 권유받았을 정도이다. 필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적부터 장애가 있는 몸으로는 취직하기 힘들테니 공부 열심히 해서 약사가 되라는 권유를 받으며 자랐다. 약사나 한의사가 아니면 앉아서 하는 자수나 양재, 한복 짓는 일이 좋을 것이라는 권유도 있었다.

보통의 아이들은‘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을 받는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으레‘너는 다리가 불편하니까...’라는 말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장애 여성이 무얼 잘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장애라는 조건만을 앞세우곤 한다. 그런 이유로 지체장애 여성이라면 당연히 이 다음에 커서 앉아서 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시각장애 여성들은 시각장애인들 이 다니는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안마사 아니면 침술사, 역술사, 그것도 아니면 기껏해야 텔레마케터가 고작이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특수학교에서 치료와 직업교육에 한 정된 교육을 받고 이른바 적합 직종에 종사하는 것이 정해진 (?) 코스였다. 자신의 적성에 맞춰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한 두가지의 직업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이 기이함은 현대판‘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다름 아니다.






바쁘거나 아프거나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필자는 약사 혹은 한의사의 길을 걷지않고 문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그로 인한 대가는 혹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거의 10년 가까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실업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청년실업을 30년 전에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데 몸의 조건으로 인해 다소 제약이 있긴 하지만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 데도 번번이 채용을 거절당했다.

“몸이 불편한데도 열심히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러나 편집 일이라는 게 앉아서만 하는 게 아니다. 복사도 해야 하고, 시장조사도 나가야 하고, 인쇄소에 나가 외근도 해야 한다. 비록 채용이 되지않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복사도 할 수 있고, 외근도 나갈 수 있다고 알려줘도 소용이 없었다. 남들 눈도 있고, 자신들의 마음이 불편해서 안되겠다고 했다. 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들에게 되묻고 싶었다.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실력이 없거나 장애 외에도 뭐가 성격상의 결함이 있지 않나 하는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였다. 특히 가족들이 보내는 무언의 비난이 있었다. 그때 부모, 형제, 주변의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조건 탓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한개 섬처럼 고독했다. 그렇게 이십대의 불안한 청춘이 덧없이 지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채용이 된 경우는 보통 재정이 어려운 회사여서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이 반드시 뒤따랐다. 일 할 기회를 갖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열악한 근무환경과 부당한 대우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 여성이 일터에서 가장 많이 하는, 할 수 밖에 없는 말이 아마도‘괜찮아요’‘할 수 있어요’가 아닐까 싶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데 어찌 괜찮을 수 있으랴.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힘들어요’‘아파요’ 라고 말하면 영원히 잊혀진 사람이될테니까.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다 보니 어느새 일중독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삶의 질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해고 1순위일 게 분명하기에 늘 불안정했고 승진 순서가 되어도 남자 후배에게 밀리는 게 당연했다.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소외는 더 극심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니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아무것도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출퇴근의 어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후배 장애 여성의 경우 전동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로 출근하던 길에‘왜 바쁜 시간에 돌아다니느냐?’며 혼을 내는 할아버지에게‘회사 가는 길’이라고 대꾸했다가 말대답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기도 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 니‘쓸데없이 왜 돌아다니느냐?’든가‘그 몸으로 얼마나 힘 드냐?’는 그런 부정적인 시선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직장 내에서 대인관계에 제약은 여전히 있었다. 업무 외에도 동료들과 소원해지지 않기 위해 사내 운동회, MT 등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러나 장애 여성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중중의 장애 여성들에게는 먼 얘기일 수 있다. 게다가 언어 장애가 있는 장애 여성이라면 당장 동료들과의 의사소통에 애를 먹는다. 수화로 대화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구화를 하는 장애 여성이 알아들을 수 있도 록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에티켓을 알고 실천하는 동료가 얼마나 될까?

NGO 활동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직장이었던 정부출연기관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구내식당에서 밥먹는 일이었다.구내 식당이 으레 그렇듯 식판에 먹을만큼의 음식을 덜어먹는 것은 양쪽 목발 혹은 휠체어 사용자에게 버거운 일이다. 매번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 시작했고 부서 내에 도시락파가 하나 둘 늘기 시작해서야 점심시간에 대한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낙오할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도 힘들다고 엄살 피워도 아무 소용없으며 이겨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계속 일에 매달리는 가운데 몸은 정직했다. 자신을 늘 채찍질하며 지나치게 긴장하고 휴식도 없이 과도하게 부려먹었기에 자주 몸이 반기를 들었다. 고열과 근육통을 동반한 몸살이 찾아올 때에야 하는 수 없이 쉬었다. 일상적으로 감기, 알 러지성 비염, 편두통, 위염, 혈액순환장애로 인한 팔저림 증세는 기본이었다. 바쁘지 않으면 많이 아팠다. 몸이 힘들다고, 더 이상 못버티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몸을 야단치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아름답지도 않으면서 왜 좀 더 강하지 않냐고, 왜 좀 더 분발해서 욕심껏 채워주지 못하냐고....

그렇게 부실하지만, 그나마 큰 고장없이 잘 지탱해준 몸을 홀대했다. 그 결과 지금 남들보다 훨씬 빨리 몸의 노화를 맞이하고 있다. 백세시대에서 이 몸으로 남은 45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야 하는 과제를 눈앞에 둔 셈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과연 회사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장애가 있으니 역시 일도 시원치 않더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았을까? 그들은 아마도 건강하지 못한 장애인, 의존적이고 의지가 약한 장애인과는 함께 일하기 힘들다는 자신들의 평소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변으로 밀리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20~30년 겪었던 필자의 경험이 지금 청년인 장애 여성들의 경험과 얼마나 다를까? 지극히 소수의 경증 장 애 여성들이 공무원이나 준공무원으로 진출하는 정도를 제외 하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장애 여성 중에는 막상 취업을 해도 급여 수준이 매우 낮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꽤 있다. 수급자에서 탈락될 경우 의료비 등이 지원이 되지 않아 임금만으로는 병원비를 충당하기에도 모자라므로 수급자보다 더 불리해지는 상황이 발생해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만다. 그녀들은 제도라는 틀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기생적인 집단의 일원으로 자주 비난받는다. 한편, 양육을 지원 해줄 사람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거나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직장에 취업하기를 포기하는 장애 여성의 문제는 비장애 여성의 취업 문제와 비슷하다.

하지만 장애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병행하며 겪는 차별은 훨씬 미묘하고도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무성(無性)으로 취급되는 탓에 장애 여성들은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성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에 시달리는 가운데 가사노동과 양육에 대한 부담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가사도우미제도가 있지만, 저소득장애 여성에게 먼저 지원되기 때문에 일하는 장애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이유로 일터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도 장애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건 휴식이 아니라 가사와 육아라는 또 다른 노동이다.

요즘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가 생겨 사회참여를 위한 신변 처리나 이동 문제를 해결하는 중증장애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 이 제도는 아직까지 기본적인 지원에 그칠 뿐 중증장애 여성들의 직업생활에 필요한 지원으로까지 원활하게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복지의 완성은 고용일 터인데, 중증장애 여성에게 고용은아직 먼 남의 이야기이다. 기껏해야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의 활동가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을 뿐이며, 그조차 10년 이상 일해도 간사라는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소장은 대부분 장애남성이며 국장은 거의 비장애 여성인 구도에서 장애 여성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다. 장애와 여성이라는 신체적 조건의 위치성을 드러내는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활동가를 기다리며

마흔 살 무렵 인권운동에 뛰어든 뒤 20년 가까이 NGO 활동을 하고 있는 요즘 새로이 직면한 문제는 NGO 활동가와 사업주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활동가를 만나고 헤어졌다. 처음에는 열정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고 저절로 신이 나는 활동이었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10년 전부터 복지에도 시장 논리가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NGO에도 4대 보험이 적용되었고 활동가들은 스스로를 직원으로 정체화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래서 단체의 대표는 어디에서도 이윤이 생기지 않음에도 함께 일하는 동지들의 급여를 마련해줘야 하는 이중의 짐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당과 상여금,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할 경우 간단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악덕 사업주로 몰리게 되었다. 이 경우 단체 대표가 활동비조차 받지 못하고 헌신하면서 부르짖는 운동의 가치나 철학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고 갈 길은 먼데 함 께 손잡을 수 있는 활동가는 사라진 현실에서, 활동가인지 사업주인지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누가 이 길을 가라고 한 적은 없지만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줄 동지가 그립다. 장애 여성이라는 몸의 조건을 가지고도 더 이상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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